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강철의 왈츠 11

2009.05.13 10:1305.13

수도로 돌아가는 길에서 에이린 일행은 크로우 백작령으로 돌아갔다. 브란틴은 모처럼 카널드와 둘이 되었다. 둘은 천천히 돌아갔다. 길을 가다 만나는 농민들은 귀족과 기사가 말을 탄 것을 보자 일을 멈추며 인사를 했다.
언덕을 넘는 도중에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근처에 수도원이 있군. 페스트에 저항할 수 있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수도사가 있을까?”
“병에 걸린 자를 치료하는 건 몰라도 걸리지 않도록 저항하는 마법을 쓸 수 있는 수도사는 흔한 편이라 들었습니다.”
“마법 자체가 희귀한 재능이니 흔하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리는군. 아, 저기다.”

언덕 위에서 카널드가 수도원을 발견했다. 수도원은 비교적 큰 규모였다. 수도원 중앙에 있는 지구라트 위에서 종이 울리고 있었다. 저녁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지 수도사들과 신자들이 지구라트를 오르내리는 계단 아래 모여 있었다. 포도밭 사이로는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을 재촉해 수도원으로 향했다. 지구라트 뒤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카버넌트 백작과 그 수호기사 웰링턴 경이오.”

누구인지를 묻는 질문에 카널드가 간단히 답했다.

“눈이 검으시군요.”
“암월의 창은 아닙니다. 이단 심문관의 심사를 거쳤고요.”

카널드는 지구라트의 도장이 찍힌 문서를 성직자에게 건넸다. 성직자는 그것을 받아 꼼꼼히 살폈다.

“검은 눈은 희귀한 편인데 신기할 일이로군요. 지금의 황태자도 검은 눈이거든.”
“나도 여행을 하면서 그 이야기를 들었소. 사람들은 단지 눈동자가 검다는 공통점만으로 날 콘월 백작으로 잘 착각하더군. 여행을 하면서 오해를 산 적이 얼마인지.”

카널드가 양 손을 들고 고개를 절래 저었다.

“혹시 여기 수도원에 페스트에 저항할 수 있는 마법을 쓸 줄 아는 수도사가 있습니까?”
“두 분께서는 여기가 어디인지 잘 모르시는군요. 이곳은 ‘넬’ 찰스 수도원장님께서 계시는 마리 루이즈 수도원입니다.”
“그것 잘 됐군요. 저는 지금 수도로 가는 중인데 페스트가 휩쓸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서오. 섭섭치 않게 보답하겠습니다.”

카널드는 가볍게 자신의 주머니를 툭 쳤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수도자의 얼굴은 환해졌다.

“수도의 페스트는 이미 지나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쪽으로 여행하시는 분들께서는 불안하시겠지요. 수도원장님께 말씀 드리겠습니다.”

카널드와 브란틴은 수도사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잠시 뒤 누가 문을 두드렸다.

“식사시간입니다.”

문을 열자 두 사람을 안내했던 수도사가 서 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 마법을 행할 예정입니다. 저희 수도원이 자랑하는 치즈와 예일 맥주를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마법을 행하고 난 후 카널드는 수도자의 안내를 받아 도서관으로 향했다. 브란틴은 영내를 돌아다녔다. 한쪽에는 수녀들이 고아들을 보살피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성흔 기사단의 요새도 보였다. 중앙의 지구라트에서는 고행 수도사들이 수행하는지 채찍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양조장과 목장을 돌아보고 돌아오던 길에 한 기사가 서 있는 걸 보았다. 기사는 브란틴에게 목례를 했다.

“여행자이신가요? 전 여기의 성흔기사인 맥컬린 ‘서’ 혼우드입니다.”
“마라인 ‘서’ 웰링턴입니다. 카버넌트 백작의 수호기사지요.”
“카버넌트 백작령이라? 어디 있는 영지입니까?”
“퀴즐랜드 섬에 있는 작은 영지입니다.”
“퀴즐랜드 섬이라, 참 멀리서도 오셨군요.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많은 것이 새롭고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수도는 또 어떨지 기대가 되는군요.”

맥컬린은 미소지었다.

“요즘 롬바르디아 가도는 퀴즐랜드 대공의 토벌 실패 이후 기고만장한 브레이브 밴디트 때문에 굉장히 불안정해졌습니다. 단 두 분이 여기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니 천행이군요.”
“그렇군요. 저희는 대공께서 전사하시기 전에 섬을 떠나 지금 상황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미리 카널드와 여러 상황에 대비해서 시뮬레이션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브란틴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모시던 대공을 잃었으니 상심이 크시겠군요.”
“제 주인께서는 많이 상심하셨었습니다. 저는 직접적으로 모시는 주군이 아니니 느낌이 덜하군요.”

둘은 그 뒤로도 계속 얘기를 나눴다. 혼우드 경은 웨스트사이드 기사단에 복무하던 중 성흔(聖痕)이 나타나 복무를 중단하고 성흔기사단에 가입했다고 했다. 이 마리 루이즈 수도원이 성흔기사단이 된 후 3번째 복무지로서 수도원은 롬바르디아 가도를 지키는 요새 중 하나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방에 들어왔을 때 카널드는 이미 방에 들어와 책을 읽고 있었다.

“롬바르디아 가도를 벗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최근 들어 산적들이 날뛰고 있다고 합니다.”
“브레이브 벤디트?”

브란틴이 고개를 끄떡이자 카널드는 손을 턱에 괴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 시간이 너무 지체되지 않도록 돌아가는 길을 짜보자고.”


다음 날, 금화를 받아 기분이 좋아진 수도사들의 환대를 받으며 두 사람은 길을 떠났다. 브란틴은 롬바르디아 가도를 벗어난 작은 길로 길을 틀었다. 봄새들이 지저귀고 있었고 카널드는 고삐를 브란틴에게 맡긴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수도로 가면 사우스빌 공작가를 비롯한 귀족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과연 자신이 황태자의 비밀을 지킬 수 있을까? 의심하면서 브란틴은 천천히 말을 몰았다. 느긋한 여행이었다. 갑작스런 침입자들이 끼어들기 전까지는.
그들이 나타나기 전에 브란틴은 미리 살기를 감지하고 카널드의 말을 멈춰 세웠다. 카널드가 깨어났다.

“우리는 그 유명한 브레이브 밴디트다. 피를 보지 말고 순순히 인질이 되시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몸값만 지불하면 바로 풀어주는데다 숙박시설도 갖추고 있다고.”

사내들이 둘을 둘러쌌다. 절반 정도는 몸통을 가려주는 링메일을 입고 있었고 절반 정도는 가죽갑옷을 입고 있었다. 무기는 낫, 칼, 쇠스랑, 창 등 제각각 이었지만 손질은 잘 되어 있었다.

“미안하지만 인질이 될 생각은 없소.”

브란틴이 거칠게 말하며 박차를 가하려 할 때 카널드가 소리쳤다.

“잠깐! 멈춰라. 브란틴.”

카널드는 포위를 한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니들은 ‘판의 창’ 콘월 지부 소속의 놈들이냐?”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지?”
“커티스는 살아있냐? 만나러 갈 생각은 없었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인사나 하러 갈까.”

브란틴은 카널드를 돌아보았다. 만나러 간다고?

“너…… 넌 뭔데 우리 대장 칭호를 알고 있냐?”
“카버넌트 백작이라고 전하면 알 거다.”
“우린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당연히 너희들은 알 수 없지. 그러니 같이 가자는 거야. 가서 커티스가 카버넌트 백작이 누군지 모른다고 하면 그 때 포로로 잡아도 될 거 아냐.”

카널드는 담담하게 산적들을 노려보았다. 눈길이 닿은 산적이 주춤거렸다.

“그래. 그럼 되겠군. 따라와라.”

카널드가 브란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되었군. 따라가자. 저들은 내 편이다.”

그 말에 산적들도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네 편이냐?”


벚꽃, 아카시아 꽃, 진달래, 개나리 등 다양한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봄의 숲 속은 아름다웠다. 카널드는 산적들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루비와 더블릿은 이제 처녀가 다 됐겠다.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군.”
“우리도 뵈기 어려운 분들을 어떻게 니가 주어 담을 수 있냐?”
“뭐, 그 정도의 몸이라는 거다. 잘 알아 뵈라. 커티스는 그렇다 치고 아임과 그로우는 살아남았냐?”

브란틴은 그런 카널드를 바라보았다. 파문수도사, 암살자들이 ‘그림자의 성녀’라 부르던 세레나 윌리엄스, 그리고 이 브레이브 밴디트. 바보라는 탈을 벗은 그의 주군은 온갖 어둠의 세력과 다 교분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난 그 분의 수호기사지.’
브란틴이 그렇게 생각할 때 멀리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로실린트 백작령의 기사, 그란 ‘서’ 맥시엄이란 날 말하는 거다. 예의도 수치도 모르는 산적놈들아. 니들이 이름처럼 용기를 안다면 나와 겨뤄보자.”

소리를 들은 카널드 일행은 그를 피하려 했으나 그가 먼저 산적들을 발견하고 말을 몰아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기사는 브란틴을 향해 힐난하며 말했다.

“어떻게 된 수호기사가 주인을 보호하지도 못하고 같이 산적에게 끌려가고 있느냐! 허리에 찬 무기가 부끄럽지 않은가!”

그 힐난에 브란틴은 얼굴을 붉혔다.

“뭐, 한 마디로 같은 식구라는 것이지.”

그 때 인기척도 없는 수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좌중은 모두 돌아보았다. 한 중년 사내가 수풀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거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기사 한 놈이 있다고 해서 상대하러 나왔더니, 뜻밖의 반가운 얼굴을 보게 되는군. 무슨 바람이 불어 여기까지 오셨나? 카버넌트 백작님 나으리.”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주름이 는 것 같구나. 커티스. 올 생각은 없었는데 댁의 부하들에게 잡혀왔다.”
“거 주름 얘기 좀 하지 좀 마쇼. 잡혀왔다고. 쯧쯧, 거 운이 없었구만. 내 아이들은 내가 입단속을 시키리다.”
“네 부하들이 입이 무겁다는 건 B.B.를 봐서 잘 알지.”

커티스는 그란이라 자신을 밝힌 기사를 올려보았다.

“문제는 이 간뎅이가 부어버린 기사 나으린데. 쩝. 당신 운이 여기까지였다고 생각하쇼.”
“오호라, 이제 보니 니 놈들이 다 한패거리구나. 산적이 귀족인 척 하고 있단 말이지. 협잡과 거짓말, 사기가 악당들의 무기라더니 너희들을 보니 딱 맞구나.”

그 말에 브란틴이 저도 모르게 칼을 뽑았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시선이 집중되자 브란틴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상대하겠다고 결심하자 싸워야 될 이유가 생겨났다. 브란틴은 급히 말했다.

“저 기사의 말을 들으며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자신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 전하께 충성을 바치기로 거듭 맹세한 기사. 과거의 자신을 버릴 수 밖에 없겠지요. 저 기사를 베어서 과거와 결별하겠습니다.”

카널드가 브란틴의 검을 든 손을 잡았다.

“50점. 카버넌트 백작한테 전하란 호칭은 과분하다. 수도까지 가기 전에 고치도록. 그리고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고 싶다라. 마음은 잘 알겠다. 하지만 난 내 부하에게 그렇게 무리한 일을 시키고 싶지 않군. 시간은 많이 있다. 급하게 하려 하면 할수록 더 늦어지는 일도 많지. 과거의 네가 있었기에 이렇게 고지식하고 우직한 충직의 표본이 된 거 아니냐? 굳이 네 본성을 역류해서 급하게 바꾸는 것보다는 천천히 가자고 난 생각한다만, 결정적인 선택은 네 몫이다. 커티스, 양해해줘.”
“뭐, 나로선 일이 줄어들면 쌍수 들고 환영할거요.”

커티스는 팔짱을 끼고 뒤로 물러났다. 브란틴은 카널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검은 눈으로 인해 불필요한 공포를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그 공포를 희석시키기 위해 바보 행세를 하는 자신의 주군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부리는구나. 브란틴은 카널드의 손을 떼며 말했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래도 전 싸우겠습니다. 칼을 드는 것밖에 재주가 없는지라, 싸워야 정리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라. 단, 다치지 마라.”

브란틴은 칼을 들어 그란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상창을 안장에 매달고 검을 꺼내고 있었다. 나무들로 인해 방해되는 이런 숲에서는 돌격거리가 확보되어야 하는 마상창보다는 칼이 더 나은 것이다.

“지옥에나 갈 악당들아!”

큰 소리를 내며 그란이 먼저 말을 몰았다. 브란틴도 말을 몰아 칼을 맞댔다. 악마에게 혼을 판 천 것들. 지옥의 제일 앞자리를 예약한 개자식들, 그란은 끊임없이 욕을 하며 칼을 놀렸다. 브란틴은 동요 없이 칼을 막아가며 틈을 찾았다.
시간이 지나자 힘이 떨어진 그란의 칼놀림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움직임이 적었던 브란틴은 아직 호흡에 여유가 있었다. ‘춤추는 검이 드문 검술이라 상대하는 법을 배워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그란이 비명을 질렀다. 그란의 오른팔이 있던 자리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잘 가시오.” 브란틴이 큰 소리로 외치면서 그란의 목을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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