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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계단

1편 죽은 자들의 세상



  “여기가 어디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신을 잃고 일어나서 하는 말이다. 사고를 당해서 병원으로 후송된 사람이나, 밤새 축제 분위기로 술을 퍼마시다가 필름이 끊겨버린 사람이나, 그리고 죽어서 이곳에 온 사람들이.

  내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그런 것이었다. ‘여기가 어디죠?’ 라는 말이 나와도 자연스러울 만한 풍경. 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있는 것이냐고? 필름이 끊겨 버린 것이냐고? 사고를 당한 건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필름이 끊긴 것은 아니다. 나는 술 마시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편이고, 누군가가 나에게 술을 권한다고 해도 정중하게 거절하니까. 사고가 난 것이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하지 못한 것은 이 아이러니 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분명 사고를 당한 기억이 있다. 분명히 사고를 당했다. 거대한 화물차가 나를 덮쳤다. 눈을 질끈 감았고 그 다음으로는 기억이 없다. 내가 살아오면서 배운 지식들을 총동원 해본다면 사람이 거대한 화물차에 치이고 이렇게 멀쩡하게 서 있을 수는 없을 텐데 말이다.

  여기가 어디인가에 대한 대답은 눈앞에 있는 여자가 해 주었다.


  "여기는 천국, 죽은 자들의 세상이랍니다.”


 이 여자가 미친 걸까 아니면 내가 사고로 미친 걸까. 해맑은 표정으로 이곳이 천국이라 주장하는 여자는 엄청난 미인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 아 이곳이 천국이구나 하고서 납득할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전체적으로는 고양이 상이었는데, 눈이 마치 바닥이 보이지 않는 푸른 호수만큼 깊었다.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비밀스러운 눈매였다. 머릿결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 같지는 않고 구름이 살며시 내려앉는 듯한 밝은 갈색의 웨이브였다. 뭔가 이국적인 얼굴인데 다른 구석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키가 굉장히 컸다. 커다란 키 때문인지 이국적으로 보이는 면모를 더 부각시켰다. 175cm 정도 되어 보이는데, 느낌은 그보다 더 커보였다. 머리가 작아서 그런 건가. 

  그녀의 옷차림은 서울 한복판에 그 차림으로 나가면 한 번에 주목받을 수 있을 만한 의상이었다. 그리스 사람들이 입던 헐렁헐렁한 옷차림 그걸 토가라고 하던가? 아마도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그런 의상을 입고 있었고, 그 위에 또 형형색색의 띠를 두르고 있었다.


  "네?”


  조금 더 정상적인 대답이나 질문을 해야 하는데 굉장히 얼빠진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여기는 천국, 죽은 자들의 세상이랍니다.”


  친절하게 한 번 더 말해주셨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그녀의 옷차림만큼 이곳의 풍경은 더욱 이상했다. 정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정원이었다. 이곳을 어떻게 형용하냐 하면 천국 같았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끝없이 풀밭이 펼쳐져 있었고 간혹 바닥에 돌로 된 길이 놓여 있었다. 이 곳 저곳에 꽃밭이 늘어져 있었다. 울타리는 없었다. 가까운 곳에 강이 하나 흐르고 있었다. 맑아보였는데 그 안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빛이 비추어 보석처럼 반짝였다.

  처음 보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듯 했다. 그고 작은 언덕들이 여기저기 올라와 있고, 곡선의 미학을 알 것만 같은 아름다운 건물들도 있었다.


  “저는 루라 라고 해요. 이루라.”


  “이름인가요?”


  “네. 순우리말 이름이라고 하는데,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자기 입으로 자신의 이름이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제가 왜 여기 있는 거죠?”


  “죽은 자들의 세계이니까요.”


  그럼 내가 죽었다는 말이겠구나. 죽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리고 죽은 뒤에 정말 천국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도 적잖이 놀랐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이나 팔을 만져보았다. 이렇게 생생한데.


  “음... 최현우씨? 2013년 8월 4일에 죽었네요. 사고로.”


  “역시 죽은 것 맞죠?”


  이렇게 살아있는 것 같은데, 내가 죽었냐고 되묻는 감정이 오묘했다.


  “죽어서 슬퍼요?”


 “정말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별로 믿기지는 않네요. 슬프다는 감정이 있는 줄도 모르겠고.”


  그녀가 나의 말을 듣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다들 그래요. 여기 처음 오면. 자기가 죽었다는 걸 못 믿거든요. 여기서 지내다보면 어느 순간 익숙해져요.”


  그녀가 뒤로 돌아서 걸어갔다. 어디로 가는 건지는 모르지만 나도 그냥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지나가는 길에 나무가 있었는데 나뭇잎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유난히 해가 강했다. 천국이라서 그런건가.


  “어디 가는지 알아요?”


  한동안 그녀가 말없이 걸어서 갑자기 나를 향한 질문에 깜짝 놀랐다.


  “아니요.”


  천국에 와서 무엇을 해야 할까에 대한 질문은 아직 해답을 얻지 못했다. 경찰서를 온 것도 아니고, 아니면 직장에 온 것도 아닌데, 그 다음에 무엇을 하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녀는 한번 뒤를 돌아보고 한번 가볍게 웃은 후 다시 앞을 보고 걸어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말하면 알려 줘야하지 않나. 하고 생각하다가 어디로 가던 가야할 곳으로 가겠지. 라는 편한 마음으로 뒤를 졸졸 따라갔다.


  “천국으로 가는 거에요.”


  또 갑작스레 걷다가 말했다.


  “여기는 천국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뭐가 신나는지 어린애처럼 실실 웃었다. 그녀의 표정에 비해서 나는 무척이나 당황했다. 일어나자마자 여기가 천국이에요. 라고 말해놓고는 이제 와서 여기는 천국이 아니에요. 사실 당신도 죽은 게 아니에요. 하는 장난을 치려는 거라면 정말 화를 낼 뻔했다. 물론 화를 낼 뻔했으니까 실제로 내가 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천국은 여기랑 다른 곳이에요. 저기 저쪽에 문 하나 보여요?”


  확실히 문 하나가 보였다.


  “여기가 천국이 아니라면 어디죠? 지옥인가요?”


  “지옥 같은 건 없어요. 그냥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일 뿐이에요. 아, 아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건 아니고 저희가 인간들이 말을 안들을 때 착하게 좀 살라고 만들어낸 거죠.”


 그녀가 다시 손가락을 들어 문을 가리켰을 때 문은 언제 저 멀리 있었냐는 듯이 순식간에 우리의 앞으로 다가 와 있었다.


  “여기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천국의 이미지에요. 진짜 천국에서 잡아놓고 여기는 천국이랍니다. 라고 말하면 아무도 안 믿거든요.”


  그녀가 말하면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을 열자 신기하게도 문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뒤쪽에는 다른 장소가 펼쳐져 있었다. 마치 만화나 영화처럼.

루라는 내가 감탄하고 있는 동안 벌써 문 뒤로 넘어가버렸다. 나도 감탄은 그만두고 그녀를 따라서 문 안으로 들어갔다.



2



  “천국은 사실 평화로운 마을이에요.”


  그녀는 마을이라기보다는 국가와 비슷하다고 부연설명 했다. 그도 그런 게, 이곳은 정말 내가 생각하던 천국이랑은 완전히 이미지가 달랐다. 내가 생각하는 천국은 아까 있던 가짜천국, 그러니까 넓은 초원에 강이 하나 흐르고 나비들이 날아다니며 천사들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곳이었는데, 진짜 천국은 나의 상상 속에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느낌을 말하자면 외국에 와 있는 느낌. 유럽의 한 나라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커다란 광장을 중심으로 돌로 된 바닥이 깔려있고, 가운데에서는 분수가 물을 뿜어 무지개를 만들어내며 이국적인 고딕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사람들은 여유를 즐기며 다녔다. 과일가계 앞에서 사과를 만지작대면서 지갑을 꺼내는 이도 있었고, 카페 앞에서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주고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거리의 악사들은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고 있었고 한 글쟁이는 노트북 자판을 톡톡거리고 있었다.


  “잘 봐둬요. 앞으로 현우씨가 살 동네에요.”


 이런 곳에서 산다는 건가?

묘한 기대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어느 새 내가 죽었다는 것 마저 잊어버렸다. 그만큼 매력 있는 동네였다. 이곳은.


  “일단 입국신청을 해야 돼요.”


  “에, 그런 것도 있나요?”


  입국신청이라니... 정말 다른 나라에 잠시 여행 온 기분이 난다.

  

  “입국신청이라고 해도 복잡하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언제 어떻게 죽었고 어느 도시에서 사느냐. 그 정도만 말하면 돼요.”


  “그렇게 쉽게 입국이 되는 건가요?”

  

  “천국은 모두를 위한 공간이니까요.”


  루라는 나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제스처를 취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렸다. 내가 앞으로 살 동네.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아름다운 곳인 것 같다. 그런데 왜 하필 유럽국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걸까 하고 의문을 가지기도 했지만 아름다우면 어떠냐는 마음편한 생각이 들었다. 표지판에 마을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을 이름은 H-KR-아시리아. 그 모습만큼이나 아름다운 동네이다. 이건 내 생각이지만 H는 천국을 의미하는 말이겠고 KR은 한국이라는 의미이겠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광장 입구 쪽에서 차 하나가 다가왔다. 죽기 전에도 보지 못했던 스포츠카였다. 차에 대해서는 해박한 편이 아니었으므로 그 차가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타요.”


  문이 위쪽으로 열리는 차에서 나온 것은 루라였다.


  “차 좋네요.”

  

  “그렇죠? 제가 차를 좀 좋아하는 편이라서, 1년에 하나쯤은 차 하나정도를 사요. 집에 10대 정도 더 있는데 시간 있으면 구경하러 와요.”


  나는 차에 올라탔다. 생각보다 승차감이 좋았다. 차 내부도 조용하고 역시 뭐든지 겉과 속은 다른 모양이다. 차는 부드럽게 광장을 가로질러 출구까지 나갔다. 광장 밖으로는 5갈래의 길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아까의 빵집과 카페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비둘기들이 차를 피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하늘은 푸르렀다. 하늘색 물감으로 칠해놓은 캔버스에 하얀 물감으로 뭉게구름을 뿌려놓은 것 같다. 그 사이로 비치는 강렬한 해는 따갑지는 않고 산뜻했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어디선가 계속 불어왔다. 근처에 바다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에 오르막길을 넘어서자 그 언덕 너머로 바다가 보였다,

10분정도 달리자, 넓은 도시가 나왔다.


  “여기는 천국의 중심도시에요. 앞으로 여기 올 일이 많을테니까 둘러봐요.”


  도시는 바다의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도시인데도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3



  “루라? 여기는 무슨 일이야?”

  

  처음에는 궁전인가 아니면 박물관인가 햇갈릴 정도로 거대한 건물에 들어왔다. 도시 한가운데 있는 행정사무소라고 하는데, 정말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니 데스크 너머로 누군가 루라를 아는 사람을 만났다.


  “이번에 우리 동네로 새로 온 사람이에요.”


  “우리 동네로?”


  이상하게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내가 맘에 안 드나? 괜히 불안해졌다.


  “우리 동네로 오는 게 얼마만이야”

  

  더욱 불안하게 루라는 가볍게 웃었다. 루라는 네모난 서류가방에서 5장정도 되는 A4용지를 꺼냈다. 입국심사서인가? 별거 쓸 것도 없다면서 왜 5장이나 있는지는 모르겠다. 루라는 5장의 서류를 제출했다.


  “최현우? 평범한 이름이네. 나는 정다은이야. 같은 동네니까 잘 부탁한다.”


  “잘 부탁합니다.”


  얼떨결에 인사를 했다. 다시 한 번 다은을 바라보았다. 뒤로 올려 묶은 머리를 하고 있다. 성격이야 아직은 모르겠지만 활발하고 붙임성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

그녀는 서류를 받아들고 컴퓨터 자판을 분주하게 두들겼다. 몇 자 입력하는 것 같더니 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입국신청은 이걸로 끝이야 입국을 축하해. 이제 다시 루라를 따라가서 집이나 구경하고 있어봐, 나는 업무가 끝나고 돌아갈게”


  그리고는 루라를 휙 바라보았다.


  “오늘은 신입이 들어왔으니까 파티다!”


  “에? 어제도 파티였잖아요?”


  “그건 혁준이 데뷔기념이고 오늘은 새로운 이웃이 왔으니까 환영하자는 의미에서.”


  루라는 웃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가는 길에 먹을 거나 사 놓을게요, 저도 하던 일 하러 가요.”


  “와인도 하나 사.”


  마지막 말을 루라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대답 없이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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