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마법에 손대지 않은 평범한 국민 중 상아탑에 와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길드의 정문만 보고도 흠칫거리던데, 난 잘만 드나들고 있다. 아마 무코이가 안다면 기절할지도 모르겠다. 상아탑의 견습 마법사가 되는 게 소원인 그였지만 아마 이곳에 직접 들어온 적은 없을 것이다. 그가 공부하는 곳은 대학교 마법 전공 학부일 뿐, 본격적으로 마법을 수양한 자들만 들어올 수 있는 상아탑과는 아직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워낙 관계자 외에는 받아들이지 않는 폐쇄적인 곳이라, 이쪽에서 용무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라 저쪽에서 이쪽에 용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난 일단 합격선이었다.

“지난번에 뵈었던 분이군요. 이번에는 누구 소개로 오셨습니까?”

“브릭 교수님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법사 게펜타이너 님을 뵙고자 합니다.

같은 사람이 나온 걸 보니 이 사람은 정말 안내 전담인가 보다. 한편 지난번과 같은 머리모양에 안경, 옷, 심지어 장갑의 얼룩까지 똑같은 걸 보니 참 게으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런 내 생각은 그의 비범한 설명에 쑥 들어갔다.

“사실 전 당신을 몇 시간 전에 보았답니다. 지금 제가 연구하고 있는 시간의 초가속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지요. 아주 제한적인 공간에서 시간을 극단적으로 느리게 하는 법을 개발했거든요. 막대한 촉매가 들어가기 때문에 실용화는 아직 멀었지만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만난 게 정확히 언제죠?”

“……잘 기억나지 않네요.”

열흘 전이란 얘기는 차마 할 수 없었다.
안내인 씨는 여전히 싱글싱글 수상한 미소를 띄우며 날 안내했다. 내가 가져온 수레가 삐걱대는 소리를 내자 음소거 주문을, 오르막길에서 속도가 낮아지자 경량화 주문을 걸어주는 친절을 보이기도 했다. 그 압도적인 친절에 질린 나머지, 바퀴가 어긋나 안내인 씨가 무언가 마법을 걸려고 하자 선수를 쳐 바퀴를 걷어차 버렸다. 뿌직 하는 소리와 함께 바퀴는 정상으로 돌아갔고, 이를 본 안내인 씨는 입 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지난번에 쭉 둘러봤기 때문에 이번엔 어지간한 풍경들은 참을 수 있었다. 늙수그레한 남자가 척 보기에도 마법을 방어하는 실드 형태의 주문을 전개한 후 여유있게 담배를 피는 모습이라든가, 그런 그의 발밑을 푹 꺼지게 해 추락시켜버리는 여자의 모습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그리고 이번엔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게 아닌 만큼, 그런 걸 많이 볼 기회도 없었다.
나와 안내인 씨는 기괴한 문양이 그려진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문양은 퍽 인상깊게 생겼다. 하늘의 신 오데사의 문양부터 시작해 바람의 신 디길, 물의 신 셀레스티나, 대지의 신 바노 등의 문양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체계적으로 그려놨다기보다는 마치 어린아이가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그렸다고 할 정도로 엉성했다. 그렇지만 항상 종교계와 으르렁대고 있는 사이인 상아탑 한복판에서 이런 게 용납이 되는 건가? 흘끔 안내인 씨를 살펴보니 그는 이제 질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까까지 띠고 있던 수상한 미소가 일그러지자 보는 내가 다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게펜타이너 님은 이 연구를 언제까지 할 건지…… 브릭 교수님께 이야기는 듣고 오셨습니까? 이 방 안에서 어떤 연구를 진행하는지?”

“예. 언데드에 관한 연구라고 들었습니다.”

“대충은 알고 계시는군요. 사실 이 연구는 상아탑 내에서도 꽤 이질적이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근심하고 계신답니다. 게다가 언데드가 혹 탈출할 것을 우려하여 저런 우스꽝스러운 문양까지 잔뜩 새겨서 아주 골치아프지요. 그냥 이쯤에서 그만두셨으면 좋겠는데.”

안내인 씨는 방 안에 들릴 만큼 큰 소리로 투덜댄 후 방문을 걷어찼다. 난 입을 딱 벌렸다. 이 세상에 마법사의 공방 문을 발로 걷어찰 수 있는 사람이 여럿 있다면, 그들은 모두 상아탑 소속일 것이다. 이 정도면 배짱이 좋다는 말로 찬사를 보내기 힘들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는 말이다. 안내인 씨가 지치지도 않고 여섯 번을 힘껏 차자, 마침내 방문이 끼기긱 소리를 내며 무겁게 열렸다.

“들어갑시다. 어차피 게펜타이너 님은 문을 열어주시지 않을 테니, 밖에서 열려면 이렇게 열어야 하지요.”

“아, 예. 많이 열어보셨나 보네요.”

나는 얼떨떨한 채 수레를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의외로 널찍했지만 창문이 보이지 않아 어쩐지 어둠침침했다. 상아탑 안이니 반영구 광원마법이란 걸 쓸 법도 한데, 의외로 양초 몇 자루에 의존하고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방 여기저기엔 음산한 표지의 책들이 널려 있었고 바닥엔 붉은 색으로 별 모양이나 원, 팔각형 등이 그려져 있었다. 저 붉은 게 어째 피가 아닐까 싶지만 확인은 하지 않기로 굳게 다짐했다. 재료를 아는 순간 이 자리를 뛰쳐나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갑자기 오싹한 기운이 밀려왔다. 그 기운은 방의 가장 안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곳에는 부연 안개가 스멀스멀 새어나오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문 비슷한 것이 보인다. 분명 상아탑 외벽 바로 안에 있는 방 안에 방이 또 있는 기묘한 사실은 ‘상아탑이니까’란 생각 하나로 깨끗이 정리되었다. 이 방의 주인은 저기 있을 게 분명하다. 일단 이 방 안에는 없으니까. 문득 옆구리가 썰렁해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안내인 씨는 방의 출구로 가 문을 닫고 있었다.

“저, 저기요! 나 내버려두고 가지 마요!”

“의뢰를 받고 오셨잖습니까. 천천히 이야길 나누셔야지요. 대신 좀 빨리 데리러 가겠습니다. 아무래도 불편하신 모양이니.”

“최소한 소개는 시켜주고 가셔야죠!”

“별로 예의 차리지 않는 분이니 그냥 얼굴 맞대고 인사하시면 됩니다.”

후련해 보이는 안내인 씨의 얼굴이 문 뒤로 사라졌다. 끼기기기긱. 문이 닫히자 방 안의 빛은 달랑 초 세 자루가 담당하게 되었다. 나가지도 못하고 당장 뭘 해야 할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이윽고 생각이 정리되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바닥의 책이나 문양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안개가 자욱한 저 문을 향해서.

“게펜타이너 님~! 브릭 교수님의 소개를 받고 온 휴드라고 합니다~! 있으시면 문 좀 열어주세요~!”

묵묵부답. 몇 번 더 외쳤지만 역시 반응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돌아서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세다 보니 의외로 방 앞까지 금방 왔다. 사실 여기까지 오느라 함정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은근히 겁이 났기 때문에, 아무 일도 당하지 않고 무사히 걸어와 안개 속 방문 앞에 서자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조금만 더 긴장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밖에 있는 녀석! 얼른 들어와! 어서! 이 새끼를 잡아!”

지옥 밑바닥에서 사투를 벌이는 것처럼 다급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그것은 보통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잔뜩 쉰 듯한 어조도 그렇지만, 목소리에 실린 기운이 내 몸을 뒤흔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깐 긴장을 푼 사이에 이런 목소리를 들으니 온몸이 찌릿찌릿해진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도, 일단 도움을 요청하는 만큼 들어가 보는 게 좋을 듯했다. 각목이라도 하나 가져왔으면 좋았을 것을. 난 석관만 덩그러니 놓인 수레를 잠깐 쳐다본 후 문을 발로 찼다. 쾅! 아까와 달리 문은 쉽게 열렸다. 하지만 난 발을 들어올린 자세 그대로 정지했고,
그와 동시에 나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뭘 보고 서 있어! 얼른 와 무슨 마법이라도 써 봐! 난 네 녀석 마법에 맞아도 괜찮으니까 어서!”

……게펜타이너로 짐작되는 남자는 늑대로 추정되는 뼈와 격투중이었다.
난 급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게펜타이너 씨는 저 언데드에 비해 힘이 많이 딸린 듯했다. 이대로 두면 뜯어먹히는, 아니 뜯기는 - 위장이 없는 녀석이니 고기를 먹을 순 없을 것이다 - 건 시간문제였다. 마법을 쓸 수 없으니, 도구를 써서 물리쳐야 한다. 난 언데드에 대해선 그리 아는 바 없었고, 따라서 효과적인 주문이나 파괴도구 등도 잘 모른다. 그나마 주워들은 지식으로는, 잘게 부숴버린다든지, 신의 가호를 받은 물건을 사용해야 언데드를 정화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는 절대 무리. 둘째는?

“……뭐 이렇게 많아.”

방 한구석에는 신의 말씀을 담은 경전에서부터 성수, 성상, 바노의 축복을 받은 철퇴, 오데사의 빛의 정수가 담긴 보석 등, 카탈로그에서나 구경했던 물건들 거의 모두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잠깐 동안 여기가 상아탑이 아니라 신전의 성물 판매소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난 손에 잡히는 대로 철퇴를 집어들고 걸어가 성의없이 뼈에 한 방 갈겨 보았다. 세게 때린 것도 아닌데 퍼석 하고 흙벽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언데드는 맥없이 소멸하였다. 일반인에 지나지 않는 내가 일격에 언데드를 잡을 정도라면, 숙련된 전사가 들었다간 공동묘지 다섯 개라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상아탑답게 제대로 된 물건만을 취급한다는 얘기일까. 그런데 왜 저 사람은 이걸 쓰지 않았던 걸까? 늑대와 춤이라도 추고 싶었던 걸까? 내가 짐작하느니 대답을 듣는 게 나을 것 같아, 철퇴를 구석에 얌전히 내려놓고 그를 부축했다.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어요?”

“아니. 자네 손 좀 빌려주게. 날 일으켜서 저기 의자에 좀 앉혀 줘.”

이를 악물었는지 목소리는 아까보다 가늘었다. 나는 물리고 뜯겨 엉망이 된 그를 질질 끌고 방 한켠에 놓인 의자에 앉혔다. 그나마 피는 흘리지 않았지만, 이빨자국이 몸 여기저기에 난 데다 새하얘야 할 로브가 엉망으로 찢겨 있어 노숙자를 방불케 했다. 긁혀서 빨갛게 부어오른 얼굴에는 신경질적인 표정이 자리잡고 있었고, 덥수룩한 머리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백발에 가까웠다. 나도 새치가 꽤 많지만, 이 사람에 비하면 애교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 의외로 마법사답지 않게 제법 근육이 있어 보이는 게 눈에 띈다. 어디까지나 이곳에서 본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세 보인다는 것이지만 상아탑 안에서는 근육 사나이로 군림해도 될 만한 몸이다.
그 근육의 일부가 슬쩍 들렸다. 뭘 하려는 거지? 하고 생각하는 사이, 그의 팔은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그의 주먹과 내 머리를 강력하게 접촉시켰다. 빡! 아주 가까운 곳에서 타격음이 귀와 두개골을 통해 동시전달되고, 난 그 충격으로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난 잠시 비틀거린 다음 불끈 쥐어지는 주먹을 애써 내리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왜 때려요!”

“아까 내가 마법 쓰랬잖아, 이 얼간아! 네 녀석의 약해빠진 마법으로 날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냐? 까라면 까! 상아탑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 너 따위가 벌써부터 선배의 말을 무시할 정도로 여기가 우습게 보이냐? 엉?”

“나 마법 못 써요! 난……”

“마법을 못 쓴다고? 이제 어물쩡 넘어가시겠다? 그딴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지껄여대다니, 네 녀석이 얼마나 비겁한지 알 것 같군. 하! 네 녀석의 이름은 대체 뭔가? 똑똑히 들어주지.”

이건 아까 늑대보다 더 으르렁대는 말투다. 이제 내 손은 주먹을 쥐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철퇴 쪽으로 뻗고 있었다. 철퇴를 먼 곳에 두고 와서 다행이다, 고 내 머리는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까 실수인 척 하고 둘 다 때려잡았다면 편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수님의 필사적인 모습과 맞바꾼 내 인내심은 이 강타 하나에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이런 사람에게 ‘님’이란 칭호를 생각했었단 말이지? 일단 그것부터 수정했다.
난 대답했다.


“게펜타이너 씨, 브릭 교수님의 소개를 받고 온 휴드라고 합니다. 말씀하신 석관을 가져왔습니다.”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브릭 교수님? 석관? 그게 오늘이었나?”

“예. 그리고 전 그분의 제자로, 마법은 전혀 쓰지 못하는 일.반.인입니다. 아까 마법으로 언데드를 잡은 게 아니라서 매우 유감스러워하시는 점, 아주 조금 죄송하군요.”

“아주 조금?
잠깐만, 친구……”

어느새 호칭이 친구로 승격되었지만 그런 건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말 한마디에 태도가 싹 바뀌는 인간은 이쪽에서 사양이다. 그리고 지금 내 이성은 잠깐 휴업한 상태다. 그나마 마법사에게 직접 덤벼서 좋을 거 없다는 사실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기에 그를 외면하고 출구로 걸어가며 대수롭지 않은 척 말했다.

“따라서 전 책임을 지고 모든 업무에서 손을 떼겠습니다. 교수님이 쓰신 매뉴얼을 소포 안에 동봉했으니 그걸 보고 하시면 어느 정도까지는 혼자서도 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보도록 하지요. 도움이 되었다 만 것 같아, 진심으로 전혀 아쉽지 않군요.”

에라, 모르겠다. 본능의 충동질에 넘어간 나는 삐딱하게 나가기로 결심했다. 은인에게 대우를 하지 않으면 가장 지독한 원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격언을 되새겨 보라지. 특별히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목숨을 구해주었는데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내 쪽에서 때려치우고 상종을 않는 게 낫다. 안 그래도 상아탑에 오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았던 만큼, 이 쪽에서 먼저 일을 때려치울 구실을 만들어준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돈도 중요하지만 내 기분이란 것도 충분히 고려해야 하니까 말이다.

“어이.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보군. 이곳의 신참 마법사인 줄 알고 그만 착각했네. 화 풀게.”

“신참은 그렇게 다루시나 보지요? 거 참, 훌륭하게 성장하겠네요.”

“미안하다니까, 글쎄. 내 사과를 받아주게.
받지 않으면 자네는, 주, 죽을지,도, 몰라아앗!”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이딴 식으로 사과를 청하는 사람도 있나?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날 대체 뭘로 보고! 난 이번에야말로 주먹을 꽉 쥐고 그대로 마법사를 때려눕힐 생각으로 뒤돌아섰다.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게펜타이너 씨의 모습이 보인다. 주먹을 쥐고 있었지만, 당장 내게 주먹질을 하기 위해 달려오는 건 아닌 듯 싶다. 아무튼 잘 됐다. 달려오는 기세를 이용해 한 방 먹이면, 한 방, 먹일……수 없다! 난 다시 돌아서서 전속력으로 달렸다. 내 뒤를 게펜타이너 씨가 빠른 속도로 쫓아온다. 그리고 그의 뒤, 아니 우리의 뒤를,
거대한 그림자가 쫓고 있다!  

“저거 뭐야아악!”              

“학명은 나도, 모른다네! 헥헥헥!”

덜거덕거리는, 뼈가 요란하게 맞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린다. 자세한 모습을 볼 틈도 없었지만, 아까 늑대 언데드보다 최소한 세 배는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즉 보폭도 세 배, 도약력도 세 배, 다리 길이도 세 배, 힘은 아마 세 배 이상. 그리고 이쪽을 향해 전력으로 질주중!

“당신 마법사잖아! 어서 마법 써!”

“그게 되면 내가 이렇게 뛰고 있겠냐! 이대로면 둘 다 잡혀! 출구로 가지 말고 성물을 써!”

어찌된 일인지 그는 마법을 쓸 수 없는 듯하다. 그는 아까부터, 나는 벌써부터 입에서 거친 숨이 나오려 하고 있다. 아무튼 그의 말이 맞다. 출구로 가 봤자 저런 나무문짝으로는 저 녀석을 잠시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술래잡기하듯 방 안을 빙빙 돌아봐야 잡히는 건 매한가지일 터. 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급격히 틀었다. 발목과 허리 쪽에 엄청난 통증이 왔지만 신경쓰지 않고 최대한 속도를 내 달렸다. 그 방향은 저 괴물이 뛰어오는 방향과 정반대. 즉 녀석과 비스듬하게 마주치는 각도이다. 아니나다를까 괴물의 앞발이 퉁기듯 내 쪽으로 날아왔다. 그 직전에 나는 몸을 날렸고, 그 덕에 충격은 조금 완화되었다. 뼈의 상태가 조금 좋지 않았는지 발톱은 너덜너덜하게 무디어져 있었고, 그래서 거기에 찢기는 건 면할 수 있었다.

“크아아앗! 아프잖아!”

……이렇게 말해 봤자 죽을 정도로 아프다는 건 부인할 수 없지만.
내가 날아간 방향은 다행히 성물 무더기 쪽이었다. 몇천 피아 어치 성물에 부딪쳤지만 신의 가호, 혹은 신의 분노가 내게 임하진 않았다. 하지만 저 괴물에겐 충분히 임할 것이다. 지근거리에서 괴물이 날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까의 언데드에게선 별다른 살기를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 녀석에게선 숨이 턱 막힐 만큼의 분노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 이유를 생각할 겨를 따윈 없었고, 난 보지도 않고 두 손 가득 성물을 집어든 후 괴물에게 외쳤다.  

“이리 오너라!”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난 지체하지 않고 손에 든 것들을 내던졌다. 보석, 성수병, 펜던트 등등이 괴물에게 닿을 때마다 구멍이 뚫리거나 새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녹아내렸다. 괴물의 뼈는 성물에 대해 물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무력했다. 성물의 유탄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괴물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난 한번 더 움켜쥔 성물을 뿌린 후 아까의 철퇴를 잡고 괴물의 머리통을 향해 휘둘렀다. 콰창! 하고 질그릇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괴물이 땅에 쓰러졌다. 제대로 들어간 모양이다. 내버려두면 이대로 소멸할 게 뻔했기에 난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괴물을 바라보았다. 괴물은 고개를 조금씩 움직였지만 곧 움직임을 멈추었다. 살았을 때 그대로 엮여 있던 뼈들이 와르르 무너지며 하나하나의 객체로 돌아갔다. 문득 괴물의 머리를 바라보니, 눈동자 없는 휑한 눈구멍이 아까 게펜타이너 씨를 덮쳤던 언데드가 소멸한 장소를 향하고 있었다. 두 번 죽은 사체의 모습은 후련하다기보단 어쩐지 슬픈 느낌을 가져왔다. 물론 이런 감상적인 생각은 이 녀석이 무력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그때 갑자기 생각났다. 상아탑 안에 언데드가 나올 수 있다면, 그것은 아까 들었던 사실과 일치한다. 화석 파괴자.
게펜타이너 씨는 십년 감수했다는 표정으로 내게 걸어왔다.

“무사해서 다행이군. 이 녀석이 깨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언데드란 건 워낙 변수가 많아서 말이지.”

언뜻언뜻 생각들이 떠오른다. 일단 정리해 보자. 질문부터 하고서.

“당신이 저것들을 깨웠어요? 왜?”

“그야 연구하려고 깨웠지. 내가 심심해서 이러는 줄 아나?”

“하지만! 이미 죽은 생명을 다시 살리는 건 그 생명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겁니까? 게다가 되살려놔 봤자 이렇게 산 자에 대한 증오만 가질 뿐인데 이걸로 무슨 연구를 하려구요?”

게펜타이너 씨는 가만히 날 바라보다 혀를 차며 말했다.

“네 녀석은 바보군.”

“하! 뭐라구요?”

“연구란 알지 못하는 영역을 알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네 녀석은 알량한 도덕심을 내세우고 싶은가 보군. 그럼 말해 봐라. 내가 이 오래된 생물을 되살려 그들의 행태를 관찰하려는 것과, 네 녀석이 그 도덕심을 지켜 만족감을 느끼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 결과를 줄 수 있겠나?”

“도덕심이란 걸 그런 걸로 재지 마시죠. 어미 늑대와 새끼 늑대를 갖다놓고 한꺼번에 살리고 죽이는 작자한테 그런 말 듣기 싫습니다.”

난 역사학도일 뿐, 고고학이나 해부학 등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 정도쯤은 구별할 수 있다. 골격은 정직한 것이고, 따라서 두 마리의 언데드의 골격이 척 봐도 딱일 정도로 일치한다면 당연히 같은 종류이다. 거기에 확연한 크기의 차이, 큰 언데드가 죽을 때의 반응을 보면 불확실하지만 제법 사실에 가까운 추측이 가능하다. 그리고 추측은 게펜타이너 씨의 반응을 본 순간 사실이 되었다.
그는 두 손을 들고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은 맞아. 하지만 난 변태가 아니야. 둘을 동시에 살릴 생각은 없었다네. 하지만 어미인지 아비인지가 새끼의 뼈와 너무 가까이 있던 터라, 새끼를 살리려다 한꺼번에 살려버리고 말았지 뭔가. 조금 늦게 알아챈 덕에 둘 다 운동 좀 했지만, 별로 다친 덴 없어 보여 다행이야.”

살짝 말을 돌리는군. 하지만 상처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느닷없이 전력질주하다 거대한 앞발에 두들겨맞은 자에게 상처가 없을 리 없다. 어디 삐거나 하진 않았지만, 내 팔다리나 배에는 피멍이 얼룩덜룩 배겨 있었다. 뻔뻔도 하셔라.

“당신에겐 피멍까진 상처의 범주에 속하지 않나 보군요.”

“당연하지! 요새 언데드들과 매일 격투를 하다 보니 그 정도는 일상다반사로 생기더군. 남자라면 그 정도는 견뎌야 하는 것 아니겠나?”

대화가 안 통한다. 어지간한 떡대들이나 할 법한 대사가 마법사의 입에서 나온다는 자체가 모순이다. 그러고 보면 저 어울리지 않는 근육도 매일의 고행을 통해 얻은 듯 하다. 지금 막 난 상처에 대해 보상을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이런 식의 대답을 듣는다면 은근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난 아까까지 미칠 듯이 화를 내지 않았던가. 더 대화해 봤자 아무 결론도 나지 않는다.

“이번엔 진짜 갈 겁니다. 그래도 물건은 전해드려야 할 테니 저건 이리로 갖다드리지요.”

“정말? 브릭 교수님에게는 날 도와줄 사람을 부탁했고, 그쪽도 수락한 것으로 아는데. 좀 도와주다 가지 그러나.”

“교수님은 교수님이고, 저는 저니까요. 할 수 있다면 절 설득해 보시든가요.”

“설득이라. 그럼 한 번 해보도록 할까.”

정말 하는 건가? 당연히 안 할 줄 알고 내뱉은 말에 상대가 진지하게 대응하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조금 기대되기도 했다. 어떤 식으로든 내 상상을 깨는 말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다시 그를 향해 서서 말을 기다렸다.
그는 1분 가량 침묵하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왜 상아탑과 교단이 사사건건 싸우고 있는지 알고 있나?”

그의 말은 이를테면 ‘사람이 왜 숨을 쉬어야 살 수 있는지 아나?’와 같은 종류의 압박이었다. 당연히 생각하고 있지만, 대답하려면 막막해지는 문제. 상아탑과 교단이 사이가 나쁘다는 건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만, 정작 왜 나쁜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의외로 얼마 없다. 왜 갑자기 이런 말이 나왔는지는 조금 있다 생각하기로 하고, 흥미있는 명제였기 때문에 나 또한 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인 후 천천히 말했다.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교단은 신을, 상아탑은 에테르를 믿고 있잖아요. 그래서 교단에 비해 상아탑 쪽이 좀 더 능동적이고 인간 중심적이죠. 인간이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입장은 교단에서 보면 당연히 껄끄러울 테고.”

“교과서적인 대답이군. 재미없는 녀석일세.”

아까까지 경멸했던 상대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속이 쓰린 일이다. 더군다나 내 말은 원론적인 입장에 불과하다는 걸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기에 속쓰림은 한층 더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교단과 상아탑이 서로 반대방향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란 말은 맞다. 하지만 네 말보다 더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다. 신은 산 것을 살리고, 죽은 걸 죽인다.”

그와 나의 시선이 언데드의 잔해가 흩어지는 곳을 향했다. 그 말대로다. 성물의 힘은 산 자의 원기를 북돋워주고, 죽은 자가 영원히 안식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는 손가락을 들어 자기 쪽으로 까딱 구부렸다. 내 뒤에 있던 수레가 마치 누가 잡아당기는 것처럼 스르르 다가와 그의 앞에서 멈췄다. 게펜타이너 씨의 손이 화석을 어루만졌다. 먼지가 흩날려 난 기침을 했지만, 그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마법사는, 산 것을 죽이고 죽은 것을 살린다.”

잠시 둘 다 침묵했다. 그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내게서 시선을 거뒀다. 하지만 난 그에게서 뭔가 더 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게 저를 붙잡으려는 설득입니까?”

“그래. 자네가 보기에 어떨지 몰라도, 이것이 마법사의 숙명이자 마법사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네.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과거에서 현재를 읽고, 미래를 읽어 현재를 살아가지.
내 연구는 이러한 명제에서 출발했어. 이제는 실존하지 않는 생물들의 정보가 담긴 유일한 증거가 바로 화석일세. 이것을 고고학자들이 한두 달 연구한 후 성과를 발표하면 그걸로 끝이야. 기껏해야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어느 날엔가 다른 유물에 밀려 버려질 뿐이지.
그래서 난 생각했지. 화석의 시체를 언데드로 되살린다면 잠시나마 그가 살아가던 방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결과는 어떤가? 나와 자네를 향해 달려들던 그 모습은 고대에 그들이 사냥을 하던 방식과 똑같았을 걸세. 그리고 난 그 생생한 모습을 관찰하여 고고학자보다 훨씬 나은 성과를 올릴 수 있지. 비록 얼마 가지 못하고 소멸되어야 하지만, 박제되어 돌멩이 취급받는 것 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하네. 우리는 그를 관찰하고, 그는 잠시나마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있으니까.“

“당신의 말은 틀렸어요. 새로운 생명? 당신은 시체를 생전의 기억에 따라 움직이게 했을 뿐이지, 생명을 준 게 아니에요. 게다가 언데드의 공격본능으로 우리를 공격한 걸 잊었어요? 살려놔 봤자 본래 습성대로 행동한다고 보기 어렵지 않을까요?”

“또 도덕심에 기대 말하는군. 그 부분은 자네와 내가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더 말하지 않겠네. 그리고 아까는 나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대부분의 실험은 성공했네. 난 내 모든 역량을 기울여 이 방을 만들었고, 이 안에서 깨어난 언데드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생전의 기억만을 가진다네. 언데드의 증오심이란 최소한 이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어.”

“하지만 아까……”

“확실하게 해 두지. 저기 소멸된 언데드들은 멸종된 종으로, 현존하는 가장 큰 늑대보다 최소한 배 이상 큰 놈들일세. 내가 이런 말을 하긴 쑥스럽지만, 아마 자네가 처음으로 본   언데드는 나와 장난치려는 것이었을 거야. 난 이 방을 유지하느라 내 힘을 모두 쏟아붓고 있으니 마법을 쓸 수 없고, 그래서 자네가 마법을 쓰면 내가 그 위력을 살짝 떨어뜨려 움직임을 막으려고 했지. 그리고 두 번째는 자네도 짐작하다시피 새끼를 잃고 본능적으로 어미가 달려든 것이고. 이쯤 되면 이해하겠나?”

“아……”

이제 이해가 간다. 아까 마법을 쓰지 않았다고 화를 냈던 건, 언데드를 뜻하지 않게 소멸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치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다급함이 가득 묻어나왔던 것 같지만, 아무튼 언데드나 게펜타이너 씨나 일단 악의는 없었다는 소리다. 이렇게 보면 오해한 건 분명 내 쪽이다.

“정말 그렇다면 제 잘못도 있군요. 제가 새끼를 잡은 탓에 어미까지 덩달아 소멸시켜야 했으니까요. 그것 때문에 게펜타이너 씨의 연구에 지장이 생겼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좀 억울한 감도 있긴 했지만, 난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 문득 강간범인 줄 알고 때려눕혔더니 정열적인 남자친구더라, 같은 사건에 휘말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랴. 잘 보존된 화석이 그렇게 흔한 물건도 아닌데, 나라는 변수로 인해 두 개나 못쓰게 되었다면 도의적으로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하다. 아직 그가 좋아진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책임은 지는 게 옳다.
게펜타이너 씨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설득은 성공했군.”

“그런 것 같네요.”

아직은 감정이 좀 남아 있었기에 난 까칠하게 대답했다. 마법사는 거기에 별로 개의치 않고 손을 내밀었다. 난 그 손을 붙잡고 악수를 나눴다. 그는 웃으며 손을 위아래로 크게 흔들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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