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어지간하면 조회수 신경쓰고 싶지 않지만, 의욕이 쭈욱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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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잘 부탁하네. 그런데 우리 통성명도 안 했군. 내 이름은 알고 있는 것 같고, 자네 이름이?”

“휴드입니다.”

“그래. 휴드 군. 오늘 하루 잘 부탁하네. 원래 저 늑대들을 며칠 더 관찰한 후 이 석관으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군.”

“자, 일 시작하겠습니다! 노동은 좋은 것이지요! 뭘 하면 될까요?”

내가 급히 말을 끊고 팔을 걷어붙이자 게펜타이너 씨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거기서 구경하고 있으면 되네.”

“네? 구경이요?”

“그래. 구경 말일세. 그동안 혼자서 실험하느라 많이 심심했었는데, 오늘 하루 정도는 구경꾼이 있는 것도 재밌겠지.”

“구경……말입니까. 뭔가 허탈하긴 하지만……”

정말로 허탈하다. 몸 굴리는 것보단 편한 게 바람직하긴 한데, 방금 벌어진 파괴적 사건 때문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터라 뭔가 배신감마저 느껴진다. 내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그는 피식 웃었다.

“아, 그렇게 실망한 표정 짓지 말게. 손 놓고 놀라는 이야기가 아니니까. 보수만큼의 일은 확실히 시킬 생각이네.
그런데 실험에 앞서 자네의 이야기를 듣고 싶군. 자네는 저 미이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고민이라면 실컷 해 봤지만, 답을 낼 수 없었어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걸 단순히 원숭이나 고릴라로 볼 리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교수님께서는 그것이 고대에 살았던, 인간과 아주 유사한 종류의 생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습니다.”

“흠. 교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지.”

그는 자신의 말을 곰씹으며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몸에 있는 상처들을 닦았다. 손수건에 어떤 마법이 걸려있는지, 자잘한 상처들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는 게 보인다. 저거 갖고 싶다! 그가 손수건을 내게 건네주자 난 침을 꿀꺽 삼킨 후 배의 상처를 슬슬 문질렀다. 저릿한 아픔이 사라지며 보랏빛 피멍이 순식간에 연분홍색 정도로 탈바꿈되었다. 그는 나의 경악을 눈치채지 못하고 흩어진 성물들을 주워 제자리에 갖다놓고 있었다.
순간 난 나조차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했다. 슬그머니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고, 그것을 손에 쥔 저 손수건과 슬쩍 바꿔치기한 후 게펜타이너 씨에게 손수건을 건네준 것이다. 눈치챈 것일까? 그가 날 돌아보았다. 눈을 마주치기 두렵다.

“이것만으론 상처가 낫지 않았나 보군. 하지만 그렇게 뭐 잘못 먹은 표정을 지어도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라서 말이지. 미안하게 됐네.”

“……아니요.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내가 뭔 짓을 한 거야? 하지만 입은 떨어지지 않았고, 그래서 난 영원 같은 몇 초를 지켜보아야 했다. 두 손수건의 색이 비슷했기 때문일까? 그는 손수건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넣고 수첩과 펜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표지가 너덜너덜한 걸 보니 상당히 애용하는 모양이었다. 수첩을 대충 펼쳐놓고 펜뚜껑을 열어놓은 그는 기록을 시작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늑대의 뼈가 흩어진 곳에 가 그것을 관찰했다. 과연 마법사답게 우리 학교의 교수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집중하는 모습이다. 뼈를 하나하나 집어들고, 부서진 뼈들을 한데 모아  얼기설기 늘어놓자 대충 늑대처럼 보이는 형태 두 개가 완성되었다.

“에테르의 바다에서 영원한 안식을.”

그는 무겁게 중얼거리며 뼈를 향해 손을 폈다. 그러자 뼈들이 달그락거리더니 이내 푸스스 소리를 내며 풍화되는 것처럼 가루로 변했다.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나라도 이것이 게펜타이너 씨가 행하는 엄숙한 장례식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입을 여는 대신 그 자리에 남은 두 줌의 뼛가루를 신중하게 유리병에 집어넣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잠깐이나마 늑대들의 명복을 빌었다.

“임시학명, 「거대늑대」 1호와 2호. 사인은 성물에 의한 직 · 간접 타격. 목격자는 상아탑의 연구자 게펜타이너와 협조자 휴드.”

그가 뇌까리자 슥슥 소리가 등뒤에서 들린다. 분명 이 자리엔 우리 외엔 없을 텐데, 어째서? 등골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니, 아까 그가 열어두었던 펜이 알아서 수첩에 기록을 하고 있다. 아아, 마법사들이란…… 한번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고 싶어하는 족속들 같으니. 물론 이렇게 자조한다고 해도 ‘편하겠다……’하는 생각이 드는 걸 억누를 순 없었다. 게다가 손수건 때문에 켕기는 게 있으니 그를 비판할 처지가 못 된다. 그 사이에 그는 늑대들을 발견한 장소와 사망한 장소, 활동할 동안 그들이 보인 행태에 대해 제법 자세히 말한 후 손가락을 튕겼다. 펜촉이 종이에 긁히는 소리가 그치고, 펜은 얌전히 수첩 사이에 몸을 눕혔다.

“원래대로라면 성까지 불러야겠지만, 마법사가 부여받은 성이란 게 워낙 길어서 축약했네. 혹시 해서 묻는 건데, 자네 성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런 귀하고 쓸모없는 호칭은 없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거라면 이름으로 충분하다. 성이란 건 자기 자신이 주체 못할 정도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귀족이나 왕족, 마법사들이나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농담조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갔다.

“다행이군. 그럼 슬슬 본편을 시작해 보세. 자네가 도와줄 수 있을 때 부활시키는 게 여러모로 편할 듯하이.”

게펜타이너 씨는 책상서랍 안에서 몇 가지의 스크롤을 꺼냈다. 지난번 어쩔 수 없이 물어내야 했던 스크롤을 생각하자 위가 아파온다. 그 가격도 만만치 않았는데, 저만한 스크롤들을 한꺼번에 쓸 생각일까. 그는 스크롤을 하나하나 들어올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언데드를 부활시키는 주문이야 당연한 것이었지만 강제언어인식주문, 육체 복원 주문까지 준비한 것은 결벽증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돈 좀 그만 처발라! 하는 생각을 뱃속에 담아둔 채 그가 스크롤의 성능들을 설명해주는 것을 경청했다.

“보통의 동물은 인간과 성대의 구조가 달라서 이런 마법을 걸어도 소용없지만, 이 녀석은 분명 인간이니 지식을 주입받으면 이 시대의 말을 할 수 있을 거야. 연대가 매우 오래되어서 생전에 의사소통을 말로 했는지 몸짓으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통상 미이라를 만들던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면 언어를 쓸 수 있겠지. 어느 쪽이든 주문의 효력은 확실해. 본인의 입을 통해 그 시대의 실상을 알게 된다면, 동물의 사체 몇 백 구를 되살리는 것보다 이득 아니겠나?”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저 스크롤들의 위력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로서도 저 녀석이 되살아나 어눌하게나마 말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사실이다. 미이라로서의 그의 가치가 고고학적이라면, 그가 하게 될 말 한마디 한마디는 역사적 가치를 띠고 있을 것이다. 시험성적은 중간 이상을 가지 못하더라도, 나도 엄연한 역사학도이다. 이런 초유의 이벤트를 놓칠 수는 없는 것이다.
창문이 없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기 힘들었다. 그러고 보면 아까 그가 지나가는 말로 이 공간 전체를 자신의 마법으로 둘러싸기 위해 벽보다 효율이 낮은 창문을 과감히 없애버렸다고 했다. 내가 이곳에 들어온 게 점심을 먹은 직후였으니 지금은 대낮을 조금 지났을 것이다. 게펜타이너 씨에게 물어보자 그는 품에서 그 비싸다는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해 주었다.
상아탑 입구에는 외부인의 출입은 초저녁까지이며 시간이 되면 안내인이 데리러 간다는 말이 적혀 있다. 이 녀석을 되살려놓자마자 안내인이 데리러 온다든가 하면 좀 곤란하다. 하지만 게펜타이너 씨야 남는 게 시간일 테니 느긋한 모습이다. 나는 아까보다 조금 초조한 기분으로 그가 의식을 진행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아, 피곤하다.
머리에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게 들어간 것 같다. 이대로 뇌를 비틀어 짜내면 오늘 보았던 상식을 벗어난 장면들을 좀 바깥으로 배출할 수 있지 않을까. 상아탑을 나올 때부터 시작된 강렬한 두통은 집으로 향하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리듬을 맞춰 엄습해 왔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나를 주정뱅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차라리 그 편이 다행일 것이라 생각한다. 최소한 술에 만취한 경우는 깨었을 때 이전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지 않는가? 분명 오늘 본 것들은 대단한 것들이었지만, 이것들은 자칫하면 내 평생에 걸쳐 대답받을 수 없는 지긋지긋한 명제로 눌어붙을 수도 있다. 그러한 사실에 진저리치며 내 방문을 연 나는 문을 닫고 잠깐 눈을 깜빡거린 후 다시 문을 열었다.
안에는 브릭 교수님이 의자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거야, 이 사람……”

하숙집 관리인에게 왜 방문을 열어줬냐고 따질까 하다가 그만두고 책상 위에서 홍차잎을 꺼냈다. 부엌에 가 뜨거운 물을 받아다 컵에 따르고 이파리를 띄운 후 은은한 물이 우러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교수님을 깨웠다. 꽤 깊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몇 번을 깨워서야 겨우 눈을 뜨게 할 수 있었다.

“이제 왔나. 좀 늦는군.”

“……저기, 교수님. 그건 집주인이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정확히는 방주인이라고 해야겠지. 아무튼 난 주인에게 허락받고 들어왔네.”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서두르시지 않아도 내일 뵙고 말씀드릴까 했는데, 아니, 그렇게 째려보지 마시구요. 지금 거기서 본 것들을 말씀드리죠.”

난 컵을 교수님에게 쥐어준 후 내 몫을 집어들어 한 모금 마셨다. 따끈한 액체가 목구멍 안으로 흘러들어가자 저절로 졸음이 밀려온다. 머리를 흔들어 졸음을 쫓으려 했지만 눈꺼풀이 조금씩 무거워진다. 아무래도 얼른 보고를 마치고 교수님을 내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는 게 낫겠지요.
게펜타이너 씨는 그 미이라를 되살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브릭 교수님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침착한 건 머리 위 뿐이고, 으스러져라 팔걸이를 움켜쥐는 손과 달달 떨리는 발을 보니 오히려 저렇게 침착한 표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게 기적같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 되살렸나? 그냥 언데드? 아니면 뭔가 다른 마법을?”

“저나 교수님이 상상하지 못했던 이것저것을 써댄 덕에 거의 생전의 모습 그대로, 아니 거의 우리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정도로까지 만들어졌죠. 말도 하고, 학습능력도 대단한 편이었죠. 아마 지금 한참 게펜타이너 씨와 이야기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자네는 왜!”

“거기서 나갈 시간이 되어서요. 상아탑은 외부인 출입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거 아시죠?”

“으음……”

교수님은 목에서부터 올라오는 긴 신음을 토해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난 아까 본 것들을 어느 정도까지 말해줘야 하는지 망설였다.


“성공한 겁니까?”

“성공했어! 완벽해!”

게펜타이너 씨는 격한 춤으로 자신의 심정을 대변했다.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자가 땀을 흩뿌리며 추는 덩실덩실 춤이란 실로 볼 필요가 없다. 난 얼굴에 튕긴 몇 방울의 땀을 손등으로 닦은 후 석관 안의 소녀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소녀는 눈을 감은 채 입을 뻐끔거리다 갑자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신나게 춤추던 게펜타이너 씨가 움직임을 딱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석관이 들썩일 정도로 격하게 몸부림치며 그녀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런! 죽을 때의 기억이 아직 남아있어!
휴드! 잡아! 몸부림치지 못하게 해!”

“예!”

난 급히 한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남은 손으로 배를 눌렀다. 붕대 안쪽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에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지만, 지금 다른 곳을 골라잡을 여유는 없었다. 대뜸 그쪽으로 손이 간 게 남자의 본능이라 한다면 할 말 없지만. 그런데 손이 닿는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은 단순히 엄한 부위를 만진다는 데서 오는 것일까? 아무튼 그녀의 상체가 고정되자 마법사는 급히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더니 그 큰 손으로 얼굴을 몇 차례 쓰다듬었다. 마법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몸부림치던 육체가 조금씩 잦아들어갔다. 게펜타이너 씨는 얼굴을 덮은 손을 위로 올려 그녀의 눈꺼풀을 강제로 들어올리더니 크게 외쳤다.

“말하라! 너는 말할 수 있다!
들어라! 너는 우리의 말을 들을 수 있다!
보아라! 너의 눈이 보지 못할 것은 없다!
생각하라! 지금 이 순간, 너는 사고할 수 있는 자이다!
너는 죽었으나 죽지 않은 자. 지금 이곳에 불완전한 생명을 부여받고 다시 눈뜬 자이다!
죽음의 고통은 네가 다시 눈감을 때까지 찾아오지 않으리라!“

아아. 아까 소녀의 몸부림은 죽기 직전의 고통을 깨어난 직후에도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저 정도로 고통스러워한 걸 보니 대체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할 정도이다. 마법사의 주문인지 호통인지가 효과가 있는지 몸부림이 급격히 잦아들었다. 가쁜 숨을 내쉬는 그녀를 한참 지켜보고 기다리다 보니, 마침내 그녀가 눈을 뜨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소녀는 후우우, 하고 가느다란 숨을 내쉬더니 초점없는 눈으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번엔 완전하지 못했어요. 한 번 더 흡수해야 하니 가까이 와 주세요.”

“뭐? 어, 어이!”

소녀의 영문모를 소리가 뭘 말하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소녀의 눈에 대고 손을 휘휘 흔들었다. 아기가 움직이는 물체에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소녀의 망막에 흔들리는 그림자가 그녀의 의식을 조금씩 이끌어내었다. 반쯤 감겨 있던 눈이 점점 더 커지면서 흰 바다에 잠겨 있는 갈색 보름달이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내가 손 흔들기를 멈추자 그녀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떠듬떠듬 표현했다.

“여긴…… 어디?”

‘생전의 기억 때문에 혼란스러운가 보군. 강제언어인식 주문은 잘 먹힌 것 같아.’

마법사는 그렇게 속삭인 후 그녀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따스한 숨을 얼굴 이곳저곳에 불어넣었다. 저런, 저건 정신이 멀쩡한 나라도 화들짝 놀라버릴 것 같다. 그녀의 눈에 생기가 돌아오자 그는 조금 거리를 띄우고 말했다.

“지금, 나와 동등한 객체로 이 자리에 있는 너의 이름을 말하라.”

“이름……?”

소녀의 정신은 아직 완전히 돌아온 것 같지 않았다. 조금씩 몸을 들썩이며 움직이려 하는데, 붕대로 온 몸이 칭칭 동여매어져 있으니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난 그녀를 일으켜주려 했지만 게펜타이너 씨가 제지했다. 그는 한 손으로 내 어깨를 누르며 다시 말했다.

“그래. 네 생전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름을 알아야 우리는 계약을 맺을 수 있다. 네가 불완전한 생명이나마 이곳에서 부여받기 위한 계약 말이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약간 의아한 기색으로 말했다.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이름이 있습니까?”

“응? 이름이 없다고? 흠, 이거 뜻밖인걸. 그렇다면 우리 소개를 먼저 해야 하겠지.
나는 게펜타이너, 이 친구는 휴드라네.”

소녀는 계속 눈을 깜빡이며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막 깨어난 터라 눈부신 것 같은데, 손을 움직일 수 없어 눈을 비빌 수 없는 듯하다. 게펜타이너 씨가 눈치를 챘는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방 안을 채우고 있던 인공적인 빛이 상당히 사그러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휴드 님, 그리고 게펜타이너 님이라고 하셨지요? 제가 어떤 상태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게펜타이너 씨는 잠깐 망설이다 대답했다.

“여기는 나의 공방이고, 나는 너에게 일시의 생명을 부여한 자이다. 원래대로라면 정식으로 너와 이름을 교환해 계약을 맺어 종속시켜야 하겠지만, 이 자리에 있는 너는 이름이 없다고 하니 지금은 불가능하겠군. 원래 이름이 없었던 건가, 아니면 기억이 나지 않는 건가?”

“설마 모르시는 겁니까? 저희 일족은 봉인된 후에야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이 제게 이름을 붙여주었겠지만, 전 제 이름을 알 수 없군요. 그런데 전…… 여러분이 절 깨우신…… 걸까요? 이 관 속에 봉인되어 있던 저를?”

“정답이다.”

“………………역시, 의식은 실패했군요.”

난데없이 실패했다는 말을 들은 건 조금 이따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의외이다. 살아난 게 기쁘지 않은 건가? 물론 언데드로서 살아나긴 했지만, 해골바가지가 아니라 저런 육체까지 가지고 있으니 부활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하지만 그녀의 표정에서 기쁨의 감정은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소녀의 원망스러운 눈빛이 묘하게 나를 공격해온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살짝 돌리자, 아까 들었던 말이 사레걸린 것처럼 거북하게 뇌리를 쑤셨다. 지금 봉인이라고 했나?

“봉인되었다고? 너는 평범한 미이라로 장례되어진 게 아니었나?”

“예. 저는 제물로서의 의식을 마친 후 봉인되었습니다. 미이라는 사자의 불로장생에 대한 염원을 담은, 이름을 가진 분들의 의식입니다. 제 경우와는 다르지요. 이런 걸 모르시는 걸 보니 제가 봉인된 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네요. 옷도 제가 처음 보는 것이고, 이 장소도 낯설어요.
가르쳐주세요. 제가 봉인된 지 몇 번의 겨울이 지나갔죠?”

나는 반사적으로 게펜타이너 씨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마법이든 뭐든 써서 그녀의 연대를 밝혀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뭔가 생각할 게 있는 듯 고개를 숙인 채 묵묵부답이었다. 설마 대답할 수 없어 딴청부리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하며 난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그렇다면 내 전공을 조금만 살려볼까.

“네가 살던 시대에 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칼이나 거울이 뭘로 만든 건지 알려줄 수 있어?

“아, 예. 녹색과 갈색의 중간쯤 되는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었어요. 칼은 돌로 만든 걸 가지고 계신 분도 꽤 많았구요.”

“좋아. 청동기 초기인가.”

지배자들이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칼과 거울 등을 청동으로 만들어 쓰기 시작한 시대. 딱히 전공을 살렸달 것도 없는 상식이다. 좀 더 자세한 질문으로 넘어가는 건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고, 지금은 이 소녀의 의문에 먼저 답해주기로 했다.

“정확하진 않지만 네가 살았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사천오백 년이나 오천 년 전이야.”

“오천 년? 그게 어느 정도의 기간이죠?”

아무래도 저 시대의 개념은 우리와 틀린 것 같다. 난 좀 더 알기 쉽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겨울이 오천 번 정도 지나갔다고 해야겠지. 눈이 내렸다 녹은 게 오천 번 반복되었다고 생각하면 돼.”

“맙소사…… 오천 번?”

그녀의 얼굴이 청동처럼 푸르스름하게 질려 갔다. 이래서야 정말 언데드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 같다. 그녀가 발작적으로 몸부림치자 관이 들썩 흔들렸다. 스스로도 놀랐는지 소녀는 금세 몸부림을 멈추었지만, 연신 고개를 흔들며 입을 뻐끔뻐끔 벌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 같다. 그나저나 붕대로 온몸이 묶인 미소녀를 관에 넣어두고 감상하는 두 명의 남자라니, 이건 마치 여자를 보쌈해 온 변절자들의 모습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내 침대 아래 있는 멋진 책의 상황 중…… 얼른 망상을 집어치운 후 난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댔다. 몸부림치느라 이마에 땀이 송송 배었고, 그 땀 때문에 앞머리가 엉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저 소녀가 살았던 시대는 계급이 막 생기기 시작한 청동기 무렵일 것이다. 그녀가 우리에게 존대를 하는 것은, 그 시대의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 이름의 유무이기 때문이겠지. 처음 안 사실이지만, 브릭 교수님께 말하면 내 의문을 해소해 줄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내가 교수님이었다면 게펜타이너 씨를 밀쳐내고 질문을 퍼부어대고 있었겠지. 하지만 게펜타이너 씨의 관점이 나와 다르다는 걸 곧 알게 되었다.

“맙소사! 그런 거였나?"

마법사는 뭔가 떠올랐는지 맹렬한 기세로 관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서슬에 난 뒤로 나가떨어져야 했다. 그는 소녀의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된 것을 떨리는 손으로 닦은 후 그 손을 살짝 핥았다. 동작은 상당히 변태스러웠지만, 아무래도 진짜 땀인지 확인하는 것 같다. 그러고보니 언데드가 땀을 흘리던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몇 번 더 핥더니 소녀에게 질문했다.

“너…… 대답해라. 넌 어떻게 죽었지?”

“게펜타이너 씨!”

죽었다가 겨우 살아난 자에겐 너무 가혹한 질문이다. 아까도 환통까지 겪으며 괴로워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소녀는 의외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 죽지 않았습니다. 다만 봉인되었을 뿐입니다. 원래대로라면 그 상태로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잠들어 있었어야 할 터였는데, 깨어나 버렸군요.”

“그렇다면 여지껏 가사상태로 관 속에 있었던 건가? 맙소사! 오천 년이라니! 그런 마법은 들어본 적도 없어!”

그는 비명 같은 환성을 지르며 초조하게 연구실 안을 걸어다녔다. 연구실은 아까의 언데드들이 뛰어놀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곳이었지만, 그가 뭔가를 중얼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빙빙 돌자 괜히 비좁은 것처럼 느껴졌다. 절대 자신에게 말 걸지 말라는 포스를 풍기며 두 바퀴쯤 돈 그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소녀 앞에 섰다.

“봉인? 세상이 끝날 때? 설명해 다오. 네 시대와 우리 시대와의 간격은 너무 깊고 커서 알아듣기 힘들구나. 게다가 흘려들을 수 없는 내용이기도 하고.”

게펜타이너 씨가 심각하게 요청했다. 마법사로서의 탐구심이 발동한 것일까. 나 역시 속으로 환성을 지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소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교과서의 몇 페이지를 통째로 바꿀 수 있는 내용이었다. 역사적 현장에 있는 역사학도라니, 이렇게 운이 따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곧 후회했다. 그냥 믿을걸.

“게펜타이너 님. 휴드 씨를 이만 내보내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외부인은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문 밖에서 안내인 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맙소사, 벌써 시간이 다 되었나? 아니, 분명 이르다. 그러고 보니 들어올 때 안내인 씨 앞에서 들어가기 싫은 티란 티는 다 냈던 게 생각난다. 그렇다면 설마 나를 걱정해서 일찍 데리러 와 준 건가? 맙소사!

“시끄러! 방해하지 마! 지금 한창 중요한 때야!”

잘 하고 있어요, 마법사 님. 난 마음 속으로 게펜타이너 씨의 남자다움을 칭송했다. 안내인 씨에게 대놓고 좀 더 있겠단 말을 꺼낸다는 건 여기 규칙이 내 눈에 우습게 보인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할 수 없다. 여기선 눈앞에 있는 이 남자다운 마법사가 좀 더 터프함을 발휘하는 것뿐이다.
문 밖에 있는 안내인 씨는 방주인의 고함에 놀랐는지 말이 없었다. 좋아, 내가 예상한 것처럼 소심하고 당사자 앞에서는 제대로 말 못하는 그런 성격을 계속해서 보여줘! 난 문밖의 안내인이 근무지로 돌아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길 간절히 기원했다. 하지만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대신 문틈으로 쪽지 하나가 스윽 들어오는 게 보였다.

“뭐지? 휴드, 저걸 가져다주겠나?”

난 두말않고 문에 가 종이를 집어들었다. 그냥 쪽지인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구불텅구불텅 계속해서 딸려온다. 이건 무슨 두루마리인가? 밖에서 안내인 씨가 어떤 식으로 이걸 넣어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악전고투 끝에 종이를 모두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대충 둘둘 접어 석관이 있는 쪽으로 가져가는데, 어쩐지 내 걸음걸음마다 마법사의 표정이 시시각각 어둠침침해진다. 영문을 모른 내가 종이를 내밀자마자 그는 빼앗듯 그것을 펼쳐보더니 아까 소녀처럼 청동빛 얼굴로 변했다.

“저, 저…… 게펜타이너 씨?”

“벌써 날짜가 이렇게 되었나? 하지만 무리야! 다다음 달까진 도저히…… 진작 여기 시간을 늘였어야 하는데! 젠장! 미리 말해주지 않고 청구서만 들이미는 건 뭐야!
어이! 밖에 있지? 이거 좀 어떻게 연장할 수 없을까?“

“…………”

“쳇. 삐졌군. 귀여운 녀석 같으니.”

“……당신의 귀여움이란 기준은 일반인과 아득하게 멀군요.”

“그런가? 일단 자네를 귀엽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니, 그 정도면 정상 수준 아닌가?”

“…………원래 이런 성격입니까?”

도대체 왜 난 이런 비뚤어진 사람들과 필연적으로 만나야 하는 걸까.
마법사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미안한 표정으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안. 오늘은 저 녀석에게 뭐라 할 말이 없어. 이거 당분간 약점 잡히겠군.
아쉬운 건 알겠지만, 일단 돌아가 주지 않겠나?”

“하지만, 하지만……
아니,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와야겠군요.”

지금은 물러나는 게 상책이다. 여기서 괜히 고집피웠다가 그를 화나게 만들면 앞으로의 출입마저 장담할 수 없으므로. 오늘은 얌전히 물러나고, 내일 질문거리를 잔뜩 싸들고 와서 소녀를 괴롭히기로 하자. 하룻밤, 아니 앞으로 몇 시간만 더 초조해하면 될 일이다. 그새 소녀가 어디로 도망갈 리는 없을 것이다. 어느새 마음만은 충실한 학자가 된 나는 거의 성욕과도 같은 열정적인 학구열을 석관에 쏟아부었다. 각도상 내 시선이 보일 리는 없었을 텐데, 어째 관이 조금 부르르 떨린 것 같았다.

“자네에겐 미안하지만, 잘 된 일이기도 해. 이제부터 할 일은 내 주특기와 관련된 일이라, 마법을 쓰지 못하는 자네가 옆에 있으면 위험할 수도 있거든. 그쪽 관련 일은 오늘밤 안에 최대한 끝내놓을 테니, 내일 잘 부탁하겠네.”

“알겠습니다. 내일 아침, 상아탑이 문을 열자마자 달려오겠습니다.”

“좋아. 그 기세로, 저 소녀까지 우리 셋이서 한번 놀랄 만한 일을 해 보자고.”

게펜타이너 씨가 내 등을 팡팡 쳐댔다. 난 마음과 육체가 한결같이 울고 싶어하는 것을 애써 추스르며 그에게 작별인사를 고했다. 소녀에게도 인사를 할까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여기서 미련을 가지고 시간을 끌까 봐 두렵다.
하지만 내일은 꼭 물어볼 생각이다.
종단이 생기기 전의, 까마득한 과거에는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야 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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