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버스에 오르기 전에 잠깐만, 하고 가셨던 어머니는 양손 가득 뭔가를 들고 오셨다. 경주까지의 길이 그렇게 먼 것도 아닌데. 나를 굳이 창가로 앉히시고 나가시더니, 삶은 계란이며 오징어며 따뜻한 국물까지 싸들고 오신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종종 경주로 다녀오셨다. 직장에 매어 있는 것이 아닌 아버지는 내가 학교로 가는 평일에 두 분이 산행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주일이면 내 손을 붙잡고 산으로 오르는 것 역시.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산이 높지 않아도 좋았다. 금정산 자락을 올라가면 성벽은 어디 가고 문만 남아있는 남문자리 아래에서 숨을 내쉬는 것을 서로 지켜보는 것, 서로의 거친 숨소리를 서로의 젖은 얼굴을 보는 것으로 좋았다.

지끈. 하고 심장이 아린다. 나는 조금 얼굴을 찌푸렸다.

“뭘 이렇게 많이 사왔어?”
“심심하잖아. 차 타고 가는 동안에.”
“엄만. 참.”

그래도 나는 계란 하나를 집어 든다. 버스가 출발하고 사람들 일부는 등판을 뒤로 기대 잠을 청하고, 일부는 낮게 이야기를 꺼낸다. 볕이 따스한, 삼한 사온의 사온이 시작된 첫날. 여행길로는 더 좋을 수가 없는 날씨가 바깥에서 환히 웃는다. 원거리 출근을 하는 사람들도 없는 늦으막한 아침, 평일의 버스는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월차 얻길 잘했지? 휴일이면 붐빌테니.”
“응. 한산해서 좋아.”

어머니는 음식을 잘 씹지 못하는 나를 위해 전기구이 오징어를 잘게 찢었다. 가까이에 있는 어머니의 얼굴에 햇살이 닿는다. 어머니의 이마에 언제 저렇게 깊은 주름이 자리잡혀 있었나. 어머니의 나이를 생각하면 그렇게 의외인 것도 아니지만, 언제나 기억 속의 어머니는 그저 조용히 웃고 있는 30대 후반의 모습이다. 식탁 한 켠에 앉아서 과일을 깎고 있는 모습, 표구된 액자 앞에서 흐뭇한 눈을 하고 있는 모습. 세월은 언제나 기억 속에서는 멈춰져 있는 것이다.

“나경이는 사귀는 사람 없니?”

오징어가 다 비워질 때쯤 어머니가 물었다. 얼굴. 시현의 얼굴과 완의 얼굴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쳤다. 바보같다. 완.이라니. 그녀석은 지금쯤 같은 상처를 안고 있는 누군가와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편하게 지내고 있을텐데. 나 역시 바라는 일인걸. 완이 내 전화에 대고 퍼붓는 말들, 대상이 정해져 있지도 않은 그 말들을 받아내는 것은 내게 너무 힘든 일이니까.

“…없어.”
“전에 찾아왔던 그- 시현이라고 했던가? 그 사람은?”

하아. 하고 나는 조금 헛웃음을 지었다.

“그 사람, 애인 있어.”
“…그래? 그것 참- 전에 왔을 때는 말을 하도 넙죽 넙죽 잘하길래 저만하면 되었다 싶었더니.”
“그렇지 뭐- 남자들이.”

대충 말을 맺어버렸지만 어머니는 몇번 더 혀를 끌끌 찼다. 그러고보면 그날, 백화점에서 나를 데리고 왔던 날, 시현이 그랬었지. ‘나경이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라고. 시현다운- 나에게만은 그렇게 어색한 시현다운 말이다. 요즘 누가 그런 말을 하며 부모님께 인사를 드릴까. 요즘은 어쩐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이제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매몰차게 밀어내 버렸으니까. 아무리 시현이라고 해도, 사람좋은 시현이라도 그런 말을 듣고서 다시 나를 만나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국사까지 오르는 걸음 내내 우리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 올라 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토함산의 절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었다. 어렸을 때엔 그냥 걸어 올랐던 돌층계가 출입금지 줄로 막혀 있었다. 사람들의 잦은걸음에 청운교 백운교에 깎아놓은 조각들이 형체가 옅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물이 있어야 할 다리 아래엔 잔디가 겨울을 맞아 잠들어 있었지만- 나는 잠시 그 앞에 서 있다가 다른 출입구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어느새 예전에 오르던 입구 앞에 가 계셨다. 연화교와 칠보교를 다시 디딜 수는 없었지만, 위쪽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회가 새로우신 모양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잠시 그렇게 바라보다가 석가탑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려한 석가탑은 신라의 석탑에선 기형奇形 같은 것이라고, 고등학교 때 역사반의 선생님은 말했었다. 그래서인가. 저 화려한 세공 앞에서 오히려 주눅이 드는 것은. 나는 전형적典型的인 석가탑 앞에서 오히려 마음이 푸근해져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조금은 바람을 맞아 이즈러지고, 조금은 이끼 때문인지 색깔도 푸릇해진 그 앞에서는 낡은 것에 느껴지는 애착 같은 것이 동해 버렸다.

“…이 앞에서, 사진을 찍었었지.”

어머니가 어느새 다가와 가만히 석탑을 올려다 보았다.

“나경이 네가 세 살 때인가. 할머니 댁에 너를 맡겨놓고 둘이서 올라왔었어. 신혼여행을 와서 꼭 이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서, 5년마다 여기 와서 사진을 찍으면 어떻겠냐고 그랬단다. 하지만… 사는 게 어디 뜻대로 되어야지.”

욱신. 머리가 아파, 나는 가방을 바싹 당겨매었다.

“더 올라가야지? 석굴암도 못보고 가면 억울할 테니.”
“…응. 엄마.”

어머니는 출입구로 나가며 다시 예전의 입구를 쳐다보았다. 동의 청운교 백운교를, 서의 연화교 칠보교를, 마치 그 때처럼 밟아가듯이.




석굴암 본존불은 거대한 유리벽으로 막혀 있다.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가며 내뿜는 날숨들이 그렇게 독하다고 해서 천년의 유산이 사라지기 전에 우리가 지켜내야 한다는 호들갑스런 장치들이다. 어두운 빛의 조명. 예전에는 아침에 떠오르는 햇빛이 닿으면 사람처럼 붉어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는, 그 모습에 반해 일본인들이 통째 일본으로 옮겨가려고도 했었다는 본존불은 이제 관에 갇힌 것처럼 저렇게 막혀 있다. 조지훈 님이 그러셨던가, ‘돌에도 피가 돈다’고. 인도의 불상이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은 그 닮음으로 보아서 분명하지만, 우리 나라의 불상은 이미 신라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고도 했다.

나는 막혀 있는 석굴암 본존불 앞에서 멍하니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본존불 바로 뒷자리에 있는 관세음보살 입상을 보았다. 본존불은 무량수불- 아미타불이라 해도 그 후덕한 본존불 뒤에 하늘하늘 서 있는 관세음보살상만큼 내 눈길을 끄는 것은 없었다. 돌에도 피가 돈다 한 것은 해돋이를 받아 빛나는 본존불을 보고 조지훈님이 한 말이지만, 본존불 주변에 둘러싼 이 입상 하나하나도 조금의 소홀함 없이 깎아낸 솜씨를 누가 흠을 잡을 수 있을까.

…글을 쓰고 싶다.

문득 일어난 충동에 나도 모르게 가방 끈을 움켜쥐었다. 갈색의 작은 가방이 등 뒤에 달려 있다가 내 동작에 놀라 등으로 바싹 붙어왔다. 열다섯 칸칸이 들어찬 보살상, 나한상, 그 모자람 없는 인간적 형상처럼 누군가에게 드러남 없이, 모자람도 없이 느낌을 줄 수 있는 그런 글을 쓸 수 있다면. 때로는 저 하늘하늘한 관세음보살상처럼, 때로는 저 늠름한 나한상처럼- 필요할 때 적절한 자리를 잡은 글을 쓰고 싶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고개를 들었다. 알고 있잖아, 이나경. 니가 글을 쓰지 않으려는 이유. 이제는- 네 글을 읽으며 환하게 웃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 아니, 니가 가장 글을 보여주고 싶어한 그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도망치지 마라. 그런다고 해도 바뀌지 않아. 니가 두려워 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변함없이 그대로 있다.

“나경아?!”

어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아득하게, 새까만 풍경이 내 얼굴을 덮는다.
하얀 병실에서 정신이 들었다. 낯설음과 묘한 친숙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기억났다. 어렸을 때 온 적이 있는 곳이었다. 아마도 많아야 일곱살쯤 되었을 것이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이라고 기억이 되는 걸 보면. 외가댁에 있다가 나는 외할머니 등에 업혀 이 곳으로 왔었다. 외할머니의 한복자락 색깔이, 그 노릇노릇한 느낌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첫손주라고 외할머니는 나를 끔찍이도 아끼셨다. 외가댁이 있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내리사랑도 저런 내리사랑이 없다고들 했다고 한다.

"일어났니?"

문이 열리고 어머니 얼굴이 보였다. 내가 눈을 뜰 때 마침 자리에 없었던 것이 미안하신지 침대로 오는 종종걸음이 보기에도 안쓰럽다.

"엄마 여기 일신병원이야?"
"응- 어떻게 알았니?"
"…옛날에 왔었잖아."

/ 악아, 악아- 눈 떠라- /

귓전에 시끄럽게 할머니 음성이 들렸었다. 병원에 왔을 때 의사 선생님이 나를 치료하고 한참 후 연락을 받은 부모님이 한걸음에 오셨다. 어머니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외할머니의 벗은 발을 보셨다. 진흙과 피가 섞여 엉긴 발을 치료하는 동안 아버지는 몇 번이고 내 머리를 쓸어 주셨었다.

/ 나경아, 잊으면 안된다. 외할머니 저렇게 다치신 거. 오늘 널 맨발로 업고 달리신 거, 절대 잊으면 안돼. /

어머니는 그 날 두 번 우셨다. 한번은 내 소식을 듣고, 한번은 할머니 상처를 보고.

"…기억나니?"
"응."

어머니는 쓸쓸한 얼굴로 내 앞에 앉으셨다.

"엄마…."
"…응?"
"나, 이마 좀 쓸어줘."

어머니는 말없이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어머니 손이 선뜩했다. 겨울이면 항상 손부터 차가워지는 어머니였다. 내 이마 열이 옮아가며 어머니 손이 따뜻해진다. 그 느낌이 좋다.

당신과 나는 마음 속 깊은 곳을 이야기하는 적이 없었다. 가끔 이렇게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것이 말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차마 어머니가 내게 손을 내밀지 못했던 몇 년 동안 나와 어머니 사이에는 긴 강이 점점 깊어져 가고 있어다는 것을 안다. 섬조차 없는 강. 그 강에 작은 돌섬이 생긴다. 조금의 용기로 섬으로 내달으면, 나는 이 강을, 이 긴 강을 넘을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면 어머니와 나 사이에는 더 이상 강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괜찮니?"
"응…."
"내 죄다. 내 내림이야…."

어머니의 깊은 한숨에, 뭔가가 내 속에서 꿈틀댄다.

"…그럼, 나 낳은 거 후회해?"

이마에 얹은 어머니의 손이 순간 멈추었다.

"나경아!"
"왜 재혼 안 해. 엄마는…?"

돌섬이 가라앉는다. 내가 내딛기 전에.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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