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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강철의 왈츠 6

2009.05.06 12:1605.06

“결국 황태자 자리는 황제 폐하께서 결정하실 바이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퀴즐랜드 대공이 고개를 끄떡였다.

“황제 폐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시면 다음 황태자 자리에 매우 유리할 것입니다.”

끄덕끄덕.  

“황제 폐하께서 만나고 싶어 하시는 무희가 하나 있습니다.”
“무희를 만나는 것이 뭐가 어렵습니까?”

시큰둥한 반응이다. 체스트는 미소를 지었다.

“그 무희가 외국인, 그것도 동방제일미라면 이야기가 틀려지지요.”
“동방제일미? 캐서린 윈드퍼스 이야기요?”

마음이 동하는지 대공의 안색이 바뀌었다. 동방제일미 캐서린 윈드퍼스. 마에가다르 출신으로 자유도시에서 거주하는 최고의 무희. 그녀를 동시대에 태어난 것에 신께 감사를 드린다고 그녀를 본 모든 이가 말한다. 급기야는 그녀를 두고 전쟁이 벌어질 뻔 한 적도 있었다. 그녀를 실제로 본 사람들은 동방제일미도 상당히 겸손한 호칭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녀를 찬미하는 무수한 그림과 노래들은 도시연합과 화이트앤드, 마에가다르 등을 넘어 여기까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콘월을 방문한 적이 없다. 황제의 집요한 사신들을 그녀 측에서는 매번 정중히 거절하고 있었다. 거절의 이유는 매번 달랐지만 탐욕스런 황제에게 붙들릴지 몰라 콘월에 오는 것을 피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사교계에 파자했다.

“그래서 그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이오?”

대공의 목소리에 담긴 호의를 느끼며 중늙은이는 신중해졌다.

“동방제일미가 콘월에 오지 않는 것은 콘월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억류의 가능성을 경계하는 것이지요.”
“그건 나도 알고 있소.”
“그렇다면 콘월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면 됩니다. 콘월과 마에가다르, 앙리자르 사이에는 반독립적인 영주들이 있습니다. 이런 영주들 가운데 중립적이고 영향력이 있는 영주를 택해 그 영주의 성에서 만나자고 하면 그녀 측도 거절할 명분을 잃게 됩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이대로 동방제일미와 한 시대에 태어나시고서도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죽는 것은 싫으실 겁니다. 대공은 황제 폐하께 접근할 수 있는 쉬운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고요. 이것이 첫째 제안이고 다른 제안도 있습니다.”
“다른 제안도 있단 말이오?”
“마리나 황비에게서 나온 자식은 황태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콘월 대공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공주도 하나 있었구려. 그래서요?”

체스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까지 알려주면 수도의 모략에 익숙한 귀족들은 단숨에 알아들을 것이다. 그걸 못 알아듣는데다가 첫 번째 공주의 이름마저 몰라 어물대다니. 퀴즐랜드 섬에서 거의 왕처럼 굴던 시골귀족 출신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하긴 이런 정치력이니 대공이라는 콘월황국의 황제 바로 아래 작위를 가지고도 사우스빌 공작에게 밀리는 것이겠지.

“동방제일미와 황제 폐하의 만남을 주선하면서 세나 공주를 블루오웬 황자의 사위로 삼으십시오. 왕위계승의 서열을 높임과 동시에 마리나 황비의 가문인 노스위덴 공작가와 연결되는 일거양득의 수입니다. 굳이 산적 따위와 싸우지 않고도 능히 사우스빌 가문과 대적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촌뜨기 시골귀족에게 노회한 노스위덴 공작의 지혜가 더해지겠지. 카널드 황태자의 출생과 관련된 스캔들로 인해 마리나 황비가 수도원으로 쫓겨난 뒤로 중앙정계에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바로 그 전까지 재상을 역임할 정도로 공작은 능력 있는 귀족이었었다. 그 말은 속으로 삼키며 체스트는 대공의 안색을 살폈다. 대공의 얼굴에 피어 오른 환희를 보는 순간 체스트는 자신의 계략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역시 당신이라는 인간은 소문 이상이오. 그대가 나의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오. 내 공의 조언을 적극 명심하리라. 나라의 우환을 제거하고 황제 폐하의 소망을 풀어드린다. 이 어찌 귀족의 자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체스트의 안색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쉬운 길을 알려줬는데 굳이 어려운 길 또한 걷겠다고 하다니. 브레이브 밴디트가 이 시골 귀족에게 토벌될 정도였다면 150년 동안이나 중소 귀족들의 악몽이 될 수 없을 것이었다.
체스트가 입을 열었다.

“지금의 황태자가 아직도 폐위되지 않고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
“으음. 그거야 황태자가 장자이기 때문이 아니겠소?”
“겨우 그런 이유로 황태자를 폐위하라는 그 많은 귀족들의 청원을 황제폐하께서 무시하신단 말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왜 황제폐하께서 현 황태자를 폐위하지 않고 계시는지? 그리고 왜 유력귀족들의 딸을 후비로 삼아 아들들을 낳았는지 말입니다.”

실망감에 해야 할 소리가 아닌 이야기까지 한 체스트는 자리를 일어났다. 다섯째 황자가 이번 토벌에서 세력을 잃을 것은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이미 2황자와 4황자를 한꺼번에 암살해 기세등등한 사우스빌 가문과 3황자 우드로우 반 이스트월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그 다음 수를 생각해야 했다.
잠시 뒤 정중한 환대를 받으며 밖으로 나온 체스트는 절뚝거리며 마차에 올랐다. "빌라 오브 마드리드로".


며칠 동안 브란틴은 카널드에게 검을 가르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카널드는 번번히 브란틴을 따돌렸다. 황태자는 저택의 사용인들이나 이용할법한 저택의 구석진 길들까지 다 알고 있었고 가뜩이나 낯선 저택에서 브란틴은 황태자를 찾아내기 힘들었다.
이스트월은 수면 위로 떠오른 퀴즐랜드 대공의 브레이브 밴디트 토벌계획으로 인해 시끄러워졌다. 대공에게 고용된 용병들이 몰려들었고 대공을 지지하는 귀족들도 가병들을 소집했다. 병사들을 따라 상인과 창녀들도 몰려들었다. 사교계의 귀족들은 살롱에 모여 대공의 계획이 성공할지 여부와 사우스빌 공작가는 이 도전을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날도 사라진 카널드를 찾기 위해 헤매던 브란틴은 황궁으로 향하는 ‘로열 로드’의 길가에서 카널드를 발견했다. 카널드는 벽에 기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카널드에게 향하던 브란틴은 거리를 지나가는 마부들이 카널드를 바라보며 비웃는 걸 보았다.

“일어나십시오!”

브란틴은 격앙된 목소리를 내고는 카널드를 일으켜 세웠다.

“응, 누구야? 이거 우리 수호기사 나으리 아니신가? 마담, 여기 럼주 한 병 더! 어, 마담이 없네. 여긴 어디야?”

카널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브란틴은 카널드의 어깨를 부축하고 ‘검은 백조의 홀’로 향하기 시작했다. 카널드는 비틀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거 알아? 음파 학파의 마도사들은 진동을 예민하게 느낀다고 하더라고.”
“예. 때문에 음파 학파의 마도사가 정찰대로 움직이는 부대를 상대로 기습을 하기가 어렵지요.”

건성으로 대꾸하던 브란틴은 마차 하나가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그 얘기는 음파 학파의 여마도사들은 엄청 민감하다는 얘기 아냐? 쩝, 먹어보고 싶다.”

이런 길에서 음담패설이라니. 눈살을 찌푸리던 브란틴은 마차에 새겨진 문장을 바라보고는 경악했다. 줄에 매달린 수정. 이건 ‘수정의 계시회’의 문장이었다. 그 중에서도 수정을 가로지르는 피리가 있는 문장은……
마차의 창문이 열리며 초로의 귀부인이 카널드를 째려보았다. 브란틴은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필이면 ‘솔’ 앤 후작부인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다니. 그 때 마차가 멈췄다.

“어머, 체스웍스가의 꼬맹이 아니니?”
“브란틴 ‘서’ 체스웍스입니다. ‘솔’ 앤 후작부인”
“그래. 그… 의 수호기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못난 주인을 섬기게 되어 고생이 많구나.”

그 못난 주인이 바로 옆에 있는데…… 브란틴은 카널드를 흘깃 바라보았다. 카널드는 트림을 하고 있었다.

“아버님을 뵙게 되면 안부를 전해주렴. 그럼 고생해라.”

카널드를 못마땅하게 쏘아본 ‘솔’ 앤 후작부인은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마차는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다. 카널드는 마차의 뒤에 대고 감자바위를 날렸다.

“참, 브란틴. 오늘이 며칠이지?”
“성 ‘테오도르’의 축일 보름 전입니다.”
“그럼 갈 데가 있다.”
“어디입니까?”
“성 빌렌시우스 수도원”

성 빌렌시우스 수도원. 카널드와 동복남매인 세나 공주가 머무르고 있는 곳. 그리고……

“오늘이 어마마마의 기일이다.”


“어마마마는 날 낳으셨기 때문에 죄인이 되셨다. 신성한 황가에서 ‘이능’을 가진 자가 태어날 리는 없다고 법황청은 증언했고, 내 검은 눈이 ‘암월의 창’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다음에도 후유증은 계속됐지. 결국 궁내부원 중 하나는 어마마마께서 날 임신했을 무렵 황제께서 어마마마를 찾지 않았다는 증언을 하려 했다고 해. 외할아버지가 미리 손을 써서 증언은 취소되었지만. 흥. 결국 어마마마는 여기로 쫓겨나시게 되었지. 외할아버지도 낙향해버리고 말이야.”

무덤은 수도원에서도 떨어진 산에 있는 절벽에 마련되어 있었다. 절벽에 오르는 동안 카널드는 보기 드물게 제정신이 박혀 있었다.
무덤에 꽃을 바친 후 카널드는 잠시 묵념했다. 브란틴도 그 뒤에서 같이 죽은 사람을 위로했다.

“자 내려가자.”
“전하, 지금 모습은 보기 좋습니다. 오늘만 아닌 다른 날들도 오늘처럼 계실 수는 없으신지요.”

카널드가 몸을 돌려 브란틴을 노려보았다.

“소류가 조사를 끝낼 때까지 기다리려 했지만 오늘 내로 돌아오지 않았으니 할 수 없다. 여기 이 무덤 앞에서의 모습은 결코 신뢰하지 못하는 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니까 말이야.”

뒤에서 누군가가 큰 인기척을 내면서 올라오고 있었다. 브란틴은 뒤를 돌아보았다.
파도치는 듯 풍성한 붉은 머리, 춤이라도 추는 듯한 활달한 걸음걸이. 모니카였다. 모니카가 오른손에는 검을 들고, 왼손에는 어떤 머리를 들고 올라오고 있었다. 머리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모니카가 머리를 던졌다. 눈을 부릅뜬 금발 사내의 머리가 브란틴의 앞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전하를 미행하고 있던 자입니다.”

브란틴이 머리에 시선을 주었을 때, 모니카가 재빨리 브란틴에게 파고들었다. 브란틴이 검을 뽑고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모니카는 브란틴의 옆으로 돌아갔다. 브란틴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모니카는 카널드를 보호하는 위치에서 자세를 잡고 있었다.
‘무슨 여자가.’
모니카에게서 발해지는 살기를 정면으로 받으며 브란틴도 자세를 잡았다. 그녀의 검은 검은 광택이 나는 세검이었다. 브란틴은 검의 재질이 철이 아닌 것을 발견했다.

“흑요석 검이라. 그녀는 대지 엘프라도 되는 겁니까?”
“뭐, 흑요석 검을 대지 엘프만 사용하라는 법 있나?”
“지금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래? 황제는 아무 말 안 하디?”
“폐하께서는 훌륭한 기사가 되길 바란다고……”
“정말 모르는 건가? 아니면 능청이 좋은 건가? R.R.K.(Royal Round Knights)의 명가 체스웍스가에서 나에게 수호기사를 보냈는데 황제와 관련이 없다고? 들어오자마자 내 측근을 내쫓은 네가?”
“람슈타인은 전하께서 가까이 하실 만한 자가 아니, 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태자 전하의 수호기사가 된 것은 제 자의에 의한 것입니다. 그보다 지금 상황은 뭡니까? 이게 전하의 진짜 모습입니까?”
“미안하지만 네 자의를 믿어줄 시간은 없구나. 모니카,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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