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강철의 왈츠 5

2009.05.04 13:5005.04

소류는 이스트월을 벗어나 계속 걸었다. 날이 지날수록 길옆에 마을과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무들이 자리를 대신했다. 소류가 오솔길에서 멈췄을 때 주변은 나무로 빽빽하고 길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소류의 맞은편에 한 소녀가 우락부락한 사내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사고의 빛 아래에서 우리는 자유로워지고."

소녀가 먼저 말했다.

"이성의 빛에 의해 우리는 짐승에서 벗어난다."

소류는 말하며 소녀를 내려 보았다.
소녀는 고작 십대 초반으로 보일 정도로 작고 말랐다. 소녀 바로 뒤에 브란틴과 좋은 비교가 될만한 거대한 거한이 서 있어 소녀는 더욱 작아보였다. 갸름한 턱 선에 빠지지 않은 볼 살. 커다란 눈은 성인이 된 이후의 모습을 기대해도 될 만큼 귀여운 아이였다. 하지만 왼손에 비해 2배 이상 큰 오른손이 그 귀여움을 역전시켜 기괴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소녀는 껌을 씹고 있었는데 소류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 커다란 오른손을 내밀었다.

"악수"

소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의 앞에 놓인 커다란 손을 바라보았다.

"B.B. 이시여. 소인은 당신께 잘못한 게 없습니다만 왜 죽이려고 하시는지?"
“응? 악수하자구. 악수.”

B.B.는 계속 오른손을 내밀었다.

“끄응, 알겠습니다.”

소류는 마지못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때 B.B.는 기괴한 오른손을 거두고 왼손을 내밀어 소류의 오른손을 잡았다.

“헤헤……. 내가 소류를 어쩔 줄 알았어? 내가 소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근데 이 숲에는 왠 일로?”

B.B.는 그런 모습으로 악수를 했다.

"카버넌트 백작에게서 바로 오는 길입니다. 브레이브 밴디트의 안위와 관계된 소식이 있어서 말이죠."
"헤? 그런 건 다른 음유시인을 시키지 왜 직접 와? 직접 달려올 정도로 급하고 우리 안위와 관련된 소식이라…… 니미 염병할 정부가 또 우릴 토벌하려고?"

소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렀습니다. 역시 선대가 당신을 잘 ……."
"저번에 보여준 걸로는 부족한가? 이번엔 완전히 살을 발라주마. 잠깐, 그런 조까튼 이야기는 여기 말고 음, 지도자 회의를 하자.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 빨리 손님을 회의실로 안내하지 않고 뭐하는 거야?"

B.B.는 멍하니 서 있던 졸병들에게 화를 낸 후 안으로 들어갔다. 졸병들은 빙긋 웃으며 소류에게 다가왔다. 소류는 아직 남아있는 거한을 바라보았다. 거한은 오른쪽 팔이 없었다.

"잭. B.B.의 저 말투는?"

잭은 암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대의 영향이오."
"역시."

소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래서 애들은 가정환경이 좋아야 한다니까."


소류가 회의실로 안내됐을 때 회의실에는 B.B.가 먼저 와 키에 맞지 않는 큰 의자에 앉아 땅에 닿지 않는 발을 흔들거리고 있었다. 잠시 뒤 소류 자신도 목을 꺾어 바라봐야 할 정도의 거구인 부두목 잭이 B.B. 뒤에 와서 섰다. 브란틴과 잭을 마음속에서 비교하고 있을 때 붉은 머리카락을 짧게 깎아 젤을 발라 세운 중년의 사내가 들어와서 앉았다. 다음으로 젊은 쌍둥이 자매가 각각 흰색과 검은색이 선명한 옷을 입고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으로 푸른 단발머리를 한 젊은 여성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B.B.가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올 놈들은 다 왔으니 회의를 시작하자."

그때 쌍둥이 자매 중 흰 가운을 입은 여성이 검은 튜닉을 입은 여성에게 소곤거렸다.

"더블릿, 형부는?"
"형부는 훈련 나갔어."
"자! 소류 씨가 가져온 소식을 듣기 전에 각자 소개부터 하지. 우선 이쪽은 소류 람슈타인 씨. 연석의 멤버로서 빌어먹을 정부가 우릴 토벌하려는 간 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가지고 오셨다. 소류 씨, 저쪽은 커티스. ‘판의 창’의 총대장이자 콘월 지부의 지부장을 겸하는 놈이야. 망고슈를 주로 사용하지만 정작 조심해야 될 건 반대편에 숨긴 단검이지."
"그걸 말씀하시면 저는 뭐로 먹고 살라는 말씀이십니까?"

중년의 사내가 입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알아도 대부분 못 막는 게 저놈의 솜씨고, 단검을 너무 경계하다가는 오히려 망고슈에 꿰일 수도 있지. 저쪽은 루비와 더블릿. 루비는 우리의 재정을 총괄하고 있고, 더블릿은 우리의 정보를 총괄하지. 그리고 원래 이 자리에 참석해야 하는 아임과 그로우는 훈련관계로 불참이야"

소류는 브레이브 밴디트의 간부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그리고 B.B.는 단발머리의 여성을 가리켰다.

“마지막으로 이 분은 메튜어 에스프란차 양. 우리 손님이야.”
“맥나라마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이미 안면이 있습니다.”

소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 B.B.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부의 어떤 간 덩어리 부은 새끼가 우릴 건드리려고 하는 것 같아. 소류는 그걸 알자마자 우리에게 달려온 거고, 더블릿은 그걸 몰랐다고 창피해할 필요 없어. 소류는 황태자와 연락하고 있는데다 살롱이라는 돼지똥통에도 발이 넓으니 미공개 정보들도 알아낼 수 있으니까. 자세한 내용은 소류가 말할거야. 나도 소류에게서 이 소식을 듣자마자 너희들을 불렀거든."

소류는 B.B.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여인들에게 들려줄 세레나데가 아닌, 피비린내가 흐릿하게 나는 전쟁의 첩보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3년 전에 퀴즐랜드 대공이 수도로 올라오신 것은 다들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대공은 자신의 누이동생이 낳은 오 황자의 황태자 등극을 로비하기 위해 수도로 올라왔죠. 하지만, 이미 중앙정계는 삼 황자의 외척인 사우스빌 공작 가가 휘어잡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공의 위가 아무리 높아도 연줄 없는 시골 귀족. 그 기득권을 그대로 부수기에는 힘이 들죠. 그래서 대공은 이벤트를 생각했습니다."
"우릴 그 놈의 위신을 높이는데 밑거름으로 삼겠다고?"
"예. B.B. 아직 어려움 같은 건 겪어 본 적이 없는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생각하기에 적당한 작전이지요."
"하하, 간이 얼마나 큰지 배때기를 열어보고 싶은데? 적의 규모는?"
“아직은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는 단계라 규모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대공을 추종하는 영주들의 가병과 대공이 가지고 온 재력으로 고용 가능한 용병단을 검토해본 결과 약 1000명에서 1600명 정도 동원될 것으로 크로우 영애는 추측했습니다. 다만 브레이브 밴디트는 숲에서 무적이라는 평판이 동원숫자의 변수가 될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크로우 영애는 대공은 약 40년 전 헨서 경이 제안했던 토벌 작전을 사용할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더블릿”

“핸서 경의 작전은 저희의 돈줄을 끊겠다는 작전입니다. 저희의 수익은 주로 롬바르디아 가도를 지나는 귀족들을 납치해서 몸값을 받아내거나 지방귀족이 중앙귀족에게 바치는 예물을 훔치는 것입니다. 롬바르디아 가도 곳곳에 요새를 세우고 순찰을 돌고 있지만 우리는 순찰이 오기 전에 털고 달아나거나 순찰도 박살내 버리지요. 그래서 헨서 경은 롬바르디아 가도가 아닌 미드콘월 숲 남쪽에 있는 미슬렌 호수에 요새를 세울 계획을 세웠습니다.
미슬렌 호수에 요새가 건설될 경우 저희가 롬바르디아 가도에서 일을 벌이고 귀환할 때 반드시 요새병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저희는 매 습격마다 동지를 잃을 것이고, 결국 롬바르디아 가도가 아닌 다른 수익원을 찾아야겠지요. 하지만 롬바르디아 가도만큼 귀족들이 오고가는 도로는 적으니까, 결국 저희는 저희를 지지하는 백성들을 습격하게 될 것입니다. 백성들의 지지를 잃은 우리 산적단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죠.”
“왜 아직까지 시행이 안 됐지?”
“우선 미슬렌 호수 근처에 좋은 석재가 나는 채석장이 없다는 이유가 큽니다. 채석장에서 돌을 미슬렌 호수까지 들고 오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고 비용도 많이 소모될 것입니다. 또한 미드콘월 숲 안에 있는 미슬렌 호수의 요새는 저희에 의해 포위를 당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포위기간에도 자체적으로 보급이 가능한 요새여야 합니다.”
“한 마디로 돈이 많이 깨지는 계획이란 소리군. 퀴즐랜드 대공은 돈이 썩어나나봐?”
“퀴즐랜드 섬 전토를 다스리는 대공이니까요.”
"만약 적이 1600명 이상이라면 저희 콘월 지부의 4배 되는 전력입니다. 색슨 지부와 튜튼 지부도 불러오는 게 ……"

루비가 말을 흐리며 B.B.를 바라보았다.

“그건 놈들의 규모와 작전이 확정된 다음 결정해도 안 늦어. 소류, 아직은 준비단계지?”
“그렇습니다.”
“더블릿은 이제부터 수고하고. 만약 구해야 되는 정보가 귀족 사회 깊숙이 감춰져 있는 거면 소류의 음유시인들이 도와줄거야.”
"예"

더블릿은 B.B. 에게 고개를 숙였다.

"소류, 직접 여기까지 와서 알려주다니 고마워. 그럼 이제 어디로 갈 거야? 돼지똥통?"

소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곳에 가게 되면 소인도 즐겁겠습니다만...... 얼마 전에 황태자에게 새 호위기사가 생겼습니다. 전 그 호위기사의 주변을 조사하러 갈 생각입니다만."
"진짜, 어떤 할 일 없는 새끼가 그 자식의 호위기사가 돼? 그런 미친놈이 진짜 있어? 귀족 새끼들은 우리 평민들보다 더 이능이니 저주니 하는 것들에 민감하잖아."
“브란틴 ‘서’ 체스웍스.”
“진짜, 그 놈이라면 올해 황실 주최 토너먼트에서 삼관왕을 한 놈이지? 커티스, 너 토너먼트 구경 갔었잖아?”
“맞습니다. 두목. 정말 강한 놈이죠.”
“너랑 비교하면 누가 세?”
“에이~ 정면에서 도적놈이 기사 나으리의 상대나 됩니까?”

B.B는 커티스를 놀리는 것을 그만두고 소류를 돌아보았다.

“그 정도 강하면 어디든 가도 대접 받을 텐데 왜 하필 황태자야? 머리가 나빠?”
“그걸 조사하려고 그 부친의 영지로 가는 거죠. 배후가 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B.B는 활짝 웃었다.

“그거 잘코사니다. 소류가 조사할 동안 그 오지랖은 꼼짝 못하는 거잖아. 그런데 그 기사 힘이 엄청 강하다면서, 잭이랑 비교해보면 어때?”

소류는 잭의 덩치를 흘낏 쳐다보았다.

“글쎄요. 서로 팔씨름이라도 해보지 않는 이상은 잘 모르겠네요.”
“그렇게 강해? 만약 놈이 스파이나 암살자라면 골치 아프겠는걸.”

소류는 웃었다.

“스파이나 암살자라도 상관없습니다. 전하 옆에 있는 자들이 누구인지 잊으셨습니까?”


콘월의 수도 이스트월은 콘월의 역사와 함께 해온 유서 깊은 도시다. 한 때 마족의 세력이 콘월을 제외한 전 지역을 점령했을 때에는 성족과 그 동맹 종족들의 망명정부가 서 있기도 했다. 그래서 콘월의 시민들은 지금 마족이 사라지고 성족이 알려진 세계 전 지역의 통치자가 되어, 콘월이 성족 세계에서 동쪽 끝에 위치한 변방의 국가가 되었음에도 이스트월을 세계의 수도라 부르길 좋아했다. 그 세계의 수도엔 중앙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많은 귀족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의 부인들이 만든 사교계의 중심, 살롱도 부지기수로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이 곳, 퀴즐랜드 대공 부인의 살롱은 특별했다.
콘월의 많은 귀족들 중에서도 공작중의 공작, 대공의 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퀴즐랜드 대공 혼자뿐이다. 그것은 퀴즐랜드가 알려진 대륙에서 꽤 떨어진, 독자적인 하나의 큰 섬이라는 이유에서 유래된 것이다. 멀리 떨어진데다 바다로 둘러싸여 황제의 명이 잘 통하지 않는 그 섬에서 대공은 거의 왕처럼 통치하고 있었다. 그 대공이 이 이스트월에 온 것이 삼 년 전이다. 그가 왕처럼 행세할 수 있는 퀴즐랜드를 굳이 떠나 이스트월에 올 때부터 콘월의 많은 유력 귀족들은 동요했다. 대공의 목적은 분명했다. 지금의 허술한 황태자를 대신해 그의 누이동생이 낳은 오 황자가 차기 황태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정치공작을 벌이기 위해 수도로 올라온 것이다. 비록 수도에 줄 하나 없는 지방영주이지만 그는 콘월의 유일무이한 대공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일거수일투족이 주목 받고 있는 그 대공의 살롱에서, 대공은 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그 자가 홍차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대공이시여. 이번에 매우 큰 이벤트를 준비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쪽까지 이야기가 흘러갔던가? 이거, 소문이란 빠르군."

대공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쪽에서 이야기를 알고 계신다면 좀 도와주시오. 병력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니까. 퀴즐랜드에 병력요청을 하긴 했는데 그쪽에서 병사가 오려면 시간이 꽤 걸리는구려. 내가 성공하여 사우스빌 공작가를 견제하게 되면 그 쪽에서도 유리하게 될 것 아니오?"
"대공이시여.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 드립니다만, 그 건은 실패할 겁니다. 저는 오늘 대공을 말리기 위해 왔습니다."

사내의 말에 대공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인테바랄 경. 당신도 제가 실패할 거라 생각하십니까?”
"제가 감히 대공의 재능을 재겠습니까? 하지만 이 건은 대공의 능력과 상관없이 실패할 뿐입니다. 브레이브 밴디트. 그들은 150년이 넘는 전통 있는 산적들입니다. 토벌의 기운을 느끼자마자 납작 엎드려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콘월의 그 많은 숲 가운데 그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으시렵니까? 그렇게 시간만 흘러가다 대공께서 체면을 잃게 되시면 사우스빌 공작가의 사람들만 기뻐 날뛸 것입니다."
"하하, 두고 보시오. 내가 황국의 오랜 골칫거리를 단숨에 없애 줄 테니. 도적놈들을 잡기 위해 1500 이상을 동원할 예정이오. 이렇게 많은 병력이 동원되는데 그들이 어디로 숨는단 말이오."

대공의 말은 그가 어린 만큼이나 단호했다. 사내는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하고 왔는데 역시나였다. 그리고 설득될 자도 아니었다. 사내는 잠시 침묵했다. 대공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침묵이었다.

“경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를 말리더군요. 하지만 나는 헨서 경의 계획을 실행할 것이오. 1500명이 넘는 병력이 호수에 요새를 지으면 산적들은 말라 죽을 수 밖에 없을 것이오.”

사내는 한숨을 쉬었다.

“그 계획이라면 간악한 도적들도 꼼짝을 못하고 사라질 겁니다. 역시 대공께서 만만의 준비를 하시고 계시다니 이 콘월의 큰 복입니다. 하지만 미슬렌 호수에 요새를 쌓으려면 날라야 하는 돌이 만만치 않고 그 과정의 경비비용도 많이 들어갑니다. 고작 도적 하나 잡자고 그렇게나 지출하는 것은 아깝지요. 그것보다 훨씬 비용도 적게 들고 대공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고자 이 늙은이가 왔습니다.”
“오, 칠 황자의 이름 높은 책사께서 저에게 지혜를 빌려주신다니 경청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고견을 들려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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