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강철의 왈츠 10

2009.05.12 15:4305.12

'도주로는 어디?'
대공이 타고 있는 말의 고삐를 잡아채며 대공의 수호기사 랜들 ‘서’ 로시거는 생각했다. 정작 자신은 뛰어나니느라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땀이 눈을 가릴 지경인데 가도가도 지겨운 나무숲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예비대는 어디쯤 있을까?
대공은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안돼서 산적이 친 아군의 목이 자신의 품으로 떨어지자 넋이 나가버려 말 등에 배를 깔고 포개져 있었다. 대공에게 있어 전쟁은 이야기 속에 존재했던 것일 뿐, 목이나 팔이 날라가고 피가 흩뿌려지는 것을 목격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대공이 넋을 잃자마자 그대로 말에 태우고 도망쳤기에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지 조금이라도 지체했다면 저 아비규환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목이 떨어졌을 것이다.
랜들은 고삐를 놓고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얼마나 달렸는지 비명소리도 이제 별로 들려오지 않는다. 이대로 숲을 벗어나면 자신은 충심으로 대공을 살린 공훈을 세우는 것이다. 그걸 생각하자 새로 기운이 솟아 랜들은 일어섰다. 그 때 작은 체구의 녹색 옷을 입은 호리호리한 체형의 누군가가 로시거가 주군을 데리고 가야 하는 숲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녹색은 산적의 옷. 랜들은 섬뜩해져서 건틀렛으로 눈가를 비볐다. 땀을 훔치고 바라보자 길을 막고 있는 녹색 옷은 작은 소녀였다.  '어느 산적의 딸내미야?'

"꼬마야, 어서 비켜라!"

언제 뒤에서 적이 쫓아올지 모른다는 공포에 랜들은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러나 소녀에게서 나온 반응은 뜻밖이었다.

"누가 꼬마야. 좆같은 겁쟁이 새끼가. 그 뒤에 있는 벼룩 간덩이는 대공이겠지?"

자식교육 참 잘(?) 시켰다는 생각에 랜들 로시거는 피식 웃었다.

“아가야, 오래 살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도망쳐라.”
"나는 브레이브 밴디트의 수장 B.B다. 니가 명예를 아는 놈팽이면 덤벼봐."
"꼬맹이가 허풍은 세구나. B.B.가 잘도 혼자 돌아다니겠다?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 벤다."

랜들은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여자와 아이에게 공손한 기사도 정신 따윈 어딘가에 버리고 온지 오래였다.

"B.B.는 너희들처럼 바지가 항상 젖어있는 겁쟁이가 아니라 혼자 다녀도 된다."

B.B.는 천진스레 말하며 왼손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길이 25cm의 단도도 소녀가 들고 있으니 장검처럼 보였다.

"입 한번 거친 꼬마로구나. 이 어르신이 교육 좀 시켜야겠다."

랜들은 검을 거칠게 위아래로 휘두르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소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렇게 흐느적거리는 검술로는 병든 달팽이도 베지 못할 걸."
"이년이!"

격분한 랜들이 검을 크게 휘둘렀다. B.B.는 왼손에 든 단도로 검을 흘리며 오른손으로 검의 옆면을 쳤다. 그녀의 손에 닿은 부분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랜들이 주춤거렸다. 그의 검은 자루만 남아있었다. B.B.는 새하얗게 웃었다.

"부정의 손. 내가 가진 이능(異能)의 이름이지."

랜들은 이제 넘어진 채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시선은 B.B.의 비정상적인 오른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B.B.가 미소를 지으며 접근함에 따라 랜들의 안색은 더욱 하얘졌다. 랜들은 두 손을 들었다.

“사…… 살려주시오.”

B.B.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기로 도망쳐서 나를 만난 이상 안 돼.”
“몸값…… 몸값이 탐나지 않냐? 대공입니다. 대공이에요. 여러분이 여지까지 보지도 못했던 거금을 뜯어낼 수 있습니다!”

랜들은 주저앉았다.

“비밀은 지킵니다. 지키고 말고요. 그냥 두둑한 몸값만 받아서 사라지시면 돼요.”
“일주일 전에도 법황청의 머저리들이 이능을 가진 어린아이를 화형대로 보내버렸다는 소식을 들었어.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너흴 풀어주면 며칠 뒤로 이 숲의 나무보다 더 많은 머저리들이 날 잡아 화형을 시키겠다며 덤벼들걸.”
“비밀은 지킵니다. 반드시 지켜요. 그리고 요즘 법황청 많이 유연해졌어요. 황태자, 그래 황태자도 이능이 있는데 살아있잖아요.”
“병신, 검은 눈을 가지고 있다고 모두 암월(暗月)의 창(窓)은 아니거든?”

B.B.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랜들의 눈이 B.B의 왼손에 있는 단도에 잠깐 머무르다 다시 오른손으로 향했다. 랜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랜들은 말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허리에 찬 단도를 꺼냈다. 랜들은 주저 없이 단도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엉덩이가 차인 말은 앞다리를 크게 들어 히힝거린 뒤 숲을 벗어났다. 그 기세에 퀴즐랜드 대공은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으악.” 퀴즐랜드 대공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다시 주저앉았다. 눈물을 글썽이며 온 몸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리다 퀴즐랜드 대공은 자해한 랜들 서 로시거와 소녀를 보게 되었다.

“로시거 경? 무슨 일이오? 여기는 어디오?”
“멍청이, 너도 죽어라.”

B.B.가 던진 단도가 대공의 목덜미를 관통했다.


전투가 끝났다. 총 1500명의 퀴즐랜드군 가운데 살아서 몸값 흥정의 대상이라도 된 사람은 불과 삼백여명에 불과했다. 최고급 간부만 해도 퀴즐랜드 기사단장 그레이 반 맥시멈, 썬월 용병단장 리처드 썬월 등이 전사했다. 거기에 비해 브레이브 밴디트의 피해는 경미했다. 사망자가 스물 셋, 부상자는 오십육이었다. 그 사망자 중 세 명은 호수에서 대기하던 중 체온저하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들이었다.
퀴즐랜드 대공의 행방에 대해서는 어떠한 소문도 들려오지 않았다. 몸값을 지불하고 나온 자들 중 누구도 퀴즐랜드 대공의 소문에 대해서는 들은 자가 없었다. 그 가을, 결국 퀴즐랜드는 이전 대공의 사촌을 새로운 대공으로 옹립하게 되었다.


매일 밤 관리자 부부가 잠들고 난 후, 브란틴은 모니카와 어울려 검을 수련했다. 맨 처음 브란틴이 모니카에게 겨루고 싶다고 말했을 때 모니카는 고개를 가우뚱거렸다.

“’춤추는 검’은 자주 볼 수 없는 검인데, 그걸 상대하는 방법을 배워서 어쩌시려고요?”

브란틴은 생각에 잠겼다. ‘여자에게 진 채로 끝내고 싶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이들의 특성 상 매우 상처를 입을 것 같았다.

“바로 당신을 이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모니카는 가볍게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었다.

“제 이름은 모니카 ‘서’ 스트라우스. 기사 작위는 크로우 백작님께 받았어요.”

모니카는 매일 밤 브란틴을 상대해주었다. 브란틴의 하인들이 수도에 있던 갑옷을 가져다 준 후로는 매일 갑옷을 입고 상대했다. 갑옷을 입고 상대해도 모니카를 이기기는 쉽지 않았다. 맨 처음 좁은 시야 바깥에서 갑옷의 틈을 노리는 모니카에게 쩔쩔맸다. 안면가리개를 떼낸 후에는 브란틴이 지쳤을 때 얼굴로 날아오는 흑요석 검을 봐야만 했다. 브란틴은 관리자 부부가 돌아다니는 낮에도 계속 검을 수련했다. 시야 바깥의 적에게 갑옷의 틈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법, 움직임을 최소화하면서 적을 상대하는 법을 익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카널드와 에이린이 둘이 겨루는 걸 구경하러 나왔다. 브란틴은 카널드에게 가볍게 경례했다.

“어인 일이십니까?”
“오늘 람슈타인이 돌아오기로 되어 있다.”

브란틴은 다시 대전 상대에게 집중했다. 한 차례 대련이 끝나고 잠시 쉬고 있을 때 류트 소리가 들려왔다.

“선량한 이들은 모두 잠들고, 악인과 음모가들이나 돌아다닐 듯한 밤*에 주무시지 않고 어인 일들이십니까?”

소류는 카널드부터 한 명씩 악수를 했다. 브란틴과 악수할 때 소류는 크게 웃었다.

“아니, 아직도 살아 계시다니, 이거 참 반갑소. 경은 제게 크게 빚을 졌으니 나중에 꼭 갚으시게.”

악수를 끝마치자 일행은 별장 안으로 들어가 탁자에 앉았다.

“그래. 사우스빌 공작의 계획에 대해 들은 것이 있나?”

카널드의 질문에 소류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이야기되는 것이 없소. 그들은 보안이 좋거든. 아무튼 지금은 이스트월로 돌아가지 마시오.”
“왜?”
“전염병이오. 신의 분노가 닥치었소. 페스트가 돌아서 시체가 언덕을 이루는 판이오.”

그 얘기에 에이린이 호기심을 보였다.

“그래요? 누가 누가 죽었는데요?”
“많은 이들이 죽었소. 황실에서만도 제이나 ‘반’ 이스트월 공주님을 비롯해 블루오웬 황자님, 황자님을 간호하던 안터벡 공작부인이 돌아가셨소. 수도의 귀족들도 페스트를 피해 도망쳐서 사교계가 사라질 지경이오. ‘검은 백조의 홀’에서도 집사 말톤 아나키를 비롯하여 펜우드, 젊은 펜우드, 메리 등 하인과 하녀들이 죽었소. 전하께서도 수도에 계셨다면 큰일이 벌어질 뻔 했소.”

에이린과 카널드가 눈을 마주쳤다. 에이린이 소류를 돌아보았다.

“사우스빌 공작가가 페스트 요양원을 운영하지 않나요?”
“그렇소만, 설마……”
“죄송하지만 또 부탁을 드려야겠네요. 그 페스트 요양원을 조사해주세요.”
“설마, 말도 안 되오. 제이나 공주님은 현 황비의 하나뿐인 딸이오. 자신의 혈육을 죽여가면서까지……”
“독약과 달리 전염병은 통제가 되지 않죠. 그것보다 다섯째 황자가 죽고 검은 백조의 홀에도 페스트가 퍼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해요. 그리고 현 황비야 어차피 사우스빌 공작가가 황실에 바치기 위해 입양한 양녀. 그런 딸이 낳은 황위계승권이 낮은 왕녀라면 자신에게 쏠리는 의심을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인 재물이죠.”
“어떻게 자식까지…… 말도 안 돼……”
“현 황비는 아무것도 모를 거에요. 음모란 대개 그런 거니까. 어차피 사우스빌 공작이나 측근 두셋만 알고 있을 거에요. 어찌됐든 조사해 보세요. 부탁드려요.”

망연해 있던 소류가 에이린의 눈을 쳐다보았다. 그가 이를 갈았다.

“크로우 영애의 말이 맞다면, 사우스빌 공작은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죄인이오. 알았소. 내 당장 다녀오리라.”

소류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에이린은 망연자실하고 있던 다른 한 사내를 돌아보았다.

“체스웍스 경. 이것이 저희가 현재 대적하고 있는 상대에요.”

다음 날, 혼자 검을 수련하던 브란틴에게 에이린이 거울을 하나 내밀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선물이에요. 체스웍스 경은 생각이 표정에 바로 드러나요. 그래서는 수도에 돌아갔을 때 왕자님의 비밀을 지켜드릴 수 없잖아요? 그러니 속임수를 다루는 법을 좀 익히셔야 해요. 거울은 거기 필요한 도구이죠. 앞으로는 검을 연습하는 시간만큼 속임수를 배우는 시간을 좀 내세요.”
“기사도에 어울리는 수업은 아니군요.”

브란틴은 마지 못해 거울을 받아 챙겨두었다. 그 때 문이 열리고 세레나가 빨랫감을 들고 나왔다. 세레나는 에이린에게 인사를 하고 브란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갔다.

“세레나, 그럼 안 돼. 체스웍스 경도 이젠 우리의 동지야.”

에이린의 말에 세레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죽이는 게 깔끔한데.” 거울을 보며 세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세레나!”
“체스웍스 경. 전 세레나 윌리엄스에요.”

에이린의 고함에 세레나가 태도를 바꿔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저기, 방금의 태도 변화는 도대체?”
“당연히 속임수죠. 세레나가 좀 낯을 가려서 그렇지 속은 착한 애예요.”

글쎄, 낯을 익힐 시간은 이미 지난 것 같은데…… 브란틴은 쓴웃음을 지으며 브란틴이 세레나를 칭하던 말을 떠올렸다. ‘그림자의 성녀’
브란틴은 세레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 때 에이린이 까르르 웃었다.

“이렇게 태도에 바로 드러난다니까요. 방금 암살자는 꺼림칙하다고 속으로 생각하셨죠?”

브란틴은 얼굴을 붉혔다.

“어차피 고지식한 기사님이 가장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세레나일테죠. 하지만 태자 전하를 지킨다. 라는 공통적인 목표가 가졌으니 그런 표정을 짓지 마세요.”

세레나가 여전히 생글거리며 브란틴의 손을 맞잡았다. 브란틴은 악수를 하면서 그가 애초에 황태자를 지키겠다고 결심했던 날을 생각했다. 그 때 황태자가 이런 사람들과 손을 잡았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직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이전 암살자들을 상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카널드 일행에게 황제의 전령이 온 것은 봄이 시작되고 좀 지나서였다. 전령은 크로우 백작가에서 콘월의 황제와 귀족들이 무희 ‘캐서린 윈드퍼스’를 보러 떠난다는 사실을 전했다.

* 세익스피어 ‘맥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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