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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강철의 왈츠 2

2009.04.30 14:1404.30

1. 황자는 검은 눈동자


갑자기 내린 가을비가 도시의 풍광을 180도 바꿔 버렸다. 여기저기서 빗물에 쓸려가는 낙엽들. 브란틴 서 체스웍스는 비를 맞으며 스산하게 보이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건물은 화려했다. 세로로 홈이 파인 둥근 대리석 기둥들은 가운데가 약간 볼록 나왔고 천장과 이어지는 부분에는 섬세한 장식들이 달려 있었다. 정문 위 지붕과 대들보 사이에는 둥근 홈이 파여 있었고 그 안에는 콘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태자 월리엄의 흉상이 서 있었다. 이런 건물이 스산하게 느껴지는 건 가을 소낙비 아래 올려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니, 이 건물 ‘검은 백조의 홀’의 현재 주인을 생각하며 보고 있기 때문이리라.
카널드 반 이스트월. 현재 콘월 황제의 첫째 아들로 제 1 황위계승자(콘월 백작)이며 역사상 최악의 황태자
콘월은 성족의 나라 중 가장 역사가 오래된 나라다. 그 동안 다양한 성격의 황태자가 이 건물을 사용했었다. 여자를 밝혔던 자도 많았다. 하지만 카널드처럼 지저분하게 집적거리는 황태자는 없었다. 술에 빠져들었던 황태자도 많았다. 하지만 하루 24시간, 연회에 들어서기도 전이나 심지어 황제 앞에서도 술에 취해 주정부리던 황태자는 없었다. 교양이 있다고 자부하는 콘월의 귀족과 시민들은 카널드란 이름만 들으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이름은 콘월의 수치였다. 오죽하면 최근 귀족 집안에서 일단 아들이 태어나면 카널드란 이름은 우선 제외하고 다른 이름을 지으려 한다고 할 정도일까?
스산한 건물의 느낌 탓인지 경비를 서는 병사들마저 을씨년스레 보였다. 브란틴이 문 앞에 서자 양 쪽에 서 있던 병사들이 서로의 핼버드를 수직으로 겹치며 문을 막았다. 황실경비대의 이름에 걸맞은 절도 있는 동작이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브란틴 서 체스웍스, 올해 이스트사이드 기사단에서 전역한 자유기사입니다.”

고개를 들어 브란틴을 바라보던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이름은 여기 성내 중심가에 있지만 카널드의 악명으로 인해 스산해진 콘월백작가(街)에 나타날 이름이 아니었다. 브란틴 서 체스웍스, 올해 자유기사가 된 기사들 중에 가장 명성이 높은, 한 마디로 여러 귀족들이 충성서약을 받고 싶어하는 자유기사였다. 그는 황실기사단 R.R.K. (Royal Rounded Knights)의 예전 단장이었던 체스웍스 경의 아들인데다 현 기사단장 더 퍼스트 나이츠(The First Knight) 블루코렐 경 아래서 종자생활을 했었다. 귀족이 되길 거부하고 기사로 남아 황제에게 충성하는 전통의 R.R.K. 14가문의 하나인 체스웍스 가에서 올해 배출한 자유기사.
그런 배경만 좋은 것도 아니었다. 올해 있었던 황제의 환갑 기념 축제에서 토너먼트(마상 대결)와 난투 대결, 궁술 대결의 3개 부분을 동시에 거머쥔 무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것도 웨스트사이드 기사단에서 갓 전역한 청년기사가 말이다. 축제에서 3개의 월계관을 한 사람이 차지하는 일은 48년 만에 발생한 기적으로 지금도 그 기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노래들이 어느 선술집에선가 불려지고 있을 터였다. 호랑이의 아들이자 그 자신도 호랑이임을 입증한 사내. 눈이 휘둥그레진 병사도 황실 토너먼트의 어느 한 관중석에서 브란틴이 상대를 압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흥분에 차 고래고래 소리 질렀던 경험이 있었다. 그 때 눈에 확 띄었던 압도적인 체구의 곱슬진 녹색머리의 사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병사를 내려 보고 있었다.

“이미 오늘 뵙기로 약속은 잡았습니다만…….”
“예! 확인해 보겠습니다”

한 병사가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브란틴은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잠시 뒤 그 병사가 돌아왔다.
입구를 지키던 경비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브란틴은 잘 꾸며진 화원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연락이 되어 있었지만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비가 와서 안 올 줄 알았나? 브란틴은 비에 젖은 예복을 털어내며 잠시 기다렸다. 비에 젖은 몸으로 처음 들른 저택에서 마음대로 행동할 수는 없는 법이다. 지나가는 하인이라도 하나 있으면 자신의 집에서 다른 예복을 가지고 오라고 할 참이었다.
그 때 한 하녀가 다가왔다. 마른 체격에 입고 있는 복장과 어울리지 않는 우아한 걸음걸이. 하녀는 비를 닦을 수건을 들고 브란틴을 올려보았다. 기다란 푸른색의 머릿결이 넘실거렸다.

“체스웍스 경. 갈아입으실 예복도 안쪽에 준비해두었습니다. 우선......”

비잔틴은 수건을 받아들어 비에 젖은 몸을 닦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분명 처음 만나는 사람이었다. 황태자의 궁에 있는 하녀를 그가 이전에 봤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총기 있는 초록색의 눈동자와 분위기는 최근까지 익숙했던 누군가와 닮은 느낌이 들었다.
‘웨스트사이드 기사단의 복무지역에는 남자들밖에 없는데?’
비잔틴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하녀를 따라갔다.
건물 벽 내부에는 여러 황태자들이 이룬 업적들이 밝은 색의 유화로 그려져 있었다. 병든 황제를 대신하여 법률을 제정하고 다른 귀족들을 억눌러 황국의 터전을 닦았던 황태자 에드워드, 마족에 의해 모든 성족의 나라들이 점령당하고 콘월만이 남게 되었을 때, 분연히 일어나 마족들을 격파하고 결국 마지막 말론 전투에서 목숨을 잃어 영원히 황태자로 남게 된 ‘미트라 신의 번개창’ 황태자 월리엄, 월리엄 생존 당시 태자는 아니었으나 윌리엄이 마음껏 싸울 수 있도록 내정과 외교을 담당하고 전쟁 후 각 나라의 국경선 및 세계 체제를 결정한 ‘이스트월 회의’의 주역으로 이름이 높은 황태자 폴 등 콘월의 역사에서 나타난 이름 높은 황태자들의 업적이 나무 벽 사이사이 그려져 있었다.
“그럼 이쪽으로.”
하녀는 말을 마치자 몸을 돌려 걸어갔다. 브란틴은 그 뒤를 따르며 고개를 기웃거렸다. 어린 시절부터 종자를 거쳐 기사로 임명되어 웨스트사이드 기사단에서 복무하기까지, 그의 일생을 되돌아봐도 저런 하녀는 만났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친숙했다. 그 기묘한 위화감을 가진 채 하녀는 작은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하녀가 안내한 방에는 다른 수건과 오늘 브란틴이 입을 예복, 그리고 입는 걸 도와줄 남자 하인까지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하녀는 기품 있게 브란틴에게 인사를 한 후 방을 나갔다. 브란틴은 하인의 도움을 받으며 예복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하인에게 방금 나간 하녀의 일을 물었다.

“그녀 말입니까? 에이린이라고 하녀입죠.”
“제가 여기 왔을 때 이미 이 저택에 있었습죠.”
“저요? 저는 이제 2년째 여기서 일하고 있습니다요.”
"어디서 왔는지는 잘 모르죠. 저희와는 잘 어울리지 않아서……."
“저, 그…그게…….”
“그…매일 전하의 침실에 들락거리는 음탕한 년이라.......”
“그럼요. 그 년 외에도 모니카와 세레나라는 년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하인의 마지막 말에 브란틴은 입을 다물었다.


예식은 응접실에서 약식으로 거행되기로 되어 있었다. 하인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응접실에는 집사가 혼자 서 있었다.
"당신이 체스웍스경이시군요. 저는 이 저택의 집사 말톤 아나키라고 합니다.”
"브란틴 서 체스웍스입니다. 노스우드 지방에 봉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제 처의 고향도 노스우드이지요."

둘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황태자를 기다렸다. 그러나 황태자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점심을 먹을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 동안 방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점점 초조해하던 집사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황태자를 찾으러 나갔다. 다시 돌아온 집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잠시 뒤에 오실 겁니다. 그런데 부친이 전임 R.R.K.기사단장이신 서 체스웍스 경이 맞으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얼마 전 황제 폐하의 64세 생일 축제에서 3관왕이 되신?"
"토너먼트 대진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위업을 거두신 무훈 높은 기사께서 이런 황태자에게 검을 바쳐 인생을 조지려 하십니까?"

브란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처음 그의 결심을 밝힌 이후 그를 말린 사람들 가운데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도대체 황태자는 어떤 기준으로 하인들을 뽑는 거지? 어찌됐든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해왔던 결심을 다시 한 번 말하려 할 때였다.
문이 덜컹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진한 술 냄새가 진하게 피어올랐다. 마치 술로 목욕이라도 한 사람이 온 것처럼 심한 냄새였다. 그것은 한 사내에게서 나오는 냄새였다. 그 사내는 한 하녀의 부축을 받으면서 응접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제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주정뱅이의 손은 쉴 새 없이 자신을 부축하는 하녀의 가슴과 하체를 더듬고 있었다.

"말톤! 말톤! 그래 네 말대로 응접실에 한 번 와줬으니 됐지! 꺽, 앞으로 또 잔소리를 하면 해고해 버릴 테다!"
"태자 전하, 이 분은."
"됐어! 어떤 새끼인지 알게 뭐야. 대충 둘러대고 쫓아내. 사람 귀찮게 하지 말란 말야!"
카널드는 말을 마치고 하녀를 바라보았다.
"세레나, 이제 됐으니 돌아가자고. 딸꾹, 에헤헤. 못 다한 것을 마저 해야겠지."

카널드의 어조는 저잣거리의 불량배처럼 격조가 없이 음흉할 뿐이었다. 저런 말투는 또 어디서 배웠는지, 브란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영애들에겐 실패만 하니까 저항도 할 수 없는 하녀나 집적되는 건가? 생각보다 저질이군.' 브란틴은 결심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어느새 카널드는 하녀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가려 하고 있었다. 브란틴은 당황한 집사를 버려두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황태자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하녀의 부축에서 풀린 황태자는 브란틴 쪽으로 넘어지려 했다. 브란틴은 황태자의 양 어깨를 잡고 카널드의 눈을 응시했다. 성족에게는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검은 눈, 그 눈과 마주쳤을 때 브란틴은 잠시 흠칫했다. 하지만 바로 정신을 차렸다.

"성스러운 약속을 수호하는 성 거버먼트와 용맹한 기사의 수호자 성 니콜라우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의 아버지 미트라 신의 이름을 걸고, 나 브란틴 서 체스웍스의 검은 앞으로 당신 카널드 반 이스트월의 것입니다. 죽음이 내 손에서 검을 벗길 때까지."

브란틴은 카널드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능(異能) ‘암월의 창’의 상징처럼 된 저주받은 검은 눈동자가 흐려진 빛으로 카널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탁한 눈이 잠시 브란틴을 바라보다가 미묘하게 실룩였다. 그 한 순간 카널드의 눈은 뭔가 재미있는 것을 보았다는 듯 반짝였다. 카널드는 호쾌하게 웃어 제쳤다.
"하하 하하하, 그래. 그 맹세 어디까지 지킬 수 있을지 지켜보지. 재미있어지겠군. 세레나, 가자."
카널드는 브란틴의 손을 떼어내고 비틀거렸다. 세레나라 불린 하녀가 다시 와서 카널드를 부축했다. 브란틴은 그런 카널드의 등 뒤를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움켜진 주먹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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