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은 그닥 반응이 없나 보네요.
뭔가 허무하지만 일단 끝까지 올려보겠습니다.



  강의실 안은 후덥지근했다. 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실내에 수많은 학생들이 뿜어내는 숨결이 스멀스멀 채워졌다. 학문의 열기라고 부르기 애매한, 짜증과 불만이 뒤엉킨 기분나쁜 열기였다. 창문을 열어놓긴 했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이 열기의 발생원인은 창이 열렸든, 바깥에서 공사를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모든 것은 돈이 생기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또 나왔다, 저 흰소리. 몇 사람이 하품을 하는 게 보인다. 물론 내 위치에서 보일 뿐, 교수에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강의가 시작됨과 동시에 어느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천장만 바라보는 피욘 교수이기에. 혹자는 경제학에 대한 학문의 지식보다 돈에 대한 열정적 사랑을 인정받아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고 비아냥거리고, 그 때문에 ‘피아의 연인 피욘’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아니, 도대체 돈 얘기만 나오면 종교인이라도 된 것처럼 찬양 일색으로 가는 이유를 모르겠다. 그 때문에 안 그래도 빈약한 수업내용이 아주 속이 빈 샌드위치처럼 엉망이 되지 않는가.

“누차 이야기한 바와 같습니다. 돈은 신께서 인류에게 내려주신 불이나 바퀴 등과 달리 인간이 직접 발명한 최초의 물건이며, 이로 인해 교환경제란 것이……”

‘누차 이야기한 바와 같으면 이제 그만하라구.’

옆자리에 앉은 시아가 내게 살짝 중얼거렸다. 여드름이 여기저기 나 있지만 그것까지 포함한 귀여움을 가진 내 동기이다. 여자아이지만 나와 생각하는 게 잘 맞아 같이 듣는 수업에서는 이렇게 옆자리에 앉는다. 둘이서 이 교수 저 교수를 험담하며 키득거리다 보면 지루한 수업도 어찌어찌 버틸 수 있다. 덕분에 성적까지 이인삼각으로 중하위권을 달리는 중이다. 딱히 연애감정 같은 건 없는데 어째 동기들은 우리를 연인으로 간주해 골치아프다.
피욘 교수의 있는지 없는지 모를 아내와 아들, 장인과 장모에게까지 험담의 촉수가 뻗쳐갈 무렵에야, 교수의 돈에 대한 사랑의 세레나데가 끝났다. 아직 1절도 안했다는 아쉬운 눈빛으로 교수가 물러나자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이제부터 뭘 할지에 대한 즐거운 토론이 여기저기서 들리고, 대학생다운 풋풋함이 강의의 무거움을 털어낸다. 대낮부터 맥주로 목구멍을 적시려는 술꾼 녀석이 있는가 하면 도서관에 처박히려는 샌님도 보인다. 친한 녀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무시하고 지나가려는데, 옆에서 들린 몇 마디 말에 잠깐 걸음을 멈췄다. 선교 클럽의 회장과 견습 마법 코스를 밟고 있는 무코이와의 말다툼인 듯했다.

“인류가 어디서 창조되었냐고? 암, 원숭이 같은 네 녀석은 대답 못 할 거다. 우리의 몸은 신들이 힘을 합쳐 만든 귀중한 존재이지. 그들이 만든 게 아니라면 이런 정교한 육체가 가능할까 보냐?”

여러 종단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신화이다. 대지의 신 바노가 육체를, 물의 신 셀레스티네가 혈액을, 바람의 신 디길이 그 혈액의 흐름을 생성시켜 인간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하늘의 신 오데사는 그에게 빛을 내려주어 눈을 뜨게 하였다. 신화 속에서는 아름다운 협력으로 피조물을 만든 그들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신도들에 의해 아웅다웅하는 사이가 되어가고 있다. 대체 신들 사이에 서열이 무슨 필요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신들 자신들도 잘 모를 것이다. 신도의 숫자와 헌금의 액수의 관계가 비례한다는 걸 깨달은 최초의 성직자에게 저주 있으라.
몇 천 년을 이어온 굳건한 신화였지만, 그에 맞서는 의견도 팽팽했다.

“그런 구닥다리 의견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 없지. 만물은 에테르에서 시작한다. 이미 마법사들은 벼룩 같은 작은 동물을 탄생시키는 데 성공했어. 신들이 나설 것도 없이, 인간이 생명을 탄생시키는 경지에 다다랐다는 거야. 아직 다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에테르의 무한한 흐름 속에서는 어떤 생명도 탄생이 가능해. 그리고 그 원리를 밝혀내는 순간 인류는 신이 될 수 있는 거다!”  

위험하군. 무코이 녀석, 눈이 맛이 갔어.
하지만 그 자리를 슬슬 피해 가면서도 그의 말이 아주 허황되어 보이거나 하진 않았다. 요즘 뜨고 있는 -상아탑의 영향력 확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에테르 기원설은 에테르야말로 인류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모태라는 것을 주장한다. 논거가 턱없이 부족한 것은 필연이지만 마법사들은 그 필연을 우연으로, 나아가 절연으로 바꾸기 위해 오늘도 시험관을 기울이고 있다. ……사실은 내가 무신론자라서 그런지, 어느 쪽이 특별히 나은 의견이라고 기울기 싫은 건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당장 내 코가 석 자인데 그런 쪽에 관심을 가질 여유도 없었다.
시아와 나는 손을 잡고 그들 사이를 헤치며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내가 이제부터 무엇을 할지 잘 알고 있는 시아는 손을 흔들며 곧장 사라진다.  여자아이의 손을 잡는 건 연애감정과는 상관없이 즐거운 일이라,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언제나와 같은 대학생의 일상. 나는 이 일상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 사랑을 꿋꿋이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돈을 사랑해야 한다.
언제나 소득 없이 끝나긴 했지만, 나는 걸어가면서 질리지도 않고 생각했다. 과연 지금 하려는 고고학 교수 브릭의 조교 일 말고 할 만한 일이 있는지. 조교 일이 어려운 건 아니지만, 돈을 너무 조금 번다는 게 문제다. 현재 모아야 할 돈은 등록금만 120피아. 그나마 조교를 맡아 조금 감면된 액수이다. 게다가 먹고 살 생활비는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절대로 다른 일거리와 병행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일거리란 건 보수가 엄청나게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중의 하나이다. 나쁜 경우라면 애당초 일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좋은 경우란 건 일전에 맡았던 끔찍한 일 같은 종류들이다. 지금까지 한 일은 시체 조립, 마법사들의 탑 청소 같은, 일상과 살짝 동떨어진 임무들. 다시 랑테 사무소를 방문하면 어떤 일거리가 주어질지 상상만 해 보려다, 그 상상마저 포기했다. 이제 거기는 이틀 정도 굶어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 정도에나 내 발로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절대 보류다!
하지만 생활비는 이제 7피아 남짓 남아 있었다. 만약 학교에서 보수가 제때 지급되지 않는다면 정말 랑테 씨에게 매달리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런 불길한 생각을 떨치고자 머리를 이리저리 돌렸다. 뚜둑 소리가 아무도 없는 복도에 울렸다. 설마 소리가 방안까지 들렸을 린 없겠지만, 안에 있는 사람은 내가 온 것을 눈치챈 모양이다.

“벌써 왔나? 어서 들어오게. 내가 목이나 좀 주물러줘야겠군.”

“사양하겠습니다아.”

지옥귀란 별명이 납득이 가는군, 이란 말은 이번엔 속 안에서만 되뇌었다.
안에서 이미 내가 온 것을 알았으니 노크는 생략하고 바로 문을 열었다. 방 안은 언제나처럼 책구덩이화 되어 있었다. 질서 없이 난삽하게 쌓인 책 무더기 사이에서 브릭 교수가 빠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누가 보더라도 학자라고 인정할 만한 얼굴과 육체였다. 껑충한 키에 누런 얼굴, 움푹 들어간 뺨에 숱 적은 머리칼, 덥수룩한 수염, 담배냄새가 짙게 밴 가운, 불룩한 주머니. 이 외에도 그에겐 자신이 학자라고 주장하는 온갖 호기심과 자부심 등이 암암리에 뻗쳐나오고 있었다. 그 기운은 120피아를 갈망하는 내 영혼의 기운과 맞부딪치고도 줄어들 줄 몰랐다.  

“일단 급한 용건부터 해결하도록 하지. 자네에게 물어볼 게 있네. 혹 특별수당 받을 생각 있나?”

“기꺼이!”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왔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브릭 교수님의 얼굴에 랑테 씨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능글맞은 웃음이 떠올랐다. 음침한 연구실 안에서 그런 웃음을 지어보이면 정말 악당같다는 걸 왜 교수님은 모르는 걸까.

“특별수당에는 특별한 일이 따른다네. 그리 어렵진 않은 일이니 잘 해보게나. 그럼 가보게. 돈은 다녀오는 대로 서무과에 말하면 내 줄 걸세. 제법 많을 거야.”

“교수님…… 무슨 일인지 말해주셔야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닙니까.”

좀 불안했지만 일을 맡는다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으니 일단 해보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사람 하나를 순식간에 휘어잡는 교수님의 화법도 참 대단하긴 하다. 예전에 내가 시아와 함께 있는 걸 보고, 연인이 아니냐고 놀린 후 시아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일거리를 잔뜩 떠안겨 주는 식으로 노동력 1인분을 착취한 적도 있었다. 일단 일은 하되, 어수룩하지 않게 행동해야 보수를 제대로 받을 수 있다.
교수님이 방에 들어갔다 잠시 후 나왔다. 지금 막 끄적인 것 같은 종이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마차를 타면 여기서 왕복 한나절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가 본 적은 없지만, 어쩐지 산 속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분명 그 근처에 엘드에서 네 번째로 높은 메로 산이 있었으므로. 잃어버리지 않게 종이를 호주머니에 넣으며 물어보았다.

“여기 가란 말이군요. 산 속인가요?”

“음.”

“가서 일을 도우라는 겁니까?”

“아니. 찾아올 물건이 있네. 가서 내 이름을 말하면 알아서 내줄 게야. 배달을 시키고 싶지만 워낙 조심조심 다뤄야 하는 물건이라 말일세.”

“그런가요. 그래서 종류는요? 대체 어떤 물건이죠?”

“비이~밀.”

교수님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내뱉은 말 덕분에 난 사레가 걸려 콜록거렸다. 교수님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등을 몇 번 두들겨주더니 이내 돌아섰다.

“콜록, 자, 잠깐만요! 가르쳐 주시고 들어가셔야죠!”

교수님은 제자리에 서더니 흥미와 어이없음이 교차하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내가 가르쳐주면 자네 반응이 볼 만할 텐데. 사레 걸리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고 싶나?”

“아니오.”

이런. 반사적으로 대답이 나와버렸다. 교수님은 두 번 물어보지도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가만히 있게. 수고하고, 어차피 가면 알게 될 거, 여기서 설명할 필요 뭐 있겠나.”

말투는 귀찮으니 직접 확인하라는 식인데, 어째 교수님 얼굴은 그게 아닌 것 같다. 내가 그 물건을 보고 얼마나 놀랄지 기대하는, 이를테면 으슥한 밤길에 장난감 뱀을 놓아두고 행인을 기다리는 악동의 표정이었다. 교수님의 이런 표정은 꽤 오래간만인지라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마음의 수양이란 끝이 없다. 그 어떤 성자라 해도 자신이 수양의 끝에 이르렀다고 선언하진 않는다. 인간의 몸으로 신의 경지에 다다른다면 또 모를까. 그렇기에 나 같은 평범한 인간은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아직 수양이 모자라군’하고 투덜대야 한다. 이럴 때마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왜소한지 확인할 수 있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래서 종교가 생겼다. 자신의 덜 떨어진 부분을 초월자의 의지와 권능에 기대려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그저 혼자 투덜거리며 철학이니 뭐니 하는 학문을 창시했다.

‘아직 수양이 모자라’

교수님이 부탁한 물건을 현지에서 보았을 때 나의 놀람은 이 한 마디로 압축되었다. 이런 일이 연속해서 생긴다면 그때야말로 역사학 따윈 때려치고 종교든 철학이든 가져야 하리라. 어쨌든 충격은 처음 한 번 뿐이었기에, 일단 놀란 마음을 추스렀다. 이걸 발굴해낸 사람은 저주받은 물건을 돈 받고 치울 수 있어 다행이라는 태도였다. 그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등산을 하다 굴러떨어져 우연히 발견한 동굴 깊숙한 곳에 있는 석관이라니, 환상소설 등에 자주 나오는 소재가 아닌가. 이미 지불은 끝나 있었기에 - 학교 측에서 교수님에게 냉큼 돈을 챙겨줬을 리 없으니 교수님의 지갑에서 나온 돈일 가능성이 크다 -  그 사람이 떠들어대는 것에 대해 대충 대답해 주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짐을 실어야 하니 마차를 구해야 하는데, 저녁나절에 짐을 실어줄 마차를 그런 외진 곳에서 찾는 건 무리였다. 결국 그날은 그곳에서 묵고 다음날에야 다른 곳에서 마차를 잡아와 짐을 싣고 출발했다. 갔다오는 데 꼬박 이틀이 걸린 셈이었다. 학교의 복도에 촛불을 밝히기 시작할 무렵에야 도착한 나는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부스럭부스럭, 와르르, 쿵탕! 등 방 안에 있는 사물의 위치가 재배열되는 소리가 한참 시끄럽게 들린 뒤 교수님이 슬리퍼를 질질 끌며 나왔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아직 안에 불을 켜지 않았어. 요새 연구하느라 바빠 잠을 못 자서 지금 잠깐 졸던 중이었다네. 밖에서 초 하나만 가져오게.”

“저기, 교수님…… 이런 물건을 제자에게 가져오라고 하신 분 치곤 너무 태평하십니다만.”

“그래? 그렇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막 연인을 만난 표정이라도 지어야 하나?”

순간 나는 나 자신도 모를 무언가에게 감사했다. 교수님의 방은 충분히 어두웠고, 그래서 방 안에서 지은 교수님의 소녀다운 표정은 내게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런 모습을 보았다면 지금 수레에 싣고 있는 물건을 땅에 떨어뜨리고 발로 짓밟은 후 우워어어어! 하는 괴성을 지르며 복도를 질주하더라도 전적으로 교수님 책임일 것이다. 다음부터 절대 이런 말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바로 등을 돌려 초를 뽑아들고 연구실로 들어왔다. 설마 내 눈앞에 있는 흐릿한 실루엣의 60대 남성이 아직까지 소녀다운 표정을 짓진 않으리라는 불안감을 감추며 불을 켰다. 작은 불꽃이 일렁이며 다행히 내가 익히 알고 있는 흡혈귀같은 음침한 표정이 드러났다.

“물건을 꺼내게.”

이래서야 흡혈귀의 관을 꺼내는 것 같다. 하지만 더 이상 딴죽거는 건 삼가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에 난 묵묵히 포장을 벗기고 상자에서 물건을 꺼냈다. 꽤 무거웠기 때문에 교수님도 거들었다. 둘이서 양쪽을 붙잡고 낑낑대며 꺼낸 물건은 흡혈귀의 관이 아니라 돌로 만들어진 관이었다. 요즘 세상에 대리석이라면 몰라도 이처럼 바위를 파낸 것 같은 관을 쓰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더군다나 척 보기만 해도 이 관에서는 수백, 수천 년은 묵었을 법한 비범한 오라가 풀풀 풍긴다.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인이 보더라도 이 석관은 화석 취급을 받아도 상관없을 듯하다고 말할 것이다.
비좁은 연구실에는 이것을 눕힐 만한 장소가 나오지 않았기에, 일단 창문 근처에 세워 두었다. 창문이 돌에 의해 막히고 나니 연구실은 한층 괴괴해 보였다. 마치 입구가 막힌 동굴에 들어온 느낌이다. 게다가 관을 조금 옮긴 것 뿐인데 땀이 비오듯 흐른다. 교수님과 나는 윗옷을 벗고 땀을 닦은 후 관을 다시 살펴보았다. 겉표면에 뭔가 긁힌 자국 같은 것이 한가득 있는 걸 보니 혹시 이것을 만든 사람들이 뭔가 문양 같은 걸 새겼을지도 모르겠다. 긁히고 풍화된 자국이라 생각하기에는 좀 미심쩍을 만큼 세세한 균열 같은 게 표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내 전공이 아니라 브릭 교수님의 전공일 테니 내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관이 아니라 그 안의 내용물이다.  

“좋아. 이제 물건을 들여다보기로 하지. 아까 이걸 처음 봤을 때 많이 놀랐나?”

“당연하지요! 이런 걸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렇지. 나도 많이 놀랐네. 육안으로 보기는 지금이 처음이지만, 이틀 전 소식을 접했을 땐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지.”

‘그래서였나?’ 문득 난 이틀 전을 떠올려 보았다. 가운이며 셔츠며 할 거 없이 몽땅 바지 안에 쑤셔넣은 채 대학을 활보하던 교수님의 모습을. 참 놀라는 방식도 가지가지다.
우리는 비스듬하게 서 있는 석관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밀어냈다. 바닥에 눕히고 작업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그러기에는 공간도 협소하고 손도 부족하다. 그래도 관뚜껑을 여는 것 정도는 우리 둘의 힘으로도 할 수 있었다. 관뚜껑은 관과 분리되어 창틀 옆에 기대어졌다. 난 화석을 해부하는 심정으로 초에 불을 붙여 교수님께 내밀었다. 교수님은 내 손에서 초를 받아들어 돌 가까이 대며 말했다.

“자네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뭐라 말하기 힘들군요. 사실, 그 무어냐……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난 완벽한 형태의 미이라라고 생각하네.”

난 핫, 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교수님도 말입니까?”

“그래. 수많은 화석과 미이라를 보았지만, 이런……이처럼 완전한 인간의 미이라는 아직껏 누구도 보지 못한 것일세.”

교수님의 손이 가볍게 떨렸고 그 진동은 불빛에 영향을 미쳤다. 가슴 높이에서 흔들리는 붉은 빛이 관 안의 인물을 불그스름하게 비추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교수님이 미이라라 부른 그것을 바라보았다. 보는 것은 이것으로 두 번째였지만, 역시 미이라란 단어로 정의내리기엔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미이라라면, 잠자는 사람은 모두 미이라라 칭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관 안에는 그야말로 완벽한 사람의 원형이 잠자듯 누워 있었다. 몸의 굴곡을 보면 아무래도 16~7세의 소녀 같다.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는 붕대로 싸여 있었는데, 먹으로 칠한 것보다도 새까만 색이었다. 보통 미이라가 전신을 붕대로 둘러싼다는 걸 생각하면 얼굴이 제외된 것은 좀 의외였다. 혹시 가면이 따로 있는데 이것이 발굴되는 과정에서 분실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드러난 얼굴은 살아있는 사람과 차이점이 전혀 없었다. 보존이 잘 된 미이라를 두고 ‘마치 살아 있는 것 같다’라고 할 수는 있지만, ‘산 사람과 구별할 수 없다’라고 칭할 수는 없다. 애당초 미이라라는 기술은 엘드가 건국되기 한참 전, 국가라는 개념이 막 생기기 시작한 사막 지대의 원시부족에서 행해지던 것이었고, 따라서 그 결과물들은 적게 잡아도 천 년이 넘는 세월을 겪어야 했다. 즉 보존이 잘 되어 있다는 말은 뼈에 아직 가죽이 입혀져 있다는 말 정도로 해석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이건 대체 무엇일까? 보기 좋은 볼살에는 불그스름한 빛이 감돌았고, 긴 속눈썹과 허리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은 당장에라도 파르르 떨릴 것 같았다. 어째서 미이라인데 모발이 썩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건 갓 죽어 김이 아직 올라오는 따끈따끈한 시체라고 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하지만 난 교수님이 이 미이라를 처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오오오…… 이 피부의 촉감, 모발의 질! 게다가 어지간한 여자아이를 능가하는 미모! 이런 것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최고야! 이건 위대한 발견이야! 당장이라도 내가 가서 그 일대를 파 보고 싶을 정도야! 이런 게 둘, 아니 하나만 더 있다면……!”

자세히 보니 교수님의 입가에서 침이 조금 흐르는 것 같다. 교수님이 이런저런 기행을 많이 하긴 하지만 시체애호가가 아니란 걸 알고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이다. 어쨌든 교수님이 기뻐하는 건 좋은데, 문제는 놔두면 하루종일 저러고 있을 것 같다는 점이다. 게다가 어차피 이곳에서 내가 더 할 일은 없다. 난 넋을 잃은 교수님께 다가가 옷자락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오늘은 일단 돌아갈 수 있을까요? 시간이 너무 늦어서요.”

“응? 그래. 수고했네.”

교수님의 흥을 깨긴 싫었지만 할 얘기는 해야겠다. 지금 교수님께 휩쓸렸다간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미이라 품평회를 열지도 모르니 이쯤에서 나가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게다가 시간도 정말 늦었다. 무엇보다도 추가 수당이란 건 얄팍한 조교 수당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즉, 더 이상 머물러봤자 초과 근무로 인정받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교수님은 대답을 마치자마자 다시 자기만의 세상으로 빠져들었고, 난 교수님을 더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이번 방학은 교수님과 저거 연구하는 걸로 다 보낼 것 같다는 내 예측에는 호기심과 우려가 반반씩 섞여 있었다.


주말이 지난 후 학교에 와 보니, 꼬박 이틀을 연구실에 처박혀 있던 교수님이 밖으로 나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숙제를 제출하러 학교에 왔다가 교수님을 본 시아의 말에 따르면, 교수님은 허리띠를 거꾸로 맨 채 자꾸만 흘러내리는 허리춤을 계속 손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난 교수님께 가 보았다. 과연 무슨 일이 있긴 있었다. 오랜만에 본 교수님의 외관은 얼핏 큰 변화가 없었지만, 살짝 치켜뜬 두 눈이 시뻘개져 있는 것만 봐도 지금 교수님의 심정이 정상은 아니라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상아타아아압이라구요?”

“그래. 상아타아아압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나?”

“……일 때문에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창피를 좀 당해서요.”

“그거 잘 됐군. 그쪽에선 되도록 상아탑에 출입경험이 있는 사람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아니, 창피를 당했다니까요, 교수님……”

“그럼 다른 사람 시킬까? 나로서도 자꾸 이런 일에 자넬 시키는 건 썩 내키지 않아. 추가 수당이 자꾸 지출되는 것도 맘에 안 들고 말일세.”

“가겠습니다.”

또 자동으로 대답이 나온다. 그럴 줄 알았다는 교수님의 얼굴을 보며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거기 갔다 온 지 몇 달이나 되었다고 또 가야 하나? 하지만 교수님은 이번에도 추가 수당을 준다고 했다. 거기에 덧붙여, 상아탑 측에서도 며칠 동안 그곳에서 숙식하며 협력해준다면 충분한 보수를 준다고 했다. 그곳의 금전감각은 이쪽의 서민세계와는 자릿수에서 차이가 나니, 분명 짭짤할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고민의 주제를 바꿔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갈지, 마스크라도 하나 구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깔끔하게 결정재량 완료, 이제 선택재량의 문제인 셈이다. 난 돈에 관해서라면 어쨌든 비굴해지기로 진작에 결심한 바 있다. 설령 이번에 그곳을 다녀온 후 상아탑이 상아아아타아아아압이 되더라도, 그건 그때 일이다.

“가요, 간다구요. 갈 테니까 이번엔 무슨 일을 하는지 확실하게 가르쳐 주세요.”

교수님의 손이 벽을 가리킨다. 벽에는 이틀 전 세워놓았던 석관이 미묘하게 위치가 바뀐 채 서 있었다.

“저걸 어쩌라구요? 설마 저걸 갖다주라는 건가요?”

“그렇다네. 저걸 상아탑에 가져다 주게.”

“하지만 저건 교수님이 연구하는……”

교수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단순한 동작이었는데 내 눈에는 60년간 쌓인 피로를 내쫓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 이상했다. 이틀 전, 석관을 바라보며 흥분과 희열에 찼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간 걸까.

“이제 저건 내 손을 떠난다네. 애당초 내 물건이 아니었어. 인연이 없었던 걸까.”

“무슨……?”

“애당초 지인에게 한 발 빠르게 소식을 듣고 학교와 싸워가며 간신히 사들였던 물건일세. 그런데 나와 마찬가지로 저걸 노리던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야. 상아탑의 마법사인데, 화석을 이용한 연구를 하고 있다더군. 그가 학교측에 거액의 기부금을 내걸었어. 거기다 추가로 복도에 반영구적인 광원마법을 걸어준다고 약속했지. 이제 조만간 촛대를 모두 철거하는 걸 볼 수 있을 걸세.”

제길, 그건 너무 매력적인 조건이잖아!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교수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순 없었다. 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을 수도 있는 귀중한 연구자료를 확보했는데, 고작 이틀 만에 알지도 못하는 작자에게 뺏겨야 한다면 그 충격은 말로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교수님의 불만은 그게 다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경멸, 두려움, 실망 등이 엉망으로 뒤섞여 있었다.    
교수님은 잠깐 침묵하더니 끊어 말하듯 강하게 내뱉었다.

“게다가 그 자는 화석 파괴자일세.”

평소의 조용조용한 어조와는 다른, 경멸하는 태도가 확연히 드러난 말에 난 어리둥절했다.

“화석 파괴자라니요? 화석 가져다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마법이라도 갈겨대나요?”

“그보다 훨씬 악질일세. 나도 소문으로만 들은 얘기지만, 이 자는 화석의 생물을 언데드로 되살린다고 하네. 그런 다음 소멸할 때까지 관찰한다고 하지.”

“언데드라구요!”

난 이 화석을 보았을 때보다 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언데드는 말할 필요도 없이 죽은 자를 되살리는 재수없는 마법의 결과물이다. 마법의 계통이라든가 주문 등은 잘 모르지만, 그렇게 되살아난 녀석들은 본능적으로 산 자를 증오하게 되기 때문에 그의 옆에 있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게다가 시술자의 능력이 높을수록 언데드는 생전의 능력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 만약 저 뼈가 되살아나 내게 덤벼든다면 난 당해낼 자신이 없다. 난 나에 대해 과신하지 않으며, 내가 인간 중에서도 약한 축에 속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저 녀석이 언데드 중에서도 특별히 강한 축에 속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전혀 없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어깨가 덜덜 떨려왔다. 이건 아니다. 이런 일은 맡을 수 없다. 그때 교수님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생각보다 따뜻한 온기에 난 조금 진정되었다. 난 잠시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교수님. 이건 할 수 없을 것 같…… 교수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교수님은 내게 얼굴을 바짝 갖다댔다. 음침한 얼굴이 고개만 까딱 움직여도 입술 박치기를 할 수 있을 만한 위치까지 도달했다. 내 외침 때문에 침이 좀 튀었지만 교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안 돼. 자네가 꼭 가야 하네. 절대로.”

“아깐 다른 사람 보낼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니야. 역시 자네가 가야 하네. 내가 가고 싶지만 갈 수 없어.”

어째서, 란 말이 목구멍에서 꿀꺽 삼켜지다 말았다. 교수님의 눈 속 깊은 곳에서 마른 장작이 타는 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툭 튀어나온 복숭아뼈처럼 나를 아프게 자극하는 사실이 있었다. 만약 마법사가 브릭 교수님의 눈앞에서 그 화석을 언데드로 살려놓고 희롱한다거나 하기라도 한다면, 교수님은 기필코 그자를 쳐죽이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도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비통하게 말하는 것이다.

“제발 부탁이네. 나 대신 가서,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말해 주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어떤 일이 벌어지고 마무리지어졌는지는 알아야 해. 내 연구는 자네 없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네. 가서 자네의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게. 그리고 내게 이야기해주면 되는 거야. 무리한 부탁인 건 알지만 들어주게!”

거절했다간 마법사보다 내 목을 먼저 비틀어버릴 것 같다. 그 정도로 교수님이 내뿜는 열기는 대단했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생각했다.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다.
이 일을 하면 돈이 많이 들어온다.
어쨌든 상아탑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이니 목숨이 위험하진 않을 것이다.
거절했다간 조교 일이 잘릴 수도 있다.


자기합리화란 항상 생각보다 쉬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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