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그렇게 그녀를 만났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형과 나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늘 형에게 비교 당했다. 수제라고 치켜세워졌지만 천재중의 천재인 형 앞에선 언제나 그림자일 뿐이었다. 언제나 비교당하고 형을 좇아가는 삶. 나는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어디에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마음속으로 형에 대한 미움이 생겨날 법도 했지만 형을 미워할 수 없었다. 형은 누구보다 도 열심히 살았고 누구보다도 날 사랑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배다른 자식으로 태어난 날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서히 감정을 없애며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지 못하게 가면으로 얼굴을 덮었다. 기뻐도 웃고 화가 나도 웃고 슬퍼도 웃었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유일한 법이라 생각했다. 아웃사이더로나마 내 자신을 찾아갈 무렵 형이 낫기 힘든 병에 걸렸다.
백조가 갑자기 다리가 꺾였다. 나는 내 다리가 부러진 것처럼 울었다. 그리고 졸지에 형 대신 가업을 잇게 되었다. 미운오리새끼가 순식간에 백조가 되었다. 하지만 회사는 기울었고 다시 비교당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회사는 다시 살아났지만 나는 병실의 형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거의 매일을 집에 누워 지내는 형은 더 책을 팠고 유일한 소통수단인 인터넷에 글을 올리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경제, 정치, 종교 할 것이며 다방면에서 박식하며 창의적이고 유쾌한 형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며 형을 찾아왔다. 하지만 병실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형의 모습을 보고는 다시 오는 사람은 없었다. 오프라인이라는 현실세계에서 형의 모습을 계속 사랑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망망대해의 섬 같았을까. 결점이 없을 것 같던 형도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형이 흔들리자 기업이 흔들렸고 연이어 나또한 흔들거렸다.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 때, 그때 그녀가 분홍색 풍선껌을 터질듯 불며 나타났다.
큰 교회의 외동딸이라는 그녀. 형과의 친분이 있었던 부모가 고등학교의 방학을 맞아 형에게 그녀를 보낸 것이다. 나는 가면 같은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환영했다. 그녀는 자신을 연기자 지망생이라고 소개했다. 형 앞에서 부모님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봉사활동’을 왔다고 태연스레 말했다. 방학동안 형을 보살피는 연기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맡은 역은 아웃사이더라며 처음에는 심히 적응하지 못하는 연기부터 한다고 했다.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형이 아웃사이더 이후 스토리는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그녀는 생각한 적이 없는 듯 우물쭈물 거리다가 그 이후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다가 화합(?)해서 사회에 항거(?)하는 스토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형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따뜻한 휴먼스토리, 해피엔딩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고민하던 그녀가 눈을 빛내며 좋은 제안이라며 형을 치켜세웠다.
내가 초면부터 반말을 하면 기분이 나쁠 수 있다고 말하자 그녀는 깜짝 놀라는 척을 하며 어려 보여서 그만 하며 새침스럽게 말했다. 그리곤 나의 동의도 없이 날 자기의 휘하의 간호사 역할이라고 결정지었다. 그리고 다시 반말을 시작하며 금세 불치병 환자를 돌보는 나긋나긋한 의사 역에 몰입해 들어갔다.
“거기 신입 간호사 환자 분 열이 나. 빨리 수건을 준비해줘요.”
그녀가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서서 뭐하는 거예요. 빨리빨리.”
그녀가 재촉했지만 나는 무심하게 서 있었다. 그런 나를 보는 형의 입가에 가느다란 웃음이 생겨났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형의 웃음에 건성으로 수건을 건네주었다.
“덩치는 산만해서 왜 이렇게 동작이 꿈떠요.”
그녀가 수건을 홱 낚아채며 한 소리 했다. 형이 희미하게 웃다가 목 막힌 기침을 했다.
“환자분이 기침을 하시네요. 어서 물 컵을 가져오세요.”
나는 뚜벅뚜벅 주전자와 물 컵이 있는 탁자를 향해 걸어갔다.
“간호사 빨리빨리!”
그녀가 정성스레 형의 얼굴에 묻어난 땀을 닦아내며 날 재촉했다. 그녀의 재촉과 함께 형의 기침이 크게 이어졌다.
“괜찮아?”
나는 걱정스레 말하며 발걸음을 빨리하며 물 컵을 가져왔다. 물 컵을 받아 든 그녀의 표정이 뚱해졌다.
“아니 내가 물 컵을 가지고 오라고 해서 물 컵만 가지고 오면 어쩌자는 거예요? 물을 같이 가지고 와야죠.”
그녀의 말에 나는 두 손 위에 들린 컵을 내려다보았다. 플라스틱 재질의 물 컵 안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형의 큰 기침소리에 당황해서 물이 든 지 알고 급하게 가져온 것이다.
“간호사! 팬티 가져오라고 하면 고무줄은 빼고 팬티만 가져올 거예요? 지금 고무줄 없이 팬티만 입은 거 아니에요?”
그녀가 내게로 다가와 불쑥 내 바지춤을 잡아 벗기려는 듯 당기며 흔들었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나는 당황한 채 두 손으로 바지가 안 벗겨지려고 잡아채 위로 쭉 잡아 올렸다. 그녀는 눈을 삐죽 세우다 흥, 고개를 돌렸다.
“흉하다 나네야.”
형의 차분한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녀가 손가락으로 내 아랫도리를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내렸다. 한껏 끌어올린 바지가 가랑이 사이로 흉하게 조여들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총부리라도 되는 듯 포위된 병사처럼 손을 번쩍 들었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어서 뛰지 못해요?”
“네?”
“나도 모르게 대답했다.”
“뭐긴 뭐에요. 물!”
“네네.”
나는 내가 왜 이러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급하게 다시 뛰었다. 방학기간 동안 부모가 이런 곳에 유배 보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등 뒤로 형이 켁켁 사래를 참으며 웃는 소리가 들여왔다. 일상에 무너져 가던 나는 남은 악을 그 당돌한 녀석에게 풀어내겠다고 다짐했다.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온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는 급하게 그녀를 찾아 형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형의 시신은 정부에서 수거해 간 후였고 그녀 역시 보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차를 모는 동안 흑백 영화처럼 그녀와 처음 만난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의 아버지가 목사로 있는 교회를 찾아갔다. 가장 싫지만 가장 편안한 공간이라며 농담처럼 그녀가 얘기하곤 했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십자가 앞에 선 그녀가 보였다. 초췌한 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였다. 그녀는 십자가를 향해 멀쩡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하나님. 왜 그 사람을 나한테 보내주셨나요. 이렇게 떠나보낼 것 왜 보내주셨나요…이런 삼류 영화 같은 대사는 읊지 않을 거예요. 그녀석이 죽든 말든. 전 하나도 슬프지 않아요. 왜냐면 사랑하는 연기를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녀가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하나님 저 이제 여우주연상 타도 될 것 같아요. 닦아내도 닦아내도 이렇게 눈물이 멈추지 않네요. 이제 마지막으로 연기를 하고 제 역할을 끝내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늘 하고 싶었던 비련의 여주인공이에요. 사랑하는 남자가 불의의 사고로 죽고 그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여자의 연기에요.”
그녀는 연극 대사를 읊듯 말했다.
“당신이 처음 우리를 만나게 해준 것처럼, 이렇게 하면 그 사람에게 갈 수 있겠지요?”
대사가 끝나자 그녀는 주머니에서 약을 한 줌 꺼내며 보란 듯 웃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하늘나라
어느 역에 내려야
그대 계신 곳
찾을 수 있을까

<어느 역에> 혼호연

그 모습이 정지한 듯 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과 그녀와의 옛 기억이 겹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연기는 완벽했다.
다시 형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회사를 안정시켜갈 무렵이었다. 나는 꼭두각시처럼 힘이 없었고 무기력했다. 내 스스로 나를 움직일 줄 몰랐다. 그런 나에게 그녀가 완벽한 연기로 나를 꼭두각시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술기운에 신세 한탄 같은 형에 대한 험담을 했을까. 내 한숨을 보며 그녀가 혀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왜 한숨을 쉬고 그래. 계속 반말하니까 아니꼬와? 응? 아니꼬우면 말을 해 자식아.”
그녀가 술이 몇 잔 들어가 발개진 볼을 들이밀며 말했다.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대꾸 않고 술잔을 홀짝였다.
“그런 얼굴 하지 마 이 녀석아. 너도 천재야….”
나는 실없는 웃음으로 받아 넘겼다.
“천재? 무슨 소리야 내가 천재라니. 내가 형처럼 공부를 잘했냐 그렇다고 몸이라도 좋아서 운동이라도 잘하냐. 그렇다고 인간성이 좋냐. 연기 하지 마. 난 그냥 이대로 살란다. 멀쩡한 사람 괜히 바람 넣지 마.”
내가 소주잔을 들어 홀짝이려는데 그녀가 급하게 잔을 들어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너도 천재면서 왜 그래.”
나는 실없이 웃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천재잖아. 웃음의 천재….”
나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녀가 소주를 홀짝이며 말을 이었다.
“난 너처럼 웃는 사람 본적이 없어.”
그녀가 내 눈앞에서 눈을 위로 치켜 떠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도 너한테 배웠어. 진짜 웃는 법을….”
나는 말이 없었고 그녀가 실실 웃으며 주정을 부렸다. 처음으로 자신의 집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처럼 그녀를 성모 마리아라고,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하며 교회를 부흥시켰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에게 그녀는 없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연기가 시작되었다.
“아 이 좋은 걸 왜 이제 마셨나 모르겠어. 큭큭큭.”
그녀가 술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그녀는 내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날 방어하고 감추기 위해 만들어온 가면의 연기를 시청하는 시청자였다. 그 여유 없는 웃음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 희망과 근본 없는 행복이라는 가면이 그녀라는 필터를 거치자 진실로 여과되고 있었다. 눈물로 정수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니지만 공기처럼 소중해서 미친 듯이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마치 가느다란 바늘 하나가 풍선을 터트려버리듯 너무나도 쉽게 가면이 벗겨지고 있었다. 그 안에는 알몸의 내가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야, 너 울어?”
그녀가 졸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응? 내, 내가 언제 울었다고 그래?”
“반말 좀 했다고 그러냐 사내자식이 쪼잔하게.”
나는 후다닥 눈물을 닦으며 그녀에게 꿀밤을 놓았다.
“으아앙.”
그녀가 눈물을 찔끔거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괜찮아?”
찔끔거리는 그녀의 눈물에 놀라 손을 놓고 조심스레 고개 숙인 그녀를 걱정했다.
“순진하기는.”
그녀가 고개를 들며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었다. 나는 황망한 생각에 다시 종주먹을 들었다.
“으앙 살려주세요.”
그녀가 고개를 뒤로 한껏 빼며 어색하게 내 손을 뿌리쳤다.
“연기 하지마 이 녀석아.”
“헤헤헤.”
그녀가 날 향해 고개를 쭉 빼며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에 나는 들이대던 종주먹을 놓으며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자 건배, 건배”
그녀가 호탕하게 어깨동무를 하며 잔을 부딪쳤다. 그녀의 팔이 내 목 언저리를 감쌌다. 가슴한구석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 느낌에 종잡을 수 없었다. 가면이 아닌 맨 얼굴로 맞이한 첫날이었고, 꼬맹이가 여자로 바뀐 첫 날이었다. 나는 황급히 술잔을 들이켰다.

그저 무심히
내가 너를 스쳐갔을 뿐인데
너도 나를 무심히
스쳐갔을 텐데

그 순간 이후는
네가 나를 내가 너를
스쳐가기 이전의
세상이 아니다

간밤의 불면과
가을 들어서의 치통이
누군가가 스쳐간
상처 혹은 흔적이라면

무심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너와 나와는
그 무심한 스침이 빚어놓은
순간의 꽃이기 때문인 것이다

<순간의 꽃> 복효근        

나는 급하게 달려가 그녀를 붙들었다. 동그란 수면제가 그녀의 손을 벗어나 교회바닥을 또르르 굴렀다.
“이거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그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내 손을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미쳤어?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소리쳤다. 그녀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음을 토해냈다.
“그 자식이 기다리잖아….”
나는 혼열과 식은땀으로 젖어있는 그녀를 놓지 않았다.
“어떻게 혼자 둬….”
애처롭게 중얼거리는 그녀를 향해 질끈 외쳤다.
“형이라면 너 이러는 거 절대 바라지 않을 거야!”
나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녀가 눈 먼 장님처럼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떨림은 잦아들어 갔다. 난 그녀를 잡은 두 손을 놓았다.
“그래…그 녀석이라면 절대 바라지 않을 거야.”
한마디를 끝으로 그녀는 소리 없이 울기 시작했다.

‘형이라면 절대 바라지 않을 거야.’

내가 뱉어놓은 말을 내가 듣고서야 갑자기 형의 빈자리가 떠올랐다. 눈물에 전염된 듯 덩달아 눈물이 젖어 들었다. 조금씩 조금씩 눈물은 먹처럼 검게 온몸에 번져갔다. 그녀의 울음소리로도 느낄 수 없던 형의 빈자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파도에 밀린 조각배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형의 얼굴이 꿈의 기억이 생생히 되살아 나가 시작했다.

“왜 형을 구하지 않았어. 왜 날 내버려 두지 않았어!”
‘너 때문이야. 네가.’
‘이 비열한 놈.’
‘형 대신 네가 죽었어야 했어!’

어디선가 알 수 없는 얼굴들의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가슴을 채찍질했다. 나는 머리가 텅빈 듯 오열했다. 그렇게 얼마를 울었을까. 머리로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괜찮아. 오빠 탓이 아니야.”
그녀가 찬찬히 내게 말했다. 그 모습에 나는 또 슬퍼져 소리 내어 울었다. 그녀가 다 알겠다는 듯 나를 꼭 감싸며 안아주었다. 나는 콧물을 훌쩍였다.
“잘못은 이 분한테 있어.”
그녀는 울음이 그친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응시하는 시선의 끝에는 거대한 십자가가 우리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녀는 십자가 쪽으로 다갔다. 그녀는 십자가를 향해 눈물을 삼키며 물었다.
“내게 왜 이런 역을 맡기신 거예요?”
단호하게 느껴지던 그녀의 목소리 끝에 웃음기가 흔들거렸다.
“내가 너무 연기를 너무 잘하나요?”
나는 아무말 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서서히 격해졌다.
“네? 가르쳐 주세요. 가르쳐 달란 말이에요. 가르쳐 달라고 가르쳐 달란 말이야!”
그녀는 쥐어짜듯 소리쳤다. 그리고 이내 고열에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그녀의 마지막 말을 나는 들을 수 있었다.
“이제 내 역할은 내가 정해…루시퍼…루시퍼….”
그녀는 정신을 잃으며 어두운 세상 속으로 쓰러져 들어갔다.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 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 달라지만
남자에게서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려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러보리라
울어서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 잔은 너와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또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사모> 조지훈


나는 내 품에 안긴 그녀를 보았다. 내 품에 안긴 그녀는, 내 품에 안긴 그녀는 천사 같았다. 나는 정신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나도 모르게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마치 외딴 섬에 그녀와 나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순간 머릿속으로 먹구름 같은 생각이 칼에 베인 듯 뜨겁게 스쳐지나갔다. 곧이어 그녀의 신음소리가 이어졌고 나는 놀라 사과를 훔친 어린아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순간이었다. 한순간이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으며 매몰차게 고개를 저었다. 순간이었지만 머릿속에 십자가처럼 못 박혀 있는 생각이 안개처럼 부풀어 올랐다. 나는 다시금 고개를 흔들었지만 안개는 늪처럼 더 내 발을 잡아끌고 있었다.  

한순간이었지만
나는
형의 죽음을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잃은 그녀를 태우고 급하게 차를 몰았다.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멸망의 시간이 뒤를 쫓아오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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