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강철의 왈츠 14

2009.05.19 14:3505.19

주위가 흐릿해지며 그녀만이 시선에 들어온다. 아니, 보이는 것은 그녀의 춤이다. 그녀의 몸짓 손짓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시간을 정지시켜놓은 상태에서 그녀만이 찬란하고 푸르고 아름다웠다.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며 동방제일미라 불리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냐 싶던 사람들도 이젠 동방제일미가 아닌 세계제일미도 그녀에겐 부족한 호칭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세상 속에 그녀의 춤만 있었고, 그녀의 춤 속에 세상이 있었다.
그녀의 춤이 끝났다. 세상은 잠시 고독해졌다. 천상이 사라지고 다시 지상의 연회장이 사람들 눈에 들어왔다. 하나, 둘씩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가 손바닥이 부서져라 박수를 쳤다. 곳곳에서 감격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 박수 소리에 카널드가 술에서 깨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캐서린이 걸음을 옮기자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방금 전 천국의 한 장면을 보여준 그녀에게 사람들은 천사라도 되는 양 조심스러웠다. 그녀가 황제 앞에 이르자 박수소리가 그쳤다. 캐서린은 치마를 펼치며 황제에게 인사를 했다.

"알려진 세계 전체가 마족의 말발굽에 신음하고 있던 암흑기, 성족의 한 줄기 등불이 되어 주었던 콘월 황가에 인사드립니다. 미천한 저를 위해 먼 길을 달려오셨기에, 황송한 마음으로 부족한 제 재주를 보여드렸습니다. 부디 심기에 드셨는지요?"

다시 한 번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박수소리가 그치자 황제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나, 나는 오늘 천국을 보았다. 고맙다. 내 그대에게 공작부인 자리를 주겠다. 의전관!"

궁내대신 윈켈 자작이 튀어나왔다.

"남아있는 공작부인의 자리엔 뭐가 있지?"
"자유로운 자유도시의 시민은 작위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작위를 받지 않습니다. 자유도시만의 오랜 관습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윈켈 자작의 말을 끊으며 캐서린이 정중히 말했다. 그 내용에 무례함에도 기분 나쁜 느낌은 전혀 들지 않게 하는 마력이 깃든 목소리였다.

"정녕 그렇다면 별 수 없군. 대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말하라. 내 다 들어줄 수 있다."
"황제 폐하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캐서린은 치마를 다시 한 번 펼치며 황제에게 인사를 했다. 자리를 물러서는 그녀의 주위로 젊은 귀족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었다. 자유도시 연합의 대표이자 룬켈의 시장인 캘리스 마그누스가 큰 소리로 외쳤다.

"콘월 제국과 자유도시 연합의 모든 신사들이여. 즐거운 연회 되시기 바랍니다."


카널드가 음식이 차려진 탁자 위로 올라간 건 그 때였다. 그는 바지를 내리고 물건을 두 손으로 잡고 있었다. 정숙한 부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시선을 피하고 브란틴을 포함한 다른 귀족들이 망연해있는 사이에 카널드는 시원하게 오줌을 싸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박수소리로 가득 찬 회장이 이젠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오줌을 다 싸자 카널드는 바지를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탁자 아래로 내려와 그가 오줌을 싼 탁자에 기대 다시 잠을 청하려 했다. 브란틴이 정신을 차리고 카널드를 붙잡은 건 그 때였다.

“제 주군께서 오늘 술이 과하신 듯 합니다. 연회에 더 이상 참석하지 못함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카널드를 부축한 브란틴은 빠른 걸음으로 회장을 벗어났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마부를 부르고 마부와 함께 카널드를 마차에 올린 브란틴은 자신도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꼭 그렇게 하셔야겠습니까?”
“나도 창피하다. 하지만 이것도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다. 그러나저러나 네겐 좀 몹쓸 짓을 했구나. 나 때문에 너도 꼼짝없이 파티를 더 즐기지 못하게 되었으니.”

브란틴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파티는 취향도 아닙니다.”
“오늘 밤에는 연석의 총회가 준비되어있다. 따라오겠느냐?”
“제가 따라가도 됩니까?”
“그래. 너도 슬슬 우리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때가 되었다.”
“알겠습니다.”


한참이 지난 뒤 마차가 멈춰 섰다. 브란틴은 카널드를 부축하고 밖으로 나왔다. 마부와 함께 숙소로 머무는 방까지 카널드를 끌고 간 브란틴은 방문을 열고 카널드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마부가 물러나자 카널드는 똑바로 일어섰다. 그는 기지개를 켰다.

“아, 피곤해. 귀족들은 항상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니까.”

카널드는 브란틴을 돌아보았다.

“이렇게 되었으니 먼저 출발할까?”

브란틴이 고개를 끄떡이자 카널드는 지금은 불을 피우지 않는 벽난로로 걸어갔다. 벽난로 옆의 횃불을 잡아당기자 벽난로의 뒤 벽이 스르르 움직였다. 브란틴은 횃불을 붙이고 카널드의 뒤를 쫓았다.
비밀통로는 눅눅했다. 카널드는 계단 중간에서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벽 너머로 카널드가 사라지자 브란틴도 그 뒤를 따랐다. 횃불의 불이 다 꺼질 즈음 브란틴은 앞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걸 보았다.

“진실의 빛 아래에서 우리는 자유로워지고.”

회랑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카널드 일행을 보자 소리쳤다.

“진실의 빛에 의해 우리는 짐승에서 벗어난다.”

카널드가 병사들에게 대꾸하자 그들은 교차되게 세웠던 할버드를 치우고 두 사람에게 경례했다. 카널드와 브란틴은 문 밖에서 회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회랑 안에는 연회장이 차려져 있었다. 탁자에 앉아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무법자였다. 브란틴은 빌과 행크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행크는 얼굴이 발개진 채 시중드는 하녀 앞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었다.

“카버넌트 백작”

갑자기 뒤에서 소녀가 카널드에게 뛰어들었다. 오른쪽 손이 왼손에 비해 두 배 정도 큰 귀여운 소녀였다. 브란틴은 그녀가 달려오던 자리에 있던 빌, 아임, 그로우, 커티스, 루비와 더블릿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경비병이 구호를 외치자 아임이 답호를 외쳤다.

“빨리 왔네. 동방제일미는 소문대로 예뻤어?”
“그래. 예쁘긴 예쁘더라.”

카널드는 B.B.를 안아 어깨에 태웠다.

“그래도 내 눈엔 에이린이 가장 예쁘지만?”

소녀가 대꾸하자 카널드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너도 알고 있구나.”
“외울 수 밖에 없잖아. 언제나 그렇게 말하는데.”

B.B.는 입을 삐쭉거렸다.

“빌, 난 카버넌트 백작과 함께 먼저 올라갈께.”

무법자들을 위한 연회장으로 가기 전에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카널드와 브란틴은 그 쪽을 통해 위로 올라갔다. 위층에는 자유계급의 젊은이들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브란틴은 그 자리에서 매튜어 에스프란차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카널드는 그들을 보지도 않고 한 층 더 올라갔다. 위층에는 탁자 하나가 마련되어 있었고 의자 일곱 개가 탁자에 놓여 있었다. 카널드가 말했다.

“한 개가 늘어났는데?”
“진짜. 우와, 누가 새로운 신입 두령이 됐나 봐.”

카널드에게서 내려온 B.B.는 날새게 의자 하나에 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카널드도 의자 하나를 잡아 앉았다. 브란틴은 카널드 뒤에 시립했다.

“아래로 내려가서 좀 놀아라.”

카널드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수호기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입니다.”
“체스웍스 경. 수호기사는 콘월에만 있는 관습이래. 이 의자의 나머지 주인들은 외국인들인데 체스웍스 경이 왜 뒤에 서 있는지 이해를 못할 걸.”

B.B.가 참견했다. 브란틴은 잠시 고민하다 카널드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발렌타인 대학의 학생들이나 졸업생들이었다. 뻘줌하게 구석에 앉아 음식을 집어 먹던 브란틴을 구원한 건 매튜어 에스프란차였다. 그녀의 소개에 의해 그 청년들을 알게 된 브란틴은 그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자정이 다 되갈 무렵 에이린이 두 수호기사를 데리고 브란틴이 있는 자리로 다가왔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마침 브란틴은 후스라는 사람이 주장했다는 천부인권에 대한 장광설을 들으며 고기를 뜯고 있던 참이었다. 오랜만에 에이린을 본 브란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했다. 에이린은 브란틴의 옆 자리를 빌려 앉더니 와인으로 목을 축였다.

“문제가 발생했어요.”

브란틴은 에이린을 돌아보았다.

“저번에 활자의 원리에 대해 말한 걸 기억하나요?”

나무에 글자를 새겨 책을 만드는 기술에 대해선가? 브란틴은 고개를 끄떡였다.

“아버님께서 그걸 실험하시기 위해 만든 기지가 알 수 없는 자들에 의해 습격을 받았어요. 장비와 실험경과를 적은 일지가 모두 파괴되거나 불타버리고 연구인력과 경비인력이 모두 죽었어요.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던 건 그 현장에 마법이 다수 사용되었다는 거예요. 게다가 지금은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어둠의 3학파(에테르, 사령, 암흑) 쪽 마법도 사용된 것 같아요.”

에이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쪽에도 마법사는 있었는데 상대가 안 되었나 봐요. 거기에 들인 비용에 이번 연회를 주최하는 비용까지 해서 아버님은 당분간 연구를 재개하지 못할 것 같아요.”

그 때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났다. 온화하게 생긴 늙은이가 소류 람슈타인과 함께 올라와 있었다. 에이린도 자리에서 일어나자 브란틴도 따라 일어났다. 소류가 이쪽을 바라보고는 눈을 찡긋했다.

“교수님, 교수님.”
“그래. 다들 즐겁게 놀고 계신가?”

주위에 몰려든 청년들을 향해 늙은이는 미소지었다.

“발랜타인 대학의 맥나라마 학장님이세요. 저희 연석의 최고 리더이시죠.”

그리고 옛날 황태자의 가정교사 일도 잠깐 했었지. 브란틴은 그렇게 생각하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맥나라마 학장은 소류와 함께 위로 올라갔다.
‘소류 람슈타인도 두령의 한 사람인가?’
브란틴은 그렇게 생각하며 맥주를 들이켰다. 젊은이들은 다들 자리로 돌아가 웃고 떠들고 마시기 시작했다. 밤늦은 연회는 한 사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족이 쳐들어왔다!”

사내가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하지만 연회장에서 그 사내의 말을 주목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에이린은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에이린은 창백한 얼굴을 한 사내에게 다가갔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마족의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아요. 마족은 카자크 제국의 수출품인 노예로서 존재하죠. 전령이여. 그대가 말하는 건 이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건가요?”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무슨 뜻인가요?”

사내는 숨을 몰아 쉬었다. 안색을 되찾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방금 수정의 계시회에서 모든 나라의 왕실과 법황청에 긴급 타전된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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