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교수님이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오데사의 사도임을 나타내는 백색 사제복을 입고 일곱 별이 박힌 모자를 쓴 자와, 그를 따라온 듯한 무리들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사도는 구석에 몰린 쥐 꼴이 된 우리를 향해 고양이처럼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저희 사정이 급해 부득이하게 신성력으로 마차를 멈추었습니다. 교수님도 저희의 용건이 무엇인지 아실 거라 믿습니다.”

“압니다. 하지만 별 도움은 되지 못할 것 같군요.”

“지금은 교수님께서 저희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시는 것 자체가 돕는 것입니다. 같이 가 주시지요. 왜 이 시간에 수도를 벗어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알겠소. 휴드, 자넨 학교에 가서 대기하게. 이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곧 돌아가겠네.”

교수님은 나를 향해 부자연스럽게 눈을 두어 번 깜빡인 후 돌아섰다. 모른 체하고 돌아가란 얘기겠지. 하지만 오데사의 사도가 고개를 까딱이자 세 명의 남자가 마차로 와 나오란 신호를 했다. 교수님이 뭐라고 항변할 새도 없이 사도는 침착하게 말했다.

“사정을 아는 사람은 모두 저희와 동행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일은 자칫 외부로 퍼졌다간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짐까지 들고 있는 걸 보면 어쩌다 이 마차를 탄 것 같진 않군요.”

뭐라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난 깔끔하게 포기하고 짐을 멘 채 마차에서 내렸다. 이들을 따라가며 흘끗 마부석을 보니 마부가 어느새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이것도 신성력이란 것의 힘이겠지. 난 속으로 이를 바득 갈며 이들의 뒤를 따랐다. 사도와 교수님이 나란히 걷고, 이들의 뒤를 나와 무리들이 졸졸 따라가는 식이었다. 이럴 때 ‘사람살려! 납치야!’라고 외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교수님과 내가 성스러운 사도의 일행을 한꺼번에 납치해 끌고 가는 식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놈의 불합리한 세상 같으니.
왜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가나 했더니, 이들이 향한 곳은 가까운 곳에 있던 오데사의 회당이었다. 회당의 신관이 뛰어나와 사도에게 절하고, 사도가 이곳을 잠시 비워달라 요청하자 황급히 회당의 인원을 소개하였다. 회칠을 새로 하는 중인지 비릿한 냄새가 나고 군데군데 잿빛 얼룩들이 보였다. 사도는 얼굴을 찡그리며 창문을 모두 열라 지시하고 강연대 앞에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나와 나머지 무리들이 신도들이 앉는 긴 의자에 앉았고, 교수님은 사도의 앞에 앉아 사도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자, 먼저 제가 누구인지 밝혀야겠군요. 전 오데사의 귀입니다.”

“제 이름은 아시리라 믿습니다.
오데사의 팔이 오지 않아 다행이군요.”

“그분은 좀 과격하신 분이지요. 하지만 제 선에서 끝나지 않을 경우, 그분이 오실 가능성도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매 5년마다 신관 중 가장 신성력이 강한 자들로 선정되는 오데사의 사도는 오데사의 신체부위를 하나씩 상징한다. 눈, 코, 귀, 입, 머리, 팔, 다리. 각자 맡은 임무가 있지만 그 중 귀는 종단과 관련된 각종 탐문탐색을, 팔은 각종 명령과 필요할 경우 무력사용까지 할 수 있다. 만약 정말 오데사의 팔이 왔다면, 다짜고짜 도망치려 한 이유부터 추궁하고 윽박지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시작할까요. 우린 교수님이 상아탑이 주장하는 수위 실신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라 생각하지 않아요. 아마 상아탑에서도 교수님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요. 다만 시간을 벌기 위해 우리가 교수님께로 신경을 돌릴 수 있도록 조치한 것 같습니다.”

좀 의외의 발언이라 놀랐다. 보통 저런 건 협상용 카드로 숨겨두었다 나중에 꺼내는 게 아닌가? 하지만 생각해보면 저 사도는 노회한 인물이다. 일부러 자기는 상대방을 믿고 있다고 전제해 방심시킨 후 필요한 정보를 빼낼 수도 있는 것이다. 교수님은 조금 흔들린 것 같았지만 곧 평상심을 되찾았다.

“그거 감사한 말이군요. 예, 전 마침 그 근처를 지나던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께서는 어떻게 저를 찾으셨습니까? 그리고 왜 저를 황급히 잡아들이셨습니까?”

“상아탑 앞에서 교수님의 이름을 밝히시지 않았습니까? 오데사의 눈에게는 그 정도만으로도 여러분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에 앞서 저도 묻고 싶군요. 교수님께서는 왜 그 근처를 지나고 있었습니까? 제가 조사한 바로는 교수님은 평소 연구에 몰두할 뿐, 산책 같은 취미는 없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혹시 상아탑에 대해 뭔가 신경쓰이는 거라도 있으셨던가요?”

교수님은 잠시 무릎을 몇 차례 부딪치며 생각하다 손을 벌렸다.

“어디 그쪽의 추측을 모두 말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을 정정해 드리지요.”

“좋습니다. 그 편이 빨라서 좋겠군요. 사실 전 이야기를 빙빙 돌려서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답니다.”

사도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수님께 걸어갔다. 또 신성력을 이용한 장난을 칠 것 같아 내가 반사적으로 제지하려 했지만 바로 제지당했다. 교수님도 나와 마찬가지 생각이었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만 사도는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뒷짐을 진 채 교수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한 바퀴를 다 돌고, 두 바퀴째를 돌며 그는 자신의 발걸음에 맞춰 낭랑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브릭 교수. 국립 엘드 대학의 고고학 교수로 재직중. 가족관계 독신. 취미 연구. 거주지는 연구실에서 십오 분 정도 떨어진 거리의 하숙방. 학생들의 평판은 보통이며, 교수들의 평가는 나쁜 편. 남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연구는 거의 혼자 하며, 학교의 지원도 적음. 그런 그가 무리수를 쓰며 연구비를 타내 구입한 물건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고대의 석관.”

중간도 가기 전에 얼굴이 하얘졌던 교수님이 석관 이야기가 나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사도의 손이 어깨에 닿자마자 교수님의 몸이 의자 위에 무너져내렸다. 또 신성력인가! 신성력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마법은 일반인에게 남발할 경우 처벌받지만 신성력은 어떤 경우라도 칭송받는다는 것이다. 이유와 재생을 모토로 하는 신성력이기 때문에 절대로 무해하다는 인식이 대중에게 박혀 있는 것이다. 지금처럼 심문과 협박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에도! 난 시선만으로 사람을 때려눕힐 수 있기를 바라며 사도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나를 억누르던 자가 대뜸 내 뒤통수를 갈긴 후 뒤돌아보게 했다. 그들을 뿌리칠 힘이 없는 난 이제 교수님과 사도의 목소리만 들어야 했다.
교수님의 침묵 속에서 사도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당신을 주목하고 있었소. 브릭 교수, 당신은 석관과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겠지. 그것이 자신의 연구에 결정적인 증거가 되리라 믿으며. 그건 당신의 연구라는 좁은 목적에서 보았을 땐 그렇다는 얘기지. 당신은 중요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어.”

“난 아무것도 망각한 바 없소.”

“아니, 있어. 네 연구는 오데사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 그걸 지금까지 묵인한 것은 개 몇 마리가 짖는 것 따윈 신경쓰지 않겠다는 종단의 관용이었지. 하지만 너는 그것을 넘어서버렸지. 그 물건은 우리 종단이 처분해야 할 물건이었지. 너나 상아탑 따위가 손에 넣어 희희낙락해 할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었어.”

어느새 그의 말투는 고압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난 눈을 부릅뜨며 그가 교수님께 계속 신성력을 시전하고 있는 게 아니길 바랐다. 사도의 발자국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불안은 점점 커져 갔다.

“종단은 그 석관이 발굴된 사실을 조금 늦게 접했어. 정확히는 네가 그것을 손에 넣은 다음에야 조사를 시작했지. 네 평소 연구와 물건의 상관관계를 깨달았을 땐 물건이 상아탑에 넘어간 뒤였고, 뒤늦게 사람을 파견했을 땐 악마가 깨어나 상아탑을 나선 뒤였지. 그 머저리 마법사들은 눈뜨고 악마를 놓쳐버렸고.”

“그 소녀는 악마가 아니야!”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사도의 말을 끊었다. 고개를 돌릴 수 없어 벽을 보는 채로 다시 외쳤다. 흰 벽 너머로 살짝 비치는 거무스름한 더러움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제기랄!

“내가 봤어요. 그 소녀의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우리처럼 따뜻한 피가 흘렀던 사람입니다. 가사상태에 빠져있다 마법으로 깨어난, 그저 오천 년을 거슬러왔을 뿐인 사람이라구요! 무슨 자격으로 그 불쌍한 소녀를 악마라 규정하는 겁니까!”

“오데사가 그녀를 악마로 정했다. 여기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흥! 당신네들의 신 따위! 당신들만의 잣대로 섬기는 신이, 그를 섬기지 않는 자에 대해 심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 애당초 악마란 게 있기나 한 겁니까? 아무리 신에게 기도해도 응답을 내려주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악마 아닙니까!”

갑자기 나를 잡고 있던 자들이 내 몸을 휙 돌렸다. 난 몸을 가누며 다시 마주치게 된 사도를 노려보았다. 사도는 힘없이 의자에 늘어져 있는 교수님에게서 시선을 떼어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브릭 교수의 제자답게 재미있는 소리를 하는군.”

“아니, 전 대학교에 들어갈 무렵부터 이미 이런 사상이라.”

“그렇단 말이지. 자네에겐 그릇된 사상을 고칠 기회를 줘야 하겠군.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바쁘니, 그 이야긴 천천히 나누도록 하세. 어제 자네는 석관을 갖다준 것뿐만 아니라 악마를 직접 보기까지 한 건가?”

이런, 실수다. 교수님은 단순히 과거의 연구내용이 거슬리는 것이지만, 내가 소녀를 본 데다 실험에까지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난 문답무용으로 악마 소환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누명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오데사의 귀 앞에서 과연 얼버무림이 통할까? 눈앞의 교수님을 생각하니 차마 모험은 할 수 없었다. 난 필요한 만큼만 솔직해지기로 했다.

“네. 마법사 씨가 그녀를 소생시키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자네의 이름은?”

“휴드.”

“그 마법사의 이름은?”

“게펜타이너.”

“실험은 어디서 이루어졌지?”

“그의 연구실.”

묻지 않는 내용은 철저히 함구하는 방식으로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대는 촘촘한 질문공세로 날 옭아매려 하고 있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어차피 그들이 조사하면 다 나올 내용이라 난 착실하게 대답해주었다. 사도는 그녀의 용모와 특징 등을 시시콜콜할 정도로 알아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이제 여러분에 대한 심문은 일단 끝났습니다.”

이제 와서 가식적인 존댓말로 돌아간 오데사의 귀는 부하들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나를 구속하던 자들이 나를 놓아준 후 밖으로 뛰어가고, 두 명이 남아 사도의 옆에 섰다. 난 사도와 교수님 사이로 뛰어가 그의 시선에서 교수님을 지켰다. 사도는 그런 나를 보며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에는 푸른 빛이 맺혀 있었다.

“그걸로 뭘 할 속셈이죠?”

“얘기가 끝났으니 마무리를 할 셈이라네, 휴드 군.”  

“……하지 마시죠. 아는 것 다 대답해줬으니 이걸로 된 거 아닙니까?”

“내가 자네 이야기를 왜 들어야 하는가? 날 막으려면 날 설득해보게나.”

그는 손을 들어올린 채 다시 웃었다. 저 웃는 표정은 감정에서 우러난 게 아니라 무의식적에 기억하고 있는 얼굴근육의 움직임을 끄집어낸 것에 불과하다. 신도들을 축복하는 표정이, 신에게 거슬리는 무리를 처단할 때도 똑같이 나올 수 있다는 게 무서웠다. 난 어떻게든 할 말을 생각해보았지만 생각은 마음 속에서 점점 헝클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대답은 내가 하겠소, 오데사의 귀.”

정작 대답을 한 것은 내 뒤에 있던 교수님이었다. 신성력으로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아까의 꼬장꼬장한 기세가 거의 사라져 있었다. 교수님은 나직하게 신의 사도에게 말했다.

“종단이 왜 그 소녀에게 집착하는지 알 수 있소. 그 소녀에게 내재되었다는 악에 대해선 잘 모르겠소. 좀 더 조사하고, 그녀와 대화해 봐야 알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확실하지요. 당신은, 종단은 그 소녀가 구세주와 비슷한 행위를 했다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는 것. 즉, 죽음에서 깨어나 부활했다는 사실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게지요.”

저게 교수님의 연구내용이었던가. 난 나직하게, 그러나 거침없이 들리는 교수님의 말에 전율했다. 학교에선 단순히 청동기 시대의 생활에 대해서만 강의했던 교수님이, 실은 엘드의 국교인 오데사 교를 뿌리부터 뒤흔들 수 있는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 말이 먹혀들어갔는지 오데사의 귀는 처음으로 그 표정을 허물어뜨렸다.

“이……이 불경한! 집어치우지 못해! 신의 사도 앞에서 무슨 망발인가!”

“오데사의 현신인 구세주는 죽음을 초월했다고 알려져 있소. 그건 신의 사도에게도 불가능한 일. 오직 현신만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소. 그런데 이 소녀가 오천 년을 뛰어넘어 되살아났다고 하면, 종단은 과연 이를 널리 알릴까요? 그보다는 조용히 덮어두는 게 논란의 여지를 없애는 좋은 방법이겠지요.”

“헛소리. 우린 단지 악이 깨어났다는 신탁에 따라 행동할 뿐! 당신도 알다시피, 그 소녀에게 내재된 어둠의 크기는 엄청나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엘드에 크나큰 저주가 내릴 수도 있소. 우린 그것을 방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뿐이오. 뿐만 아니라, 당신과 그 게펜타이너란 작자에겐 일이 처리된 후 분명하게 책임을 물을 생각이니 각오하시지!”

“각오야 처음부터 하고 있으니, 당신들의 기원을 지키기 위해서 그 증거를 없애려는 행동이나 당장 그만두시오!”

교수님은 아까까지와는 달리 사도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진 않았지만, 교수님의 모습은 일어나 있는 사도보다 거대하게 느껴졌다. 신의 권위를 무기로 삼던 사도는 더욱 푸르게 빛나는 오른손을 높이 쳐들었지만 그것을 내리치지는 않았다. 그 부들거리는 손에 맺혀 있는 빛은 잠시 후 사그라들었다.

“당신의 제자와도 할 말이 많지만, 당신과는 나중에 정말 제대로 이야기를 해 봐야겠군. 지금은 당신과 말싸움을 하느니 그 소녀를 잡으러 가는 게 효율적일 테니까. 당신과의 대화는 이런 협소한 곳이 아니라 종단 본부에서 하겠소. 일이 끝나는 대로 종단 이단 심문 회의를 개최할 생각이니, 오데사의 일곱 사도를 모두 친견할 수 있는 영광을 얻을 수 있을 게요.”

교수님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비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도는 더 말하지 않고 소매자락을 떨치며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두 남자는 사도를 문까지 배웅한 후 그대로 나가 밖에서 문을 잠갔다. 얼굴만 내밀 수 있는 창문 두어 개는 이곳을 나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더 이상 폭력을 행사하거나 본부로 끌고 가지 않은 건 차라리 고마운 일이다.
회당 안에 둘만 남게 되자 갑자기 이곳이 넓게 느껴진다. 여름이니 이곳에서 하루이틀 보내는 건 별 무리 없을 것이다. 난 일단 교수님을 부축해 긴 의자에 눕히고 술을 다시 꺼냈다. 교수님은 몸을 일으켜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드러누웠다.

“아까 사도에게 당하신 건 어떠세요? 좀 괜찮으신가요?”

“그래. 난 괜찮아. 자네는 어떤가?”

“저도 괜찮습니다. 그보다 일단 좀 쉬시죠. 아침부터 무리하셨으니, 이참에 눈 좀 붙이세요.”

“그럴까. 그럼 난 잠시 자겠네. 무슨 일 있으면 깨우게.”

교수님은 사양하지 않고 바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폐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피시시 하는 힘빠지는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내뱉어졌다. 사실 난 교수님이 피곤해서 주무신다기보다는 술 두 모금의 힘 때문이라는 사실에 더 무게를 두고 싶지만, 어느 쪽이든 교수님을 쉬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난? 의외로 별로 지치지 않았다. 정신적으로 고양되어 있기 때문일까. 사도에게 통렬한 한 방을 먹인 교수님의 말을 떠올리면, 여기까지 끌려온 보람이 좀 생기는 것 같다. 그렇다고 미래의 암울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지금은 생각하기 싫다.
배가 고파 가방에서 봉투에 든 빵을 꺼냈다. 기억을 되짚어 가장 오래 전에 만들어둔 빵을 집어 우물거리다 문득 가방 안의 책이 생각났다. 교수님이 쓴 논문이라고 했지? 난 그것을 꺼내 보았다. 표지도 없이 대충 제본만 되어있는 상태이지만, 이건 무려 원본이었다. 갑자기 황송한 마음이 일어 조심스럽게 몇 장 넘겨 보았다. 서문은 교수님이 찢어내 버렸는지 흔적만 남아 있었고, 본문으로 들어가자 청동기 시대의 여러 풍습들과 현재 종교와의 연관성에 대해 나와 있었다. 객관적으로 검증된 사실에는 검은 줄이, 교수님 개인의 의견에는 빨간 줄이 쳐져 있어 쉽게 분간할 수 있었다. 교수님의 의견을 따르자면 현 종교는 인간이 탄생한 이후부터 쭉 존재해왔던 오데사에 대한 믿음이 구세주의 등장으로 체계화하여 오데사 교로 탄생하였다는 종단의 기원설을 처음부터 되짚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논문 말미에는 제본되지 않은 종이가 끼워져 있었는데, 거기에는 석관의 소녀에 대한 몇 가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아마 이 메모가 구체화하는 날이면 교수님은 정말 오데사 교의 본부로 직행할지도 모른다. 엘드에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고 있지만, 오데사 교는 엘드 전체를 지배하다시피 하기 때문에 교수님께 무슨 짓을 해도 고발당하지 않을 것이다.
시계가 없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논문을 다 읽고 가방에 넣은 후 책의 내용을 다시 곰씹어볼 때 교수님이 눈을 떴다.  

“좀 더 주무셔도 됩니다.”

“아닐세. 일어나겠네.”

교수님은 의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곧게 앉았다. 누런 얼굴에 그래도 생기가 좀 도는 게 보여 다행이다. 이제부터 교수님과 둘이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의논해야 한다.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본부로 끌려가길 손놓고 기다릴 수도 없다. 무엇보다도 맘에 안 드는 사실은 내 경멸의 대상인 오데사 교에 의해 내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도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데, 하물며 신의 수족들의 뜻이라니. 내 불안과 초조가 전해졌는지 교수님은 품에서 담배를 꺼내 권했다. 난 담배를 피지 않기 때문에 거절했다.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고 불을 붙인 교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꼭꼭 닫힌 창문을 빠끔히 열고 연기를 내뿜었다. 비흡연자인 나를 배려한 것일까. 후우우, 소리는 마치 교수님의 긴 한숨 같았다.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그는 다시 파이프를 빨며 말했다.

“휴드 군. 자네 나이가 올해 스물이었나?”

“예. 생일 지나면 스물넷이 됩니다.”

“세상을 생각할 순 있어도 몸소 겪어본 불합리함은 많지 않은 나이로군. 나와는 반대야. 난 이제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건 그만두었다네. 그저 겪고, 또 겪으며 어떻게든 버틸 뿐이지.”

교수님은 갑자기 창문을 확 열었다. 경첩이 고장났는지 문은 심하게 삐그덕대며 열렸다.  마침 공기도 좀 답답했던 터라 난 반대편 창을 열기 위해 움직였다. 그때 교수님의 말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곳에는 이 창문만 열려있네. 이곳을 통해 안과 밖의 공기가 통하지. 자네가 그 문을 열면 공기의 흐름이 바뀌면서 이곳의 답답한 공기는 날아갈 거야. 그리고…… 우리가 밖에 노출되는 게 두려워 두 문 모두 닫아 버리면 여기는 언제까지고 답답한 상태 그대로일 뿐일세. 이러고 있으면 발각되지 않을 거란 헛된 희망을 품으며 먼지섞인 공기를 마셔야 하는 거지.”

난 창틀에 손을 댄 채 그대로 멈췄다. 교수님은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지금 상황에 대한 비유? 그는 창가에서 떨어져 내게 다가오더니 내 손 옆에 자신의 손을 짚었다. 힘줄만 톡 도드라진 앙상한 손이었다.

“두려움을 떨쳐야 하네. 우리는 닫는 자가 되어선 안 돼. 그 문을 여는 것 때문에 내가, 혹은 우리가, 혹은 세계 전체가 손해를 입더라도 물러서선 안 되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을 뿐이고, 진실이 어둠 속에 묻혀 있으면 왜곡될 뿐이네. 우리는 진실을 편한 대로 수정해선 안 되네. 오직 있는 그대로를 캐내야 하지. 그러한 작업을 통해 남는 것이 상처뿐이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해.”

교수님은 단숨에 말하더니 문을 열었다. 끼이익 하는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어두운 집 안에 햇빛이 들어오며 뽀얗게 일어나는 먼지를 비추었다. 제법 상쾌한 아침바람이 실내를 채우고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햇빛에 비쳐지는 교수님의 얼굴은 마치 자살하기 위해 태양을 바라보는 흡혈귀처럼 비장함이 넘치고 있었다.

“자네에겐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우린, 물러설 수 없네.”

‘우리’라는 말의 울림이 듣기 좋았다. 드디어 한 패가 된 기념으로, 난 지금 상황에 대해 좀 더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았다.

“교수님의 결의는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애시당초 종단이 그 소녀를 악마로 규정한 시점에서,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따지기라도 해야 합니까?”

“시간과 장소가 충분하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어. 우리는 어떻게든 종단보다 먼저 소녀를 찾아내야 하네.”

“찾아내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가 보호해야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곧 화들짝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목소리는 교수님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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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의 입장이 좀 치우쳐져 있는 건, 속편에서 좀 더 다루기 위해서였달까요. 문제는 그 속편을 아직 쓰지 않았다는 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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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 장편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4) 라티 2009.07.13 0
338 장편 위험한 아르바이트를 맡아 버렸다(3) 라티 2009.07.1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