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이야기가 끝났다. 나와 브릭 교수님은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방 안에 켜둔 초가 거의 다 타들어갔기 때문에 난 새 초를 꺼내 불을 붙였다. 짧은 심지 끝에 애처롭게 매달린 불꽃이 밀랍 덩어리 안에서 몸부림치다 꺼져들어갈 무렵 교수님은 입을 열었다.

“그것이 자네의 질문인가.”

“네.”

“역사책에 나온 대로는 믿지 않나 보군.”

“역사책보다는 역사책에서 튀어나온 인물을 믿는 게 여러 모로 낫겠죠.”

나와 교수님은 마주보고 웃었다. 교과서에 나온, 자연에 풍요와 다산을 빌었다는 짤막한 서술은 내일부로 조금 더 복잡하게 바뀔 것이다. 난 그 추가될 사실이 나를 조금이라도 구원해주길 바라고 있다.
살짝 열어둔 창틈으로 바람이 불어와 촛불이 잠시 일렁였다. 흔들리는 불빛에 비친 브릭 교수님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몇 개나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그는 그 주름 하나하나에 자신의 생애를 걸 만한 질문을 새기고 있었을 것이다. 만약 교수님이 나 대신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하는 감상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교수님은 내게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네는 오늘 최고의 활약을 했네. 학부가 다른 게 유감이지만, 자네는 분명 내게 있어 최고의 제자야. 수고했네.”

“교수님……”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겠네.”

“아, 네. 그만 가실 겁니까?”

대답하며 난 흘끔 그를 쳐다보았다. 적어도 그의 얼굴에는 아쉬움 같은 건 없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흡혈귀같은 표정이었지만, 입가에 미미하게 미소 비슷한 게 걸린 것도 같았다.

“이만 쉬게나. 난 가보겠네.”

브릭 교수님은 그렇게 말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문을 열고 나갔다. 난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그는 돌아선 채로 손을 내저었다. 그 서슬에 난 자리에 주저앉았다. 문이 바람을 타고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혼자 남게 된 나는 그제서야 내일 소녀에게 질문할 내용이 있냐고 물어보는 것을 깜빡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래도 내일 학교에 잠깐 들러 물어보는 게 낫겠다. 교수님께도 간접적으로나마 기회를 드리는 게 도리다.
일단 손에 들고 있던 홍차를 마저 마신 후 책상에 내려놓고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방안에 밀려와 촛불이 더욱 흔들리며 방 안을 그림자들의 춤판으로 만들었다. 그것마저 후 불어 끄자, 희미한 달빛이 밀려와 방을 채웠다. 밖에는 마법처럼 선명한, 태양의 조각 같은 초승달이 떠 있었다. 이런 때면 항상 느꼈던 막막한 괴로움이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 신기한 일이다. 아니, 그 전에 내가 무슨 일 때문에 괴로워했었지? 거듭 생각해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상아탑에서 나온 이후로 계속 뭔가 내게서 빠져나간 듯한, 결핍감과 상쾌함이라는 미묘하게 엇갈린 감정들이 내 안을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육체의 피로가 해일처럼 몰려오자 일단 몸을 숨기는 것을 택했다.
내게서 떨어져나간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희미하게 떠올려 보며, 난 수천 년의 간격마저 뛰어넘은 희푸른 달빛의 물결에 몸을 뉘었다.


“휴드? 잠깐만!”

어쩐지 교수실 앞에 사람들이 많다. 무슨 일이지? 라고 의아해하며 브릭 교수님의 연구실로 들어가려던 나는 시아의 외침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흥분해서 얼굴이 빨개진 시아가 멀리서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날 부르는 것 같아 옆으로 다가가자, 그녀는 대뜸 내 손을 잡더니 복도 끝의 화장실 문 앞으로 갔다. 벽이 돌출되어 있어 저쪽에서 이쪽을 바라볼 수 없는 곳이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시아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지금의 행동은 뭔가 심각한 내용일 듯하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시아는 답답하다는 듯 손을 붕붕 휘두르며 빠르게 조잘대기 시작했다.

“교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잔뜩 왔었어. 종단 사람들인 것 같은데, 자세한 건 모르겠어. 너 무슨 일인지 알겠어? 교수님은 또 어디 있는지 알아?”

“아니. 난 모르겠는데. 교수님이 일정표를 워낙 적지 않는 사람이다 보니, 조교인 나도 교수님이 여기 없으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 게다가 종단 사람들이 왜……”

어이가 없어 뭐라고 푸념을 늘어놓으려는 찰나,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이 내 머리를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소녀 때문이다.
하지만 왜?
그 의문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대신 난 당혹스러운 표정만 연출했다. 시아는 내가 급조한 표정에 넘어간 눈치였다.

“그래. 아무튼 휴드 너도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너 교수님 조교잖아. 상황을 잘 모르는 걸 보니 네게 특별히 문제는 없겠지만, 자칫 발견되었다간 귀찮은 일이 벌어질 거야. 얼른 돌아가. 학교에선 못 본 걸로 할 테니.”

“응. 고마워. 나중에 아이스크림 사줄게.”

한여름의 아이스크림은 제법 눈물나는 가격이다. 특별히 제작된 냉동고에 보관된 얼음을 쓰든지, 마법의 도움을 빌리든지 해야 하게 때문이다. 하지만 시아는 내 비장의 제안에 코웃음치더니 손가락 두 개를 펴고 혀를 날름 내밀었다.

“이 인분 사주기야!”

“그럼 일 인분은 내 거.”

난 시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준 후 계단으로 뛰어가 단숨에 1층 정문으로 나왔다. 행여 날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했지만, 아직 조금 이른 시간이라 학교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아니, 어차피 방학이 시작되었으니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다. 정문을 빠져나와 거리의 인파 사이에 몸을 묻고 집으로 향했다. 총총히 걸으며 난 아까 잡은 일정을 수정했다.  교수님이 그들과 조우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목표는 나로 변경될 수도 있다. 나야 죄 지은 게 없으니 꿀릴 건 없지만, 종단과 엮이는 건 어떤 식으로든 사양이다. 이대로 상아탑에서 며칠 지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쪽이 허락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되도록 상아탑과 집 외에는 가지 않는 편이 상책이겠지. 난 걷는 속도를 높이며, 혹시 날 따라오는 사람이 있지 않나 흘끔흘끔 살펴보았다.
하숙집 정문 앞에는 일단 아무도 없었다. 난 잽싸게 들어간 후 2층의 내 방으로 뛰어갔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는데 어쩐지 느낌이 이상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들어가지 않는다는 건 내 성격상 맞지 않는다. 난 천천히 문고리를 돌린 후 확 잡아당겼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데자뷰인가?”

“얼른 들어오지 않고 뭐 하나?”

……데자뷰가 아니었다.
난 방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근 후 어제와 똑같은 위치에 앉아 있는 브릭 교수님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교수님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하더니 정말 냉막한 시선으로 날 노려보았다. 시선만으로 원격 흡혈 당하는 같은 이 기분은 대체 뭐지? 난 눈싸움을 포기하고 창가로 가 커튼을 쳤다. 아침답지 않게 방 안이 꽤나 어두워졌다.

“자네가 나가기 전에 만났더라면 이런 시간낭비를 하지 않았을 것을.”

“아니, 교수님. 그런 말씀보다 먼저 상황설명을 해주세요. 종단에서 찾는다고 하던데, 왜 이곳에 계신 거죠?”

“그런 말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면서 하도록 하세. 이곳도 안전하지 않으니.”

교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에 놓여있던 가방을 내게 던졌다. 받고 보니 디자인이 맘에 들지 않아 방구석에 처박아두었던 내 가방이다. 상당히 묵직한 무게를 느껴 열어보니 무슨 여행이라도 가는 것처럼 내 짐이 잔뜩 들어 있었다. 설마 교수님이 챙긴 건가?

“자네가 직접 짐 싸길 기다릴 시간이 없을 것 같아 내가 싸 줬네. 당장 며칠은 버틸 만할 게야. 다 챙기고도 시간이 좀 남아 방 정리도 해 줬으니 안심하고 출발하세나.”

자기 가방을 손에 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서는 교수님을 보니 어이가 없었다. 아니, 가뜩이나 준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는 터에 제자와 함께 구렁텅이에 빠지려는 사람의 태도가 저럴 수 있는 건가! 괜히 울컥한 나는 브릭 교수님의 팔을 붙잡았다. 학교에서라면 상상하기 힘든 무례겠지만, 잠깐 동안이라도 이 사람을 멈춰 놓고 설명을 듣고 싶다.

“이대로는 못 나가요. 제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해 주시죠.”

“좋네. 자네의 짐 안에는 비상식량과 갈아입을 옷 두 벌, 속옷 세 점, 필기구, 모자, 양말 세 켤레, 책 두 권이 들어있네.”

“그 얘기가 아닌 거 알고 계시죠?”

“책 한 권은 내가 쓰고 있는 논문의 미완성본이니 시간나는 대로 읽고 오자와 탈자를 수정하게. 청동기 시대에 관한 것이니 그녀와 제대로 대화하려면 정독하도록. 그리고 또 한 권은 가방 옆 책장 바닥에 숨겨놨던 걸 꺼냈네. 내가 옆에 있어도 부담갖지 말고, 시간나는 대로 자위해도……”

“와아악! 와아악! 와아악!”

어떻게든 그의 말을 멈추기 위해 난 교수님의 양 어깨를 잡고 탈탈 흔들어댔다. 순식간에 전후좌우로 격하게 흔들린 교수님은 어지럽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생선 가시라도 삼킨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말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네.
그 소녀는 탈주했고, 종단과 상아탑은 이를 뒤쫓고 있다는 거지.“

“뭐라구요?!”

“시간이 없네. 어느 쪽이 그녀를 찾아내든, 좋은 꼴은 일어나지 않아.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면 끝도 없다네. 그리고 나 또한 자네가 이야기해 준 걸 토대로 가설을 세운 것 뿐이니 자네에게 설명해주는 건 불가능해. 논쟁 정도라면 가능하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먼저 그녀를 찾아내야 해. 그들보다 먼저!”

교수님이 안광을 빛내며 내게 누런 얼굴을 바짝 갖다대고 단숨에 말했다. 입냄새가 제법 고약해 내 의식은 잠시 환기를 위해 밖으로 외출했다 돌아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난 교수님께 팔목을 잡힌 채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교, 교수님! 알았으니까! 제 발로 걸을 테니까! 계단에선! 으엑!”

굴러떨어지듯 현관에 도착한 우리는 그 길로 문을 나섰다. 길에는 머리가 벗겨진 마부가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한가하게 마차를 몰고 있었다. 교수님은 대뜸 그 마차를 잡더니 바람의 신 디길도 따라잡지 못할 정도의 속도를 요구했다. 마부는 자신의 속도본능을 주체하지 못하는 위인이었는지 웃돈 약간에 대뜸 승낙했다. 사람의 통행이 거의 없는 아침의 도로를 마차가 낼 수 있는 최대 속도로 달리는 가운데, 교수님은 내게 간단하게 설명했다.

“난 어제 한숨도 자지 못했네. 자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소녀를 상상하는 건 내 첫사랑을 떠올리는 것만큼이나 가슴설레는 일이더군.”

“……계속하시죠.”

“그래서 아침에 그리로 산책을 나갔지. 물론 난 초대받지 않았으니 상아탑 안에, 아니 길드 안에도 들어갈 수 없겠지만, 그저 그 근처라도 한번 지나가고 싶었어. 그래서 그 앞으로 가 서성거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수위가 고함을 지르더군. 놀라서 그쪽을 보니 내가 보았던 그 소녀가 수위의 가슴에 손을 대고 있었어. 맹세코 난 그 소녀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어. 그건 수위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수위는 그 손이 닿자 몸이 경직되더니 곧 쓰러졌고, 소녀는 그 길로 길드 바깥으로 나왔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

“나왔다구요? 아니, 잠시만요. 그 애는 미이라 식으로 꽁꽁 묶여져 관 밖으로 혼자서 나오지도 못했는데.”

이야기의 진행이 너무 빨라 난 당황했다. 그 소녀가 맞긴 할 텐데, 난데없이 사람을 쓰러뜨리고, 게다가 상아탑에서 나오다니. 그렇다면 게펜타이너 씨도 그녀에게 당했다는 건가? 교수님은 내 의문에 답해주진 못했다.

“붕대라면 팔, 다리, 배 등에 어수선하게 감겨 있긴 했지만 걸음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네. 자네의 말대로라면, 게펜타이너 님이 풀어준 게 아닐까?”

난 게펜타이너 씨에 대한 존경심은 별로 없었지만, 교수님은 예의상인지 ‘님’이라고 했다. 하긴 그쪽도 ‘교수님’이란 존칭을 썼었지. 직접 만난 사이는 아니겠지만 예의는 확실히 차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쪽은 그냥 부르던 대로 하는 게 편하다.

“그래서 그 소녀는 어떻게 되었나요? 교수님은 그녀를 잡지 않으셨나요?”

교수님은 날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교수님의 잿빛 눈동자는 이렇게 항변하고 있었다. ‘마법사도 당했는데 나라고 별수있겠냐?’ 지당한 말씀이다. 학구열에 불타는 교수님이긴 하지만, 거의 모든 때 - 차마 모든 때라곤 말할 수 없다 -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 난 교수님의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납득의 표시를 하고, 교수님은 그 대목을 빼고 대답했다.

“잡을 수 없으니 뒤를 쫓기라도 해야겠지. 일단 그녀가 어제 들었던 본인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소녀는 유령처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지. 어디까지 가더라도 따라갈 기세로 뒤를 밟으려 했는데, 상아탑에서 몇 명이 뛰어나와 나를 붙잡더군. 이미 날 반쯤 범인으로 생각하고 있어서(죄송하지만 교수님의 인상을 생각해 보면 그들의 판단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뿌리칠 수 없었어. 그들과 실랑이를 벌이다 그녀를 보니 어느새 사라졌더군. 내가 한눈판 것은 단 4~5초 정도였을 텐데.”

상아탑 앞은 대로가 펼쳐져 있다. 상아탑의 각종 마법 연구 재료와 시약, 발명품 판매 등으로 인해 늘 교통량이 많았고, 우리나라는 이를 감안해 수많은 마차가 다닐 수 있는 폭넓은 도로를 세웠다. 그래서 이곳에서 5초 정도로 사람의 눈을 피해 달아난다는 건 불가능은 아니지만 매우 힘든 일이다. 가장 가까운 건물까지 전력질주를 해야 할 테니까. 한편 교수님은 조금 주저하는 듯하다 내게 말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기는 좀 늦은 감이 있네만,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은 종단과 상아탑에 대항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네. 하지만 난 어떻게든 그 소녀를 찾아 우리가 데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아까 상아탑에서 그들에게 붙들렸던 내가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종단 사람들이 그리로 왔기 때문이야.”

“무슨 볼일이라도 있었나 보지요?”

“그 소녀에 관한 볼일일세. 상아탑에서는 마법사들의 감시를 뚫고 탈출한 그 소녀의 정체를 파악하려 하지만, 종단에서는 다른 이유로 그녀를 찾았지. 종단은 그녀를 엘드에 강림한 악마로 규정했네. 신탁이 떨어졌다고 하는군. 극비사항이라고 했는데, 난 운좋게 바로 옆에 있어서 들을 수 있었지.”

난 어이가 없었다. 요즘 세상에 난데없는 악마라니?

“하아? 혹시 악마라면 물에 빠뜨려서 죽으면 인간, 살면 악마라서 다시 죽이는 이단심판을 할 때의 그 악마 말씀이신가요?”

“그래. 왕실의 금지로 인해 민간인에겐 더 이상 그런 짓을 할 수 없겠지만, 종단에서 직접 오데사에 맹세코 악마로 규정한 자에겐 여전히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아니, 잠깐 이야기가 샜군그래.”

이건 너무 급전개이다. 그녀가 깨어난 것은 어제 저녁이고, 그것도 상아탑 한구석의 실험실에서였다. 상아탑이 그녀의 부활을 환영해 덩실덩실 춤을 추며 널리 이를 알렸을 리도 없다. 그런데 난데없이 종단이 그녀를 파악하다니. 게다가 신탁? 교수님은 나지막이 운율을 담아 읊조렸다.

“엘드에 고대의 어둠이 부활하였노니, 석양의 빛이 만물을 덮는 가운데 오직 홀로 하얀 탑의 한가운데서 만들어진 빛을 받아 깨어났노라. 태초의 업을 모두 짊어지고 이 땅 위를 걸을 때 빛의 사도들은 신음하고 또 신음하리라. 태초의 빛이 그로 인해 새벽빛처럼 희미해지리라. 어둠은 사흘 동안 대지를 걸은 후 빛과 하나 되어 사라지리니, 사도들은 깨달음을 얻으리라.”

“그게 신탁의 내용입니까. 미묘하게 구체적인데요.”

신탁 자체는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최소한 신전의 신탁이 그들의 일기예보만큼의 완성도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빛의 신 오데사를 섬기는 신관들은 하늘을 관찰하는 법을 알고 있고, 그들의 일기예보는 할머니의 신경통만큼이나 정확하다. 그리고 신탁이 정말 신의 말씀인지, 아니면 사도들의 회의결과인지 몰라도,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그들의 신탁이 완전히 빗나갔던 적은 없다. 단, 그것은 사건이 지나간 시점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사도들이 신탁을 받으면 그들은 그것을 해석해 행동한 후 그 결과에 따라 신탁의 해석을 슬쩍 바꾼다. 어차피 원문이 중구난방으로 해석되기 좋은 구조이니 멋대로 끼워맞춰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한 과거의 신탁에 비해 지금의 신탁은 그나마 구체적이다. 그나저나 대충 주워들었을 교수님이 한 글자도 더듬지 않고 줄줄 외운 것도 대단하다.

“종단은 어제 저녁, 아마도 그녀가 깨어났을 시점에 받았을 그 신탁을 말하며 상아탑을 조사하겠다고 했지. 자네도 알겠지만 엘드의 국교는 오데사 교이고, 이들이 신탁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따라야 할 의무가 있지. 하지만 상아탑도 난처한 입장이었어.”

“악마를 인정하면 상아탑이 악마를 부활시킨 셈이 되니까요.”

“맞아. 그래서 그들은 수위를 급히 안으로 들이고, 그가 과로로 쓰러진 모양이라고 얼버무리며 종단의 출입을 막으려 했지. 그러다보니 내게 신경쓸 겨를이 있겠나. 난 종단에게 내 신분을 밝히고 일단 자리를 벗어났네. 하지만 학교에 돌아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지. 상아탑이 그 소녀 대신 나를 범인으로 몰아버린다면 난 꼼짝없이 당할 수도 있겠다고. 그래서 일단 자네 집으로 피신했던 걸세. 학교에 사람들이 와 있었지?”

“네. 아까 종단 사람들이 왔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렇다면 우리 집에도 사람들이 와 있겠군. 녀석들이 고양이 밥을 줘야 할 텐데.”

교수님이 진심으로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난 진심으로 종단 사람들을 걱정했다. 교수님의 고양이는 거의 새끼 호랑이와 맞먹는 위용있는 꼬리와 발톱을 가지고 있고, 침입자를 상대할 때마다 가죽 너머로 근육이 일어나는 게 보일 정도로 제대로 된 싸움꾼이다. 다른 고양이의 두 배는 먹어대는 녀석이 밥을 굶는다면, 그 신경질을 누구에게 부리겠는가. 난 교수님의 방문을 열 첫 번째 불청객에게 심심한 조의를 표했다.
마차의 속도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들썩거리던 엉덩이가 한결 진정되었다. 난 그제야 아침을 안 먹은 것을 깨닫고 내 배낭을 뒤져 먹을 것을 꺼냈다. 교수님은 그 와중에 술까지 두어 병 챙겨넣었다. 난 망설이지 않고 술 한 병을 꺼냈다. 이 주일 동안 절약하고 절약해 겨우 구입한 「이슬로」였다. 달달한 과일주가 아니라 증류주였기 때문에 도수가 꽤 높아  절대 아침에 마실 술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에선 한 잔, 아니 한 모금 들이켜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병을 내밀자 교수님은 새가 물을 마시는 것처럼 한 모금을 꼴깍 마셨다. 양이 별로 줄어들지 않은 것을 확인한 후 꿀꺽꿀꺽 마시자 목구멍이 얼얼해졌다. 취할 정도의 양은 아니었지만 급하게 마신 탓인지 순간 머리에 피가 몰렸다. 병을 집어넣고 벽에 등을 기대자 아까까지의 혼란이 사라지고 제법 나른해진다. 무엇보다 아까까지의 진동이 사라져 살 만하다.

“일 다 끝나면 내가 술 한 잔 사주지. 난 와인 파라 그 술은 잘 못 마시겠네.”

그런 핑계를 대지 않더라도 교수님의 주량은 잘 알고 있다. 저기서 조금만 더 마시게 했다간 목적지까지 시체를 운반하는 장의사 신세가 될 것이다. 하지만 주량을 지적하면 괜히 오기로 더 마시다 뻗어버리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교수님을 자극하지는 않았다.

“과일주는 좀 비싸서 그동안 마시지 못했는데, 교수님 덕에 잘 마시겠군요.
그런데 우린 어떻게 소녀를 찾아야 합니까? 종단은 수배령을 내릴 테고, 상아탑은 탐지마법을 쓸 텐데 우리 둘이서 발품을 팔아봤자 결국 늦을 것 같군요.“

“하지만……”

생각이 덜 정리되었는지 헛기침을 하며 시간을 끌려던 교수님의 안색이 확 변했다.

“휴드! 마차가 서 있네!”

“도착한 건가요?”

“아냐. 방금 전까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마차가 느닷없이 정지했단 말일세. 안에 타고 있던 사람이 뒤늦게 눈치챌 정도로!”

교수님은 황급히 창문에 쳐 놓은 커튼을 열었다. 커튼이 젖혀지자 제법 떠오른 태양빛이 마차 안에 들어와 눈부셨다. 그 빛은 창밖에 나타난 사람의 그림자에 가려졌다. 그는 창문을 똑똑 두들겼다.

“…………나가세.”

난 앓는 소리를 내며 배낭을 집어 어깨에 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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