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피아노의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오렌지리큐르를 몇 방울 떨어트린 얼 그
레이의 향기와, 갓 구워낸 슈크림. 보기 좋게 세팅된 하얀  테이블클로스의
티테이블. 은제의 스푼들과 하얀 백자로 된  장미문양의 티세트들. 그리고,
그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몇 명의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들리는 것은 그저 감미롭게 진행되고 있는.. 약간은 서글픈 느낌의
'오렌지 랩소디' 하얀 시폰의 커튼이 밤바람에 흔들렸다. 밤하늘에 가득한
별과 그 별로 이루어진 새하얀 은하수. 별들의.. 밤.
   이제 저런 별들의 밤은 없어..  나는 저런 별빛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
면 이건... 어머니의 기억, 또는... 어머니의 '설정'
  
   " ... 설?(雪) "
  
   현실의 목소리가 정신을 들게 한다, 눈을 떠도 보이는 것은 어둠뿐, 그러
나 느낄 수는 있다, 내 이름을 그가 불러주는 것을, 내 뺨을 그가 어루만져
주는 것을, 그 모든 감각들이 모여 어둠 안에 그의 모습을 그려낸다.
  
   " ... 진명(眞冥). "
   " 또 꿈을 꾸던 중이었나? "
  
   걱정스러움이 섞인, 다정한  목소리. 약간은 무뚝뚝하지만,  실상은 아주
섬세한 사람.
  
   " 어머니의... 기억이었던 거 같아요. 예쁜 별이었어요. "
  
   진명은 하얀 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주  보드랍고 아기의 것과 같이
약해 보이는 피부. 그리고 뜨고 있으나 보이지 않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와
청순해 뵈는 얼굴 샘김들.
   처음 만났던 3년전보다, 더욱더 어려지고 아름다워지고, ...꺼질듯이 약해
져버린 운명의 연인.
  
   " 그래... 아름다운 광경이었나 보군. "
  
   꿈 외에는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지만, 그 꿈 안에서만은, 무엇이든  가능
한 존재.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그녀를 지키도록, 평생을 함께 하라
고 운명 지워진 존재가.. 나.
  
   " 네에 아주 . "
  
   그녀는 아주 밝게 미소짓는다, 3년전에는, 그녀도 볼 수 있던 모습들이었
을 텐데, 아니면... '그 일' 이전의, 우리세대가 알지 못하는 그런  풍경이었
을지도,
   팡-
   공기가 압축되어 터져나가는 소리, 텔레포트다. 저런 소리를 내면서 이곳
으로 텔레포트해 오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 .. 그 애들이 온 모양이군. 나가보고 오겠어. "
  
   진명은 설의 뺨을 가볍게 쓸어  내리고는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그녀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은빛이 되어버린 치렁치렁한 설의 머리카락이 새
하얀 시트 위에 장막처럼 늘어뜨려져 있었고 그 침대의 사방에는 반투명하
게 비쳐 보이는 하얀 시스루의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설은, 그 시스루의 건너로 아른하게 비쳐  보이는 진명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물론, 그녀의 안구는 아무 것도 잡아내지 못했지만, 그녀의 감각과,  
그리고 능력은 눈이 보지 못하는 풍경들을 그대로 그녀의 머릿속으로 넣어
주었다.
   눈이 안 보이기 전에 보았던, 진명의 넓은 등과 언제나 부드럽게 만져주
던 손과 그리고 섬세한 세공품에 하는 것 같은 아주 조심스럽고 그리고 조
금은 서툰 입맞춤. 그 입맞춤을  할 때마다 그는 얼굴이 붉어지곤  했었다.
이제는, 더이상 그렇게 얼굴을 붉히지도 서툴지도 않지만,  더욱더 조심스
러워진 접촉과 ... 자신을 대하는 모든 행동들. 그것은, 진명이 자신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대우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설의 방에서 나온 진명은 방문을 조용히 닫고 긴 복도를 지나서  단출하
지만 깔끔히 꾸며진 거실로 나왔다.
  
   " 아무리 길이 불편하다지만, 가끔은 조용히 등장해 줬으면 하는데 제이
린양 그리고.... "
  
   진명은 거실 안쪽의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약간
은 미안한 표정을 하고 서 있는, 허니블론드의 아가씨, 그리고 또 한  사람
은 백금빛에 가까운 금발을 한 이상할 정도로 새파란 눈을 한 소년.
  
   " ..... 콜링 레전드군. "
   " 그 길은 너무 좁다구요, "
  
   소년은 무뚝뚝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진명에게 해맑게 웃어  보이
면서 무릎을 끌어당겨 가슴 앞에 안았다. 무척이나 귀엽고, 그리고  천진해
보이는 일련의 그 행동을 보면서 진명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섬뜩해지는 것
을 느꼈다.
   소년의 눈은 그 또래의 아이들보다도 더 맑고, 천진하고 구김살 없는 듯
이 보였으나 실은, 그 눈은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았다. 이상스러울  정
도로 새파랗기만 한.... 그런 눈.
  
   " 그래서- "
  
   진명은 그 눈빛이 주는 기분 나쁨을  애써 떨쳐버리며 두 사람을 훑어보
았다.
  
   " 오늘도 설이를 힘들게 할 작정으로 찾아온 거겠지 두 사람? "
  
   진명의 말에 아가씨는 더욱더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소년도 머리를 긁적
였다. 그리고 아가씨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
  
   " 죄송해요 진명씨, 저어 설 아가씨는 일어나 계세요? "
   " 아아, "
  
   " 의논드릴 일이 많아져서 말이죠, 솔브의 일이나.. 그리고 '보석의 아이
들 ' 중 하나가 무언가 눈치를 챈 듯 하기도 하고요, 안 그래 제이린? "
  
  소년이 배시싯 웃으며 아가씨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진명은 그와 동시
에 아가씨- 제이린의 안색이  희게 질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제이린은
소년의 시선을 피하며 소년의 말에는 창백해진 낮빛으로 고개만을  끄덕였
다.
  
  " '보석의 아이'- 라면, 제이린양, 그 청년 말인가? "
  
  진명은 설에게 얼핏 들은 적이 있는 그녀의 애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는 그녀에게 말을 건네었다, 진명의 예상대로  제이린은 고개를 숙이고 미
약한 끄덕임으로 그 질문에 대답했다. 앞으로 꼬옥 모아 쥔 하얀 제이린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소년의 미소와, 진명의  침묵만이 거실 안을
옅게 채우고 있었다.
  
  " '보석의 아이' 에 대한 문제는, 거론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레전드군, "
  
  복도 쪽에서 들려온 작지만 부드러운 목소리에 거실의 세 사람은 모두 그
쪽을 바라보았다. 하얀 옷, 하얀 얼굴, 그리고 흘러내린 은빛의 머리칼.
  
  " 설- "
  
  진명은 놀란 얼굴로 일어나서는 복도  벽에 기대고 선 설을 부축해  안았
다. 그녀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은, 함께 지내는 그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이 입고 있던 얇은 흰옷은 이미 그녀가 흘린 땀으로
젖어서 안아 든 진명의 손에까지 축축하니 배어들 정도였다.
  
  " 이런, 무리를- "
  
  진명은 마치 부스러질 것 같이 가벼운 설을 조심스레 보듬어 안고는 곤란
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침실과 거실사이의 복도는, 만에 하나  암살
자들이 들어왔을 때를 대비하여 좁고 길게 만들어져 있었다. 보통 설은, 자
신의 침실에서 움직이지 못했고, 이동할 때는  진명의 도움을 받아서 움직
이곤 했는데, 그 긴 복도를 설은 움직이지 않는 다리로 걸어나온 것이다.
  
  " 난 괜찮아요 진명, 그보다- "
  
  설은 진명에게 안긴 채 고개를  들어 난처함과 궁금함이 섞인 표정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천진해 보이는 미소를  약간 입가에 머금고 있
는 소년과- 그와는 반대로 창백하게 질린 표정을 하고 있는 아가씨를.
  
  " 대답을 듣고 싶은데요 공주님. "
  
  소년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왜 '보석의 아이'  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죠? 그들이,
메이저 알카나인 하이프리스티스의 아이들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당신이
잘 알고 계실 텐데요. "
  
  " 그래요, 그들은 루에의 아이들이죠 "
  
  설은 땀에 젖은 얼굴로  평온히 웃었다. 소년의 천진스러운  미소가 약간
흐려지는 듯하다가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설은, 조금 나아지긴  했지
만 여전히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제이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걱정 말아요 제이린, '보석의  아이들' 이 모두 솔브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은 아니랍니다 "
  " 정말인가요? "
  
  제이린의 풀죽어 있던 청자빛 눈동자에 화색이 돌았다. 설은 그런 제이린
을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자신도, 금지된 사랑을 했었다, 진명을, 사랑해서
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를 내 운명에 끌어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내 옆에 있는 것을 어머니의 '설정'으로 알고 있겠지
만, 실은 그것은 나의 '설정'. 내가 처음으로 사용한  나의 힘,  그래서, 보
행의 자유를 잃고, 눈을  잃고, 검은 머리카락을 잃고......   그리고 그는, 나
를 위하여 스스로의 운명을 잃고.
  
  " 괜찮아요 레전드군, 제이린양, 그 청년은 아직 내버려두어도, '보석의 아
이'라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루에의 손이  닿지 않은데다가, 그녀에게는 다
른 '보석의 아이들' 이 많으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좋아요. "
  " 그건- '공주님'의 예언인가요? "
  
  방긋, 소년의 입가가 조금 더 올라갔다, 아니, 다른 사람은 아무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설만, 설만이 그 미묘한 오라의 변화를 감지했을 뿐.  
  
  " ... 그래요 레전드군, "
  " 그렇다면 그 문제는 넘어가죠, 다행이지 제이린? "
  " 으응. "
  
  라에느는 콜의 미소를 보면서 다시 한번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분명히 천진스러운, 또래의  아이들과 같은 미소다.  하지만 저 깊은
파란 눈, 무감정함이 느껴지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새파란...
  
  " ..... 그래서, '능력자'는 구해 두었고요, 일반 회원 중에서 도움을 청할까
해서요. "
  " 나쁘지 않겠는걸, 뭐 좋아 그 부분은 네 관리를 믿으니까 레전드군. "
  " 진명씨의 신용이라니, 과분한걸요 "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있던 라에느는 콜과 진명의 대화에 현실로  돌아왔
다. 오늘 여기에 오기로 한 목적은, 반 솔브 테러조직인 자신들, A.D.R.T.F
의 활동사항을 설과 그 보호자인 진명에게 보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솔브는- '그 날' 이후부터 세계였다. 겉으로는 다국적 기업이었지만 그
실상이라고 하면- 솔브는 세계 그 자체인 것이다.
   경제력을 잡고 있는 솔브,  정치력을 지배하는 솔브, 문화계를  압도하는
솔브,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법과, 알려지지 않은 신의 힘을 독점하는 솔브.
   마지막의 이야기 따위, 어차피  극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모르지만.  그래
안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세계를 진정시켰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세계는  아
직도 백지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세계를 설계했고, 그려  넣었고, 그리고....
지배하고 있다.
  그들이 지배한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채 살아간다, 그것을  느
끼는 사람들은, 저 앞의 '꿈꾸는 공주'인 2대의  '설정자', 설과, 그 보호자
인 동시에 흔들리지 않는 심장의 이 진명, 그리고- 자신의 파트너이자 '능
력자' 인 콜링, 그리고.... '무도가' 인 자신과 같은, ADRTF들 뿐.
  
   " 제이린, 표정이 안 좋은걸? 피곤해? "
   " 응?; 아, 아냐; "
  
   콜의 갑작스런 물음에 화들짝 놀란 라에느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
다. 그러나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과 손대
서는 안될 무언가를 손댄 것 같은 죄책감으로 얼굴로 피가 몰려는 것이 느
껴졌다.
  
   " - 나 잠깐 밖에서 바람 좀 쐬고 올께요 "
  
  라에느는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해 거실 밖으로  나갔다. 콜의 목소리가 뒤
따라 왔지만 잘 인식되지 않았다. 뭘까, 뭘까 이런 죄책감.
  
   " ... 위에까지 데려다 줄까 했는데, "
   " 바라지 않는 듯 하니 내버려두지, "
   " 그러죠 뭐, 그래서 진명씨 이 부분은.... "
  
   복도까지 나온 라에느는 아까 콜이 순간이동 해 온 옆을 올려다보았다.
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많은, 거의 일직선의 수직통로에 가까운 좁다란
통로, 그 까마득한 위로 희무끄레한 것이 막혀있었다. 물론, 그 옆에는 이동
을 위한 철골사다리가 매달려 있었다. 절대로 한  사람 이상이 이동하기 힘
든, 좁다란 통로. 라에느는 그 철골사다리를 잡는 대신, 다리를 가볍게 구부
렸다가 탄력을 주어 허공으로 솟구치듯 가볍게 뛰어올랐다.
  탕.
  약간 사선으로 솟구친 그녀의 몸이 통로의 벽을 딛고 다시 대각선 위쪽으
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다시 벽을 딛고 위쪽으로, 그런 방법으로 몇 번 벽을
차고 상승한 라에느는 잠시 후에는 그 길다란 통로의 입구 바로 밑까지 도
착해 있었다.
  철골사다리를 잡고, 밑에서는 희무끄레하게만 보였던 덮개를 살짝 밀치자,
새까만 하늘이 찢어진 비닐에 반쯤 가려서 펼쳐져  있었다. 아까 콜이 텔레
포트를 했던 그 찢어진 온실의 안, 잘 위장된 덮개를 도로 덮어놓고 라에느
는 온실 밖으로 나왔다.
  알 수 없는 이상한 죄책감, 어째서 이런 거지, 난 솔브의 지배를  벗어났
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왜?
  주황색의 보안등 빛이 그녀의 금발을  고운 주황빛으로 물들이며 조용히
골목을 내리비추었다. 이 죄책감이, 솔브의 마인드  컨트롤일 리는 없다. 솔
브에 대한 반감은 ADRTF 의 일원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이다. 솔브
의 정신지배 따위는 이제 나에겐 통하지 않아- 그런데 설마 이 죄책감은.

" 토파...... "

심장이 아파 왔다. 그래 설이 말하지 않아도, 콜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보
석의 아이' 임은, 만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솔브의 일원임을, 자신이
배척하고 그 독재를 그만두게 해야 할 솔브의  일부임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했다.

" 꾸중하셔도 좋아요 스승님, 마음을  흩트렸다고 호되게 나무라셔도 라에
느는 할 말이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전..... "

허공을 향해 낮게 중얼거리던 라에느는 말을 채 맺지 않고 머리를 묶어 올
렸던 끈을 잡아당겼다. 출렁, 마치 금빛의 천이 흘러내리듯이 묵직한 직모가
라에느의 어깨를 덮고 등 복판까지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언제나 발랄하
게 미소짓고 있던 그녀의 청자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이상스러울  정도로
선뜩한 빛을 내며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라에느가 움직였다.
처음엔 가볍게 땅에 발을 디디고, 무릎을 살짝 굽혀 무게중심을 낮추고, 자
연스러운 각도로 팔을 들어올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옷을 입지 않은 맨
살이 드러난 팔 위로 주황빛 불빛이 흘러내리도록 천천히.
  그리고 다음순간, 그녀의 가볍게 쥔 오른 주먹이  밤 공기를 가르며 지나
갔다. 뒤이어 왼손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두 손이 거두어지는 것과
동시에 한쪽 다리가 빠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물러섬에
따라 무게중심은 자연스럽게 그 물러선 다리로 옮겨왔다.
  라에느의 몸이 반 바퀴 돌면서 주황빛 블론드가 출렁 하고 뒤늦게 따라왔
다. 그리고 다시 그 회전방향 그대로 돌려차기가 두 번, 세 번째의 돌려차기
는 허공에서 그 방향을 바꾸어 그대로 지면을 향해 내리 꽂혔다.  
  탁. 라에느는 마치 공기를  끊어내는 것과 같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멈춰선 다리를 그대로 유연하게 중심을 잡으면서 무릎을 당겨 가슴 앞에 세
웠다. 한 손이 부드럽게 내려오고  다른 한 손은 올라가  균형을 잡은 자세
그대로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그대로, 가슴 앞으로 끌어당겨 구부린 다리가  
하늘을 올려 찼다.
두 다리가 일직선을 이룰 때 까지 차올려진 다리는, 그 정점에서 잠시 멈추
었다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내려와 다시 땅을 디뎠다.
그리고 길게 내뱉는 한 숨.
그 숨이 끝나는 순간, 다시 이어지는 수 번의 손놀림, 동시에 원을  그리며
움직이는 다리의 이동, 춤을 추듯이 연계되는 손과 팔, 어깨로 이어지는  공
격의 무도(舞蹈). 낮게 낮춘 몸이 균형을 잡았다  싶게, 다리가 원을 그리며
땅 위를 회전했고, 그 회전에 무성히 자라났던 잡초가 다리가 지나간 궤적
그대로 잘려져 나갔다.
잠시 멈추는 몸 위로 잘려진 풀잎들이 역류해 올라왔다. 라에느의 몸 주변
으로 공기가 회오리를 치듯이 흐르고 있었다. 그  공기의 회오리를 따라 주
황빛으로 물든 금발이 어깨 위까지 날려 올라갔다.

" 후우. "

라에느가 자세를 바로잡고 숨을 내쉬자, 날려  올라갔던 머리칼들이 그대로
어깨 위를 덮었다. 주변에 날리던  풀잎들도 모두 땅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선뜩한 빛으로 이글거리던 눈동자도, 원래 그녀의 청잣빛으로 되돌아왔다.

" 역시..... 바보 같아, "

누구에게 인지 모르게, 라에느는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고개를 숙여 그
길고 치렁한 금발 때문에 가려진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슬픈, 무척이
나 슬프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 암 그렇고 말고 아주 엄청난 바보지. 너도, 토파즈도 말이야 제이린. "

빙긋, 담쟁이가 말라붙은 빨간 벽돌집의 옥상에서  내려다보던 누군가가 가
만히 입가를 씰룩 움직였다, 그리고 곧이어, 어둠에 가리어 잘 보이지  않던
그 존재는, 그 어둠에 녹아들 듯이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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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
- 이제 와서 아니라고 말하는 거야?

" 그녀가 나를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
- 투정부리고 있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아.

" 내가 그녀에게 요구한 것이 무리한 것 이었나요? "
- 그럴지도 몰라,

" 난 그녀가 위험해지는 게 싫어요! 솔브의 눈밖에 나서,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는 건 보고싶지 않아!!! "
- 그건, 너의 자존심 때문 아냐? 솔브에 충성하는 애인을 가지고 싶다라는
자존심.

" 솔브에 충성해야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쳐 준건 당신들이었잖아요!! "  
- 너에게 사랑에 빠지라고 하지는 않았어.

" 나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도대체!! 그녀를 사랑해요! 그래요 미칠 듯이 사
랑해요!!!! 그래서- 이제 와서 그녀가 솔브를 미워한다고 해서- 그녀를 사랑
하지 말라는 건가요?!!!! "
- 네가 판단해, 우리에게 투정을 부려서  될 문제가 아냐, 우리의 막내 동
생, 귀여운 토파즈 쥬얼.

" 결국은, 만들어놓고 혼자 살라고 내버리는 거로군요 "

" 그 아이, 투정이 심해, 역시 막내라서 그런 걸까? "
"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며 키워서 그럴지도, 네 생각은 어때 사피? "
" ...... 글쎄. "
" 아냐 아몬, 토파가 저러는 건 역시 저 아이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야.
아아- 로맨틱해 "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루, 로맨틱이고 뭐고 따질 계제가 아니잖아, 어머니
가 아시기 전에 저 반항기를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고. "
" 에므 말이 맞아.  어머니가 아시면 일이 커진다고,  그 애를 제정신으로
돌려놓든지, 그 여자를 어떻게 하든지 해야 해 "
" 하지만 아몬- 우리는 그들을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걸. "
" 맞아 루, 우리는 힘은 없지. 하지만 방법은 많아, 도와주겠지 사피? "
" ....... 좋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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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4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3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2 장편 SOLLV 에피소드 넷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1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다섯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30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9 장편 SOLLV 에피소드 셋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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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여섯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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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2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1 장편 SOLLV 에피소드 둘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20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넷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9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셋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8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
117 장편 SOLLV 에피소드 하나 하나 이야기. 김현정 2004.11.0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