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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사의 정체
“크크크크큭.”
실성한 듯 웃음소리가 나네의 귓전을 때렸다. 나네는 충혈된 눈으로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이천사가 주저앉아 고개를 떨군 채 웃고 있었다.
“큭큭큭 다된 밥이었는데 말이야. 막판에 재를 뿌렸어. 너희들의 승리야. 전리품을 가져.”
이천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웃었다. 이천사가 막다를 주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자 이제 날 죽여. 천사인 날 죽이면 모든 게 끝나.”
막다는 대답이 없었다. 이천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서 날 죽이라고 날 죽이지 않으면 지금까지 죽어간 수백억의 망자들이 현실세계로 나간다. 누가 그들을 막지?”
이천사가 나네에게 시선을 던지며 말을 이었다.  
“이제 껍데기만 남은 저 녀석이? 아니면 잘난 네 그 사랑의 힘으로? 큭큭큭큭. 어서 날 죽이란 말야. 내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끝나. 아무 것도 없었다는 듯이….”
이천사가 회한에 잠긴 듯 체념한 얼굴로 아득히 웃었다. 막다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왜 널 죽여야 하지?”
“그럼 날 살리기라도 할 생각이야?”
이천사가 웃었다.
“구할 생각도 없지만 죽일 생각도 없어.”
막다의 말에 힘겹게 웃던 이천사가 고함을 쳤다.
“하하…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날 죽이고 싶지 않아? 사랑하는 이를 자기 손으로 죽게 만들고 인류를 멸망시키려한 내가 죽이고 싶지 않아? 어서 날 죽이라고!”
막다가 돌아서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렇지 않아.”
“뭐라고? 농담하지 마. 또 날 어떻게 속이려는 거야?”
잠시 침묵하던 막다가 이야기했다.
“감사해.”
이천사는 잠시 아무 말도 못했다.
“감사하다고? 내가? 뭐가 감사하다는 거야. 거짓말마! 하하 인간들의 속임수에 넘어갈 줄 알고? 난 다시 속지 않아 큭큭큭.”
막다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렇게라도 그를 만나게 해줘서, 고마워.”
막다의 눈에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천사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 하지 말란 말이야!”
비릿하게 조소하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어떻게 세상을 멸망시키려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는데 기쁠 수가 있지? 거짓말하지 마. 이 세상에는 거짓말 밖에 없어. 거짓말밖에 없단 말이야. 날 사랑하다고. 날 임심해서 기쁘다고. 행복하다고 거짓말을 하곤 날 죽였지. 그렇게 행복한 목소리로 날 죽였어. 차디 찬 메스로 날 갈기갈기 찢어서 죽였어. 거짓말을 했다고! 이제 와서 그런 소리 지껄이지 마!”
이천사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난 죽었다.
나는 이름이 없는 존재. 그저 낙태아로 불릴 뿐이다.
세상은 말한다. 나에게 필요한 건 분노가 아니라. 치유라고
그런데, 진지하게 고민해 본 건데
치유가 필요하다는 건 무언가 잘못 되어 있다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태어나기도 전에 죽여 버린 거야?  
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잘못할 겨를도 없었는데 이렇게 죽여 버리는 건
분명 세상이 잘못한 거 맞지?

그게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아, 알았다!
내가 죽은 이유는,
내가 약하기 때문이야.

“너희들이 고통을 알아? 그 연약한 몸뚱어리를 가지고 자궁 속으로 들어오는 메스를 피해 도망치는 그 아픔을 너희들이 알아? 갈가리 찢겨지는 고통을, 한줌 살덩어리가 되어서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아픔을 아냐고, 햇살 한 줌 받아보지 못하고 영원한 어둠을 떠도는 고통을 네깟 것들이 아냐고!”
이천사가 숨을 고르며 웃었다.  
“지금 너희들이 얼마나 우스워 보이는지 알아? 그깟 사랑 때문에 징징 짜는 너희들이 얼마나 고까운지 아냐고. 단지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살 떨리게 기쁠 수 있다는 사실을 너희들이 아냐고!”

이름 없는 영혼은 어둠을 떠돌았다.
시간도 빛도 감각도 없이
오직 자신의 희미한 의식만이 존재하는 차디찬 어둠을 떠돌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어둠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포를 먼저 배운 영혼이 어둠에게 물었다.
“사랑이 뭐야?”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너희들은 좋겠다.”
이천사가 교복 옷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평범해서.”

막다가 무겁게 읊조렸다.
“낙태….”
막다의 말에 이천사가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낙태…그래. 너희들의 이기심으로 일 년에도 수만 명이 더 넘게 햇빛을 못 보며 앗아져가는 그 흔한 주검 중에 하나였어. 망자를 이끄는 천사는 가장 강한 자가 되는 것이 아니야. 몸이 아니라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로 정해졌지. 마음이 얼마나 강한 가…곧 얼마나 원한이 크냐가 바로 망자의 천사가 된 이유야. 원한이 얼마나 큰 가…얼마나 불쌍하게 죽었냐는 얘기지…. 저 수억의 망자들에게 동의 아닌 동의, 연민 아닌 연민을 통해서 천사가 될 수 있었지. 큭큭큭.”
이천사가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도다!”
이천사가 입가에 웃음기를 만들며 말을 더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지? 하나님이 호세아서에 말씀하셨지. 무슨 뜻인지 알겠어? 내가 존재한 것이 죄가 된 것처럼, 모르는 것도 죄가 된다는 것이야. 기쁨이 기쁨인 줄 모르고 죄가 죄인지 모르는 너희들을 내가 하나님을 대신해 벌하겠어!”
이천사의 선언에 꿈에 접속 중이 세상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동요했다. 막다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교문 쪽으로 등을 돌렸다.
“진짜 세상을 멸망시키겠단 말이야!”
이천사가 막다의 등을 향해 뱃속 깊은 곳에서 목소리를 뽑아내며 외쳤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그렇게 주저리주저리 내뱉지 말고 맘대로해.”
막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얘기하며 교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어서 날 죽여…!”
이천사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오열했다. 막다가 걸음을 멈췄다.
“네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멸망할 거 아닌가? 네가 아니더라도.”
막다가 공허하게 말했다. 이천사가 고개를 들었다. 막다가 말을 이었다.
“네가 죽는다 해도, 삼천사, 사천사, 오천사, 육천사, 칠천사는 내려오지 않을 건가? 또 꿈으로 올 거란 보장도 없지. 너를 죽여 오늘은 이렇게 넘어간다고 해도 내일의 멸망은 어떻게 막지?”
막다가 이천사에게 생각해보라는 듯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네가 우리를 죽이든 세상을 멸망시키든 그건 네 의지가 아니야.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 누구도 이 멸망을 막을 수 없다는 거야.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막다의 결연한 말에 이천사가 의아한 눈으로 막다를 주시했다. 막다가 말을 이었다.
“네가 무엇을 결정하던 그건 네 생각이 아니야. 하나님의 의지지.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이 있는 것은 분명해. 널 막을 순 있겠지만 하나님은 막을 수 없어. 하찮은 하나의 인간이 창조주이자 유일하신 하나님을 막을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
막다가 차갑게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서 널 죽이건 말건 내 스스로 택하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하심 그대로지. 내가 무슨 선택을 하든, 그건 하나님의 의지겠지. 하나님이 멸망을 택하신 이상 내가 무엇을 결정하든 그것은 멸망을 향해 나가는 발걸음 중의 하나겠지. 우리가 이렇게 같이 서 있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이자 멸망의 한 축이겠지. 내 사랑도, 네 부모가 널 버린 것도….”
이천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홀로 중얼거렸다.
“내가 바보 같아서….”
막다가 이천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혼자 탓하지 마.”
막다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세상에 네 탓인 것은 아무것도 없어. 탓해야 한다면 어둠 속에 널 만들어 놓고 책임지지 않은 사람들을 탓해야 하지 않을까?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악마를 만들어 놓고 악마가 한 행위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이천사가 멍한 눈으로 막다를 쳐다봤다.
“그렇다고 네가 악마라는 건 아냐.”
막다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는 뭐지?
이천사의 진지한 물음에 막다가 대답했다.
“네가 누군지 왜 나에게 묻지?…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 이 세상의 기준에 널 맞추지 마. 이 세상은 거짓인지도 몰라. 1명이 미치면 미쳤다고 하지만 1,000명이 미치면 종교라고 하는 것처럼 네가 거짓이 아니라 이 세상이 거짓일 수도 있어. 1,000명이 미쳤고 너 혼자 제정신이라면 그들은 널 미쳤다고 할 테니까. 우리는 지금, 힘이 있으면 미친 자 들도 정상으로 불리고 이긴 자가 역사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어. 정상은 올바름의 다른 말이 아니라 다수와 동의어지. 지금의 너는 네가 아냐, 앞으로의 네가 진정한 너야. 누구에게 물어보는 게 아냐 네 스스로 만드는 것 그것이 진정 네 이름이지 않겠어?”
막다의 물음에 이천사는 대답이 없었다. 막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뭐 별거 없지만 말이야.”
막다가 이천사에게 다가가 허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내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라면 하나님의 의지 또한 내 의지의 일부가 아닐까? 일부가 모이고 모이면 전체가 되겠지?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의지 아닐까? 그건 곧 우리들의 의지가 곧 하나님의 의지란 말이 아닐까? 우리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지만 하나님의 생각 또한 우리 생각이지 않을까? 누구를 탓해야 할까?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어. 하나님도, 나도 그리고 너도…그러니 웃어.”
막다의 자신에 찬 환한 웃음에 이천사는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이천사는 막다의 웃음을 제대로 대할 수 없었다. 급히 웃음을 거두며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사랑…? 대천사도 당하지 못한 영웅까지 떡 주무르듯 하는 당신의 능력을 내가 어떻게 당하겠어….”
“그렇지?”
막다가 싱그럽게 웃고는 허리를 펴서 일어났다.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면, 혹시라도 날 보고 싶으면 지옥으로 놀러와. 난 그쪽으로 갈 거 같거든. 내 이름은 거기 있다고 연락을 받았거든 뭐 네가 온다면 지옥도 그리 나쁘지 만은 않을 거야.”
막다가 말을 맺으며 교문을 향했다.
“안녕.”
막다의 등 뒤로 이천사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막다는 이천사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만남도 이별도 아닌 중의적인 느낌에 저도 모르게 뒤돌아 봤다. 고개 숙인 이천사의 손에 총이 들려 있었다. 이천사의 총구가 막다를 겨냥하다 천천히 이천사의 심장를 향하고 있었다. 막다가 급하게 달려들었지만 이천사를 저지하기엔 늦었다.
탕!
나네의 손에 이천사의 손에 들렸던 총구가 심장을 비껴나 가슴에 박혔다. 연약한 몸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막다가 쓰러지는 이천사를 급하게 안았다. 막다가 급하게 곁으로 다가왔다.
“뭐하는 짓이야!”
“먼저 가서 기다리려고.”
이천사의 말에 막다가 재밌다는 듯 이마를 찡그리며 웃다가 혼잣말을 했다.
“누구랑 닮아서.”
막다의 웃음에 이천사가 막다를 바라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쿨럭쿨럭 이천사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총에 맞은 상처는 순식간에 피를 뿜어냈다. 왕의 비보가 전해진 듯 순식간에 망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왜 그런 거야….”
막다의 물음에 이천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나 하나만 사라지면 아무도 싸우지 않아도 되니까.”
이야기하는 이천사의 웃음이 가빠왔다. 막다가 편하게 웃음 지으며 말을 건넸다.
“이제야 알겠다. 네가 망자들의 왕이 된 이유. 네가 원한이 가장 커서가 아니야. 네가 가장 사랑이 크기 때문이야. 더 크게 버림받았기에 더 아끼고 사랑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 빌어먹을 하나님이 말이야….”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이천사의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처음이야. 누군가한테 안겨본 게. 참 포근하다.”
이천사의 힘 빠진 말에 막다가 이천사를 더 꼬옥 안았다. 이천사가 희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엄마에게 안기면 꼭 이런 기분이겠지?”
막다가 웃으며 이야기했다.
“내게 딸이 생긴다면 꼭 너 같을 거야.”
만족한 듯 웃던 이천사가 곁에 선 나네를 향해 말했다.
“이 너저분하게 생긴 아저씨는 아빠고…이런 게 가족이란 건가.”
이천사의 눈이 흐려졌다. 나네에게 말했다.
“아저씨, 마지막으로 가르쳐 주지 않겠어? 아저씨의 능력….”
대답 없는 나네를 향해 이천사가 푸념처럼 늘어놓았다.
나네가 낮게 이야기했다.
“소설이라고 했잖아.”
이천사가 입가에 작은 웃음이 맺혔다.
“그래…아저씨가 말한 것처럼 이 모든 게 한 편의 소설이었으면 좋겠어.”
자꾸만 눈이 감겨왔다. 그렇게 이천사는 사람들 틈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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