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그녀의 눈동자를 닮은 녹색의 바다,  그 위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섬,
그리고, 그 섬의 지표를 덮은  새하얀 기둥들, 그림자조차지지 않도록,
작렬하는 태양빛 아래 그 기둥들은 유난히  새하얗게, 마치 떠올라 보
이듯 새하얗게...
천천히, 섬은, 하얀 기둥들은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히 보이지
않아야 할, 그 기둥사이에 선 소년의 얼굴이, 거리가 벌어지는 것과 비
례해서 점점 선명하게 시야를 채워왔다, 암갈색의 커다란, 마치 강아지
와도 같은 젖은 듯한 눈동자...
또..그녀가 슬퍼하고 있다. 거리는 점차 멀어져갔고, 무언가 알 수  없
는 통증이 가슴을 메우고 들어왔다. 어째서.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아
픔을 묻고 사는 거지...
리는, 뿌옇게 무언가로 흐려진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아 또 그녀의 꿈
이었나. 차가운 무언가가 눈에서 넘쳐 얼굴을  타고 베개로 흐르는 것
이 느껴졌지만, 왠지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하니, 흐려진
천장을 바라보면서 몸의 감각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뿐.
천천히, 감각이 돌아오면서 익숙하지  않은 악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어젯밤의 류트소리,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제 그  자리에
밤새 움직이지도 않은 것처럼, 그 바드가 앉아서 류트를 타고 있었다.

" 일어났습니까? "

바드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여전히 손은 류트를 타면서 말했다. 리는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고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일어나 앉았다. 현현이나 소오류에게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주어도 상관없지만, 저 바드는 이방인이다.

" 어째서 당신이 여기 있는 거지? "
" 현현은 소오류와 같은 방에서 잔다고 그쪽으로 갔습니다. "

티링... 류트를 타던 손을 멈춘 바드는  리를 돌아보고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자, 어젯밤의 일이 서서히, 리의 기억에 되살아나
기 시작했다.
듣지 못했던 노래들을 몇 곡씩 청하면서 현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
고, 소오류는 즐거워했었다. 그리고. 그가 과거에  함께 다녔던 일행의
이야기를 듣다가...

" ... 그러니까 당신은 '은색의 반역자' 와 일행이었었다는 건가. "
" 그분의 결백은 후에 증명이 되었지요, "
" .. 아아 알고 있어, 실버화이트  여공작을 모른다면 이 나라 사람이
아니지. "

용의 후예라고 말해지던  실버화이트가의 가장  아름다운 여제-라고
불리던 듀크니스 실버화이트, 그녀는 노련한 정치인인 동시에,  용맹한
모험자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리고, 엔드가 나타났을 때, 가장 먼저 그
곳으로 가서 실종되었다.....

" 저의 동료였던 아루우도, 트라이처럼 엘프의 숲을 떠난 추방자였죠,
그 일이 진정되고, 프린세스 실버화이트가 권력을 잡으신 다음에, 소오
류와 현현을 만나 본 적이 있었습니다. "

바드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천천히 몸의 감각이 되돌아왔다, 리는 머
리맡의 나이트테이블에서 안경을 집어  쓴 다음, 흘러내린  긴 머리를
손 갈퀴로 쓸어 넘겼다.
약 60년전에 있었던, 실버화이트  공작가의 반역음모 사건은,  지금은
그 반대세력이었던 다른 공작가의 음모였다는  것이 증명되어, 누명이
라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물론,  사건 자체는 간단해 보였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은빛의 반역자' 로 통칭되는 공작의 아들이, 그 추종세
력을 이끌고 수도에서 용병의 섬 레이디언까지 탈주했던 사실이나, 그
탈주 과정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를 모아, 자신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나, 후에 '소서러 퀸'의 호칭을 얻은  그의 여동생이 몇 명
의 모험자를 동료로 오빠의 흔적을 쫓아 그 증거들로 사건의 주동자를
찾아, 신년회에서 모든  귀족과 왕족들 앞에서  발표해버렸다는 것은-
모험자들 사이에서는 꽤나 잘 알려진 모험담이었다. 사소한 이야기로-
그 은빛의 반역자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도 전에 암살자에게  당했
다거나, 그 여동생이 실은 하프드래곤이었다던가  그녀가 왕자의 청혼
도 거절하고 엔드로 떠났다든지 하는, 근거가 불확실한 이야기들은 술
자리에서의 좋은 안주거리였었고.  

" 당신의 신은, 지금 어디에 있지? "
" 이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

라진은, 미소 띈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 .. 무슨뜻이지? "
" 엔드가 나타나면서, 나의 신은 그 사명을 다하고 소멸했습니다. "

리는 잠시, 태연한 라진의 표정을 바라보면서 무어라고 말해야할지를
고민했다. 소멸해? 아무리 반신 이었다지만, 그래도 신의 대열에  끼었
던, '주시자'의 사명을 ..

" 그렇다면, '주시자'의 사명은 누가 이은 거지? "
" 당신이 알 바는 아니지 않습니까? "

금빛의, 신비로운 눈동자가 리를 향했다.

" 당신은.. 노래를 불렀어, '주시자' 가 무엇을 보는지. 그리고 '설정자'
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그건 무슨 의미지? "

리의 추궁과도 같은 물음에, 라진은 빙긋이 미소를 짓고는 다시 류트
의 현에 손가락을 얹었다.

" 혜안의 운명에게 주어진 사명은, 보되 말하지 못하고  듣되, 표현하
지 못하는 운명의 이름, 주시자 에게 주어진 사명은 보되 간섭하지 못
하고, 기록하되 왜곡하지 못하는  기록자의 이름, 설정자 에게  주어진
사명은 준비하되 이어나가지 못하고, 준비하되  사용하지 못하는 준비
자의 이름... "

거기까지 노래한 라진은 다시 손을 멈추었다.

" 꿈은 꿈이 아니고, 현실은 현실이 아니고, 무엇이  진실인지 답안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알기 위해 모험자들은 엔드로
갔습니다. 리할트 폰 자일리트여. "
" 당신- 어떻게 내 본명을!! "

라진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류트를 등뒤에 메고는 등받이에 걸린
자신의 망토를 집어들었다. 여전히, 얼굴에는 미소를 띄운 채로.

" 나는, 보되 간섭하지 못하고,  기록하되 왜곡하지 못합니다. 소오류
와 현현에게 안부 전해주시길. "

그리고, 라진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리는 방안에 남겨진 채, 그를 잡
거나 말릴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에 풀썩 주저앉아서 그의 말을  되뇌
었다.

" 꿈은 꿈이 아니고.. 현실은 현실이 아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답안은
없다.... "

------------------------------------------------
그날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좍좍 시원하게 내리는 것이 아
닌, 사람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추적거리는 차가운 비,
리는 턱을 괸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젖어드는 도시, 멀리 보이는  왕
성, 가끔씩 창틀에 맞고 자신의 피부에  튀어 오르는 물방울의 선뜩한
감촉, 빗물 냄새, 번쩍, 쿠르르르릉...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번개소리가,
조용한 하늘에 울려 퍼졌다.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꿈이라는 건가. 이  비가, 이 도시가,
이 차가움이 현실이 아니고 그저 보이기만 하는 그녀가 꿈이 아니라는
말 따위, 말도 안 된다고 일축해버리고 싶지만, 그렇다면 왜 나는 그녀
와 함께 성장해온 것인가.
처음으로 그녀의 꿈을 꾼 것은 열 살이 막 넘었을 때였다. 그때 처음
으로 꿈 꾼 그녀는 갓 걸음마를 시작한, 너무나도 귀여운 여자아이. 지
금처럼 그렇게 감정을 묻지 않고 잘 웃고, 잘 울던, 그런 귀여운 아이.
그녀가 상처 입는 것을, 그녀가 차갑게 변해 가는 것을, 그렇게나  안
타깝게 보아왔는데. 곁에 있어 줄 수 없음을, 다독여 줄 수 없음을  그
렇게 한스러워 했는데.
그녀가 꿈이 아니라면?
아니, 그녀가 현실이고 내가 그녀의 꿈이라면?

" 젠장할! "

퍼적, 리가 내려친 덧창이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둘로 쪼개졌다.  그
소리에 테이블에서 책을 보고 있던 현현이 놀라 리를 돌아보았다.

" 괜찮습니까 리? "
" .... 빨리 무언가 다시 여행을 떠났으면 좋겠군. "
" 하지만 돌아온 지 이제 겨우 사흘째인데, "

미칠 것 같아, 생각하고 있으면 내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어버릴
것 같아. 이런 말을, 현현에게 할 수는 없었다. 리는 침대 옆에 기대놓
았던 세이버를 들어 허리에 찬 다음 방문을 열고 나왔다. 비 덕분인지
여관 안은 제법 시끌시끌했다. 가게문을 일찍  닫은 상인들이 비를 탓
하며 맥주 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 홀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었다.
적당히 구석의 자리에 앉은 리는,  그대로 홀 안을 둘러보았다.  상인
들, 순례객들, 어제와 변한 것은 없었다. 습기  제거를 위한 것인지 벽
난로에서는 크지 않게 불이 지펴져 있었다.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불을,
리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 어울리지 않게 웬 궁상이야? "

예기치 않게 바로 옆자리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리는 반사적으로 검
손잡이를 잡으며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느 사이에 들어왔는지, 가
온이 벽난로 바로 옆에서 옷자락을 비틀어  물을 짜내고 있었다. 그가
남긴 물 발자국이 입구에서 이 테이블까지 이어져 있었지만, 발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었다. 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검손잡이를 놓았
다. 흠뻑 젖은 옷을 대강 비틀어 짠 가온은  후드를 벗어서 벽난로 앞
에 턱 걸고는 리의 맞은 편에 앉았다.

" 다른 둘은 방에? "

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온의 검붉은 머리칼은 흠뻑 젖어서 마치 검
은빛으로 보였다.

" 하지만 왜 대낮부터 그렇게 침울해? 비가 좀 온다고는 하지만. "
" 가온 "
" 응? "
" 또 모험을 떠나자고 하면, 따라와 줄 건가? "
" 안 갈 거야 없지. "
" 지금 당장이라도? "

가온의 흑녹색 눈동자가 빤히, 리를 바라보았다. 잠시 대화가 끊긴 사
이, 테이블에 두 잔의 맥주가 놓여졌다, 가온은 그 맥주 잔을 집어들고
는 한 모금 들이킨 다음, 다시 리를 바라보았다.

" 나쁠 거야 없지 뭐. 게다가 리가 그렇게 결정했다고 한다면, "

너무나도 선선한 대답에, 리는 잠시 놀란 눈으로 가온을  바라보았다.
가온은 잔 안에 남아있는 맥주를 단번에  쭉 들이키고는, 잔을 테이블
에 내려놓았다.

" 어쨌거나, 리는 리더잖아? 나는 그런 쪽에 있어서 결정권을 리에게
맡겼고, 다른 둘도 그럴 거라고 생각해. 가끔은 하고싶은 대로  해보라
고. "
" .. 고맙다. "

내일은 타일에게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리는 자기 맥주잔을 들
어올렸다.

" 마스터 여기 한잔 더요. "

-----------------------------------------------

리의 방문에 타일은 의문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서류철을 뒤적여 지
도 한 장을 꺼내주었다.

" 신고에 의하면 언데드인 것 같아,  자네들한테는 약간 간단한 일이
겠지만, 뭐 굳이 하겠다면, 다녀오도록 해. "

리는 타일이 건네준 지도를 받아 넣고는  곧바로 미풍으로 돌아왔다.
소오류가 약간 볼이 부어있기는 했지만,  출발준비는 끝나있는 상태였
다.

" 비 그친 다음에 가도 되잖아 "

가온이 먼저 아무 말 없이 단검 집을  허리에 차고 일어나자, 소오류
는 투덜거리면서도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완드를 집어들었다. 현현
은 이미 모든 준비를 다 끝내고 있었다.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세차게 내리붓지는  않았지만 부슬부슬 내리
는 비는 천천히 옷을 적시고 차갑게 피부로 스며들었다.
타일이 건네준 지도대로 라면, 그 언데드로  인해서 폐쇄된 마을까지
는 우리의 발걸음으로 약 한달 정도의  거리였다, 산맥에 접한 마을인
데다가, 생존자가 없어서 발견이 늦었고, 아마도 지금쯤은 아무도 살지
않는, 죽은 자만의 도시가 되었으리라,  우울한 생각과 박자를 맞추듯,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하여 내렸다.  야영하는 것도 큰일이었을 뿐
아니라, 체온이 계속하여 떨어져 쉽게 지쳐버렸다.
나름대로 좋은 일이었다, 몸이 힘들기 때문에, 밤에 꿈 따위 꿀  여유
도 없이 젖은 모포를 말고 그대로  잠들어 버리면 되었으니까. 그녀의
꿈을 꿀 필요도 없었고, 그 페린인  바드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담아둘
여유 같은 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나 힘든 하루하루 속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녀의 물기 어린 바다빛 녹색 눈동자.
젖어서 불꽃이 잘 일지  않는 장작의 재를 뒤적이고,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면, 선뜩한 빗방울이 얼굴을 때렸다. 눈
을 감으면, 눈꺼풀을 때리는 기분 나쁜 물방울의 느낌과, 그  느낌으로
더욱더 선명해지는 오션 그린, 비와 그녀의 젖은 눈동자,
눈을 뜨자, 흐린 밤하늘이 나를 맞았다.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

" 으아아아아악!!! "
" - 무슨 일이야 리? "

옆에서 들려오는 가늘고 선명한 목소리. 그리고 아직 어두운 새벽 하
늘을 보면서, 나는 내가 본 그 용서할 수도 참을 수도 없는 광경이 나
의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온 몸이 흠뻑, 식은땀에 젖어 있었고 이해
할 수 없는 한기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나를  바라보고 있던
가온이 걱정스런 눈을 하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 흐..흐억.. 하아아악....... 하악.. "
" 괜찮아? 왜 그래? "

- 말할 수 있을까, 가온에게 내가 왜 이러는 지를, 아니, 가온만이 아
니다, 소오류에게 현현에게 과연, 이  밤의 꿈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까, 말할 수 없다 절대로 말할 수 없다.
그녀가, 계속해서 보아온 그녀가, 강간당했다는 것을. 몸이 묶이고 재
갈을 물리고, 노리개를 다루듯이 몇 번이나 구타당하고 그리고 .....  
울고 있었다. 나의 그녀가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그렇게나 강하게 자신을 단도리했던 그녀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 녀석
때문에,
죽여버리겠다고, 리는 몇 번이고 그녀를 짓누르던  그 녀석을 죽여버
리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꿈이든, 아니면  현실이든 간에, 그 냉소하
는 듯한  금속빛 눈에, 그녀와도 같은 피눈물을 나게 해 주겠다고, 그
렇게  결심했다. 번쩍, 희멀겋게 밝아오는 하늘에 번개가 치고 곧 이어
서 우르르릉 하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비는, 여전히 멎지 않았다.

--------------------------------------------

" 당신들, 그 언데드의 마을로 가는 중인가? "

지도상으로, 마을까지 하루 정도의 거리를 남겨둔, 산맥의  초입에 막
접어들 때였다. 리는 아침의 그 꿈으로  평소와는 다르게 신경이 곤두
서 잇는 상태였고 다른 사람들은 그칠 줄 모르는 비에 반쯤 지쳐 있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나마 비가 덜 들이치는 나무  아래에, 당당
하게 서 있었다.
리도 상당히 키가 큰 편이었는데, 그 여자는  리에게 지지 않을 정도
로 훤칠한 키에, 묵직해 보이는 필드플레이트를 아주 자연스럽게 입고
있었다. 나이는 20대 중후반, 허리에 찬  기묘한 문양이 들어간 롱소드
와 그 옆에 살짝 빗겨 찬  숏소드라던지, 왼팔에  들고 있는 미들실드
라던지가, 그녀가 모험자임을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필드플레이트
아래 밭쳐 입은 옷은 제법 오래  비를 맞았는지 흠뻑 젖어서 살에  착  
달라붙어 있었고, 검붉은 머리카락도 젖어서 어깨 위에 굽실거리며 드
리워져 있었다.  리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 그쪽으로 가는 중이지, 당신은 누구? "
" 당신들보다 먼저 출발한 파티원 중  하나지, 우리는 클레릭이 없었
거든, "
" ... 전멸인가? "

그녀는 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어깨
를 으쓱하고는 젖어서 늘어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 동료들의 시체라도 수습하고 싶어서, 다음 파티를 기다렸지,  뭐 시
체도 안 남은 녀석들도 잇겠지만, - 같이 가도 되겠지? "

리는 동의를 구하기 위해 모두를 돌아보았다, 가온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현현과 소오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본 그녀는 고
개를 끄덕이고는 일행의 뒤쪽으로 가 섰다.

" 이 방향으로 반나절만 가면 마을이 나타나, "
" 그렇군, 지도보다 좀 빠른걸 "

그리고, 다섯이 된 일행은 다시 길을 따라 출발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어두운 하늘, 그리고 씁쓸한 분노, 리의 기분을 알리 없는 다른 일
행들과 그녀는 간간이 현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페이스를 맞춰  걷고
있었다.

" 역시 '신의 손' 이란 건  대단하군,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그럼 거기  성직자님은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건가
요? "
" 무한정 살려낼 수 잇는 건 아닙니다만.. "

현현의 쑥스러움이 실린 목소리가 그녀의  약간 들뜬 듯한 하이톤의
목소리에 이어서 리에게 들려왔다. 현현이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것을,
리는 딱 한번 본 적이 있었다. 기적- 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광경
이었다 그것은,

" 어라 그러면 얼마나? "
" 저의 능력으로는 한 명을 살려내고 나면 일주일동안은 부활의 주문
을 사용할 수 없어요, 그건 상당히 힘든 주문이고 또 함부로 쓸 수 없
는 것이어서 "
" 그래요- 일주일이라 "

순간의 침묵, 그리고 리는 수많은 전투현장에서 들었던 그  소름끼치
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든 전투의 시작을 알렸던 - 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낮고 가는 파열음!  

" 소오류! "

현현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
지 못해 보이는, 여전히 맑기만 한 글래스 그린의 소오류의 눈동자, 그
녀의 하얀 로브의 가슴께, 정확히 심장이  위치한 그 자리에는 무언가
금속재질의 것이 삐죽, 앞으로 나와  있었다. 새빨간, 너무나도 새빨간
얼룩이 그 주변으로 번져나갔다.
소오류의 시선이, 천천히 자신의 가슴께를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나
와있는 그 뾰족한 것을 확인하면서, 천천히, 손이 가슴을 향해  올라갔
다. 무어라고, 소오류는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
지 않았다. 미세하게 달싹인 입술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
다.  
리가, 그 금속재질의 것이 숏소드의  날 끝이고, 그것을 소오류의 등
에  찔러 넣은 사람이, 그 붉은 머리의 모험자라는 것을  파악한 것과,
허리의 세이버를 빼어든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 무슨 짓이야!!! "
" .. 글쎄 "

소오류에 가려진 그녀의 입술이 대답하며 실룩, 미소짓듯이 움직였다.
리는 그대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숏소드를 소오류에게 꽃아
넣은 채로 그녀의 축 늘어진 몸을 리에게 내던진 다음 옆구리에 찬 롱
소드를 뽑아들었다.
현현의 절망에 찬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소오류의 이름을 부
르는 그의 목소리가 멀었다. 리의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고 잇는  것은,
마주 선 그녀의 흑녹색 눈에 비치는  싸늘한 살기였다.
텅! 하고 묵직한 공격이 검을 파고 팔로 전해져왔다. 그리고 그 공격
은 한 번이 아니라 서너 번을 연달아 리의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왔
다. 그녀의 롱소드 날이 마치 살아 잇는 것처럼  몇 번이나 리의 목덜
미 주변을 넘나들었다. 누구보다도 빠른 검 놀림에 있어서는 스스로의
실력을 자부하던 리였지만, 그녀의 공격은  지금까지 대해왔던 것들과
는 수준이 틀렸다.
적어도 지금의 리라면, 분명히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하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해도 좋을 실력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수준은  그  이상이었
다. 현란하게  뻗어오는 검날을 막아내는 것이 다일 뿐, 리는 전혀 반
격할  수 없었다. 살기,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고 해도 좋을 리조차도
처음 느껴보는 싸늘한 살기의 내음이 그녀에게서 풍겨나고 있었다.
까드득 밀어붙여진 검과 검날이 잠시 멈추며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
었다. 잠시간의 대치 상태, 그녀의 흑녹색 눈이 뚫어질 듯이 리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 너도 꿈을 꾸나? "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136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다섯 이야기1 김현정 2004.11.02 0
135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4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3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2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1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다섯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9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8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7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하나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6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여섯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5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다섯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4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3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2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1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0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9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8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7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