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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부 장관이 주최한 자선파티는 입구부터 보통의  파티 장과  분
위기가 틀렸다. 온갖 종류의 차와  그 앞에 서있는 제복을   차려입은
자들, 간간이 세큐리터들이 눈에 들어왔고,  쉽게 눈에 뜨이는 것은 아
머의 제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들이었다.
  정치에 연을 닿고자 하는 경제인, 돈이 궁한 정치가들이  각자의 이
득과  지위의 안정을 위해 적절한 교환조건을 들고 이 자리에 모였고
그것이 파티의 목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의 결정권을 가진, 그들의 한가운데에 선 것이, 이드였다
  메이저 알카나- 세계를 이끄는 솔브의 22명의 구성원.  그것이 얼마
나 대단한 것인지를, 평범한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은 솔브라는 이름 아래 그들의 뜻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
뿐이다. 일반인들이 바라보기에는, 메이저 알카나들이 대리인으로 내세
우는 마이너 알카나들마저 한없이  높아 보이는 것이,  지금의 세상인
것이다.
  유럽의 모 국 대통령이 마이너 알카나 중 한 명이라고 하는  현실에
서, 지금의 이드의 위치는,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까.  온 세계의 금융
의 움직임이,  이드의 말 한마디에 달려있는 것이다.
  22명의 메이저 알카나 중, 공식적으로 마이너 알카나들에게 오픈 된
것은 그와, 솔브의  두뇌라고 할 수 있는 The Tower.  메이저 알카나
넘버 16. 둘 뿐이다. 후자가 인간이  아닌 슈퍼컴퓨터임을 생각한다면,
그는 현재로는 메이저 알카나의 대변인인 셈도 되었다.
  그래, 세티의 마스터는 그렇게나 대단한 자였다. 그리고  지금 그가,
세티의 눈앞에서 손을 내밀고,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 오늘은 파트너이니까. "

  이드가 내민 손을 잡고 차에서 몸을  일으키자, 파티장의 입구가 한
눈에 들어왔다. 서울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다는 호텔 말쿠드(Malkhut)
의 로비에는  대낮과 같은 밝은 조명이 들어와 있었고,  붉은 옷을 차
려입은 보이들이 병사처럼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
  왕국, 순간적으로 세티의 머릿속이 지나간 이미지는 그것이었다.  하
늘까지 솟은 웅장한  성곽과 그 성을 지키는 붉은  옷의 기사들, 그리
고- 그 안에 있는 것은, 나라를 움직이는 자들,
이드의 손을 잡고 입구에서 로비로 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연미복
을  차려입은 호텔 매니저가 마중을 나왔다, 아니 영접이라고 하는 편
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는 환영이었다.
  붉은 색의 카펫이 푹신하게 깔린 방처럼  넓은 복도, 대리석으로 치
장된 벽재, 금빛으로  빛나는 온갖 장식들 사이를 걸어서, 연회장의 문
을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 여러분, MR.유리테스가 도착하셨습니다! "

  그리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낮은 탄성을 배경으로 모두의  시선
이 이드에게 모여졌다. 선망과  존경이 담긴, 한없이 우러러보는  듯한
시선 사이를  이드는 익숙하게 걸어서 연회장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익숙하게 이드에게 접근해왔고, 각자  최선의 방법으로 그에
게 친밀감을 표현하려고 애썼다. 이드의 옆에서 걷고 잇는 세티에게는
-물론 한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나  있기는  했지만- 그 모습은 확연하
게 보였고 세티에게 새삼스럽게 확인시켜 주었다. 이 자리가, 그  누구
도 아닌 이드  유리테스를 위한 자리라는 것을.
  그 모습은 마치, 절대권력자에게 아부하는 추종자들이라던가,  아니
면 좀 더 근본적인- 여왕벌에게  달려드는 수벌들과도 같은 인상이었
다. 세티는 살짝 몸을 움직여 그 추종자들에게서 물러났다, 물론  시선
만은 여전히 이드와 그에게 달라붙은 사람들에게  가 있었지만. 한 발
자국 뒤에서 보는  이드의 모습은 좀더 확실했고 인상적이었다.
  모든 일에는 상대적 평가라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절대적인 평가로,
이드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세티가 보는 이드의 모
습은, 사무실의 모습과 혼자 일을  처리하는  모습에 국한되어 있었기
에, 평소에는 '알고' 있을 뿐  '실감하고' 있지 못하였다.  물론,  이런
식의 파티나, 리셉션이나 미팅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세티의 역할은 지금 밖에 서 있는 세큐리터들과 다를
바가 없었었다.
이런 식으로 드레스를 입고... 히어로가 되어 잇는 그를 보는 것은 처
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기묘한 기분이었다.
지나가는 웨이터에게서 무언가 황금색의 액체가 든 글라스를  받아들
고 살짝 입술만을  가져다 댄 세티는 그것이 샴페인이라는 것을 알고
는 입안으로는 넣지 않은 채, 글라스를 입술에서 떼었다. 아무 것도 들
고 있지 않으면 어색해 보일 듯 해서 받아들긴   했지만, 알코올을 마
시고픈 생각은 없었다.  파트너라고 해도, 그가 자신이 지키고 보호해
야 할 대상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 오늘은 좋은 샴페인을 사용했군 크뤼그인가. "

  흠칫, 어느 사이엔가, 이드가 자신의 곁에 서  있었다.  손에는 자신
과 같이, 황금빛의 액체가 든 글라스를  들고. 부드러운 웃음이  실린
입가와-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눈. 그의  뒤에 선 사람들의 놀람의 시
선이 차례차례로 세티에게 다가왔다.

  " 아- 저. "
  " 파트너라고 한 것은. "

  부드럽게, 그의 손에 세티의  어깨를 감쌌다. 널찍하게 파인  어깨의
맨살에 양복지의 촉감이 이상스럽게  낯설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에
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세티의 귓가에 속삭였다.

  " 내 곁에서 떠나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

  귓가에 와 닿는 그의 숨결에 세티는  살짝 움찔했지만, 곧 평상시대
로 돌아왔다. 그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은 그녀에
게 쏠렸다. 그것은,  그녀에게는 약간은 귀찮고  성가신 것들이었지만,
세티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세큐리터라고 해서, 모두 자신과 같은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
저, 기계처럼 주인에게 봉사만을 하며 살아가는 세큐리터들이 더 많았
다. 실은 그들에게 오펀 이라고 하는 인간은,  인간이 아닌, 그저 쓰레
기에서 건져낸 재활용할 수 있는 재료에 불과하기 때문에.
  단지, 그의 세큐리터이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의 시선은. 저들의 부
러움과, 존경과,  그리고 세티가 알  수 없는 수많은 복잡한 감정들이
그녀에게 쏟아지는 이유는, 그녀가  그들이 버린 세큐리터이기 때문이
었다.... 세티는 자신도 모르게 얼핏, 묘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아무
도 그  미소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시릴 정도로 차가운, 냉소였
다.

  " 아름다운 파트너 시군요 미스터 유리테스. "

  마치 한 덩어리처럼 뭉클져 웅성거리던 수많은 추종자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가까이 걸어나왔다. 그리고 그럼으로 해서, 그는 세티
에게 확실한 형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는, 요즘은 보기 힘들어진 토종의 몽골로이드(황인종)이었다. 50년
그날  이후부터 국경이라는 것은 실제로 그  효용을 발휘하지 못했고,
단지 지역별로 구분 지어진, '연방'이 솔브의 지휘 아래 존재할 뿐이어
서,  덕분에 순종의 피를 가진 인종이라고 하는 것은 찾아보기 힘들어
졌었는데, 그는, 어디를 보아도 순수한  몽골로이드였다. 눈 위의 약간
두터운 지방층과, 둥근 형에  가까운 얼굴의 모양, 그리고 자신과 비슷
한  무표정에, 입만이 웃고있는. 기억에 없지 않은  얼굴, 그러나 어디
서  본 것인지는  기억에 없었다. 마치 안개  속처럼 뿌연 기억  속에,
그 무표정한 눈가만이 남아 있었을 뿐.

  " 아아, 이게 누구인가. 자네가  웬일로 그대의 레이디 없이  움직이
나. 해승(海勝)군. "
  " 중요한 일이 가까이 오지 않았습니까. "

  그는 동양인 특유의 표정이 없는 듯한 웃음을 짓고는  이드의 옆까
지 다가왔다.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세티에게도 약간의 존경을 표하
듯이 살짝 고개를 숙인 그는 곧, 이드를 돌아보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
했다. 그것은, 세티도 조금은 알고 있는 솔브 엔터테이먼트가  주관하
는 대형 콘서트의 자금지원에 관한 이야기였다.
  해승- 이라고 불린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고, 그러면서도
확실하게  이드와 전문적인 사업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콘서트장의
후원과, 지금의 지원과. 그 외에 세티가 잘  알 수 없는 솔브의 움직임
에 관한 이야기들, 두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나누는 이야기가 기밀이
라는 것을 눈치챈 세티는  약간 몸을  움직여 그 둘의 대화권 내에서
물러났다. 들어도 별로 상관은 없었겠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쪽이, 자
신을 위해서도 좋았다.
  자신은, 그저 아무 것도 모르는 세큐리터인 것이 좋았다. 그에게  너
무  가까이 가지도 않고,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않고, 그저 하나의 소
유물로써 존재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이런 식으로 가까워지는 것  따
위는 자신이 마라던 것이 아니었다.
  세티는 들고있던 황금색의 액체로 가만히 입술을 적시면서 두  사람
을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그는 조금 전까지 이드를 둘러싼  군중
의 하나일 뿐이었는데, 어째서 그와 나란히  서 있는 것만으로 존재감
이 생기는 것일까. 그리고 분명히, 어디선가 본 듯한 모습, 본 듯한 눈
매. 그는  분명 잊을 수 없는, 흔하지 않은 몽골로이드인데.  

  "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직접 찾아가 뵙겠습니다. "
  " 그때는, 그대의 레이디를 동반하고 인가? "
  " 물론이죠 "

  그는 처음처럼 옅게 미소짓고, 다시  군중들 사이로 존재감 없이 사
라져갔다.  그리고,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인파에 묻혀서, 그의 모습을
다시 찾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사라진 뒤에야, 세티는 까마득한 기억에
서 그를 기억해내었다. 이 해승(李 海勝)분명히, 자신보다 10년인가 11
년인가 선배였던, 그러니까 그 남양의 하얀  기둥들이 있던 섬에서 한
순간을 함께 지낸 적이 있는-.
  그는 세큐리터였다. 자신처럼, 수석으로  오펀들 사이에서 인정받아,
세큐리터라는 방법으로 솔브의 일원이 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
째서 지금 이 자리에 당당하게 나타나서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움직
이고, 이드와 사업에 관한 토론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
  세큐리터는, 솔브의 중역들에게 배급되는, 물건과도 같은 것인데, 그
들을 지키고, 보조하는,  컴퓨터나, 소모성의  호신용 방패 같은, 그런
존재여야 하는 것뿐인데.

  " 무슨 생각을 하지? "
  " ..... 대단한 건 아닙니다. "

  무슨 헛생각을 하는 거지, 세티  루릭?  그가 세큐리터이든, 중역이
든, 또는 무언가  대단한 존재이든,  지금의 너랑은 아무 상관이 없잖
아. 상관없어, 지금의 너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네 눈앞에 있는  너의
마스터 일뿐.
  싱긋, 세티의 입가에 그려낸 듯한 의도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잊지 마라 세티 루릭, 너에게 허락된 것은 그 정도까지다. 그의 세큐
리터라는 것이, 너에게 허락된, 모든 것일 뿐이다.  그러니까,.... 그러니
까 다른 것 따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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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어깨에 기대어
   작게 속삭일 장소를 내게 줘요
   시끄럽지 않은 음악과
   안정시키는 향기와
   따스한 온기가 함께 있는 장소를

   당신의 어깨에 기대어
   작게 속삭일 시간을 내게 줘요
   램프의 기름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짧은
   초가 다 타서 사라지는 것보다는 긴.
   순간과도 같은 영원의 시간을,

   속삭여 줄게요
   작게, 당신만이 들을 수 있게
   크게, 당신이 확신할 수 있게

   I Love You.
  ' 당신을 사랑한다' 고
   Ich Liebe Dich.
  ' 당신을 사랑한다' 고
   워 아이 니
  ' 당신을 사랑한다' 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렇게 속삭여 줄 테니까.

   아이시테루.
   사랑한다고
   쥬뗌므.
   사랑한다고
   에고 테 아므,
   당신을 사랑한다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당신이 어떤 언어를 쓰던 간에,
   알아들을 수 있도록 속삭여 줄 테니까.

   ....사랑한다고.


  라에느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헤드폰을 벗고 모니터의  전원을
껐다. 자신이 상당한 마인드 배리어를 가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녀의
노래를 듣는 동안  그 확신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리에서 수시로 틀어주고 있는 뮤직비디오에는, 가수의 모습은  확
실히 나와 있지 않았고 목소리나 가사의 내용조차 없는 허밍이었지만,
콜이 어디에선지 구해다 준 이 뮤직비디오에는 그 목소리가  확실하게
실려있었다.
  매력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여성
의 목소리,  반쯤 C.G로 처리된 블루 톤의 화면은 그녀의  어슴푸레한
모습이 간간이 비쳤다 사라질 뿐, 확연하게 그녀의 윤곽을 잡아주지는
않았다. 그러기에 더욱 그 아련한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녀의
속삭이는 듯한 고백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같은  여자인 자신도, 무도
가의 마인드 배리어를 가진 자신도 그랬는데, 일반적인 남성들이, 그녀
의 허밍에 빠져드는 것은, 당연했다.  
  사랑합니다...
  저렇게나 몇 번이고, 부드럽게, 그 말을 속삭여주는 것이 얼마나  어
려운 일일까, 자신은, 토파에게 몇  번이나 저 말을  해  주었을까. 몇
번이나, 그의  눈을 보고, 사랑한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었을까.
  생각해 보면, 마음이 맞았던 만큼 싸움도 많았다. 사소한 일로  화를
내고, 의견충돌을 일으키고, 하루도  못 지나서 다시 깔깔거리고  붙어
잇곤  했다.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함께 있다는 것이 당연해서,
생각해보면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겨우 말을
꺼낸 것이, 그의 죽음 앞에서라니.
  헤드폰을 벗었는데도, 아직까지 그녀의 목소리는   라에느의 귓가에
떠돌고 있었다.  묘하게 불어의 발음에 잘 어울리는, 그러면서도 투명
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목소리. 그러나  그 투명하고 맑은 목소리는
노래를 부르면서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자극을 주는 파워 있는 목소리
고 바뀌고 있었다. 분명히,  속삭이는 듯이 가늘고  여린  목소리인데,
왜 이렇게 저 목소리에 가슴이 아픈 걸까.
  분명히 나는 망설이고 있다, 다시 헤드폰을  쓰고, 플레이어의 플레
이 버튼을 다시  누르는 것을,  가슴은 그렇게 하라고 하고 이었지만,
머리는 그것을 말렸다 빠져들어선 안돼. 그녀에게 현혹되어선 안돼 하
고. 그 망설임을  결론지어준 것은, 뒤에서 들려온 문 열리는  소리였
다.

  " 제이린, 시디 다 봤어? "
  " 아, 그래. "

  문을 열고 들어 온 것은 야구모자를 뒤집어 쓴  소년이었다. 아무렇
게나 걸친 헐렁한 후드
티에 역시 만만찮게 헐렁한 힙합바지 아래로 농구화를 신은 발이  살
짝 보였다.  
  시디롬을 열어 뒷면이 금빛인 시디를 꺼내어 라벨 없는 케이스에 넣
은 라에느는 그것을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 그나저나 콜, 넌 이것 어디서 구한 거야? "
  " 비이밀~ "

  콜은 시디 케이스를 앞 포켓에 집어넣고 빙긋 웃었다.

  " 아직 팬클럽에도 미공개 된 영상인데, 출처를 밝힐 수야 없지 "  
  " 그럼... "

  빙긋, 콜은 언제나처럼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집어넣었던 케
이스를 도로 꺼내어 달가닥 소리가 나게 흔들어 보였다.

  " 솔브 엔터테이먼트의 동영상 자료실을  조금 들여다봤지. 뭐 원래
목적은 콘서트 관련 자료를 좀 찾으려는  거였지만. 예상외의 것이 있
어서 말야. "
  " 콘서트라. "

  화면보호가 돌기 시작하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면서 라에느는  혼잣말
인 듯 중얼거렸다. 화면에서는 색색가지의 3D 파이프들이 가득히 깔렸
다가 사라지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온갖 모양으로  얽히고 설킨
다음, 곧 눈 듯이 스르륵 사라져 가는 그 화면은, 평소처럼 빠른  속도
로 화면을 채우고 없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것은 기묘
한 두근거림으로 라에느에게 다가왔다.    
  불길함. 아니 딱 그것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과, 초조
함과, 등골이 오싹해지는 섬뜩함이 섞인, 기분 나쁜 혼합물과 같은  느
낌.

  " 제이린? "

  의문이 섞인 콜의 부름은 귓가에서 맴돌았다. 콘서트, 솔브 엔터테이
먼트. 버추얼 아이돌이라고 불려지는 얼굴 없는 가수, 노래, 목소리, 그
녀의 목소리.
  라에느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팔의 근육이 부
들부들 경련하고 팔을 움켜쥔 손 사이로 땀이 배어 나왔다. 무슨 느낌
이지 이것은, 이 불길한 느낌은. 덜덜덜 떨리는 이를 억지로  악물면서
라에느는 애써 고개를 가로 저었다.
  무엇에 대한 불길함인 걸까 이것은, 콘서트에  대한 불안감? 그녀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 그것도 아니면....

  " 제이린! 왜 그래? 괜찮아?!! "
  " ..괜찮아. "

  간신히 떨리는 입술을 깨물어 진정시키고 콜에게 대답을 하고  나자
그 불길한 느낌은 등골을 훑고 내려가듯이 혹은, 무언가 물 속에서 빠
져 나오는 것처럼 저릿한 통증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후 하고, 긴 한숨을 내쉬면서 라에느는 팔을 감싸고 있던 손을 풀고
책상을 짚었다. 온 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어서, 짚은  손등위로
흘러내렸다. 마치 기혈이 뒤틀렸을 때와도 비슷한 불길함,

  " 콜 "
  " 으, 으응? "
  " 콘서트장 멤버에, 나도 낄 수 있는지 알아봐 줘. "
  " 앞에 나서는 일은 안 한다고 하지 않았어? "
  " 생각이 바뀌었어. "

라에느는 땀에 젖은 손으로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면
서 어금니 안을 꽉 깨물었다. 그녀의  청자색 눈동자가 오래간만에 새
파랗게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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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7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