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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강철의 왈츠 13

2009.05.18 10:0605.18

봄꽃 들도 다 떨어질 즈음, 크로우 백작령으로 향하는 귀족의 첫 행렬이 떠나기 시작했다. 귀족과 그 가족들, 그들이 거느린 수호기사와 하인들, 광대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 붙은 상인들과 창녀들 때문에 행렬은 거대했다. 카널드는 출발 당일 술에 떡이 돼서 말에 타지 못할 정도였고 결국 마차를 타게 되었다. 브란틴은 그 옆에서 천천히 말을 몰았다. 빨래 등을 돕기 위한 하녀 한 명과 마차를 몰기 위한 마부가 붙어 네 명이 된 일행은 이 행렬에서 가장 단출했다.
‘마치 전쟁이라도 떠나는 것 같군.’
좁은 길을 가득 매운 마차들과 말 탄 기사들을 바라보며 브란틴은 생각했다. 부실한 도로 상태로 인해 길은 자주 막혔다. 마차가 멈출 때마다 사유를 알기 위한 황제의 사절이 급하게 말을 달렸다. 황제가 초조해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 뻔하게 드러났다.
매일 밤 행렬이 멈추면 주변의 귀족들끼리 작은 사교모임이 벌어졌다. 카널드는 어떤 귀족도 초청해주지 않았다. 화톳불 주위에서 광대나 음유시인을 중심으로 끼리끼리 모인 귀족들이 속삭이는 숲 속의 그늘에서 브란틴은 검을 휘둘렀다.
본래 느긋한 여행자가 2주 정도 걸려 여행하면 이스트월 시에서 크로우 백작령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행은 4주가 걸려서야 백작을 대비하기 위해 설치된 웨스트 사이드 기사단 4병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프리슬라니 봉에 요새가 서 있군.’
그가 전역하기 전에 없던 요새에 브란틴이 눈을 가늘게 떴다. 흐릿하지만 요새 위쪽에서 흩날리는 깃발은 홰를 치는 까마귀가 분명했다. 브란틴은 혀를 찼다. 콘월에서 크로우 백작령을 지나가려 할 때 상대할 수 밖에 없는 곳에 요새가 들어선 것이었다. ‘저기서는 우리의 움직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가 신성기사단에 복무할 때 단장에게 요새 신축을 건의했다 무시당한 곳에 상대편의 요새가 들어선 모습을 본 브란틴의 마음은 씁쓸했다.

“저기가 오늘 우리가 묵을 곳이다.”

카널드가 마차 문을 열고는 고개를 흔들더니 말했다.

“그런 명목으로 건설된 요새이지.”
“절묘한 핑계거리군요.”

브란틴이 카널드를 돌아보았다.

“크로우 백작과는 웨스트사이드 기사단 시절에 안면이 있습니다. 몇몇 국경분쟁이 발생했을 때 뵈었지요. 그 분은 절 모르시겠지만 한 때 적대했던 자들이 우리를 감제할 수 있는 고지에 요새를 세운 것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군요.”

그 때 카널드는 마차 밖으로 몸을 내놓고는 구토하기 시작했다. 내용물이 마차 뒤로 휘날리며 떨어지자 뒤의 마차가 멈추면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헛구역질도 끝나갈 즈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귀족들의 숙박을 명분으로 건설된 성이라기엔 깊은 해자나 성문을 보호하는 치의 존재 등 군사적인 목적이 강하게 드러난 요새였다.
카널드는 그래도 황태자라고 땅에 가까운 좋은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다. 다만 그 옆에 사우스빌 공작이 머무른다는 것이 브란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니카와 세레나도 없는 지금, 황태자를 지킬 수 있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다. 거대한 행렬을 이끌고 온 만큼 소란스럽게 짐을 내려놓는 사우스빌 공작 일행을 바라보며 브란틴은 검을 움켜쥐었다. 그 때 사우스빌 가문에서 한 기사가 브란틴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여, 체스웍스 경. 오랜만이야.”
“지켈 경 아냐!”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브린틴은 놀랬다. 웨스트사이드 기사단에 같이 입단하고 같은 곳에서 근무하고 같이 전역했던 갈란드 ‘서’ 지켈이었다.

“만나지는 못해도 자네 소식은 늘 들려오더군. 토너먼트 3관왕을 해서 이름을 날리더니 ‘그’ 황태자의 수호기사가 됐다는 것까지.”
“자네는 사우스빌 공작님의 수호기사가 된 건가?”

갈란드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공작 부인의 수호기사지. 레이디의 수호기사는 작은 영지를 가진 기사의 막내아들이 먹고 살기 적당하고 낭만적인 일이거든. 다만 내 레이디께서는 검버섯이 핀 쭈글탱이라는게 문제지만.”

거기서 갈란드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런데 체스웍스 가는 명문가잖아? 귀족이 되지 않고 오로지 황제의 기사로 남기로 서원한 R.R.K.(Royal Rounds Knights) 14 가문 중 하나니까 황제가 좋은 영지를 주었을 텐데 왜 수호기사로 밥벌이하는 거야?”
“수호기사가 꼭 영지 없는 떠돌이기사만 하는 건 아니잖아.”

에이린이나 카널드라면 갈란드에게서 이것 저것 캐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운 생각에 브란틴은 혀를 찼다.

“여기서 너를 만나다니 반갑군. 날이 좋을 때는 크로우 백작령의 동태를 살피던 봉우리에 그 백작의 요새가 들어설 줄이야.”

갈란드는 쓴웃음을 지으며 브란틴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도 우리를 여기 머무르게 하다니 크로우 백작의 통이 크긴 커. 나 같으면 요새의 허점이 탐지될 것이 두려워서 우리를 묵지 못하게 할 텐데 말이야.”
“그만큼 자신이 있는 거겠지. 크로우 백작이 허술한 인물도 아니고 말야.”
“그렇겠지. 사실 공작을 칭해도 될 정도로 영지를 확장한 사람이니.”

갈란드는 고개를 돌려 사우스빌 공작이 머무르고 있는 곳을 흘낏 바라보았다. 다 안으로 들어가고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갈란드는 머리를 붙이고는 브란틴에게 속삭였다.

“야, 저번에 황태자궁에서 불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사우스빌 공작님이 새로운 가구 일체를 기증하겠다고 했는데 거절했다면서? 호의가 무시당했다고 꼰대가 길길이 날뛰던데?”

브란틴은 긴장했다. 얼굴이 굳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조용히 응대했다.

“내가 모시는 주군의 수치이니 되도록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어. 사우스빌 공작님의 호의는 고맙지만 호의를 받아들이는 순간 다시 한 번 사교계에 오르내리지 않겠는가?”
“그건 그렇군.”

갈란드는 몸을 뒤로 젖혀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며칠만 있으면 이 눈으로 동방제일미를 보게 되는군. 얼마나 미인이길래 이렇게 난리인지 직접 볼 수 있다니 기대되지 않나?”

여지까지 나누었던 화재가 마치 동방제일미에 대한 내용인 양 웃어버리며 사우스빌 공작가로 돌아가는 옛 전우를 보고 브란틴은 미소지었다.


방은 햇빛이 잘 들어오는 남향에 있었다. 그는 책상에 앉아 햇살을 뒤로 한 채 서류를 잃고 있었다. 각진 턱을 어루만지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류를 살펴보는 초로의 사내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갈란드 ‘서’ 지켈입니다.”

갈란드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초로의 사내에게 경례를 했다. 초로의 사내는 갈란드를 노려보았다.

“옛 전우는 어떻던가?”
“거짓말 실력은 많이 들었더군요. 하지만 원래 고지식한 성격이라 뭔가 알고 있다는 걸 완전히 숨기지는 못하더군요.”
“그래? 불이 낸 것이 미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계획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소리냐? 어디서 노출이 된 거지?”

초로의 사내는 팔짱을 끼었다.

“다시 한 번 시도해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검은 백조의 홀’에 숨겨둔 조직은 정상적으로 기능하니까요. 이전에는 불장난을 친 적이 없었는데 우리가 공작을 한 시점에서 다시 한 번 불이 난다면 그쪽이 확실히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테지요.”

갈란드는 초로의 사내에게 건의했다.

“과연. 다시 시도해서 손해 볼 일은 없겠군. 추진해 봐.”
“예.”
“너도 알다시피 이제 황제가 노리는 귀족은 나밖에 안 남았어. 노스위덴 공작은 영지에 은거해서 여기도 안 따라올 정도고, 퀴즐랜드 쪽은 어린이가 새로운 대공이 되면서 황제가 후견이 되었지. 워낙 거리가 머니 대리기사가 파견되야 할 테지만 말이야.
목표가 바로 코앞이지만 그만큼 위험도 커. 그 방법은 나에게 모반 혐의를 씌우고 싶어 안달이 난 황제에게 명분을 주지 않는 가장 좋은 선택이다. 그런데 첫 번째 시도에서 카널드 녀석이 여름별장으로 이동하는 바람에 시간을 끌게 되었어. 그래서 들킨 것인지도 모르지.
만약 녀석이 진짜 우리의 계획을 알고 있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겠지. 대신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생각나면 언제든지 달려오게나.”
“알겠습니다.”
“나가봐.”

갈란드는 경례를 하고 문을 나갔다. 초로의 사내, 사우스빌 공작은 다시 서류에 눈길을 주었으나 곧 일어나서 서성거렸다. 한참을 서성거리던 공작은 고개를 들고 지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설마 황제인가?”


동방제일미 캐서린 윈드퍼스.
사실상 태중강 서편의 카자크 제국은 성족의 정복자들이 마족을 지배하면서 세운, 지금도 어둠고 음침한 느낌의 야만제국이란 느낌이 강했기 때문에 동방제일미란 태중강 동편의 발전되고 오래된 성족의 나라들, 자유도시들에서 가장 예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월계관을 누가 받느냐에 대한 문제로 마에가다르 왕과 아키탱 대공이 싸운 것이 전쟁 직전까지 갔던 것은 매우 유명한 일화였다. 그녀를 그림이나 조각상의 모델로 삼기 위해 많은 예술가들이 그녀의 공방을 들락거렸으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노래를 만들고자 하는 음유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콘월의 황제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지속적으로 사신을 보냈었으나 억류의 가능성을 걱정한 그녀의 측근들에 의해 계속 거부되어 왔었다. 브레이브 밴디트를 토벌하던 와중에 실종되었던 퀴즐랜드 대공은 국경의 독립적인 영주의 초청을 받는 형식으로 황제와 동방제일미의 만남을 주선하였다. 그가 실종된 이후에도 동방제일미를 꼭 만나야겠다는 황제의 의지아래 계획은 계속 추진되어 이제 실행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었다.


시나브로 깔린 어둠이 연회장에만 스며들길 거부하는 듯 휘황찬란한 촛불들이 환한 빛을 비추고 있었다. 귀한 향유쥐의 기름으로 만든 초를 아낌없이 썼기에 연회장 전체에 초가 타면서 나는 향긋한 내가 감돌고 있었다. 연회장에는 콘월의 귀족과 도시연합의 상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덕담을 나누고 있었다. 새로운 귀족을 태운 마차가 연회장에 도착할 때마다 집사는 큰 소리로 내방객의 등장을 알렸다. 이름을 불릴 가치가 없는 중소귀족이나 기사들은 저택 안까지 마차를 들여오지 못한 채 밖에서부터 걸어 들어왔다.
카널드는 구석 탁자를 하나 점유한 채 술에 떡이 되어 취해 있었다. 브란틴은 그 뒤에서 목석처럼 시립한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 동안 사교계에 거의 나타나지 않던 크로우 백작의 영애 또한 두 명의 여성 수호기사를 대동하고 모습을 드러내 동방제일미가 나타나기 전까지 시간을 때우고 있던 청년 귀족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잘록한 보디스와 엉덩이를 부풀린 일반적인 귀족 영양의 옷을 입고 우아하게 청년 귀족들을 상대하는 에이린을 보자 브란틴은 하녀복을 입고 검은 백조의 홀을 우아하게 걷던 그녀의 모습이 생각나 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행히 그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은 없었다.
음악이 멈췄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는 것도 있고 안내하는 집사를 바라보았다. 집사의 입이 열렸다.

“윈드퍼스 양이 입장하십니다.”

환성 소리가 회장에 울려퍼졌다. 홀 안으로 한 젊은 여성이 걸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카널드의 손바닥에 가려질 만큼 작았다. 새하얀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맑았고 커다란 연녹색 눈은 진짜 에메랄드라도 박아놓은 듯 반짝였다. 입은 작았지만 바라보는 사내의 가슴을 단숨에 태울만한 붉은 입술은 두툼했다. 어린 처녀의 상큼함과 요부의 관능이 동시에 느껴지는 첫인상이 사람들의 탄성을 불러일으켰다.
그녀가 어느 새 홀의 중앙에 다다랐다. 음악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경쾌한 음악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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