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장편 미래전쟁 (5)

2010.08.11 20:0608.11

“아무래도 여기 있는 저를 포함한 여기 세 사람은 당신에게 선택받은 거 같은데, 그 까닭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아? 그런 질문 괜찮아요. 사실 별 거 없어요. 그냥 나랑 상성이 잘 맞게 골랐으니까. 마치 드레스 코드처럼요.”

마리아가 귀를 쫑긋 세웠다.

“드레스 코드?”

“우리를 옷에 비유한 겁니까?”

“네, 물론이에요. 어떤 장소에 갈 때 일반적으로 TPO를 생각해서 옷을 맞춰 입잖아요.”

TPO에 대해서라면 아내에게 들은 적이 있다.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에 따라 옷을 맞춰 입는 걸 뜻한다. 구닥다리 남자였기 때문인지 나는 이것에 대해 매우 둔했고, 한창 연애하던 시절 아내는 데이트를 할 때마다 똑같은 분위기의 옷을 입고 나오는 나를 매우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고, 신혼여행 첫날밤에 털어놓았다. 그 후부터는 부단히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못난 옷차림을 입고 다니는 건 천성인가 싶었다. 그런 내가 자신에게 어울리다니, 앨런도 자신의 옷차림에 대한 병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전쟁터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옆에서 함께 싸울 전우 아니겠어요? 그런 사람을 선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자신에게 맞게 선택…… 어라? 두 남성께선 왜 그러시죠?”

나는 아서에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넘겼다.

“재미있는 발상이지만 군대는 좌우로 나란히 섰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곳으로 보내지는 않습니다. 신병교육대에서 뭘 배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훈련이 끝나면 각자의 적성에 맞게 재배치됩니다. 그게 군대죠.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곳은, 유치원쯤이나 되겠군요.”

“걱정 말아요, 그쯤 조작하는 건 문제도 아니니까.”

저런 자신감은 또 어디서 나오는 거야. 나사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지칠 줄 모르는 그녀의 에너지는 아무래도 우주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윽고 다른 곳의 문이 열렸다. 차단막처럼 사라지는 게 아니라서 좀 실망했지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상식적인 게 어울리는 모양이다. 미닫이처럼 열리는 문이 저렇게 반갑기는 처음이다. 문이 열리자 무장을 하지 않은 병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회색빛이 감도는 복장을 입고 있었는데, 평상복처럼 보이는 우주복이라 생각해도 될 만큼 두툼했다. 그리고 또 하나 다른 점을 발견했다. 이건 정말 바보 같은 발견이었는데, 모두 안경을 쓰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내가 안경을 쓰지 않았기에 몰랐던 사실인데,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안경을 쓰지 않았다. 그걸 깨닫게 된 것은 우리 앞에 나타난 군인들이 고글처럼 보이는 걸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판 다르게 생긴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아닌, 인간이 자신들을 맞이하자 사람들은 순순히 그들의 안내를 따라 숙소로 이동했다. 이윽고 우리의 차례가 됐을 때, 앨런은 곧장 처음 보는 병사에게 수작을 걸었다.

“난 지구 출신인데, 그쪽은?”

상대의 대답을 잠깐 예상해봤다. 지구가 100년 전에 멸망했으니, 지구 출신일 리는 없지 않은가. 농담 삼아, ‘토성 출신입니다.’ 라고 말한다면, 최소한 미소 정도는 서비스로 얼굴에 띄워줄 용의가 있었다. 고글 너머의 그의 눈동자는 담담하게 앨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그녀가 내민 손을 잡았다. E. T.와 손가락을 마주한 소년의 감동이 전해졌다.

“타코다 항성계, Px-7 행성거주지 출신입니다. 앨런 훈련병.”

나는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보다도 앨런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더 신기했다. 미리 자리를 선정한 것도 아니고, 우리들 옷에 이름표가 달린 것도 아닌데 그는 어떻게 우리의 이름을 알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고글을 주목했지만, 확인할 길이 없어서 아쉬웠다. 물론 앨런은 나와 반대였다. 그녀는 아주 흥분한 상태였다.

“정말요? 그곳은 어때요? 지구와 비슷하나요? 아, 그러니까 내 말은 백 년 전의 지구를 말하는 거예요.”

“제법 괜찮은 곳이지만, S. E. P. 프로젝트를 중지시킬 정도는 못되죠. 이렇게 4명이 한 조입니까? 좋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앨런의 붙임성 덕분에 우리는 이 시대의 많은 지식들을 알아낼 수가 있었다. 일단 우리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내 예상대로 고글 때문이었다고 한다. 뇌에 부착된 컴퓨터와 전파를 주고받는 고글은 여러 정보들을 제공해주는데, 곧 우리도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방에 도착했을 때 플라스틱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재질로 만들어진 원형의 책상 위에 네 개의 고글이 놓여있었다. 이동 중에 알게 된 것인데 마리아는 생전에 언어학자였다고 한다. 그녀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언어에 노출된 사람들이 어떻게 이리도 쉽게 서로의 언어를 배울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함으로써 병사를 괴롭혔고, 그는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 성실하게 답변을 했다. 살인사건을 놓고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사와 유죄라고 으르렁거리는 검사의 논박을 보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우리들 중 유난히 부끄러움을 잘 타던 마리아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호기심이 왕성한 새끼 사자처럼 요란하게 떠들었다. 이윽고 방에 도착했을 때, 마리아는 다시 조용해졌고, 우리를 안내해준 병사는 흐르지도 않는 땀을 닦아내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방에 여러분의 고글이 있을 겁니다. 그것을 착용하고 지시대로 행동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다음 그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런 일을 대체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4-351’이라는 숫자가 적힌 방의 앞에 서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아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생활 보호가 전혀 안 되는 곳이군.” 우리는 실실 쪼개며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제법 넓었고, 꽤 심플한 구조였다. 방 중앙에는 타원형 책상 하나와 네 개의 의자. 양옆으로는 2층 침대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문 바로 옆에는 블라인더가 쳐진 창문과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캐비닛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게 우리 고글인 모양인데요?”

앨런은 바로 책상으로 달려갔고, 아서가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마리아에게 먼저 들어가라는 시늉을 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더니 곧 침대에 앉아 매트를 손으로 꾹 눌렀다. 촉감이 제법 괜찮은지 배시시 웃는다. 고글을 집은 앨런은 자신이 먼저 써보려다가 옆으로 다가온 아서에게 건네줬다. 그것을 받은 아서는 흠칫하더니 그녀의 눈치를 보고나서 예의바르게 도로 고글을 내밀었다.

“이런 경우는 역시 레이디 퍼스트.”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결국 서로 미루다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던 앨런의 연기에 폭소를 터트린 아서가 먼저 고글을 착용했다. 약 5초 동안 아프리카 코끼리도 잠재울 정도의 마취제를 맞은 사람처럼 멍하더니, 맹렬하게 팔을 휘둘렀다. 우리는 그가 실성한 게 아닌가 싶어 벌벌 떨었고, 잠시 후 안정을 찾은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듯 어서 고글을 써보라고 말하는 아서의 모습은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한니발 렉터처럼 보였다. 공포로 간이 잘 베인 앨런이 남아있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먼저 고글을 착용했고, 역시 맹렬하게 팔을 휘둘렀다. 아서를 선두로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고, 그녀도 곧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먹이를 발견한 매의 눈빛으로 나를 쏘아봤다. 나는 아서의 경우를 따르기로 했다.

“레이디 퍼스트.”

마리아는 비에 젖어 떨고 있는 아기고양이처럼 애처로운 구조신호를 보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두 팔을 잡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래서 내가 그녀의 팔을 잡았고, 앨런이 싱글벙글 웃으며 고글을 씌웠다.

“우우웅!”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고 나는 팔이 빠지는 줄 알았다. 우리들 중 가장 왜소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보기와는 다르게 힘이 상당했다. 팔을 휘두르지 못하자 그녀의 격한 반응은 대체로 목소리를 통해 발산되었고, 아서는 벽을 잡고, 앨런 침대 위를 구르며 낄낄 웃어댔다.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오자, 이번에는 마리아가 고글을 집었다. 나는 동정표를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서는 내가 남자라는 점을 감안하여 포박할 것을 주장했지만 다행히도 방에 밧줄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이 강구되었다. 군대를 다녀온 경험이 있는 아서는 나를 바닥에 눕힌 다음 팔을 뒤로 돌리고 그것을 무릎으로 강하게 눌렀다. 적군을 포박할 때나 쓸법한 기술이었다. 결국 제일 꼴사나운 자세로 고글을 착용하게 되었다. 그 경험은 강렬하고, 짜릿하면서, 결코 거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고문과 비슷했다. 뇌와 연결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짜릿한 감촉은 전기쇼크를 당한 것 같았고, 이윽고 머릿속으로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정보와 몸 전체를 관통하는 촉각은 팔로 개미떼가 들끓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래서 팔을 휘저을 수밖에 없었군. 짧은 개통식이 끝나자 고글에 선명한 녹색으로 글씨가 떠올랐다. 거기에는 나에 관한 정보가 써져있었다.

- 이름 : 하진우

- 혈액형 : A (Rh-)

- 사망일 : 2010년 8월 3일

- 가족사항 : 아내(29). 딸(2).

- 특이사항 : 군필자(대한민국 육군 병장 제대)

등을 누르고 있던 압박감이 사라졌지만 나는 오랫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내가 죽은 날은 2010년이다. 내가 28살이던 때 아내는 나보다 한 살 어린 27살이었다. 지구가 멸망한 시기는 2012년. 그러니까 아내가 멸망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딸이라니. 딸이었다니. 내게 딸이 있었다니.

이를 악물었지만 소용이 없다. 꽉 다문 이빨 틈새로 나오는 오열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주먹에 들어간 힘은 빠져나올 기색이 보이지 않았고, 부르르 떨리는 몸은 감정을 추스르지 않는다. 온몸으로 울었다. 누군가에게는 이미 백년이나 지나버렸지만, 나에게는 어제 통화했던 아내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리고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고, 지금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무사히 태어난 거야?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바깥으로 나온 거야?’

‘아빠 없이 태어났고, 아빠 없이 자랐고, 아빠 없이 죽었어.’

‘제길! 그만 멈춰! 이미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른다. 내가 간신히 울음을 멈춘 건 어깨를 통해 누군가의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눈이 아팠지만, 그래도 여신의 얼굴을 구분할 수는 있었다. 나를 부축한 사람은 마리아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괜찮아요. 다 괜찮을 거예요.”

거짓말.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고글에 떠오른 글귀를 읽었다. ‘S. E. P. 군용전략고글 최신버전 X-II에 접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눈을 살짝 옆으로 굴리자 글귀가 사라졌다. 아까의 충격으로 이 물건에 의한 조작법을 저절로 익혀버린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지만, 지금은 어떤 것도 신기하지 않았다. 그저, 죽어버린 게 확실한 내 아내와, 내 딸아이의 죽음에 최선을 다해 명복을 빌어줄 뿐이었다. 백년이 지난 미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고작 그거였다. 과거로 보내는 송별사는 숨죽인 울음소리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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