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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12월 21일
늦은 밤. 작가지망생 나네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원고지에 시詩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몇 번 끄적이다 잘 풀리지 않는 듯 원고지를 덮었다. 머리맡 성경 위에 올려진 시집을 펼쳐 읽어 내렸다.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
꽃과 술과 촛불이 있어요.
당신이 안 오시면
이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당신이 오신다면 또한
이 모든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봄의 과수원으로 오세요> 루미

나네는 시집을 가슴으로 안으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왜 이런 시를 못 쓰나.”
피식 웃던 나네가 머리맡에 있던 성경을 들었다.
“어디까지 읽었더라?”
나네는 중얼거리며 성경을 휘적휘적 눈으로 읽었다.

보아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요한계시록 16장 15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호세아서 4장 6절

손등으로 턱을 괴고 머릿속에 흔들흔들 떠오른 구절들을 정리했다.

그 날은 도둑처럼 올 것이니
지식이 없어 망할 것이다.

‘지식이 뭘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네가 모르겠다는 듯 웃으며 중얼거렸다.  
“죽이니 살리니 해도 결국은 망한다는 건가? 너무하시다.”
나네는 성경을 덮으며 천장을 보며 벌렁 드러누웠다. 온몸을 힘을 빼고 눈을 감자 늘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좋은 세상, 왜 망하는 걸까.’
그녀를 생각하자 또 시가 생각날 것 같았다. 나네는 입꼬리에 맺힌 그녀의 웃음을 품에 안으며 잠이 들었다.



■심판이 시작되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니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 전서 1장 27절

루시드 드림lucid dream. 자각몽自覺夢이라고도 한다. 꿈을 꾸면서 ‘아! 내가 꿈을 꾸고 있구나.’ 꿈을 인지하는 것을 말한다. 꿈을 꾸며 꿈임을 안다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다. 꿈에서만큼은 법도, 구속도 없이 무엇이든 가능한 나만의 세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세상에서는 내가 신神이 되어 나만의 세상을 종횡할 수도 있고 열렬히 사랑하는 여자를 만날 수도 있다^^*
그녀를 만나고, 형의 도움과 다년간의 노력 끝에 스스로 루시드 드림을 꿀 수 있게 되었다. 한번은 만원버스를 타고 가다 잠깐 졸았다. 꿈속에서 그만, 루시드 드림 안에서 그녀를 만났다. 손이라도 잡아보려고 했는데 긴장이 되어 몸이, 하필 아랫도리가 반응해 버렸다. 중요한 곳이 헐렁한 츄리닝을 뚫고 나오려고 한 것이다. 버스의 덜컹거림에 놀라 화들짝 눈을 떴을 때 조그만 시선들이 후다닥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시선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조만간 내 얼굴을 인터넷에서 볼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루시드 드림 속. 며칠 째 똑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나의 고향 서울, 63빌딩 근처 한강변이었다. 하늘은 어두웠고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꿈속에서는 감각을 느낄 수 없는데 맨살로 닿는 비의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정도로 꿈속의 공간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길게 신경 쓰지 않고 늘 그렇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강은 운동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잠을 자기 전에 강하게 소망하면 그 소망하는 대상이나 사물에 연관된 것이 꿈에 나온다. 며칠째 같은 꿈을 꾸었고 며칠째 그녀가 그 꿈속에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막다.’ 내가 처음 사랑한 여자였다. 오규원 시인의 한 잎의 여자의 한 구절처럼.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여자’였다. 그 여자가 남자를 만났다. 그것이 나의 형 ‘구누’였다. 내가 처음 사랑한 여자는 우리 형과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여자와 햇살처럼 따뜻한 남자는 행복할 것이다. 마치 내가 그녀를 처음 알았을 때, 밤하늘의 별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 것처럼.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난간에 두 손을 얹은 채 한강을 바라바고 있었다. 어젯밤 꿈에서도 그녀가 뒤돌아보자 꿈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이름이라도 불러보고 싶었다.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고 싶었다. 꿈에서라도. 이건 죄가 아니겠지.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어제처럼 꿈이 깨지 않기를 바랐다. 별안간 새들이 푸드득 거리며 날아올랐다. 쥐들이 일사분란하게 사방을 뛰어다녔다. 꿈이 깨지 않았다. 대신 처음 꿈속으로 들어설 때 느꼈던 이질적인 느낌이 벌레처럼 꾸물꾸물 올라왔다.
‘뭔가 이상하다.’
생각을 이을 새도 없이 쿠구궁! 땅이 흔들렸다. 난간을 잡았다.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한강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한강 밑바닥으로 뭔가 시커먼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림자는 더욱 커졌다. 우르르 땅은 연달아 흔들거렸다. 이윽고 물속에서 빌딩보다 더 커다래 보이는 그림자들이 뱀처럼 꾸물대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나는 꿈인 것도 잊은 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면서도 계속 한강에 눈을 고정했다. 이윽고 잔잔하던 수면이 파도치듯 성을 내기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뻣뻣하게 굳은 내 어깨위로 판타지소설의 마지막 보스로 나올 법한(‘용사들은 모두 죽었다.’는 제목의)거대한 용이 솟아올랐다.
머리 중앙에는 유니콘같은 뿔이 박혀있었고 삥 둘러 빛나는 면류관을 얹고 있었다. 흔한 괴성도 없이 고양이같이 찢어진 눈동자를 빛내며 침묵 속에 서서히 수면위로 올라왔다. 여섯 머리가 뒤이어 수면위로 올라왔고 다 올라왔을 때는 그 머리가 63빌딩, 63층 꼭대기 위로 올라와 있었다. 고래만한 몸통에 달린 일곱 머리는 저마다 목을 비틀어 대고 있었다.
‘스케일이 너무 큰데?’
나는 진땀을 닦으며 애써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머리만큼이나 거대한 꼬리가 한강 다리 아래서 다리를 부수며 하늘 위로 솟구쳤다. 다리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자동차만한 파편이 덮쳐왔다. 나는 몸을 던져 그녀를 가렸다. 파편은 내 머리를 스치며 운동하는 사람들을 덮치며 뒹굴었다. 파편이 덮쳐 옆에서 사람의 팔다리가 날아가는데 아무 일 없다는 물처럼 흘러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생경하게 들어왔다.
‘여기는 꿈속이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진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파편이 스쳐간 머리 옆으로 붉은 피가 줄줄줄 솟았다. 손바닥으로 피를 닦아내어도 붉은 피가 한껏 옷을 적셨다.
아파트같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은 땅에 부딪친 충격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떨어질 때 느끼는 쇼크로 죽는다고 한다. 땅에 충격을 당하는 것은 그 다음이고, 놀랐을 때 심장마비로 죽듯 정신적 충격으로 먼저 쇼크사하는 것이다. 지금이 그러했다. 꿈인 줄 알면서도 죽는다는 생각이 손 안의 땀처럼 흥건했다
“크어어어엉!”
별안간 들려온 포효에 놀라 짐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일곱 머리가 비명과 포효를 번갈아 지르며 사방으로 불과 연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건물들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잿더미가 되어 굴렀다. 그 위압적인 모습에 나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일곱 머리 중 가운데 머리의 녀석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뱀같은 눈과 마주쳤다. 머리는 먹이를 발견한 맹수처럼 나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칼을 휘두를 용기 같은 건 칼집에서 뽑히기도 전에 목숨을 잃었다. 도망쳐야 한다.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꿈이라는 것도 망각한 채, 나는 굳어진 몸을 힘겹게 움직여 도망치려했다. 멈춰섰다. 내 뒤에 그녀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일곱 머리용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슬그머니 움직이던 머리가 테이프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갑작스레 커다란 입을 벌리며 삼켜들었다. 온 세상이 시커먼 굴속에 빨려들어 간다고 느낄 즘. 나는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한동안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뭐야 이거…손이나 한 번 잡아보나 했는데…켁켁.”
사래가 걸려 숨이 막혀 나왔다.
“…하필 악몽이라니.”
나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탁하게 웃었다. 식은땀이 흥건하게 이마를 적시고 있었다. 숨을 고르는데 옆에 놓인 성경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전에 본 성경 구절이 생각나 급하게 성경을 뒤적였다.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요한 계시록 12장 3절

계시록의 한 줄 한 줄과 꿈에서 본 큰 용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더 이상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성경위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어디서 피가 떨어지는 거지?’
나는 무심결에 이마를 훔쳤다. 나는 이마를 훔친 손등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손 등으로 붉은 피가 묻어났다. 나는 놀라 다시 손바닥으로 이마를 훔쳤다. 손바닥으로 흥건하게 붉은 피가 묻어났다.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뜨거운 피가 머리에서 볼을 타고 내려왔다. 용이 다리를 부수며 올라올 때 떨어진 파편에 맞은 자리에서 뱀 같은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다리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꿈. 평소와는 다른 알 수 없는 이질감. 용과 혼란. 그 안에 그녀가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어지럽게 서랍장을 뒤졌다. 물을 찾을 겨를도 없이 억지로 수면제를 삼켰다.

다시 63빌딩이 있는 자리였다. 용의 모습이 보였다. 똑같은 꿈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상황을 정리할 생각도 못하고 주변을 살폈다. 내가 있던 자리는 용에게 먹혀 호수처럼 파여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도시는 곳곳이 불타고 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불과 연기를 뿜어대던 용이 멈췄다. 불을 뿜던 머리가 나를 쳐다봤다.
‘왜 또 나야.’
나는 울상을 지었다. 으르릉. 용이 피할 새도 없이 나에게 덮쳐왔다. 나는 그녀에게 한걸음 가지도 못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콰광. 쾅.
귀를 찢는 소리에 뒤이어 천천히 실눈을 떴다. 나를 덮쳐오던 머리가 목이 잘린 채 한강 다리기둥에 쳐 박혔다. 잘린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내 몸을 적셨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눈동자 안으로 백마 한 마리가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백마 위에는 날렵한 사내가 그의 눈빛처럼 투명하게 빛나는 검을 들고 있었다.
구누. 나의 형이었다.
내게 루시드 드림을 가르쳐준 형이었다. 천재라고 불리는 형이었다. 그녀와 결혼을 약속한 형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식물인간이 된 형이었다. 몇 년 째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형이었다. 형은 바삭바삭 과자를 베어물며 우물우물거리고 있었다. 형은 나와 그녀 사이에서 잠시 머물다 예전의 그 사람 좋은 웃음을 살며시 깨물며 말했다. 몇 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 형의 목소리였다.
“안녕.”
그리고 들고 있던 과자를 나에게 던졌다. 나는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그제서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안녕이라니.’

백마가 발을 굴러 짐승을 향해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악마와 같이 입을 벌리고 있는 7머리 10뿔 짐승을 향해 뛰어드는 그 모습은 마치 전설의 용사처럼 용기 있고 고귀해보였다.   ‘백마.’
형이 허리에 두른 검을 하늘 위로 뽑아냈고 7머리 10뿔 짐승의 눈도 광기를 형형하며 눈이 부신 붉은 빛이 공중에서 충돌했다.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세상은 무너질 듯 흔들거렸다.
‘일곱 머리 열뿔 용과의 싸움.’
어지럽게 이어지던 생각은 성경의 한 구절에서 멈췄다.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요한 계시록 19장 11절  

형의 검과 짐승의 뿔이 부딪치며 번쩍하는 빛이 사방을 꽉 채웠다.
‘뭐가 어떻게 돼가는 거야.’
나는 울먹였다.

형은 강했다.
용의 이빨이 아슬아슬하게 형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머리들이 하나둘 목에서 떨어져나갔다. 용은 비명을 질러댔다. 마지막으로 중앙에 위치한 가장 커다란 용의 목을 잘라내자 용의 몸은 한강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한강물이 파도처럼 한강 주변을 덮쳤다. 파도를 피하고 몸을 추스르며 형을 바라봤다. 형은 잘려진 머리 쪽으로 뚝 떨어졌다. 기세 그대로 형의 검이 용의 머리에 박혀들었다.
머리는 시커먼 연기를 내며 뒹굴었고 곧 사람의 형상을 취하며 일어섰다. 용의 머리에서 태어난 사내는 흰 사제복에 토끼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사내는 부서질 듯 흔들거리는 가면을 한손으로 붙들고 있었다. 가면 아래로 붉은 핏줄기가 후드득 터져 나왔다. 형이 다가갔다. 다가오지 말라는 듯 형을 향해 비틀비틀 손을 내밀었다. 형이 있던 주위가 꽃밭으로 변하며 바닥이 꺼져 내렸다. 백마가 허공을 짚으며 비틀거렸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꽃가지들이 형을 덮쳤다. 꽃은 서로 엉켜들며 형의 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둥글게 뭉쳤다. 가면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 눈빛이 섬뜩했다.
가면이 고개를 숙였다. 가면의 배로 투명한 칼날이 뚫고 들어와 있었다. 형이 나무줄기를 뚫고 나와 가면의 등에 칼을 꽂아 넣은 것이다. 가면이 피를 토하며 몸을 빼내 도망쳤고 도망치는 가면의 목으로 투명한 칼날이 다시 파고들었다. 가면은 넘어질듯 휘청거리며 뒤로 날았 도망쳤다. 가면은 비틀거리며 착지했다. 목을 움켜잡고 잡고 꼿꼿이 서려고 노력했다. 목 중앙으로 붉은 핏줄기가 커튼처럼 흘러내렸다. 가면이 손을 때자 반쯤 잘려나갔던 목에 꽃이 피며 상처를 뒤덮어갔다. 진정할 새도 없이 가면이 서 있던 바닥이 검게 꺼졌다. 가면이 휘청거렸고 형이 백마를 탄 그대로 어깨로 가면을 박았다. 가면은 한참을 뒹굴며 다리 밑의 기둥을 향해 날아갔다. 가면은 육중한 기둥을 종잇장처럼 뚫고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백마의 날개가 높이 펴졌다. 형은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듯 백마를 타고 날았다. 순간 가면의 눈이 빛났고, 검은 그림자가 나와 그녀를 감쌌다.
‘어…?’
나는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형의 손에 쓰러진 용의 머리중 하나가 내 머리 위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나는 오금이 저려 멍청하게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형이 급하게 말머리를 돌리며 들고 있던 검을 던졌고 용의 머리를 뚫고 땅바닥에 부르르 박혔다. 나는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용의 머리가 검은 연기가 되어 스르륵 사라졌다. 형은 무리한 움직임에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 허공에서 비틀거렸다. 가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번쩍 날아와 같이 자폭이라도 하려는 듯 형을 와락 껴안았다. 가면의 몸에서 꽃줄기가 피어나 순식간에 형을 덮쳤다. 형은 꼼짝도 못 한 채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꽃에 뒤덮였다. 밖으로 삐져나와 있던 백마의 날개가 부러지며 안으로 꺾여 들어갔다. 꽃은 꽃밭을 만들며 강변으로, 찰랑거리는 한강 위로 솜사탕처럼 퍼져나갔다. 사방을 덮치는 아릿한 꽃향기에 정신이 몽롱해져 갔다. 형을 조이던 희디흰 꽃들은 동화 잭과 콩나무에 나오는 나무줄기처럼 커다란 기둥을 만들며 하늘높이 엉켜 올라갔다. 가면의 입 꼬리가 함께 올라갔다. 흰 꽃이 형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슬픔의 눈물인지 공포의 눈물인지 나는 내 눈물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이건 꿈이야…”
나는 멍하니 웃으며 중얼거렸다. 눈물 너머로 그녀가 떨어진 형의 검을 들고 가면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내가 덧없이 중얼거리는 동안 그녀는 내 옆에 꽂힌 검을 빼들고 형을 구하려고 가면을 향해 달려갔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허둥지둥 따라갔다. 그녀가 가면을 향해 휘청, 검을 휘둘렀다. 가면의 등에 길다란 상처가 났다. 가면의 눈이 그녀를 향해 홱 돌아갔다. 그녀는 놀라 그대로 검을 잡은 손을 놓았다. 가면의 날카로운 손이 꽃나무에서 손을 때며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 목을 조여오던 힘이 줄어든 틈을 타 형이 꽃줄기 속을 떨쳐 나왔다. 형이 소리치며 달려들었지만 그녀를 향해 꽂히는 가면의 손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나는 그녀를 잡고 뒹굴었고 가면의 손은 허공을 스쳐 지났다. 달려온 형의 손이 가면의 얼굴을 낚아챘다. 형의 손가락이 가면의 얼굴을 부러트릴 듯 죄여왔다. 가면은 크억 큭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형의 팔을 두 손으로 잡으며 몸을 비틀었다. 형의 눈이 분노로 일그러졌고 꽃줄기들이 다시금 형을 뒤덮으며 땅 밑으로 뿌리를 박았다. 형은 아랑곳 않고 가면의 목을 쥔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엉켜진 꽃들이 질질질 형의 등에 붙어 끌려왔다.
“으아아아아!”
형이 고함을 지르며 가면을 다리기둥에 박아 넣었다. 가면의 입가로 피가 터져 나왔고 꽃들이 뿌리가 잘린 듯 형의 등 뒤로 뿌드득 떨어져 나갔다. 형이 손을 놓자 가면은 그대로 두 팔을 늘어트리며 밭은 숨을 내뱉었다. 형은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듯 주먹을 높이 들었다. 늘어져 있던 몸뚱이에 걸쳐져 있던 가면 한쪽이 연기처럼 부서져 나갔다. 얼굴의 일부가 드러났다. 형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 곧바로 가면이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보셨군요.”
가면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형은 마지막 일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면이 삐걱 허리를 세우며 일어났다.
“끝을 내셔야죠….”
가면이 형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다가왔다. 형은 아무 말도 못한 채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꽃가지가 형의 발을 낚아채며 던졌다. 형은 종이비행기처럼 날아가 제방에 부닥쳤다. 가면은 어느새 새로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형을 형해 걸어갔다. 쿨럭쿨럭, 형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몸부림치는 그녀를 뒤에서 안은 채 그 모습을 주시했다.
가면의 등 뒤로 솟아난 꽃 이파리들이 하늘하늘 하늘로 날아올랐다. 천천히 걸어가는 가면의 주변으로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들이 피어올랐다. 형도 마주 일어선 채 움직이지 않고 가면을 주시했다. 가면이 형의 검을 뽑아 들며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내 얼굴을 죽이지 못하겠습니까?”
가면이 형의 코앞까지 왔다. 기세등등하던 형은 움직이지 않았다. 형은 가면의 눈을 주시한 채 입을 열지 않았다.
“내 얼굴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당신은 날 죽일 수 없습니다. 날 죽일 수 없다면, 당신이 죽어야합니다.”
형의 검이 형의 가슴에 꽂혔다. 가면이 형의 검으로 형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형은 힘없이 무너졌다. 그녀는 내 안에서 몸부림치다 그 모습을 보고 정신을 잃었다. 형은 쓰러지며 나를 향해 웃었다.
잘했다.
형의 웃음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웃기다. 깨면 형에게 꿈 이야기를 해줘야겠다. 형 진짜 멋있었다.”
나는 덧없이 중얼거렸다.

‘꿈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는 온통 꽃밭으로 변해가며 한강을 삼킬 듯 커져만 갔다. 형은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듯 꽃에 둘러싸여 한강 다리 위 허공에 못 박혀 있었다. 가면은 내게 잠시 눈길을 주더니 꽃으로 화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땅이 다시 우르릉 흔들거리더니 머리가 다시 붙은 나머지 여섯용이 63빌딩 뒤로 서서히 올라왔다. 머리는 각자 연기로 화하더니 가면처럼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 63빌딩 옥상 위로 내려앉았다. 그들은 각기 동물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여섯 가면이 옥상 위로 내려앉자 그 중앙에 꽃이 사람 형상으로 피어오르며 형을 죽인 토끼 가면이 솟아올랐다. 여섯 가면이 토끼 가면을 보좌하듯 자리를 잡았다. 토끼 가면이 앞으로 나와 명령하듯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귀를 막아도 가슴에 칼을 긋듯 생생하게 새겨 들려왔다.
“인간들이여 많이 기다렸다. 드디어 너희가 고대하고 기다리던 심판의 때가왔다. 하나님이 요한계시록에서 예언한대로 우리 일곱 천사가 너희를 심판하러 왔도다. 앞으로 칠일 간 우리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지상에 임할 것이다.”
잠시간의 정적이 후 토끼 가면이 다시 말을 이었다.
“마지막 날 이후 모든 심판을 견뎌낸 자들에게 꿀보다도 달콤한 천국이 임할 것이다. 물론 내일 밤 너희들의 꿈에 찾아갈 두 번째 천사의 심판에서 살아남았을 때 얘기지만.”
그 말을 끝으로 토끼 가면과 천사들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늑대 가면을 쓴 천사만이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다. 늑대 가면이 흰 사제복을 벗어 던졌다. 독일 군복을 입은 사내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내가 차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천사님의 말을 잘 들었지? 드디어 시작이야.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심판을 오늘에서야 이루게 되었어.”
그 차가운 목소리는 언어가 아니라 몸에서 몸으로 본능적으로 전해지는 듯 분명하게 들려왔다. 사내가 늑대 가면을 벗어 땅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 속에는 전 세계 사람들이 잊을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 세계 2차 대전을 일으키며 전 세계를 피로 물들인 장본인이었다. 히틀러가 오른손을 앞으로 쭉 뻗으며 독일군식 경례를 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63빌딩은 물론 한강주변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내 옆으로도 검은 얼굴의 사람들이 스물스물 나타났다. 사람들이 느리게 내 곁을 둘러쌌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 얼굴들이 제정신 같지 않았다. 나는 놀라 주위를 경계하며 몸을 움츠렸다. 히틀러가 다시 입을 열어 외쳤다.
“우리 죽은 자들이 너희 산자를 심판하러 갈 것이다. 내일 밤 10시 이 꿈속에서 너희들이 사는 지상 세계로 내려가겠다. 그때가 너희들에겐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히틀러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퍼져갔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죽은 자들이라니? 멸망이라니 심판이라니, 그런 게 진짜로 온다는 거야?’
히틀러의 웃음에 정신이 몽롱해져갔다. 검은 사람들이 흉흉한 얼굴로 좀비처럼 나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그녀를 더 세게 안았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의 입에서 꿈이야, 악몽이야 힘없는 중얼거림만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좀비 같은 사내들이 달려들어 나의 입을 막은 채 팔다리를 잡아끌었다.

나는 이부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늘어지는 하품도 없이 생경한 얼굴로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식은땀이 온 몸을 적시고 있었다.
‘너무 생생한 꿈 이었어…형 괜찮은지 병원에 전화라도 해볼까?’
간밤에 꾼 꿈에 찝찝한 것도 잠시, 아랫도리가 하늘로 솟구쳐 있는 모습에 긴장이 풀리며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꿈인데…괜히…더 잘까?’
나는 우습다는 생각과 함께 머리를 벅벅 긁다가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의 전화는 형이 식물인간이 되어도 끊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형의 전화를 죽이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 통화음을 들으며 다른 손으로 TV 채널을 돌렸다. 아나운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채널을 멈췄다. 뉴스 속보였다.
“모두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다시 한 번 속보 전합니다. 재차 확인결과 간밤의 악몽은 전 세계 60억 인구가 동시에 같은 꿈을 꾼 것이 맞으며 믿을 수 없게도 부분적으로 피해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참혹한 피해의 모습을 보면 어제의 꿈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꿈속에서 예언한 자칭 일곱 천사들의 심판이 오늘 밤 이루어질 지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각국 정상들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거?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한 날 한 시에 같은 꿈을 꾸었단 말이야? 어제 그 꿈을? 세상이 심판을 당한다고? 진짜야? 설마….’
나는 티비에 집중했다. 응급실의 모습이 비쳐져 나오며 사망자 명단이 티비에 얼굴과 함께 떴다. 사망자 중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익숙했다. 분명 어제 용의 꼬리에 다리가 부서지며 그 파편에 팔다리가 잘렸던 사람이었다.
‘용에게 당한 사람 중에 실제 사망자가 나왔어…?’
나는 새삼스레 볼을 만졌다. 어제 밤에 파편을 피하던 자리에서 나온 피가 딱딱하게 말라붙어 있었다. 머리가 띵했다. 무언가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 한 충격이었다. 뒤이어 아나운서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개인병실을 비추었다. 널찍한 병실은 온 벽이 그로테스크한 모양의 꽃으로 덮혀 있었다. 그리고 카메라는 병실 벽에 십자가 형태로 꽃에 목 박혀 있는 남자의 모습을 클로즈업 했다. 나는 들고 있던 전화기를 떨어트렸다. 형이었다. 정신을 추스를 새도 없이 떨어트린 전화기 너머로 목 막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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