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교수님은 당황한 눈치로 고개를 돌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보다 창문 너머로 목을 길게 뺐다. 창문은 작은 편이라서 교수님이 앞에 서자 거의 가려졌다. 벽 너머에서 교수님의 ‘아!’하는 탄성이 들려왔다. 누가 있긴 있는 것 같은데, 교수님이 저렇게 가리고 있으니 누군지 알 수 없어 답답하다. ‘음, 음.’하며 누군가와 간단히 대화한 교수님은 창에서 목을 빼자마자 나를 붙잡고 구석으로 달려갔다. 뭐냐고 물을 겨를도 없이 회당의 벽이 퍽 하는 작은 소리를 내며 부서져내렸다. 흙먼지가 거의 나지 않아서 마치 케익을 칼로 자르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문 형태의 구멍이 생기고, 그곳으로 몇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선두에 선 건장한 남자는 내가 아는 인물이었다.

“게펜타이너 씨! 무사하셨군요!”

“종단 놈들이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무사하네.”

죽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단 소녀에게 뭔가를 당했던 것 치고는 상당히 건강한 얼굴이었다. 게펜타이너 씨는 굳은 표정으로 나와 악수한 뒤 교수님께 목례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브릭 교수님. 좀 더 일찍 구해드렸어야 했겠지만 저희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습니다.”

“아니, 아니요. 휴드에게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게펜타이너 님. 저희야 그저 감사할 뿐이지요. 그런데 밖의 감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잠시 재웠습니다. 의외로 경비가 허술하더군요.”

그들이 무작정 쳐들어온 것 같아 나는 아까까지 오데사의 귀가 이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자칫했으면 상아탑과 종단의 전면전이 될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들이 늦게 도착한 것이 오히려 행운이 되었다. 교수님이 악마를 소환한 죄로 자신과 그를 이단심문할 것 같다고 하자 마법사는 코웃음을 쳤다.

“그 소녀는 악마가 아닙니다. 꽤 특이한 점이 있긴 하지만, 기본체는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오천 년 전의 생활상을 입증해줄 수 있는 귀중한 실험소재이지요. 신이니 악마니 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종단 녀석들이야 자기들 편한 대로 해석한 것뿐이지요. 이제 와서 제가 종단에 가 항변한다 해도, 악마에게 씌웠다는 소리 이상을 듣지 못할 겁니다.”

게펜타이너 씨는 그렇게 말하고 느닷없이 자신과 같이 들어온 사람들을 가리켰다.

“이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브릭 교수님. 게일, 마커, 라드론입니다. 나와 같이 상아탑에 있는 마법사들입니다. 중력을 연구하는 친구들인데, 그 덕분에 각종 생물의 포박에 능합니다.”

머리가 벗겨진 사람이나 짧은 턱수염을 금색으로 염색한 사람은 보자마자 마법사란 걸 알 수 있었다. 딱 집어 말할 순 없지만, 분위기가 그렇단 얘기다. 하지만 수위 아저씨의 모습까지 보인 건 의외였다. 어딜 봐도 하숙집 옆방 아저씨처럼 평범하게 보이는데, 마법사라니. 상아탑의 수위는 과연 대단하다는 걸까.
그런데 왜 게펜타이너 씨는 굳이 일행을 데리고 왔는지 모르겠다. 애당초 그의 연구에는 동료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은 그에게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불이익을 감수하며 그를 따라나선 저들의 공통점은? 이익, 사정, 명령이라는 조건 중 하나겠지. 난 여러 갈래의 예측 중 가장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 보았다.

“모두 소녀와 접촉했던 인물인가요?”

“정답. 내가 제일 먼저, 그리고 저기 마커가 제일 나중에. 덕분에 상아탑에서 그 소녀를 확보하라는 임무를 받고 이렇게 왔지. 성공할 경우 꽤 짭짤한 보수를 받을 수도 있고 말이야.”

……셋 다 정답이란다.
수위아저씨, 즉 마커 씨는 이름을 불리자 손가락 하나를 들어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다른 손을 폈다. 그러자 밝은 빛이 천장에 비치며 소녀의 영상이 떠올랐다. 교수님의 설명과는 달리 아직 관 속에 누워있는 상태였다.

“게펜타이너가 실험실 안에 비치했던 수정구에 비쳤던 영상입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 했던 실험을 재검토하곤 하는데, 이번엔 그 덕분에 소녀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게펜타이너나 저희나 이상하게 그녀에게 당하고 나니 당할 때의 기억이 사라지더군요. 아마 종단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지 않았다면 상아탑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단순빈혈 사고로 판단하고 그녀의 존재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요. 그걸 막아준 이 영상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소리는 나오지 않지만 영상만으로도 이해가 되실 겁니다.”

배우고 싶은 마법이 하나 추가되는 순간이다. 교수님도 나와 마찬가지 생각인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킬 정도로 영상은 사실적이었다. 만약 저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야기꾼이 있다면 없는 돈을 쥐어짜서라도 찾아다니며 볼 텐데.
영상 안에서 게펜타이너 씨가 주문을 외우며 그녀의 몸에 있는 붕대의 매듭을 풀었다. 그 순간 붕대 위의 문자들이 검은 빛을 발산하며 제멋대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마법사는 놀라며 급히 다른 주문을 외우지만 검은 빛은 그 주문을 튕겨낸다. 뱀처럼 서서히, 은밀하게 소녀의 몸에서 벗겨지는 붕대가 왠지 에로틱하다. 소녀의 팔다리를 얽매던 붕대가 느슨해지자 소녀는 기지개를 펴듯 몸을 쭉 편다. 그러자 검은 기운이 한층 강해지며 소녀와 붕대 전체를 감싼다. 잠시 동안 소녀가 있던 자리를 어둠이 지배한다. 마법사가 성물의 무더기로 뛰어가 닥치는 대로 한 아름 안고 달려오는 사이, 어둠이 서서히 걷힌다. 붕대로 온몸이 얽매여 있었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붕대가 옷처럼 팔다리를 감싸고 있다. 자세히 보니 허리 아래로 늘어뜨려진 붕대가 스르륵 미끄러지며 치마처럼 둥글게 돌아갔다. 붕대만으로 저런 맵시를 연출하다니, 패션 센스가 뛰어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소녀는 천천히 관에서 일어난다. 그녀는 팔다리를 가볍게 움직여 보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마법사는 성물을 내밀지만 소녀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한 손을 내밀어 마법사의 가슴에 갖다댄다. 순간 마법사는 입을 벌리더니 그대로 고꾸라진다.
마커 씨가 손뼉을 한 번 치자 영상이 끝났다. 나와 교수님은 게펜타이너 씨를 바라보며 무언의 항의를 했다. 결국 그녀가 자유롭게 움직이게 된 것은 그가 독단으로 그녀의 봉인에 손댔기 때문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전혀 부끄러운 기색 없이 말했다.

“일단 밝혀둘 게 있군. 저 봉인을 푼 건 제가 맞습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봉인을 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런 난리가 난 것이잖소!”

교수님이 벌컥 화를 냈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그에 대한 반감이 폭발한 모양이었다. 게펜타이너 씨는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표시를 했다. 교수님은 그를 노려보며 이어지는 말을 경청했다.

“하지만 봉인을 푸는 건 기정사실이었습니다. 제겐 저 소녀를 깨운 데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언데드였다면 사흘 후 근원으로 돌아가 잠들겠지만, 소녀는 가사상태에서 깨어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평생 그 관에서 정체모를 붕대에 감싸인 채 살게 할 순 없었단 말입니다.”

“자네에겐 그게 우선이었나, 아니면 봉인에 쓰인 기술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게 우선이었나?”

게일 씨가 짧은 턱수염을 만지며 묻자 게펜타이너 씨는 그를 노려보다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래도 같은 마법사들이라 그의 행동 뒤에 있는 내막을 금방 알아챈 것 같았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게펜타이너 씨를 추궁하는 대신 엉뚱한 소리를 했다.

“하긴. 자네 심정 이해하네. 그런 귀중한 연구재료가 있으면 잠시 눈이 돌아갈 만도 하지.”

“상아탑에 있는 그 녀석이 한심하군. 이 소녀만 있으면 시간축을 늘였다 줄이는 기술을 대폭 보완할 수 있을 텐데.”

“그 쪽까지 생각할 것도 없이, 물체에 대한 영구보존주문이 실현될지도 모르지. 몇천 년을 뛰어넘을 수 있다니, 이거 나도 한 번 당해보고 싶어질 정도인걸? 오천 년 후의 세계는 얼마나 발달해 있을까?”

마법사들은 벙쪄 있는 우리를 놔두고 느닷없이 게펜타이너 씨가 부러워 죽겠다는 식의 전개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봉인마법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의 원형이라는 둥, 붕대의 샘플을 진작 채취해놓을걸 하는 푸념 등이 잇따랐다. 도저히 끼어들 수 없어 멍하니 듣고 있었지만 금방 인내의 한계가 왔다.

“그만! 지금 자기들끼리 무슨 얘기들 하시는 거에요? 소녀를 찾아서 보호한다더니, 소녀를 잡아서 해부라도 할 셈인가요?”

“보호야 하지. 해부는 그 아이를 연구하다 죽으면 그 때 가서.”

마커 씨가 무덤덤하게 얘기했다. 난 내가 잘못 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눈을 보자마자 그 이야기가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작자들에게 잠시나마 공감했다는 게 경멸스럽다. 이 현재밖에 모르는 빌어먹을 녀석들 같으니! 순간 머리가 아찔해지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어졌다. 하지만 기분과는 달리 몸은 앞으로 튕겨져 나가려 했다. 어느새 꽉 쥐어진 주먹을 의식할 순간도 없이 휘두르려는 순간 왼쪽 팔에 강한 압박이 들어왔다. 교수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팔에 파고들어 있었다. 너무 꽉 잡아 손등에 힘줄이 도드라질 정도였다.

“휴드.”

교수님은 속삭이듯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난 나를, 정확히는 교수님이 쥐고 있는 내 팔을 보았다. 교수님이 있는 힘껏 쥐었을 그 악력은 객관적으로 봐도 형편없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내 정신을 차리게 해 주었다.

“……이제 됐습니다. 정신이 돌아오네요.”

“그래. 갑자기 현기증이 났나 보구나.”

“네. 갑자기 말이죠.”

난 비틀거리며 교수님의 부축을 받아 의자에 앉았다. 정말 머리가 지끈거리고 열이 난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 신선한 바람을 쐬고 싶다. 난 뒤로 고개를 젖혀 좀 편한 자세를 취하며 교수님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야 할 테니 얘기를 간단하게 합시다. 내가 묻고 싶은 건 두 가지요. 그 소녀가 무슨 수법으로 당신들을 쓰러뜨린 건지,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건지.”

교수님은 내가 하지 못하는 일, 그러니까 단숨에 상황을 정리해버리는 질문을 했다. 그 말에 마법사들은 난상토론을 멈추고 쑥덕거렸다. 소녀에게 당했던 각자의 상황을 정리하는 모양이다. 쑥덕거림이 끝나자 게펜타이너 씨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녀가 무슨 수를 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단숨에 쓰러져 버렸으니까요. 손이 닿고, 그리고 정신차려보니 몇 시간 후. 일어났을 때 몸이 굉장히 개운했던 걸 보니 체력 흡수라든가 하는 주문은 아닐 것 같습니다. 아무튼 몇 차례 더 당해보든지 해야 알 수 있을 겁니다.”

“확실한 건 모르겠다는 말이군요. 좋습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려주시오.”

교수님은 썩 내켜하지 않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무엇을 시킬지 몰라서 그런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엇을 시킬지 예상되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게펜타이너 씨의 다음 말로 증명되었다.

“이미 알고 있으실 텐데요. 아니, 모르고 계신 사실도 있긴 하군요. 그 소녀는 상아탑의 최상층에 있는 천리안으로도 포착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그 붕대의 기운 때문인 것 같은데, 저희가 그렇다면 종단 쪽에서도 신성력으로 찾아내긴 어려울 겁니다. 신탁이 내렸다고 해도 그건 신탁일 뿐, 그들이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죠. 하지만 아직 남은 수단이 있지요.”

마법사와 교수님의 시선이 부딪쳤다. 둘 모두 서로의 시선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게펜타이너 씨의 얼굴은 평상시와 같았지만, 그의 눈빛은 상당히 강압적이었다. 우리가 너희를 구해줬으니 너희도 등가교환을 해야 할 것이다, 라는 마법사다운 논리였다. 어차피 이들이 없었다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을 테니, 지금은 이들의 기대에 따르는 것이 낫다. 난 생각을 굳히고 교수님 앞에 서서 눈싸움을 막았다. 둘은 제3자의 난입에 의해 결투를 중단당한 검사들처럼 뒤로 물러났다.

“휴드 군, 그럼 부탁하겠네. 자네와 자네 스승님의 지식이라면 그 소녀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네, 네. 저희도 그 편이 낫겠네요. 종단에서 얼씨구나 하고 소녀를 잡아 태워버리는 걸 보는 것보단 말이죠.
하지만 저흰 저희대로 행동하겠습니다. 같이 행동하는 건 사양이에요.”

“그래. 그럼 우리는 그때까지 따로 소녀를 찾아보겠네. 상아탑에는 당분간 돌아갈 수 없을 듯하니. 소녀를 발견하면 바로 연락주게. 나처럼 당하지 말고.”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할 문제입니다. 그런데 연락은 어떻게 하죠?”

“그 손수건을 잡고 우리에게 말하면 되네.”

뜬금없이 손수건? 이라 생각했던 난 순식간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장소를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조차 까먹게 되기 전에 난 교수님의 팔을 잡고 구멍으로 갔다. 영문을 모르는 교수님은 질질 끌리다시피 하며 나와 밖으로 나왔다. 얼른 회당을 벗어나려 했지만 마법사의 목소리가 마법보다 끈질기게 내게 들러붙었다.

“그거 한 번만 더 쓰면 원래대로 돌아가니 잘 사용하게!”

“휴드 군, 손수건이 뭐 어쨌다는 건가? 아니, 혹시 자네와 저 분이 손수건을 주고받을 정도로……”

“…………한 마디만 더 하시면 놔두고 갑니다.”

걸음을 재촉하며 난 존경하는 교수님께 상냥하게 말했다.


두툼한 손가락이 구렛나루를 신경질적으로 비비 꼬았다. 몇 가닥이 뽑혀나갈 정도로 험한 기세였다. 끄응 하는 중저음의 신음소리가 사무소 바닥에 안개처럼 깔렸다. 난 발을 한 차례 흔들어 자꾸 들러붙으려는 그 안개를 쫓아냈다.
랑테 씨는 다시 한 번 어울리지 않는 안경을 썼다가 벗고 머리를 흔들고 눈을 비비고 목을 좌우로 뚝뚝 꺾고 기지개를 펴고 눈을 비비고 코를 문지른 후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다시 보고 다시 봐도 믿을 수 없군! 종단에서 낼름 잡아가고, 거기서 아마도 탈출인지 뭔지를 해서 조만간 특1급 수배자 명단에 오를 자랑스러운 휴드 군이 이런 누추한 곳에 서식하는 랑테를 찾아오다니! 이건 그동안의 우정을 생각해서 내게 현상금을 양도해 주려는 호의일까, 아니면 나 여기 있으니 이 사람도 공범이라 생각하고 잡아가주세요 라는 무언의 적대감일까? 이 멍청한 랑테는 도무지 알 길이 없네!”

“개인적으론 두 번째였으면 하지만, 일단 죄송하군요. 하지만 이곳밖에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 신뢰라면 딱 거절하고 싶군. 이런 건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가 자신을 팔아치운 주인을 바라보는 그런 눈 같지 않나. 난 이 건에 대해 도울 수 없어. 아니, 애당초 시시한 잡일이나 취급하는 이런 사무소에 기대를 거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시시한 잡일 취급이 업무라면 시시한 정보 수집은 취미인가요? 나와 교수님이 아직 수배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잡혔던 걸 알 수 있다는 건 능력있는 취미라고 말해야 하나요?”

랑테 씨가 정보수집을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사무소란 게 원래 그런 거니까. 하지만 매사 철저한 랑테 씨의 성격으로 보면 정보수집이 부업이 아니라 제법 본격적일 것 같았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찾아왔는데, 의외로 먼저 꼬리를 드러내 버렸다. 아니, 이 사람은 내가 이것을 눈치챌 수 있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먼저 꼬리를 옷 밖으로 내민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꼬리밟기는 성공한 듯하다. 랑테 씨의 희극적인 웃음이 쑥 들어가고, 구렛나루에서 꿈틀대던 손이 무릎 위로 얌전히 올라갔으므로.

“그래. 알고 있지. 다 알고있고말고. 모르는 것 빼곤 다 알고 있어. 이곳에 온 게 머저리같은 짓이란 생각은 변함없지만, 내게 온 게 단순히 허우적대다 생각난 게 아니란 건 인정해주지.
하지만 거기까지야. 난 너를 도울 의무 따위는 없으니까.”

맞는 말이다. 랑테 씨가 남의 일에 발벗고 나설 성격이 아니란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에게서 원하는 걸 얻어내는 가장 손쉽고 빠른 수단은 돈일 것이다. 하지만 난 돈 대신 다른 걸 들고 왔다.

“의무관계가 아니에요. 정보교환입니다. 서로 원하는 질문을 하고 대답해주기.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패스. 랑테 씨도 불완전한 정보를 완전하게 할 찬스잖아요?”

랑테 씨는 입술을 핥으며 나를 노려보았다. 난 마주 노려보는 대신 씩 웃어보였다. 그러자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피식 웃었다. 잠시나마 쫓기는 신세가 아닌,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찾아와 한바탕 싸우고 합의를 보던 옛날로 돌아온 것 같은 아련한 감상에 빠졌다. 그러나 그런 데 쓸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많은 게 아니다. 난 자리에 앉은 채로 손에 깍지를 끼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랑테 씨는 손짓으로 내게 선공을 양보했다. 속으로 감사하며 가장 중요한 질문부터 시작했다.

“우리가 쫓는 소녀는 어디에 있지요? 새까만 붕대로 몸을 감싸고 겁 없이 돌아다니는 그 소녀.”

랑테 씨는 한 방 맞은 표정이 되었다.

“첫 질문부터 그런 거냐? 원래 이런 건 쓰잘데기없는 질문들을 하며 분위기를 띄운 후 마지막에 하는 거라구.”

“제가 시간이 좀 없어서요. 어딘지 아시나요?”

“일단 거주지라고 한다면 알 수 없어.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가장 최근 정보가 수도 북동쪽 변두리의 빈민촌에 이상한 여자가 나타나 사람들을 치유해 주었다는 거야.”

“엣? 치유라구요? 제가 본 건……”

“그건 다음 질문으로 저장해두지. 일단 내 차례. 너와 브릭 교수, 그리고 너희를 구한 마법사들이 거처하는 곳은? 종단과 상아탑 양쪽에서 찾는데 아직도 못 찾았다는 게 신기하군.”

과연, 중요하지 않은 것부터 시작이란 걸까. 다짜고짜 소녀의 정체 등을 물을 줄 알았던 난 긴장을 풀며 말했다.

“수도 동쪽 파피농이란 여관에 있어요. 거기 방에 삼중으로 결계를 쳐서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고 있지요. 브릭 교수님은 거기서 소녀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고, 마법사들은 알아서 잘 숨고 있어요.”

“좋아. 그 소녀를 잡기 위해 종단과 상아탑이 나서고 있는데도 잡지 못하는 건, 현재 그 소녀가 빈민들 사이에서 ‘검은 성녀’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야. 그녀는 빈민촌을 중심으로 돌아다니고 있는데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빈민들을 만지고 다닌다는군. 그녀의 손이 닿은 사람은 몇 시간에서 며칠 정도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일어나는데, 그때 그동안 가지고 있던 병 같은 게 사라지고 몸이 가벼워진다고 해. 신기한 것은 막상 그녀에게 치유받은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기억하지 못하고, 먼 발치서 그녀를 본 사람들이 대신 증언을 한다는 거야. 하지만 종단 등에서 조사를 하려 해도 그녀에게 치유받은 빈민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고 해. 그녀를 도우려는 건지, 아니면 척 봐도 심상치 않게 보이는 소녀에게 도움받았다는 게 알려졌다가 종단에 험한 꼴을 당할 게 두려워서인지.”

난 날짜를 생각해 보았다. 내가 석관 배달 아르바이트를 맡은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오늘은 사흘째. 그녀는 깨어난 날부터 쉬지 않고 걸어다니면서 사람들을 ‘치유’했다는 말이다. 손을 대서 사람을 쓰러뜨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치유하는 게 목적이었단 말이지? 일어나는 데 개인차가 있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막연히 건강상태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까지 나서는 이유가 짐작되지 않는다. 이건 만나서 물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겠지. 그나저나 검은 성녀라니, 간결하면서도 센스 있는 별명이다.
랑테 씨는 그렇게 정보를 분석하는 날 보며 혀를 찼다.

“쯧. 그 소녀의 치유능력에 관해 아는 게 있나 묻고 싶었다만, 너도 몰랐던 이야기였던 것 같군. 그럼 다른 질문을 하지. 종단은 소녀를 통구이로 만들 생각인 것 같고, 상아탑에선 포르말린에 담글 생각인 것 같은데, 너희는 그 소녀를 잡아서 어떻게 할 거지?”

“잡다니요. 그녀는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그녀를 만나 그것을 재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건 교수님도 마찬가지구요. 우리의 연구도 중요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일. 그녀를 사람으로 대우하기 위한 자료를 얻어 종단과 상아탑에 항변하고, 그러면서 그녀를 이곳에서 새롭게 살아가게 하는 게 우리의 목적입니다.”

이 건에 대해 교수님과 난 의견이 일치했다. 마법사 일당에게 있어 그녀의 삶이 부수적이란 것을 알고, 우리끼리라도 절대로 잘못된 명제를 바꾸자고 했다. 그녀를 연구자료가 아닌 사람으로 여겨 존중해야 한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었다.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그녀를 감싸고 있는 검은 기운이었다. 그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종단과 상아탑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어둠의 속성을 띤 기운일 것이다. 빈민들을 치유해 주는 그녀가 어째서 그런 기운을 띠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무조건 그녀를 악마로 몰아붙이는 것보다, 그녀가 그 이유를 알고 있다면 말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봉인된 이유를 물어봤더라면 이 문제의 답을 알지도 몰랐는데, 나나 게펜타이너 씨나 그녀의 존재 자체에 너무 정신이 팔려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는 문제를 물어보지 않은 것이다.

“그럼 제 마지막 질문. 그 동안의 소녀의 이동경로를 지도에 표시해줄 수 있나요? 동선을 파악해서 다음에 나타날 자리에 미리 대기하고 싶어요.”

“그거야 쉽지.”

랑테 씨는 벽에 걸린 지도를 떼어 연필로 줄을 죽죽 그은 후 돌려주었다. 대충 긋는 것 같았는데 지도의 선은 꽤 세심하게 이어져 있었다. 동그라미들이 쳐진 부분에 마을이 있는 걸 보면 그곳들이 그녀가 머문 자리인 듯했다. 이런 쪽에 전문가인 교수님과 함께 분석해 보면 곧 그녀의 이동경로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지도를 잘 접어 주머니에 넣은 후 짐짓 여유를 보였다.

“마지막이네요. 질문하시죠.”

“그래. 이번엔 내 개인적인 질문을 하지. 넌 왜 이 일에 끼어든 거지?”

“예? 그야 어쩌다 보니 교수님과 함께……”

“휴드. 난 그런 답변을 싫어해. 어쩌다 보니 그랬다? 종단에 수배될 위험에다, 재수없으면 악마소환의 한 패로까지 몰릴 처지가 됐는데? 아무리 생각이 없는 놈이라도 그 지경이 되면 자수하든지 한 패를 팔고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할 거야. 그런데 넌 오히려 앞장서서 이 일을 하려 하고 있어. 난 네가 영웅심리에 휘말릴 녀석이 아니란 걸 알고 있어. 분명 이유가 있는 거겠지.”

“패스.”

“시끄러.”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라 얼버무리려 했지만 그의 통찰력을 피할 수 없었다. 아니, 꼭 그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겐 내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나와 교수님이 그렇게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건 아니었고, 하물며 마법사 씨와는 하루 동안 작업을 함께 한 사이일 뿐이다. 내려가는 건 생각하지 않고 오직 정상만 향해 가는 등산가처럼, 난 파멸을 향한 길을 걷고 있다. 랑테 씨의 말을 들으니 새삼 실감이 난다. 난 할 수 없이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 왜 기억나지 않지……?”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그 기억이 사라져 있었다. 난 완전히 평정을 잃고 머리를 감싸쥔 채 내가 잃은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반복해서 되감아 봐도 내 기억의 단편은 곳곳이 누락된 채 이빨 빠진 책장처럼 초라하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난 기억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기억을 포기하는 순간, 난 내가 아니게 되므로.
그런 막연함과 안타까움으로 몸부림치다 문득 랑테 씨를 보았다.

“이야. 항상 깐죽거리기만 하던 꼬마가 이런 표정을 지을 줄이야.”

“랑테 씨, 지금은……”

“됐어. 어차피 내 개인적 관심사였으니, 특별히 나중에 듣는 걸로 넘어가기로 하지. 그러니 남까지 골 아프게 만드는 그런 표정은 좀 짓지 마.”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난 그럴 기운도 없을 만큼 지쳐 버렸다. 그 짧은 순간에 이렇게 지칠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 내겐 이 문제가 그만큼 절실했다. 한참 전부터 내 앞에 놓여 있던 찻잔을 들어 단숨에 마시며, 조만간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아무리 절실하더라도, 지금은 최우선순위가 될 수는 없다. 교수님께 돌아간 후 소녀를 찾아 떠나야 한다. 난 몸을 쭉 뻗어 기지개를 편 후 일어났다. 그때 랑테 씨가 날 붙잡았다.

“아, 잠깐.”

엉거주춤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있는 나를 붙잡은 랑테 씨는 징그럽게 착 달라붙더니 구렛나루를 내 귓불에 문지르며 낮게 말했다.

“지금부터 30분 후에 종단에서 한 장소를 집중적으로 수색할 거야. 그렇게 되면 상대적으로 경계에 구멍이 생길 테니 탈출할 수 있을 테니, 잘해봐. 그 붕대소녀가 이동한 경로를 따라가는 게 편할 거야.”

자기 사무소에서조차 큰 소리로 말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정보였다. 국가와 달리 종단의 경계는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어디서 날 보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움직임을 파악하기 힘든 집단의 행동을 그대로 읽고 있다는 건 랑테 씨가 그만큼 유능하다는 증거겠지. 난 잠시 이성을 잃고 랑테 씨에게 뽀뽀라도 해 줄까 생각했지만 랑테 씨는 다행히 날 문밖으로 내쫓았다. 그는 현관에서 문을 닫으며 말했다.

“감사는 됐어. 난 네게 대가를 받고 하는 일이니까.”

“뭐라구요?”

“지금 나같은 사람들에게까지 종단의 의뢰가 와서 말이야…… 실적을 좀 올릴 수밖에.”

그런 묘한 말을 하며 눈을 찡긋 한 그는 후다닥 문을 닫고 빗장까지 쳤다. 사람을 코앞에 두고 문을 걸어잠그다니, 참 예의하고는. 별 생각 없이 은신처에 돌아가려던 난 두어 발짝 걷다 그 자리에 멈췄다. 머리가 띵 울리면서 그의 말이 순식간에 이해되었다.

“이……이 악당 같으니!”

난 뒤돌아서자마자 점프해 있는 힘껏 문에 날아차기를 먹였다. 하지만 빗장까지 질러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픈 발을 부여잡고 깨금발로 뛰고 있으려니 안에서 랑테 씨의 태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까지 가려면 시간 좀 걸릴 텐데, 얼른 가지? 30분이면 긴 시간이 아니라구.”

“제엔자아아앙!”

왜 이 사람을 만나면 늘 이 모양일까. 다음 아르바이트는 결코 이곳에서 맡지 않으리라 내 자신에게 맹세하며 난 부리나케 은신처로 뛰어갔다.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기 위해 난 도착할 때까지 빌고 또 빌었다. 종단에 우리를 고발하기 위해 곧 이곳을 나설 그의 족적 하나하나에 무좀과 돌부리와 발가락 골절과 발목 복합골절이 함께 하기를!


행여 먼젓번처럼 오데사의 눈이란 자가 우릴 탐지해낼까 두려워 헐레벌떡 도망친 교수님과 나는 - 그 와중에도 교수님은 지도를 분석해 우리의 목적지를 집어냈다 - 소녀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에서 한나절 정도 떨어진 마을에 도착했다. 하루 정도 걸렸지만 이번엔 다행히 종단에 노출되지 않았다. 마법사들이 마차에 은신과 관련된 마법을 걸어주기도 했고,  우리도 이번엔 제 속도를 내며 평범하게 달려갔다.
수도의 외곽은 개발이 되지 않아 빈민들이 판잣집을 지어 사는 곳이 많았다. 그리고 그녀는 신기할 정도로 그런 곳만 골라 다니고 있었다. 한 번 그녀가 지나간 마을은 일치단결하여 그녀를 모른 척 함으로써 종단과 상아탑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우린 아예 묻는 것을 처음부터 포기하고 앞질러 온 것이다. 물론 마법사들을 불러 결계를 새로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와 했던 약속을 충실히 지켜,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결계만 친 채 사라졌다.
원래 여관에 방을 잡으려 했지만 이곳에는 여관이 없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여관을 이용할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라 그렇다고 한다. 그래도 예의상 마을 하나에 한 군데 정돈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래서 우린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인심 좋은 과부 아줌마가 집의 빈 방에 하숙을 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곳에 우리의 짐을 다 풀고, 마법사들을 불러 결계를 치고 나니 이젠 기다림이라는 지루한 선택만 남았다.
몇천 년 전의 생물들의 움직임을 파악해내는 능력을 가진 교수님이었고, 그녀는 몇천 년 전의 생물이다. 난 그녀가 이곳에 올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확신과는 별도로 불안감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교수님. 어쩌면……이 아니라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하는데, 종단이나 상아탑이나 우리를 이용하려고 하고 있는 게 맞겠죠?”

그동안 서로 의식적으로 피하던 질문이었다.
교수님은 며칠 새 부쩍 늘은 흰머리를 쓸어넘기며 씹어뱉듯 말했다.

“상아탑은 말할 필요도 없고, 종단도 어쩌면 우릴 포착했으면서도 놔두고 있는지도 모르지. 난 종단의 최고위 사도인 오데사의 눈이 마법사 몇 명의 결계 정도도 못 볼 거라고 생각하진 않네. 그 소녀를 포착하지 못한다는 건 사실일 테지만 말일세.”

“그렇다면, 역시 그 소녀를 우리가 발견하는 대로 종단과 상아탑이 밀어닥치겠죠?”

“그래. 그들이 서로 다투는 중에 우리가 빠져나갈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좋겠지만, 그건 기대하기 힘들 것 같군.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거라면, 그 소녀를 빼앗기기 전에 최대한 많은 자료를 확보하는 것이라네. 혹 결정적인 증거, 즉 그녀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그들을 막을 방법이 조금은 생길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우린 그 소녀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군요.”

“맞아. 그 사실에 긍지를 가지게.”

교수님이 부드럽게 웃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는 옆에 있는 사람까지 덩달아 웃게 만드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난 잠시 피로와 불안을 잊고 기분좋게 미소지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란 질문은 역시 하지 못했다.

“식사 가져왔어요.”

“예. 문 열겠습니다.”

아줌마가 식사를 가져왔다. 난 문을 열고 인사한 뒤 식사를 가져왔다. 창문을 열어 환기시키며 맛없는 식사를 깨작거렸다. 차라리 내가 만드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음식은 형편없었지만 불평할 순 없었다. 나가서 사 먹을 수도 없고,

“이건 정말 기록하고 싶을 만큼 형편없군! 내기해도 좋아. 난 요리사가 아니지만, 이것보다 스무 배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어.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생긴다면 절대로 주인의 음식을 먼저 맛본 후 결정하겠어. 오천 년 전에도 이것보단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었을 거야.”

“……교수님, 불평은 그만.”

의외로 미식가인 교수님이 내 몫까지 투정하고 있었으니까.
우리는 결계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안에만 죽치고 있다. 어차피 그녀가 나타나면 마을 전체가 난리법석일 테니 여기서도 충분히 알아챌 수 있을 거라는 게 이유였다. 마법사 본인이라면 스스로에게 은신 등의 마법을 걸고 돌아다니겠지만 - 지금도 그들은 종단의 눈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마법을 걸고 있다고 한다 - 우리에겐 그럴 수 없다고 한다. 여전히 결계의 효용성이 의심되긴 하지만, 안 하는 것보다 낫다는 건 확실하므로 우린 얌전히 안에 있다. 혹시라도 괜히 밖에 나갔다가 결계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마법사들을 다시 불러야 할 텐데, 그건 사양하고 싶다. 다 큰 남자가 손수건을 팔랑팔랑 휘두르며 마법사의 이름을 소리높여 부르는 모습을 다시 보이고 싶진 않다. 나중에 아줌마가 게펜타이너란 사람이 연인의 이름이냐고 물었을 때는 폭소하는 교수님의 입을 막으며 그대로 목을 꺾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해 볼 정도였다.
아줌마와의 몇 마디 대화로 이곳 사람들이 ‘검은 성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만약 그녀가 지나간 뒤라면 알 수 없겠지만, 그녀가 나타난다면 그 순간의 반응은 엄청날 것이다. 그 때 끼어들었다간 몰매맞기 딱 좋다. 따라서 우린 그녀의 출현과 동시에 아줌마를 통해 그녀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캐고, 그녀가 떠날 때를 예측해 함께 동행하며 대화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교수님은 국제 학술 회의 같은 걸 개최해 그녀를 공개함으로써 일단 그녀에게 접하려는 상아탑과 종단을 배제하고 싶어하지만, 그건 시간이 걸리는 방법이다. 더 좋은, 더 빠른 방법을 위해 우린 골머리를 싸맸다. 그리고, 어느 것 하나도 최후까지 실행하지 못했다.


교수님의 코 고는 소리에 잠이 깼다.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피로가 쌓여있는 내 몸은 사소한 자극에도 금방 반응했다. 방구석에 있던 미지근한 물을 마시자 시원한 물 생각이 간절하다. 창문을 열어 시원한 물 대신 공기를 마셨다. 심호흡을 두세 번 하자 모기가 슬슬 들어오려 한다. 손을 휘둘러 쫓아버리다 창문 모서리에 팔꿈치를 찧었다. 얼음의 정령이 내 등뼈를 미끄럼틀 삼아 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명은 그보다 약간 늦게 나왔다. 난 급히 입을 다물고 어느새 맺힌 눈물을 닦았다. 손가락에 맺힌 눈물이 달빛을 받아 파르스름하게 비쳤다.
울고 싶다.
찔끔 나왔던 눈물이 갑자기 줄줄 흘러나왔다. 팔꿈치의 아픔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지만 가슴 아래에 뭔가 들어찬 것처럼 묵직한 아픔이 느껴진다. 조용히 흐느끼면서 내가 왜 지금 울어야 하는지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그렇지만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란 존재가, 지금껏 잘난 척하며 살아왔던 나라는 인간이 고작 자신의 기억조차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존재였던가?
미치도록 소리지르고 싶다.
몸부림치며 뒹굴고 싶다.
누군가를 부여잡고 통곡하고 싶다.
수많은 감정들이 내 안에서 폭발하고 점멸해 간다. 가슴의 압박이 한층 더해져 한 손으로 가슴을 눌러야 했다. 가쁜 숨을 쉬며 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더 이상 방 안에 있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너무 헝클어져 온통 새까매진 것 같았다. 내 안에서 점점 커져 가는 괴물이 이제는 날 이끌고 있었다. 내가 어디로 향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건 내가 아니라 괴물이었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난 생각을 그만두고 몸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달이 비추는 길가에는 개 몇 마리만 외롭게 짖고 있었다. 그들이 짖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뾰족한 돌멩이라도 밟았는지 따끔한 통증이 전해졌다. 그러나 괴물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개들이 나를 향해 몇 차례 짖다가 꼬리를 말고 돌아섰다.
길에는 아무도 없었고, 내 안의 괴물은 나를 부숴버릴 만큼 비대해졌다. 여기서 괴물을 토해내면 어떻게 될까? 부의 감정의 덩어리일 뿐이란 걸 알면서도, 왠지 내게는 이 괴물이 실체를 가지고 당장에라도 이 초라한 마을을 부숴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마을까진 부수지 않아도 좋으니, 녀석이 나가고 난 뒤에 남은 나라는 빈껍질을 산산조각내 주었으면 좋겠다.
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들이킨 숨을 헛삼켰다.

“오랜만이네.”
  
“오랜만입니다, 휴드 님.”

달빛 아래에서 아름다운 칠흑의 드레스를 걸친 그녀가 내게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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