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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슬픈 해피엔딩 : 격돌

2009.08.03 03:0508.03

■격돌
나네는 쓰러진 막다를 응급실로 옮기고 간호를 했다. 막다가 안정을 찾자 수면제를 들었다. 히틀러가 심판을 예고한 10시를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히틀러가 말한 꿈속의 그 많은 망자를 막아내고 싶었다. 루시드 드리머. 자신의 능력으로. 형을 위해 그녀를 위해.
꿈속이었다. 나네가 잠에서 깨듯 천천히 눈을 떴다. 서울 시내. 고등학교 운동장. 넓은 운동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네가 눈을 뜬 곳은 교정으로 들어서는 학교입구였다.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두부처럼 허리가 깨끗하게 잘려진 고층 아파트였다. 아파트의 머리가 학교 옥상 위로 떨어져 화마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처절한 싸움을 증거라도 하듯 이곳저곳 불타고 무너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둘 상처투성이였다.
“오랜만이지예.”
기척도 없이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나네는 놀라 뒤돌아봤다. 배불뚝이 중년 남자가 어느새 나네 옆으로 다가와 있었다. 웃는 인상이었지만 어두운 안색의 중년 남자. 눈에 익은 얼굴이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놀라셨습니꺼. 죄송합니더.”
중년남자의 미안한 표정에 나네가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저 기억하십니꺼? 혜미 아빱니더. 형님하고 있을때 몇 번 뵜었지예. 한창 루시드 드림에 대해서 몰두했었지 않습니꺼.”
“철호 아저씨!”
나네는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활달한 성격으로 형과 몇 번 만난 기억이 났다. 부인과 함께 조기유학 보낸 어린 딸 하나만 보고 사는 기러기 아빠였다. 참으로 남자답고 호탕한 성격의 사내였다. 나네는 그때의 그 생기로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어울리지 않는 침울한 모습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한 것이다.
“기억하다마다요. 덕분에 술도 많이 늘었지 않습니까. 꽤 된 것 같은데 혜미는 유학생활 잘 하고 있습니까?”
밝게 말하는 나네를 대하는 기러기 아빠의 얼굴이 그림자 졌다.
“지난달에 죽었습니더. 구누님 덕분에 유학도 갔더니 지 어미랑 같이…고마 그래 가삐맀네요.”
남자는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슬픈 감정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나네는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짤막하게 되뇌었다.
“죄송합니다….”
“내가 죄송하지예.”
“무슨…?”
나네가 다시 물었지만 중년 남자는 짧은 말로 대답을 회피했다.
“아입니더.”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너무 위험합니더. 돌아가이소.”
나네는 남자의 알 수 없는 말에 잠시 침묵하다 웃으며 대답했다.
“살려고 온 거 아닙니다.”
나네의 웃음을 꽃인 냥 잠시 지켜보던 남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얼굴에 힘을 빼며 이야기했다.
“그 형에 그 동생이라더니 알았습니더. 그럼….”
남자는 말을 맺고는 뒤돌아서 주위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여기 좀 보이소. 여기 영웅의 동생분이 납시었소들!”
납시었다는 존칭에 나네는 멋쩍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네를 알아본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그녀석이다!”
“진짜 왔다.”
“영웅의 핏줄.”
“어떻게 하면 좋아!”
대천사와 사투를 벌인 구누는 영웅이 되어 있었다. 백마를 타고 6머리 10뿔 짐승에게 대항하는 모습이 성경의 예언과 겹쳐 삽시간에 소문이 돌았다. 곁에 있던 나네와 막다도 덕택에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물먹은 종이처럼 축축하게 가라앉았다. 곧이어 경계하듯 사람들이 나네의 주변에서 물러서기 시작했다. 바다가 갈라지듯 나네가 자리한 학교 정문부터 반대쪽으로 쫘악 길이 트이기 시작했다. 나네는 본능적으로 이 길의 끝에 존재할 무언가를 짐작했다.
‘히틀러…두 번째 천사.’
나네는 어수선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를 의식하는 것으로 보아 이 사람들은 전 세계에서 모인 루시드 드리머들일 것이다. 아마 나처럼 심판으로부터 누군가를 지키고 싶어서 이렇게들 모였겠지.’
나네는 고개를 돌려 학교 정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곳에 이렇게 집중적으로 모일 이유는 없다. 있다면 아마…저 문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천사…이천사는 꿈속의 망자가 현실로 와서 심판을 내릴 것이라 했다. 아마도 저 교문 너머가 [꿈에서 현실로 이어지는 관문]일 것이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결집한 것은 저 문을 지키기 위한 것이리라.’
나네가 생각을 마무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트여진 길 너머로 수십 미터 간격을 두고 한 무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네는 시선을 더 멀리 던지며 주위를 살폈다. 그 무리들은 학교의 담장을 넘어 빌딩 구석구석 온 도시에 새까맣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네는 까마득한 마음에 허허롭게 웃었다.
‘하긴 죽은 사람들이 한 둘이겠어.’
그것은 대치가 아니었다. 수백의 루시머 드리머들이 학교를 빙 둘러 지키고 있었고, 수백, 수천만의 망자들이 루시드 드리머들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네는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다시 결정내릴 수 있었다. 정문을 둘러 자리를 잡은 것은 최후의 보루인 것이다. 루시드 드리머들이 뚫린다면 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망자들이 [현실]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루시드 드리머들이 인사 한 마디 없이 앞으로 길을 틔워 만든 것은 그만큼 상황이 다급하다는 반증이리라. 영웅의 동생인 나네에게 앞으로 나가 무언가 해결해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나네는 생각을 갈무리하며 마음을 굳혔다.  
나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스산한 바람과 함께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네에게 가시처럼 박혀들고 있었다. 군데군데 불타고 무너져 있는 건물들, 상처입은 사람들의 시선 하나하나가 다르게 느껴졌다. 나네는 눈발과 어울려 저벅저벅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 접해보는 광경이었다.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찬 수많은 망자들이 나네에게 노골적으로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눈 위로 높이를 짐작하기 힘든 깎아지는 산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서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사이로 유유자적하며 히틀러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대천사에 이어 어제 밤, 전 세계 사람들을 향해 멸망을 경고했던 두 번째 천사, 이천사였다.
“드디어 영웅이 납시었군요!”
이천사의 말에 나네가 작게 웃으며 받았다.
“뭐 이렇게들 마중을 나오셨어요.”
당당하게 말한다고 했지만 처음 접해보는 위압감에 나네는 입이 굳어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자 이제 당신의 형처럼 당신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세요.”
나네는 말이 없었고 이천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루시드 드리머들을 휘둘러보며 조소했다.
“어째 그 전 요리는 맹물만도 못 했거든.”
나네는 속에서 긴숨이 토해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구누가 인간이 아닌것 같은 힘으로 대천사와 대적한 것과 같이 꿈에서는 정신력에 따라 마음먹은 미지의 힘을 끌어낼 수 있다. 그 능력에 한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지만 이 끝없는 망자의 해일 속에서는 덧없는 몸짓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네가 이천사를 주시했다. 이천사가 말없이 오른손을 어깨 근방까지 슬쩍 들었다. 그 작은 손짓하나가 태풍이라도 되는 듯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이천사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앞으로 떨어지며 나네를 지목했다. 나네는 가슴에 칼이라도 맞은 듯 엉덩방아를 찧으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망자들의 괴성이 일제히 서울 하늘을 뒤덮었다. 마치 머리를 걸레처럼 짜내고 있는 기분이었다. 바짝 긴장했던 나네는 총을 맞은 듯 의아함을 느꼈다. 한꺼번에 달려들 거라 생각했던 망자들이 잠잠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망자의 찢어지는 괴성에도 루시드 드리머들의 무서우리만큼 침착하고 또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알 수 없는 한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나네는 등 뒤에서 전해져오는 한기를 지우려 어지럽게 생각했다.
‘루시드 드리머들과 함께…’
‘아니 나 혼자…’
‘이천사만 죽일 수 있…’
어지러운 생각은 뚫고 등 뒤로 날카롭게 찔러오는 뜨거움이 느껴졌다. 등으로 날카로운 이물감고 함께 불에 댄 듯 확 달아올랐다. 낯선 칼날이 나네의 등을 찌르고 있었다.
‘뒤에는 루시드 드리머들 밖에….’
나네는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그래 내가 위험하다 안 캣습니꺼.”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혜미의 아버지였다. 기러기 아빠였다. 나네는 급하게 기러기 아빠를 밀쳐내며 멀리 휘청휘청 달아났다. 기러기 아빠의 손에는 매미날개처럼 투명한 단검이 들려있었다. 굵어진 눈발이 기러기 아빠의 머리위로 쌓이고 있었다.
나네는 옆구리를 살폈다.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통증이 엄습해왔다. 나네는 이건 상처가 아니다. 난 죽지 않는다고 정신을 집중했다. 상처의 피가 조금씩 멎기 시작했다. 기러기 아빠가 천천히 한 발 내디뎠다. 내디딘 발은 허공을 거쳐 땅에 닿지 않았다. 땅에 닿을 듯 허공에 멈추었다. 한 발이 허공에 멈춰선 그대로 기러기 아빠의 다른 발이 또 허공을 짚었다. 기러기 아빠가 눈을 밟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기러기 아빠는 그 모습 그대로 허공을 짚으며 나네를 향해 나아갔다.
루시드 드림. 꿈속의 세계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물리적 제약이 없는 정신적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마법이든, 하늘을 걷는 꿈같은 일이든 얼마든지 가능했다. 얼마나 굳은 의지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아무것도 되지 못할 수도, 혹은 신神이 될 수도 있었다.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기도 전 나네는 오한이 드는 섬뜩함에 고개를 들었다. 기러기 아빠가 눈을 밟으며 나네의 머리위로 다가와 있었다. 그의 손에는 피를 머금은 단검이 반짝이고 있었다. 나네는 상처를 보호할 새도 없이 옆으로 굴렀다. 나네가 있던 땅이 케익을 칼로 자른듯 잘려나갔다. 나네가 급하게 일어섰다. 기러기 아빠가 천천히 다가왔다. 나네의 입에서 피가 쿨럭 토해져 나왔다.
“하지 마, 아빠.”
기러기 아빠와 나네 사이로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가 뛰쳐나왔다. 나이에 맞지 않게 헐렁한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아빠?’
나네가 의아해 쳐다봤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
기러기 아빠가 소녀를 향해 자상하게 말했다. 기러기 아빠가 소년을 안으며 말했다.
“죽은…제 딸 혜밉니더.”
‘죽은?’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기러기 아빠의 등 뒤로 망자들 사이에서 득의하게 웃는 이천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죽은 가족을 살려내 이용한 것인가?’
“많이 컸지예?”
기러기 아빠는 뿌듯하게 말하다 고개를 숙인 채 되뇌었다.
“그러니 죽어 주이소…제발….”

유품이라고 하면 나는 그냥
오래된 낡은 물건이거니 했다
아주 오래된 낡은 안경, 둥글고 검은 돋보기
손때가 묻은 흑갈색 염주
조지훈 전집의 속표지에 나오던 물건들
혹은 누가 일생동안 쓰던 만년필
세상의 오랜 연륜이 새겨져
고달프고 위대했던 생애의 흔적이 지문처럼
묻어있던 유품들
그 외의 유품들을 나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
그런데 이른 새벽
책상서랍을 열자 문득 손에 잡히는
작은 공작 가위 하나
동그란 손잡이엔 이름표가 채 떨어지지도 않은
일곱 살 아이의 유품
유품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작고 쓸쓸한
유품
금방이라도 아이는 눈 비비며
내 방 문열고 들어와
내 꺼야
유치원 공작 가위를
손에 쥘것 같은데
모두 태워버린 사진과 장난감들 속에서
우연히 빠져나와
새벽 내 책상 위에 놓인 일곱살
어린 유품
작은 공작 가위 하나

<유품> 김기중
  
기러기 아빠가 나네를 향해 이빨을 꽉 깨물며 단검을 휘둘렀다. 검에서 나온 날카로운 기운이 허공을 가르며 나네를 향했다. 몸을 날려 피하는 나네의 입에서 피가 터져나오며 나네는 제대로 피하지 못한 채 무릎을 꿇었다.  놀라 급하게 기러기 아빠를 향하는 나네의 눈이 커졌다. 기러기 아빠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기에 나네의 등뒤로 있던 빌딩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잘린 빌딩 꼭대기가 도로 위로 떨어지며 어지럽게 지나가던 자동차가 풍선처럼 터져나갔다. 사방으로 흩어져나간 빌딩 파편에 건물과 행인들을 덮쳤다. 네온사인 휘황찬란한 하늘위로 찢어지는 비명이 하늘을 갈랐다.
“도망치소 오빠요!”
혜미의 목소리가 나네의 귓속에 어렵사리 들렸다. 멍하게 뜨여진 나네의 눈 밑으로 잘려진 머리카락이 팔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혜미가 기러기 아빠의 팔을 잡고 있었다. 혜미가 기러기 아빠를 저지한 덕에 나네는 머리카락만 잘린 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죽은 지 알았습니다.”
기러기 아빠가 다행이라는 듯 물었다. 기러기 아빠의 눈에 진심이 느껴져기에 나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네는 휘청거리는 다리를 다잡으며 일어섰다. 기러기 아빠가 나네에게 칼을 겨누며 말했다.
“절 너무 원망마소. 목숨 걸고 형님의 복수를 하고 싶었습니더. 그런데…그런데….”
감정이 격앙된 듯 기러기 아빠의 검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나네는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뒤쪽으로 피했다. 기러기 아빠의 휘두른 칼날이 나네의 가슴을 슬쩍 찢으며 하늘을 덮었다. 나네는 치명상을 피하며 겨우 몸을 굴려 기러기 아빠의 등을 잡으며 돌았다. 등을 잡았다고 안도하는 순간, 나네는 알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한기를 채 의식하기도 전에 뒤에서 불기운이 번쩍하며 터져 나왔다. 나네의 주위로 구름같은 불덩이가 하늘 위로 솟구쳤다. 나네는 종이조각처럼 구겨져 눈밭으로 고꾸라졌다. 나네는 쓰러지기 전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나네의 등 뒤로 루시드 드리머들이 성벽처럼 높게 둘러싸고 있었다.
나네는 그제야 처음 꿈에 접속했을 때 루시드 드리머들의 그 오한같은 이질감의 정체를 느꼈다. 아마 루시드 드리머들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천사에 대항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죽어버려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루시드 드리머들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라는 현실에선 이룰 수 없는 ‘천국’에 대거리 한 번 못해보고 패해버렸을 것이다.
엎어진 채 일어서지 못하는 나네의 주위로 루시드 드리머와 망자들이 둥그렇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검게 그림자 진 눈들이 나네를 향하고 있었다. 나네는 바람같은 생각을 중얼거리며 풀썩, 앞으로 쓰러졌다.
“다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건가? 좋겠다….”

막다가 입원한 응급실.
“이리로 좀 와보소 빨리요.”
팔에 깁스를 한 뽀글머리 아줌마가 급하게 간호사를 불러 세웠다.
“왜 그러세요?”
급한 걸음에 붙잡힌 간호사가 짜증이 난다는 듯 말투에 가시가 돋아 있었다.
“이 청년 아까부터 이상타 아인교. 이러다 송장하나 치울까 겁나니더. 빨리 어떻게 좀 해보소.”
아줌마가 젊은 청년 하나를 가리키며 발을 굴렀다.
“누가 죽어요? 괜찮아 보이는데.”
간호사가 귀찮다는 듯 말을 끝맺기 무섭게 간호사의 머리위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청년의 이마가 칼에 맞은 듯 베어지며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간호사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이어 청년의 몸에 바람처럼 불이 일렁거리며 솟아나기 시작했다. 불은 키를 높여 간호사의 앞머리를 태워먹었다. 우당탕탕탕, 놀라 자빠진 간호사와 아줌마가 후다닥닥 불을 껐다.
“뭐야 이게!”
간호사와 아줌마가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을 기다려 주지 않고 청년의 가슴이 붉은 피가 흥건하게 배어나왔다.
“끄어어억”
숨넘어가는 청년의 신음 소리와 함께 청년의 호흡이 가빠지며 금세 숨이 끊어질 듯 가늘어졌다. 청년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조르륵 길을 만들며 간호사의 발치에 고여갔다.
“아가씨 뭐하고 있어! 응급처치해 응급처치!”
아줌마의 꾸짖음에 멍하게 있던 간호사가 급하게 손을 놀리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사람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청년의 이름은 나네였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망자와 루시드 드리머들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그 사이로 이천사가 나타났다. 이천사는 쓰러져 있는 나네의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 비아냥거렸다.
“이런 이런 걸레가 됐네. 애들이 좀 심했나 봐. 하긴 좀 과격하긴 해. 나랑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목숨을 버려서라도 날 죽이겠다나 복수를 하겠다나 지구를 지키겠다나 뭐래나. 뭐 기를 쓰고 덤벼들긴 하더라. 네 형이 좋은 녀석이었긴 했나봐. 그런데 이 꼴이 뭐야. 빌딩을 잘라 버릴만한 힘이 있으면 뭐해. 안 그래?”
이천사가 기러기 아빠를 향해 눈길을 주다 소리 높여 웃었다.  
“정말 바보 같다니까. 믿음이 뭐길래 사랑이 뭐라고 목숨을 버리는 거지? 다 장난인데 말이야. 너도 불쌍해서 어쩌나. 쥐덫에 걸린 쥐 꼴이 되어서. 꼴이 이래서 잘난 형 복수라도 할 수 있겠어?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겠어? 내 몸에 손이라도 댈 수 있겠냐 이 말이야. 그 녀석의 동생이라 솔직히 기대를 좀 했는데 생각보다 시시했어. 당연한 거지만 역시 인간들이란 똑같아. 힘이 최고인 줄 알지. 그렇게 날 죽이고 싶었어? 응? 그랬어? 너도 다른 인간들과 다를 게 없어.”
조소하던 이천사가 말투가 낮게 변했다.
“널 마지막으로 죽이고 세상으로 나간다. 억울하니? 억울한 게 뭔지 알기나 해? 네녀석들은 아무것도 몰라. 알려고도 하지도 않고. 아니 알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지. 큭큭. 복수는 죽은 뒤에 해. 네가 죽으면 망자의 군대로 되살려 줄 테니까.”
이천사가 일어나려다가 나네에게 말했다.
“내가 좋은 거 하나 알려줄까?”
그리고 자세를 낮춰 나네의 귀에 속삭였다.
“장기에서 왕이 죽으면 게임이 끝나듯, 이 심판이라는 게임에서도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심판을 내리는 천사가 죽으면 재앙은 물거품처럼 끝이나.”
이천사가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을 더했다.
“그리고 그 왕은 평범한 인간과 같지. 총 한 방이면 끝난다고. 자 어서 일어나, 죽여보라고.  큭큭”
이천사가 나네를 주시하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어 소리쳤다.
“잘 보고 있느냐 세상의 인간들아! 망자들의 원한이 들리느냐. 그저 숨 쉬며 어제와 다를 게 없는 오늘 하루를 살고 싶었을 뿐인 이 망자들의 원한이. 권력이라는 욕망에 원치 않는 전쟁으로 억울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민초들의 원한과 고통을 너희들은 아는가. 폭력 앞에 폭압 앞에 힘없이 죽어간 망자들의 원한이 들리느냐고!”
이천사는 이제와 다르게 열을 내고 있었다. 이천사가 나네를 가리키며 말했다.
“마지막 희망이라고 기다려 봤는데 이 꼴이야! 이제 너희들 차례다. 너희들의 그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한 지 지금 이 순간 처절히 즐겨라!”
이천사가 팔을 번쩍 들었다. 신호처럼 망자들의 고함 소리가 밤하늘을 뚫을 듯 울려 퍼졌다.
“네가 처리해.”
이천사가 기러기 아빠에게 명령하며 뒤돌아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기러기아빠에게 쏠렸다. 기러기 아빠가 칼을 들고 쓰러져 있는 나네 옆에 섰다. 나네는 쓰러진 그대로 움직일 줄 몰랐다. 기러기 아빠가 나네를 겨냥해 칼을 머리 위로 들었다. 기러기 아빠의 눈이 놀라 커졌다.
“어디가 이 자식아.”
우악스럽게 팔을 잡은 손에 놀라 이천사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나네가 어느새 이천사의 팔을 잡고 서 있었다.
“다 죽어가는 꼴로 뭘 어쩌겠다고.”
이천사가가 비실비실한 모습으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나네를 타박하듯 얘기했다. 그리고 훑어보며 재밌다는 듯 물었다.
“그보다 어떻게 다 죽어가다가?”
“여긴 꿈의 세계야. 생각하는 모든 게 이루어지지, 죽으면 안 될 이유가 생각났을 뿐이야.”
대꾸하던 나네의 눈에 살기가 어리며 순식간에 피가 멎기 시작했다. 나네가 이천사를 잡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이천사의 팔이 꺾이며 몸이 따라 비틀어졌다.
“형을 살려내라.”
지금까지 와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이천사가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누가 네깟 것의 말을.”
나네는 이천사의 팔을 더 꺾으며 이천사의 아랫배에 주먹을 날렸다. 이천사의 발이 땅에서 떨어질듯 들렸다가 무릎이 풀리며 무너졌다. 이천사는 신음소리도 내지 못한 채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날 속였군.”
이천사가 겨우 내뱉었다.
“속인 건 아냐. 영원히 잠에 들 뻔 했는데 네가 깨운 거지.”
“역시, 그 녀석의 동생이야.”
“그래 누구 동생인데 그렇게 쉽게 등을 보이면 쓰나. 좋은 정보까지 알려주고.”
이천사의 눈이 작게 찡그려졌다. 나네가 가볍게 덧붙였다.
“뭐 진짜라고 믿지는 않지만.”
이천사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헤헤. 거짓말 아니야.”
“거 고맙군. 그러면 이렇게 되면 게임 끝나는 건가?”
나네가 심드렁하게 얘기하며 길바닥에 떨어진 총을 들어 이천사의 머리를 겨냥했다. 루시드 드리머들이 놀라 이천사의 주변으로 모여들며 긴장이 감돌았다. 이천사가 나네를 향해 히죽 웃었다. 나네가 주위를 둘러보며 위압했다.
“움직이자마!…구하려는 건 아닌 것 같기는 하지만.”
나네가 이천사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형을 살려내.”
“웃기지마.”
“그럼 네 말이 맞는지 아닌지 시험해야겠다.”
나네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렸다
“한 번 해봐.”
이천사가 비릿하게 웃으며 뇌까렸다. 동시에 나네의 총이 불을 뿜었다.

이천사가 총을 뺏은 채 나네를 넘어트렸다.
“거 봐, 거짓말 맞잖아.”
나네가 흙바닥에 고꾸라진 채 이천사를 향해 투덜거렸다. 이천사가 바지자락에 묻은 흙을 털며 말했다.
“제대로 맞출 생각이나 하고 그런 소리해.”
이천사는 의미 없이 이야기하며 총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총이 종이 조각처럼 구겨졌다. 이천사가 총을 나네 옆에 던졌다. 나네가 구겨진 총을 보며 대답했다.
“거짓말 맞잖아. 보통사람과 다를 게 없다면서 이게 어떻게 평범한 사람의 힘이야. 망자들은 숫자만 많을 뿐 루시드 드리머처럼 꿈의 힘을 쓸 수 없을 텐데, 아니면 히틀러가 역사에서 말하는 괴력을 지닌 용자라도 된다 말인가?”
“난 거짓말 같은 거 안 해.”
이천사가 심심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루시드 드리머들을 향해 던지듯 명령했다.
“죽여라.”
사람들이 천천히 나네에게 몰려들었다. 이천사가 나네를 뒤에 두고 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다 다시 나네에게 다가왔다.
“아니다. 내가 직접 한다.”
이천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천사의 그림자에서 검은 형상의 사람이 만들어졌다. 검은 사람은 나네의 그림자와 겹쳐졌다. 이어 나네의 몸 구석구석에서 그림자로 만들어진 쇠사슬이 뽑혀져 나와 땅에 박히며 나네를 무릎 꿇렸다.
“이제 옴짝달싹할 수 없겠지?”
이천사가 나네에게 말하며 빈손으로 총을 겨냥하듯 나네를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이천사가 나네의 귀에 대고 작게 얘기했다.
“이게 내 능력이다. 그림자를 조종하는 능력이지.”
“거짓말쟁이.”
나네가 웃음기 띤 얼굴로 힘겹게 이야기했다. 나네의 그림자 일부가 총처럼 변해 나네의 머리를 겨냥했다
“머리에 구멍을 내줄까?”
이천사의 검지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방아쇠에 걸린 듯 구부러졌다.
“형 얘기만 하지 말고 더 능력을 보여 봐. 여기는 꿈의 공간이잖아. 아니면 죽는다.”
주위는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이천사가 말을 이었다.
“자신의 목숨은 아깝지 않은가? 목숨의 가치를 모르는가? 아니면 삶이 하찮은가?”
나네가 이천사를 향해 웃었다. 바람소리가 일었고 이천사가 검지손가락이 당겨졌다.
탕!
정적을 깨면서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네의 눈가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나네가 이천사를 올려다봤다. 총알은 나네의 머리를 스치며 등 뒤로 날아가 박혀있었다. 털썩, 이천사가 별안간 힘없이 바닥에 두 무릎을 꿇었다. 가슴에서 핏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이천사의 가슴에 동전만한 구멍이 뚫려있었다. 어찌된 일인가? 나네의 눈이 커졌다. 이천사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든 총알이 이천사의 가슴을 뚫었다. 중심을 잃은 총구가 나네를 비껴간 것이다.
“아직 살아남은 녀석이 있었나?!”
이천사가 숨을 가쁘게 쉬며 말했다. 혼비백산 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이천사가 손이 근처 빌딩 옥상을 가리킨 것이다. 옥상 꼭대기에서 거울에 반사되듯 불빛이 반짝였다. 이천사의 손가락이 향하기가 무섭게 개미 때가 고목을 넘어뜨리듯 망자들이 사방에서 빌딩으로 모여들었다. 빌딩을 가리키고 있던 이천사의 손이 힘겹게 떨어졌다. 비명소리와 함께 옥상에서 군복을 입은 남자 몇이 떨어져 내렸다. 옥상위로 망자들이 까맣게 득시글거리며 몇몇이 같이 떨어져 내렸다. 뒤이어 지축을 흔드는 폭발 소리와 함께 빌딩이 썪은 고목처럼 무너져 내렸다.
나네를 잡고 있던 그림자가 힘없이 스러졌다. 나네가 일어서며 이천사를 향해 말했다.
"스나이퍼, 군인들인가? 아쉽게 됐군.”
이천사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나도 아쉬워. 핵폭탄이라도 터지나 했는데. 큭큭.”
이천사가 천천히 등 뒤로 넘어가며 눈밭에 몸을 누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입안에서 쉴 새 없이 붉은 피가 솟구쳐 나왔다. 사람들은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나네가 이천사를 향해 물었다.
“아까 거짓말이 아니라고 했지. 왕만 죽이면 끝난다고. 네 숨통이 완전히 끊어지면 다 끝나는 건가? 첫 번째 심판은 끝인가? 거짓말쟁이씨.”
나네의 눈이 이천사의 입을 주시했다.
“아니.”
이천사가 짤막하게 이야기 하며 힘겹게 웃었다. 나네가 한숨을 내쉬며 작게 웃었다.
“역시 거짓말쟁이야.”
나네가 등을 돌리려는데 이천사가 멈춰 세우듯 말했다.
“넌 뭐가 그렇게 우스워서 그렇게 웃는 거야?”
나네는 말이 없었다. 이천사의 눈이 낮게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내가 아니라 ‘이천사’가 죽어야 한다.”
“내가 아니라 이천사?”
나네가 의아한 듯 얘기했다.
“그럼 네가 이천사가 아니란 말이야?”
이천사는 대답 없이 껄떡껄떡 숨넘어갈 듯 웃다가 설명했다.
“인류 역사는 피의 역사야. 역사를 일으킨 지도자들은 수많은 암살위험에 시달렸지.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대리인을 내세워 자신인 척 암살위험을 피했어. 예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의 명장 이순신 장군도 무의공이라는 부하를 자신과 같이 만들어 대신 배를 지휘시키곤 했지. 일본에서는 이런 대리무사를 카게무샤(그림자 무사)라고 하지.”
“그림자 무사.”
나네가 힘주어 말했다. 이천사가 피식 웃으며 말을 맺었다.
“그래 내가 그 그림자 무사야.”
“하긴 죽은 자라면 그런 능력을 보일 수 없었겠지. 역시 넌 루시드 드리머였구나. 살아있는 인간이었어.”
이천사가 희미하게 웃었다. 숨이 곧 끊어질듯 눈이 희미해졌다. 나네가 물었다.
“왜 인간이 아닌 망자의 편에서 싸우는 거지?”
이천사가 허허로운 웃음을 거두며 하늘을 향해 말했다.
“웃기는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지구를 하나의 생명으로 생각했을 때 인간이란 뭘까? 모두가 어울려 살아야할 지구라는 몸에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는 암 덩어리가 아닐까?”
나네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천사가 말을 이었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모두 어머니인 지구의 환경에 맞춰서 살아가지 허나 인간이란 존재는 지구가 마치 자신들을 것인 마냥 마음대로 파괴하고 더럽히지. 지구의 역사를 1년으로 봤을 때 지구는 단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처참하게 파괴되었어. 사람으로 치자면 한 평생 잘 살아 오다 1초도 안되어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쓰러진 것과 같을 테지.”
이천사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계속이었다.
“재밌는 얘기 하나 들려줄까. 미국 서부개척 시대 미국정부는 인디언들을 무참히 학살하고는 그들의 땅을 팔라고 종용했어. 팔지 않아도 결국 빼앗길 것을 알고 있는 시애틀이라는 인디언 추장은 말했지. 어떻게 하늘을 사고 팔 수 있느냐고 어떻게 대지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느냐고 맑은 공기와 빛나는 물은 자기들의 것이 아니라고, 그런데도 어떻게 팔 수 있냐고 반문했지. 웃기지 않아? 하나님이 모두를 위해 빚어놓으신 자연을 마치 자기 것인냥 가격을 매기고 사고 팔 수 있는 거냐고…어떻게 인간들만 살기 위해 자연을 그들의 터전에서 내 쫓을 수가 있는 거지…우리는 지구의 자식들이야. 다른 형제들은 그 품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데 우리인간만 그 품을 파헤치고 괴롭히고 있어.”
이천사가 나네의 눈을 보며 물었다.
“이런 게 어떻게 만물의 영장이야. 살인자지. 어머니의 품에서 함께 낳고 자란 형제를 죽이는 살인마고 부모를 죽이는 패륜아와 다를 바 없지.”
허무한 목소리로 묻는 이천사를 보며 막다가 대답했다.  
“그래서 네가 날 죽으려고 했구나. 그 못된 인간을 하나라도 빨리 사라지게 하려고.”
나네의 너스레에 이천사가 장단을 맞추며 웃었다.
“그래 맞아. 큭큭큭.”
나네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심판을 통해 인간이 정화되길 바랐나?”
“정화라…그런 거창한 거 몰라. 그저 좀 더 작은 걸 소중하게 여기길 바란 것 뿐이야. 어린 시절의 내가 작았던 것처럼.”
죽어가는 이천사가 피를 토하며 웃었다. 웃음 끝에 회한이 걸렸다.
“당연하겠지만 히틀러와 많이 비슷하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어릴 때 무척이나 괴롭힘을 당했지. 큭큭. 하지만 난 그 녀석들을 미워하지 않아. 그 녀석들이 잘못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야. 인간이니까. 인간이란 동물이 원래 그래서 어쩔 수 없었던 거야. 그 녀석들이 잘못한 게 아냐. 인간이 잘못한 거지.”
나네는 말이 없었다. 이천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하 자꾸 말이 헛나오네. 지금 날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 얼굴을 기억하고 우리 집을 찾아내겠지? 어머니가 보고 싶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마녀사냥을 당하게 되더라도 죄를 묻지는 마. 그들이 나쁜 게 아니라 인간이 나쁜 거니까.”
죽어가는 이천사가 희미하게 웃었다. 나네는 웃었다. 무엇이 히틀러를 만들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네가 이천사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그 인간들을 향해 해주고 싶은 말은 없어?”
이천사가 웃음기 어린 얼굴로 대답했다.
“마지막…유언….”
나네가 마주 웃었다.  

내가 죽으면
술통 밑에 묻어 줘
운이 좋으면
밑둥이 샐지도 몰라

<술통> 모리야 센얀

나네의 웃음 가에 피가 튀었다. 무엇인가 가만히 생각하던 이천사의 가슴에 타당탕 총구멍이 뚫렸다. 이천사의 몸이 맥없이 무너졌다. 이천사는 한순간 눈을 부릅뜨다 고개를 떨어트렸다. 나네는 이천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총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죽어가는 마당이라 이천사님의 정체라도 밝히려고 했나요? 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지요. 당신은 마음이 너무 약해요.”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에는 또 다른 이천사, 또 다른 히틀러가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권총을 들고 있었고 입을 총부리로 가져가 총부리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연기를 후-하고 불어내고 있었다.
“자기의 목적도 모르고, 도대체가…정신상태가 썩었어. 얘들아 저 녀석을….”
새로운 히틀러가 주위의 망자를 향해 귀찮은 듯 이야기하며 시선를 돌려 나네를 향했다. 마지막으로 본대로 이천사는 그 자리에 죽어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나네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응?’
망자들이 달려들 틈도 없이 나네가 새로운 히틀러를 향해 거리를 좁히며 달려들었다.
‘뭐가 이렇게 빨라….’
히틀러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나네의 번쩍 치켜든 주먹이 히틀러의 입에 틀어박혔다. 한순간에 뇌가 흔들리며 의식이 흩어졌고, 이빨이 우르르 부서져나갔다. 목이 부러질 듯 돌아가며 몸이 따라 돌았다. 히틀러는 가랑잎마냥 공중을 날아 눈밭에 고꾸라졌다.  눈밭에 박힌 히틀러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말을 듣지 않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시야가 흐려지며 뚜벅뚜벅 걸어오는 나네의 모습이 두 개로 보였다.
“네놈만 죽이면 모든 게 끝난다고 했지.”
차갑게 내뱉는 나네의 목소리가 사신의 낫처럼 목 언저리를 쑤셨다. 히틀러는 손사래를 치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네를 향해 당황스런 목소리로 소리쳤다.
“기, 기다려봐!”
“뭐라고? 기다려 보라고? 잘 안 들리는데?”
“이 미친놈이!”
히틀러가 발악했지만 나네는 개닭보듯 심드렁하게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힘을 좀 썼더니 졸리네. 너도 졸려 보이는데? 재워줄까?”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기다려보라고 이 자식아!”
나네가 히틀러의 말을 웃어넘기며 똑똑히 얘기했다.
“영원히 자게 해줄 테니까!”
나네가 이천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으아아아아아!”
히틀러가 질겁을하며 두 팔로 얼굴을 감쌌다.
타타타탕!
수십발의 총소리가 나네를 향해 일제히 날아들었다. 나네는 두 팔로 얼굴을 가렸지만 순식간에 벌집이 되며 눈밭을 뒹굴었다. 나네가 한쪽 무릎을 곧추 세우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군데군데 총상을 입은 몸에서 총알이 꾸역꾸역 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나네가 얼굴을 가린 팔 사이로 총성이 난 곧을 주시했다.
“그렇게 맞고도 안 죽는걸 봐서. 역시 힘을 숨겨 뒀구만 그래.”
나네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또 다른 히틀러가 양손으로 총구를 늘어트린 채 서 있었다. 그 등 뒤로 아홉 명의 다른 히틀러가 추가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꼴좋다! 큭큭.”
히틀러들이 걸어 나오며 나네 앞에 쓰러져 있는 히틀러를 향해 웃어댔다. 나네가 히틀러들을 노려봤다.
“누가 대역이 하나뿐이라고 했나? 큭큭.”
나네에게 맞아 떨고 있던 히틀러가 힘을 얻었는지 고소하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나네가 벌떡 일어서며 주저앉아있던 히틀러를 향해 차갑게 뇌까렸다.
“다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
겁에 질려 뒷걸음질 치는 히틀러에게 나네의 주먹이 박혔다. 나네의 주먹에 맞은 히틀러가 개구리처럼 퍼지며 축 늘어졌다. 나네가 무서운 얼굴로 걸어 나오던 히틀러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네를 향해 쌍권총을 든 히틀러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하하하 너무 열 내지 마. 정말 우리를 다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리고….”
히틀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여기 있는 우리 중에 진짜 이천사가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우리를 죽여도 소용없을지도 몰라. 물론 진짜 이천사는 이곳에 없을 수도 있겠지?”
히틀러가 말 끝머리에 차갑게 웃었다. 나네의 걸음이 멈췄다. 히틀러들이 히죽거렸다. 나네가 갈 곳을 잃은 듯 주위를 둘러봤다.
“어디에 있는지 찾고 있나? 응?”
히틀러들이 비아냥거렸다. 주변을 둘러보던 나네의 시선이 멈추며, 한 사람과 마주쳤다. 나네는 곧바로 시선을 때 헤픈 웃음을 날리고 있는 히틀러에게 고정했다. 나네는 히죽 웃으며 군중 속에 자리를 잡고 있던 한사람을 향해 달렸다. 그러자 일제히 나네를 향해 히틀러들의 총알이 날아들었다. 나네는 옆으로 뒹굴어 피하곤 무릎을 세운 후 이야기했다.
“왜 그렇게 당황하나?”
히틀러들이 이빨을 갈며 나네를 주시했다. 나네가 군중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네와 눈을 마주쳤던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드디어 납시는군 진짜 히틀러. 아니 이천사.”
나네가 힘주어 이야기했다.
검은머리소녀가 손가락에 낀 총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오고 있었다. 혜미였다. 나네의 목숨을 노렸던 기러기 아빠의 딸이었다. 이천사의 손에 살아났다던 기러기 아빠의 죽은 딸이었다. 나네의 이천사라는 말에 옆에 있던 기러기 아빠가 놀라 혜미를 쳐다봤다.
“혜미야….”
기러기아빠가 혜미의 어깨로 떨리는 손을 가져갔다.
“더러운 손 내 어깨에서 때.”
혜미가 싸늘한 얼굴로 기러기 아빠의 얼굴에 총구를 들이댔다. 나에게 눈물로 호소하던 초췌한 소녀의 모습이 아니라 장난스런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기러기아빠가 그 자리에서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천사는 입안에 문 사탕을 빙글빙글 돌리며 나네에게 살갑게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나랑 눈을 마주쳤잖아. 분명히 날 보고 있었어.”
이천사는 사투리를 쓰지 않은 채 장난스레, 그러나 차갑게 물었다.
“내 물음에 대답하면 알려주지.”
“좋아.”
“다시 한 번 묻는다. 재앙을 내리는 천사가 사라지면 재앙도 사라지는가?”
“사실이야.”
“대천사 같은 녀석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도?”
“응. 그리고 하나 더 좋은 거 알려줄까? 아침 해가 뜨면 첫 번째 심판도 끝이 나, 물론 그때까지 살아 있을 때의 얘기겠지만.”
이천사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나네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그런 말을 이렇게 쉽게 하니 오히려 의심이 들어.”
이천사가 피식 웃으며 자상하게 말했다.
“쉽게 얘기하다니, 쉬우니까 얘기하는 거야. 거짓말 같으면 시험해보면 되잖아.”
이천사의 등 뒤로 유리처럼 투명한 흰 날개가 펄럭 솟아났다. 이천사가 손아래로 내려온 헐렁한 교복 소매를 들어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나네가 쓰게 말했다.
“시험해 보라고?”
“그럴 수 있다면 말이지.”
이천사가 사탕을 바삭바삭 깨물며 말했다.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믿을만한 구석이 있다는 걸 테지?”
이천사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히히히.”
이천사가 대답을 대신하듯 웃음을 참아가며 물었다.
“자 이제 당신이 답할 차례야.”
“어쩔 수 없네…그게 말이야. 잘 들어봐.”
나네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푸념 섞인 말을 했다. 그리고 작게 얘기했다. 나네의 목소리가 작아 이천사가 귀를 쫑긋 세우며 나네를 향해 다가왔다.
“그게 말이지….”
순간 나네의 눈이 빛났다. 번쩍, 나네가 발을 굴러 믿을 수 없는 정도로 빠른 속도로 이천사를 덮쳤다. 이천사가 손아귀에 잡혔다고 생각한 순간.
꽝!
나네의 시야로 기차만한 팔뚝이 날아들었다. 팔뚝은 나네를 덮쳤고, 나네는 한참 뒤로 나가 떨어졌다. 나네는 한동안 제대로 일어날 수 없었다. 목구멍에서 피가 토해 나왔다.
“뭐하는 거야? 잠이라도 자려고?”
나네가 대답 없이 몸을 일으켰다. 이천사의 앞으로 흰 사제복을 걸친 천사들이 내려앉았다. 하나는 나네에게 주먹을 날린, 고래처럼 커다란 천사였고 하나는 소년처럼 호리호리한 천사였다. 각각 돼지 모양의 가면과 동그랗게 똬리 튼 뱀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난 싫다고 했어. 아무 말도 안했는데 자기네들 끼리 내려왔다고.”
이천사가 나네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정말이야. 믿어달라고. 안 그래? 삼천사?”
이천사의 말에 돼지가면을 쓴 커다란 천사가 대답했다.
“대천사를 반 죽여 놓은 그 놈의 동생이라고? 한 번 붙어봐야지. 붙어봐야지. 붙어봐야지!”
삼천사는 이천사의 물음을 듣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씩씩거렸다. 이천사가 안되겠다는 듯 히죽 웃으며 고개를 돌려 옆에 선 호리호리한 천사에게 물었다.
“안 그래 사천사?”
이천사의 물음에 뱀가면을 쓴 사천사는 별안간 귀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이천사를 비롯한 사람들이 귀를 막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사천사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내뱉었다.
“내 차례까지 못 기다리겠어. 싱싱한 인간들은 너 혼자 다 죽여 버릴거잖아.”
이천사가 귀를 막은 손을 때며 두 손을 들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봐. 이런 놈들을 내가 어떻게 막아. 안 그래?”
나네가 아무 대답 없이 피가 흐르는 입언저리를 부여잡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믿는 구석이 있긴 있었군. 네 녀석 하나도 힘든데 천사들이 둘이나 동시에 내려오다니, 뭔가 반칙 같은데.”
나네가 힘없는 목소리로 웃었다.
“자 그럼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야. 어떻게 나인걸 알았지?”
나네가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내며 손가락으로 이천사를 가리켰다.
“미스터리 영화를 자주보도록 해. 범인은 늘 주변에 있어.”
이천사가 희게 웃었다. 나네가 농담처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죽은 히틀러가 가르쳐 주었지. 총에 맞으며 무의식 적으로 네가 있는 곳을 바라보더군.”
“역시 그랬나.”
“대충 방향정도여서 누군지 정확히 몰랐지만.”
나네가 둥그렇게 모여 있는 히틀러들을 향해 눈길을 돌리며 덧붙였다.  
“저 덜 떨어진 대역들의 반응이 한몫했어, 네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닌가 걱정스런 눈으로 정·확·히 널 쳐다보더군.”
히틀러들이 어쩔 줄 몰라 이천사를 쳐다봤다.
“그리고 너도 그 눈빛, 굳이 숨기겠다는 태도가 아니었어.”
나네가 삼천사를 보며 덧붙였다.
“믿을만한…다른 천사들이 나타났기 때문이겠지?”
이천사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랬던가.”
이천사의 싸늘한 목소리를 풀며 이야기를 이었다.  
“아무래도 괜찮아. 여흥이었으니까. 이제 본격적인 무대가 열렸으니 실력행사를 해야겠지? 히히. 숨겨놓은 실력이 있나 모르겠는데, 이번엔 진짜 죽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
나네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너야말로.”
이천사가 의외라는 듯 나네를 주시했다.
“자신이 있나 본데? 하긴 삼천사의 주먹을 맞고도 살아있는걸 보니 역시 뭔가 있는 모양이야.”
나네는 천천히 이천사를 향해 걸어갔다.
“너무 급하게 그러지마. 먼저 넘어야할 산이 있잖아.”
나네와 싸웠던 기러기아빠와 망자들이 앞을 막았다. 기러기 아빠가 예의 매미날개같이 투명한 단검을 뽑아들었다.
“자아 진짜 네 힘을 보여 봐.”
나네가 감독처럼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네가 피가 흐르는 입술을 닦아내며 망자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뭐하는 거야.”
이천사가 망자들을 향해 다그쳤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러기 아빠와 망자들이 우르르 무너졌다. 쓰러진 기러기 아빠와 망자들의 몸에서 날카로운 물체에 잘려나간 듯 여기저기 생채기가 생겨났다. 나네의 손에 기러기 아빠와 같은 매미 날개같은 단검이 들려있었다. 이천사가 호기심 어린 눈망울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이제야 네 능력을 알겠군. 네 능력…상대 능력을 카피하는 것인?”
나네가 조용하게 대답했다.
“나를 형과 비교하지만 내가 그런 고차원적인 능력을 가졌을 리 없잖아. 내 능력은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얕은 능력이야.”
“그럼 그 손에 들린 건 뭐야? 카피가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아니야.”
“그럼 네 능력은 뭐지?”
나네는 대답이 없었다. 이천사가 웃으며 장난스레 얘기했다.
“대답하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릴 거야.”
나네가 푸념섞인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난 작가지망생이야…소설을 쓰고 시를 쓰지. 그게 내 유일한 능력이야 내가 가장 잘하는 거지.”
나네의 말에 이천사가 말없이 뚱한 눈으로 나네를 바라봤다.
“끝까지 장난을 치시겠다? 그렇게 모두 죽는 꼴을 보고 싶단 말이지?”
이천사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천사의 싸늘한 태도에 루시드 드리머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나네가 고개를 삐딱하게 이천사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런 말씨름 하자고 본무대가 시작됐다고 큰소리 쳤어?”
퉁명스레 덧붙였다.
“아까는 방심했어. 귀찮으니까 셋 다 동시에 덤벼.”
나네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천사들을 향해 덤비라고 손짓했다. 나네의 도발에 이천사는 작게 웃으며 망자들을 향해 죽이라고 명령했고, 사천사는 새로운 장난감을 찾은 듯 소리높여 웃었고 삼천사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망자들이 우르르 나네를 둘러쌌다. 수십을 쓰러트리다 몇몇이 나네의 팔을 잡고 다리를 끌며 늘어졌다. 수없이 망자들을 내쳤지만 망자들은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나네는 힘이 빠져가는 것을 느꼈다. 나네의 다리가 풀썩 꺾였다. 나네를 둘러싸고 작은 산이 만들어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천사의 입가에 웃음이 만들어졌다.
“모두 비켜!”
쩌렁쩌렁 하늘을 울리는 소리에 이천사가 놀라 소리 난 쪽을 쳐다봤다. 삼천사의 사제복 속에서 기차화통같은 흰 연기가 쉭쉭쉭 솟아나고 있었다. 삼천사가 스스로 화를 이기지 못해 소리쳤다.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잠깐만 저 녀석을…!”
이천사가 급하게 말했지만 삼천사의 육중한 몸이 공중을 나른 후였다. 집채같은 몸은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며 망자의 산 앞으로 쿵, 떨어졌다. 땅이 흔들거리며 나네를 뒤덮고 있던 망자들의 산이 무너져 내렸다. 삼천사가 손을 들어 망자들의 산을 헤집었다. 한 번 헤집자  망자들이 우르를 쏟아져 떨어져 나갔다. 그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망자들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네였다. 나네가 쓰러진 망자들 사이로 서서 숨을 헐떡였다. 삼천사가 보물을 찾은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이천사가 발 앞의 망자들을 손으로 헤집으며 나네를 향해 걸어갔다. 이천사가 안되겠다는 듯 손을 들었다. 망자들이 나네와 이천사 사이를 비켜나며 공터가 만들어졌다. 이천사가 나네를 향해 재미있겠다는 듯 말했다.
“최강의 방패인 삼천사와 최강의 창인 사천사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천사각 입안에 문 사탕을 굴리며 사천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천사가 나네를 향해 걸어 나가고 있었다.
‘역시 못 기다리겠다는 건가?’
이천사가 씹던 사탕을 깨물며 웃었다. 사천사가 삼천사 앞을 막아섰다. 삼천사가 으르렁거렸다. 사천사가 삼천사에게 커다란 사탕을 물렸다. 으르렁거리던 삼천사가 고분고분하게 사탕을 빨며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바짝 긴장하던 나네의 눈이 뚱하게 변했다.
사천사가 고개가 부러질 듯 주억거리다가 나네를 향해 가늘게 웃었다. 나네는 다시 긴장하며 사천사를 주시했다. 사천사가 사제복과 뱀가면을 벗었다. 그곳에는 삐죽삐죽 솟아나온 금발, 긴 목도리를 두른 하늘하늘한 모습의 소년이 나타났다. 어디선가 본 모습이었다. 마치 동화책에서 빠져나온 듯 한 모습, 사람이 아니라 동화책의 그림이 그대로 빠져나온 듯 한 모습. 나네가 헛웃음을 물며 혼잣말을 했다.
“어린왕자?”
대답대신 사천사는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내가 왜 최강의 창이라고 불릴까?”
그리고는 뭔가를 던지듯 나네에게 휙 손을 내렸다. 사천사에 손짓에 나네는 움찔 놀랐다.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지만 눈발만 더 짙어질 뿐이었다. 쥐죽은 듯 조용한 가운데 사천사가 한가하게 얘기했다.
“왔어.”
사천사가 나네에게 이야기했다.
쒜에에에엑!
하늘에서 공기를 찢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천사들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눈송이가 뒤덮고 있는 하늘에서 둥그런 물체가 붉은 화염에 휩싸여 무서운 속도로 쏘아져 내려오고 있었다.
“내가 살던 별이야.”
사천사가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다.
‘살던 별이라고?’
나네의 눈동자가 커졌다. 손끝이 떨려왔다.
‘별? 운석…?’
생각을 이을 새도 없이 집채만한 운석은 정확하게 나네를 향해 쏘아져 내려왔다. 귀가 떨어지는 굉음과 함께 운석은 나네에게 격중했다. 땅이 흔들리고 온 학교의 유리창이 깨져나갔다. 여기저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주변을 덮었던 연기가 흩날리며 나네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네는 운석을 두 손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부릅뜬 눈에 핏줄이 터지며 이빨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천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이렇게 큰 거야?! 모두 죽일 셈이야! 작은 것도 많잖아!”
“잘못 골랐나 봐.”
이천사가 태연하게 얘기하는 사천사를 향해 다시 한 번 고함을 쳤다.
“잘못 고르긴! 망자들이 한 명이라도 죽으면 너도 죽어!”
사천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얗게 웃으며 물었다.
“그깟 망자들…걱정하기는…그나저나 잘 견디는데 대단해. 이제 숨겨 놓은 힘은 없어?”
나네가 이를 악물었지만 사천사의 말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네가 악을 쓰며 얘기했다.
“이런 거 하나쯤…대단치도…!”
사천사가 호기심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가 아닌데?”
붉은 운석이 나네를 향해 하늘에서 쏘아져 내리고 있었다. 다리의 힘이 풀려져나가며 다른 운석이 채 날아오기도 전에 나네는 가까스로 막은 운석을 놓치며 땅에 틀어 박혔다.
콰과과광!
충격에 놀란 주변 건물이며 다리가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나네가 서 있던 곳 뒤쪽으로 축구장만한 둥그런 구덩이가 생겨났다.
“하나만이면 충분했잖아! 한 명도 죽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천사가 씩씩거리며 사천사를 향해 내뱉었다. 사천사가 발걸음을 돌려 무너지는 빌딩을 등지며 이천사에게 말했다.
“그 녀석에게 고맙다고 해. 최소한의 피해만 남기고 별을 가지고 몸을 날렸어. 아니면 다 날아갔을 걸. 큭큭.”
사천사의 심드렁한 말투에 이천사는 더 화가 났다.
“네 이 녀석을…!”
이천사가 사천사를 향해 잡아먹을 듯 걸어 나왔다. 이천사와 사천사 사이로 사천사가 어슬렁 걸어 나오며 말했다.
“사탕 다 먹었어. 이제 내 차례야.”
이천사가 의아해 물었다.
“내 차례라니? 무슨 소리야?”
사천사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운석이 박혀든 쪽을 급하게 좇았다.
“살아 있으려고.”
삼천사가 대답 없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기뻐해야 하나? 하나도 안 죽었어. 하·나·도.”
사천사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천사를 향해 내뱉었다. 운석이 떨어졌던 곳과 사천사와의 공간이 늪처럼 검게 변하기 시작했다. 사천사가 펼쳤던 손바닥을 닫으며 주먹을 굳게 쥐었다. 굉음과 함께 검은 공간이 블랙홀에 흡수된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어 쩌정! 손바닥과 손바닥을 잡듯 검은 공간이 순식간에 붙었다. 공간을 메우려 주변의 공간이 순식간에 빈 공간으로 몰려들었다. 우르르르릉! 건물이 무너지고 땅이 비명을 질렀다. 루시드 드리머들이 경악하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거대한 공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천사의 망자를 다루는 능력과 더불어 삼천사의 능력, 공간을 없애는 힘이었다. 이천사가 커다란 주먹이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잠깐.”
이천사가 손을 들어 삼천사의 주먹을 멈춰 세웠다. 삼천사의 주먹 아래로 어기적어기적 도망치는 사내가 있었다. 나네였다.
“그 공격을 받고 어떻게 살아 있었어?”
이천사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넌 왜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나네가 두 콧구멍으로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대꾸했다. 이천사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카피.”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천사가 고개를 돌렸다.
“카피?”
이천사가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사천사가 나네 대신 대답했다.
“삼천사의 주먹에 맞았을 때 삼천사의 능력을 카피한 거야. 지상최고의 방패의 능력, 그게 아니면 내 공격을 받고도 살아난 걸 설명할 수 없지.”
나네는 포기한 듯 벌렁 드러누우며 쏘아붙였다.
“한 방 먹여주려고 했는데.”
이천사가 애써 진정하며 받아쳤다.
“입은 잘 살아있나 보군.”
이천사 나뭇가지를 들고 나네 옆으로 와 쭈그리고 앉았다.
“자 일어나. 사천사도 내 힘도 카피해서 악을 무찔러야지. 영웅이 되어야지 안 그래? 거짓말쟁이씨.”
이천사가 어린애 같은 얼굴로 얘기하며 들고 있던 나뭇가지로 나네를 꾹꾹 찔렀다.
“크으으으…으…으악.”
나네가 고통을 참다 비명을 질렀다. 나네가 이빨을 깨물며 내뱉었다.
“영웅이라고? 내가 형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알고 있어.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큭큭 그런데 왜….”
“지금 이 모습은 꿈속에서 전 인류가 시청하고 있지. 영웅이라 불리는 너의 형이 사라진 지금, 전 세계의 루시드 드리머들이 아무런 힘이 못 되고 있는 지금, 천사들과 자웅을 겨룬 너는 그들에게 영웅이지. 인간이 기댈 건 너밖에 없어. 인간이라 불리는,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는 동물들에게 넌 하나 남은 영웅이자 희망이겠지. 내가 내 의지대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듯 말이야. 알겠어? 네가 어떻게 날 찾아냈는지? 네가 어떻게 여태까지 살아있는지?  넌 운 좋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아니야. 우리가 널 살려주고 있는 거지.”
이천사가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설이 길었어, 이제 알겠지? 인간의 영웅인, 하나 남은 희망인 네가 처절하게 무너져가는 모습을 전 세계 사람에게 시청시켜 주겠다는 거야. 인간들의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희망까지 철저히 무너져가는 모습을 말이야. 네 형처럼. 그게 바로 심판이지. 꼭 숨이 끊어져야 심판이 아니거든. 편하게 죽어버리면 아무의미 없잖아? 아직 심판이 많이 남았잖아. 길게, 길게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며 처절하고 처절하게 죽어가야지 안 그래?…희망이 왜 있는지 알아? 더 큰 절망을 주기 위해서야. 내가 존재하고, 네가 살아있는 이유지.”
이천사는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나네의 팔이 이천사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천천히 고개를 세웠다. 그리고 이천사를 향해 시시하게 얘기했다.
“그런 시시껄렁한 이유로 죽을 수 없어.”
이천사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또 일어서는 거야? 인류를 위해서인가? 아니 그 여자 때문인가?”
나네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거창한 거 아냐.”
이천사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래? 사랑이라는 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인가? 목숨마저도 버릴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이 사랑이라는 건가?”
나네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니체가 말했어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고.”
“그녀 때문에?”
나네가 희게 웃었다.
“아니 나 때문이야. 그녀가 죽으면 이제 이 세상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거든.”
“미친놈이.”
옆에서 듣던 사천사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나네가 사천사를 향해 웃으며 대꾸했다.  
“헤헤헤 미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죽여주지.”
나네의 말에 사천사가 격앙된 얼굴로 나네를 향해 몸을 날렸다. 히죽히죽 웃으며 말하던 나네가 고함을 지르며 사천사를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사람들이 가끔 묻는다네.
희끗희끗한 귀밑머리와
이마에 팬 내 주름살을 보고는
나이가 몇이나 되냐고.

그럴 때 난 이렇게 대답하지.
내 나이는 한 시간이라고.
여태까지 살아온 세월을 다 헤아리고
그 모든 걸 다 합친다 해도 말이야.

아니 뭐라구요?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
또 이렇게 되묻는다네.
그런 셈법을 진짜로 믿으라구요?

그러면 나는 얘기하지.
이 세상에서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날 내 품에 살짝 안겨
은밀하게 입을 맞추는 그 순간.

지나온 날들이 아무리 많아도
나는 그 짧은 시간만을
나이로 센다고.
정말 그 황홀한 순간이 내 모든 삶이니까.

<나이>  이븐 하즘

나네가 가슴을 부여잡으며 괴로워했다. 나네의 주먹이 사천사의 얼굴에 들어박히려는 순간 사천사의 손짓에 땅에 떨어져 잇던 돌멩이가 나네의 가슴을 먼저 들어가 박혔다. 몸이 물먹은 종이처럼 무거웠다. 쓰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주위의 돌들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나네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네는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한차례의 돌팔매질이 끝나자 나네는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흥 내 능력을 카피해보려고? 내 몸에는 손끝하나 대지 못해.”
사천사가 벌레를 보듯 내뱉었다. 나네는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이천사가 그 모습을 보며 천천히 일어나 하늘을 향해 외쳤다.
“인간들이여. 보이는가? 이 처참한 몰골이! 다음은 너희들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매사에 감사하라고. 지금 너희들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숨 쉬며 햇살을 받으며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기쁘고 감사한 일인지 처절하게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위기를 느끼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천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목숨의 위협을 받은 세상 사람들의 의지가 하나둘 꿈의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살려주세요!
-천사님! 제발 자비를.
-이렇게 죽기는 싫어
-제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하듯 빌고 있었다. 목소리는 실타래처럼 서로 꼬이고 얽혀들었다. 나네는 정신이 아득해 짐을 느꼈다. 이천사가 나네에게 보란 듯이 얘기했다.
“봐 이 소리가 들려? 이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나한테 살려달라고 빌고 있어. 이 녀석들에겐 하나님은 없어. 하나님은 곧 가장 강한 자의 이름이지. 너희는 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숭배하는 것이야. 이 녀석들이 하나님처럼 강했다면 하나님도 죽이려 들었을거야. 큭큭큭. 이런것들이 살아남아야할 이유가 있을까?”
이천사가 나네에게 얘기했다.
“…또 대답이 없어? 큭큭. 여기까지 오래 기다려왔어. 영광스런 자리를 주지. 이 심판의 첫 번째 죽음이 되어라.”
이천사가 나네를 향해 검을 들었다. 나네는 일어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몸도 마음도 모두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이천사의 검이 나네를 향해 떨어졌다. 그곳에는 삼천사의 손이 있었다. 삼천사의 손이 이천사의 검을 막았다.
“뭐야?”
이천사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잠깐만 더 가지고 놀자. 헤헤헤.”
삼천사가 헤벌쭉 웃었다.
“안돼.”
이천사가 단호하게 얘기하자 다시 삼천사의 화가 뻗쳤다.
“왜·안·된·다·는·거·야. 너·희·들·끼·리·만·놀·고!
어린아이처럼 비명을 질러댔다. 귀청이 떨어질 것 같아 이천사가 급하게 귀를 막았다. 루시드 드리머들과 망자들이 머리를 잡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렇게 하자.”
사천사가 삼천사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사천사의 말에 삼천사의 입이 다시 헤벌쭉 찢어졌다.  
“무슨 소리야?
이천사가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해가 뜰 때까지는 시간도 많이 남았고 어때. 어차피 잡은 고기 좀 가지고 논다고 안 될 것 없잖아. 그리고 여기는 꿈의 공간이야. 루시드 드리머들에게 들었잖아 꿈의 공간은 정신의 차이가 곧 힘의 차이라고 했잖아. 이런 녀석은 내가 잘 알아. 이런류의 녀석들은 자기가 아무리 당해도 꿈쩍도 하지 않지. 이런 녀석들을 움직이게 하려면 다른 녀석들을 족쳐야 한다고.”
“누구를?”
“많잖아, 저기.”
사천사가 턱으로 루시드 드리머들을 가리켰다.
“싱겁긴 하겠지만. 이걸 보고 있는 인간들한테 겁도 주고 좋잖아. 큭큭.”
이천사가 짧게 대답했다.
“금방 끝내.”
이천사의 말을 듣고 사천사가 삼천사를 향해 루시드 드리머들을 향해 손짓했다. 삼천사가 쓰러져 있는 나네와 루시드 드리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천사가 덧붙였다.
“그래도 움직이는 게 더 재밌지 않을까?”
고개를 끄덕이던 삼천사가 루시머 드리머들을 향해 땅을 울리며 걸어 나갔다. 사천사가 이천사에게 제안했다.
“잠깐, 저 녀석들한테 걸려있는 인질을 모두 풀어, 그래야 그나마 보는 재미라도 있지 않을까?”
루시드 드리머들을 마주한 삼천사가 목을 길게 빼며 침을 질질 흘리며 천천히 다가갔다.  마치 먹이를 몰듯이. 루시드 드리머들은 당황하며 삼천사와 싸울 준비를 했다. 허나 무시무시한 삼천사의 힘을 보았기에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애를 태웠다.
“이러다간 눈요기는 고사하고 그냥 끝나겠는데?”
사천사가 심드렁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얘기했다.
“잠깐. 여흥을 돋워야지. 그 아이는 어디 있지?”
사천사가 이천사를 향해 능글맞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흥, 입은 살아서.”
이천사가 손가락을 들었다. 루시드 드리머와 삼천사의 중간, 삼천사를 등진 채 땅속에서 앳된 얼굴의 소녀가 솟아나왔다. 기러기 아빠의 눈에 소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기러기 아빠가 사람들을 비집으며 앞으로 나왔다. 급하게 나오던 기러기 아빠의 발걸음이 굳었다. 그 곳에는 이천사와 꼭 빼닮은 소녀가 있었다. 이천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근깨 진 얼굴에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 아이가 진짜 네 딸이다.”
사천사가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며 기러기 아빠를 향해 말했다. 사천사가 웃으며 덧붙였다.
“힘 좀 내보라고.”
기러기 아빠의 눈에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러기 아빠의 눈 속에 삼천사의 팔이 들어왔다. 삼천사의 주먹이 천천히 들렸다. 삼천사의 손가락이 천천히 펼쳐졌다. 혜미가 있는 자리가 검은 장미가 피듯 천천히 물들고 있었다. 기러기 아빠의 눈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아빠!”
아무것도 모른 채 눈물 글썽이던 혜미가 아빠를 발견하고는 활짝 웃으며 아빠를 소리쳐 불렀다.
“피해!”
나네가 소리쳤다. 삼천사의 주먹을 꽉 쥐었다. 콰광! 폭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공간이 순식간에 오그라들었다. 기러기 아빠가 이빨을 깨물며 혜미를 향해 몸을 날렸다. 혜미는 아빠가 왜 저렇게 슬픈 얼굴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떴을 때 아빠는 없었다. 투명한 단검 한 자루만이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혜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집채만한 천사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등에는 커다랗게 빛나는 날개가 달려 있었다. 사내의 손바닥이 천천히 들렸다. 소녀를 비롯한 루시드 드리머들이 있는 공간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루시드 드리머들은 개미때 처럼 달아났다. 혜미가 눈물콧물 범벅된 얼굴로 흰 날개를 펄럭이고 있는 삼천사를 올려다보며 기도했다.
“아빠를…아빠를 찾아줘요. 천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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