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속보입니다. 오늘 새벽 두 시경 청송교도소 무기수 김추암이 탈옥하였습니다. 교도소 측 교도관과 경찰관 삼백여명으로 긴급 추적반을 편성하고 역과 터미널 등의 검문을 강화하고 추적하고 있습니다…….’

엄마를 도와 식탁 뒷정리를 하다 정수기 옆 탁자 위에 놓인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빨리 잡혀야할 텐데…….” 엄마가 나직이 말했다.

병구와 용희는 소파에서 졸고 있었다. 욕실에서 막 나온 아빠가 TV를 켜면서 용희의 엉덩이를 깔아뭉개고 앉았다. 하지만 용희는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코를 드르렁 골며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TV가 켜지는 소리에 병구가 깨어났다. 그는 이마 아래로 내려온 헝클어진 머리칼을 침을 묻혀 바짝 세웠다. 용희가 뒤이어 일어났다. 그는 거의 감긴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엉덩이를 벅벅 긁었고 그 손으로 다시 콧구멍을 후볐다. 그는 반쯤 잠이 든 상태로 콧구멍에 들어갔다 나온 손가락을 비비더니 코딱지를 바닥에 툭 튕겼다. ! 그들이 날 만질 수 없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TV에서 경찰들이 탈옥수의 얼굴을 보여주며 국민들에게 수사협조를 부탁하고 있었다. 그는 대머리였고 오른쪽 볼과 턱에 불룩하게 솟아오른 흉터가 나있었다. 눈은 부리부리했고 불룩한 코는 휘어져있었고 입은 밥그릇을 엎어놓은 것처럼 튀어나와있었다.

운동하고 올게요.”

엄마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들 많은 곳으로만 다니렴.”

나는 운동화를 신고 앞발을 바닥에 툭툭 내려치며 일부러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낯선 사람 조심하고! 차 조심하고!” 아빠가 소리쳤다.

학교 수업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서야 우리는 학교건물 뒤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유령빌라지 입구 앞에서 반실성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오싹한 미소를 지으며(그녀 딴에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은 듯했다.)우릴 맞았다. 그녀는 머리를 비녀로 틀어 올린 건지 아니면 풀려는 건지 당최 감을 잡을 수 없는 헝클어진 머리를 쓱쓱 긁곤 말했다. “어서 오렴. 반가운 친구 둘!”

이란 말에 병구가 콧방귀를 픽 뀌었다. 반실성은 나와 용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병구는 상관없다는 냥 턱을 높이 들고 팔짱을 끼며 다가갔다.

, 유령빌라지 N115를 투어 시켜줄게.” 여전히 가식적이고 거부감이 드는 목소리였다. “그 전에 말이다. 내가 준비한 게 하나 있어. 정확히 말하자면 두 개지.”

그녀가 짜리몽땅한 검지와 중지를 쫙 벌리곤 두 번 정도 굽혔다 폈다.

그게 뭔데요?” 내가 물었다.

그녀가 풀밭에 던져놓은 구겨진 도화지랑 새끼손가락정도 길이밖에 안 되는 노란색 몽당연필을 가리켰다.

내 예언대로 쓰일 일이 있을 거야. 저거 가지고 오느라고 내가 얼마나 진땀 뺐는지 아니? 미친 고양이가 도화지를 뜯어놓으려고 해서 내가 주둥이를 갈기려다…… 설명하려면 길고, 정말 고양이라면 넌더리가 난다.”

나는 도화지와 몽당연필을 주워들었다.

웃기시네.” 병구가 비아냥거렸다. 반실성이 누런 이를 드러내고서 짜증가득 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용희가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볼 수 있는 거랑 들어갈 수 있는 거랑은 별개의 문제가 아닐까?”

순간 나는 당황했다. 눈에 보였기에 당연히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병구가 말했다. “모를 일이야. 손만 살짝 집어넣어봐.”

병구의 눈빛은 나만큼이나 간절했다. 교실에서 저학년 아이들이 참새 떼처럼 합창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주위를 한 번 더 살피며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입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손을 뻗자마자 입구 속으로 손가락이 쑤욱 빨려 들어갔다. 나는 내 눈 앞에 펼쳐진 이 세상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래턱을 목까지 끌어내린 건 뒤이어 들어온 병구도 마찬가지였다. 그 곳은 중력이나 지구의 법칙 따위는 적용되지 않는 세계 같았다. 형형색색의 통조림 아니면 드럼통 같이 생긴 집들이 고갤 들어도 끝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행성처럼 떠 있었다. 집은 100채는 족히 넘어보였는데 날아다녀서들 그런지 따로 만들어진 길 같은 건 없었다. 맨 아래 위치한 집 바로 아래 붉은 띠를 두른 짙은 푸른색 선박이 한 척 놓여있었고 그 길이가 족히 1km는 되어보였다. 배의 아랫부분은 출렁이는 코발트빛 물에 잠겨있었는데, 고정되었는지 아니면 바닥에 가라앉을 만큼 수위가 낮은 건지 움직이질 않았다. 배 위엔 온갖 것들이 놓여있었다. 파라솔, 시소, 정글짐, 초록색 벤치, 테이블, 공중화장실, 흡연실, 회전목마, 가로수, 아주 커다란 괘종시계, 농구장 등등. 선박 위가 공공장소인 듯 보였다.

우리는 육지에서 선박 위로 오르는 가교 같은 곳에 서 있었고 날 제외한 모두가 그 위로 올라섰다. 나는 유령들이 만들어 놓은 건 뭐든지 통과했고, 그들이 가교의 5분의 1쯤 걸어간 그 높이가 내 허리정도까지 왔다. 이들의 세상에선 내가 유령이나 마찬가지였다.

반실성이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도화지와 몽당연필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늘을 날 수 있는 거 한 가지만 그려봐.”

나는 그녀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한 건지는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 될 것 같진 않았다. 병구는 그녀의 모든 게 못마땅한 듯 짧게 메마른 웃음소리를 내었다.

설마…….” 내 입에서 절로 터져 나왔다.

우리 모두 보고, 듣고, 느끼기 전까진 설마라는 단어를 많이 쓰지. 설마라는 단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단어라고.” 반실성이 병구를 흘기며 말했다. 용희는 이 상황이 무척이나 흥미진진한 듯 보였다. 그가 거들었다. “시도는 해 봐. 너도 이런 세상이 있으리라곤 상상 못했었잖아. 하지만 이게 현실이야.”

병구가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용희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나는 용희의 말에 그려보기로 했다. 뭘 그릴까. 간단히 그릴 수 있는 게 뭘까. ? 아냐. 그릴 때마다 항상 날개가 삐뚤 했어. 비행기? 그건 너무 복잡해. 행글라이더? 그건 너무 위험해보여. 그럼…… ! 나는 그림을 그렸다. 다 그리기도 전에 용희가 그것을 맞췄다. “종이비행기?”

나는 종이비행기 그림을 보고서 반실성의 말대로 뭔가가 일어나길 기대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병구가 빤한 결과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것 봐. 다 사기야. 사기.” 그가 조롱 섞인 어조로 말했다.

반실성이 크게 당황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그녀가 그림을 휙 뺏어들며 이리저리 살폈다. “그림이 이상한 거 아냐?” 그녀가 혼잣말로 웅얼거렸다.

나는 그녀의 말이 언짢았고 그녀에게서 잽싸게 도화지를 뺏어와 그림을 살폈다. 잘못 된 건 없었다.  저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한숨이 후, 하고 절로 나왔다. 바로 그 때였다. 내 숨이 도화지에 닿자마자 도화지 속에서 종이비행기가 밖으로 쑤욱 나오기 시작했다. 그 크기는 내가 그릴 때 상상했던 것과 똑같았다. 그제야 주위에 있던 유령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쏠렸다. 그들 대부분이 우와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몇몇 유령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얘가 걔야?” 부스스한 머리에 트레이닝복을 입은 젊은 남자유령이 반실성에게 물었다.

.” 반실성은 그녀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종이비행기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이 빨갛고 머리칼을 빠글빠글하게 볶은 아줌마유령이 날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거참, 신기하네. 살아있는 사람이 별 걸 다하고. 살아있는 거 맞아?” 그녀가 내 팔을 꾹 찔러보려했지만 통과했다.

맞네. 거참 희한하네.”

수많은 유령들이 우릴 빙 둘러싼 채 웅성웅성 거렸다.

반실성이 이내 우쭐거리며 병구에게 물었다. “너 이래도 내가 사기꾼으로 보이니?”

병구는 대답 없이 고개를 휙 돌렸다. 반실성은 내기에서 이긴 것 마냥 히죽거렸다.

나는 종이비행기 위에 사뿐히 올라탔고 잘 날아갈 수 있을 지 이리저리 살폈다. 오른쪽 날개 끝에 고양이발자국이 희미하게 찍혀있었다. 나는 하늘로 날아오르길 원했다. 그러자 내 생각을 읽었는지 종이비행기가 하늘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비행했다.

놀이터에서 병구와 내가 했던 시합을 하는 꼬마유령들이 많았다. 갑옷을 입은 요크셔테리어가 붉은 조랑말 위에서 정강이뼈를 들고 맞은 편 온몸에 리본을 맨 코알라가 푸른 조랑말 위에서 나무작대기를 들고 서로를 향해 모래를 튀기며 돌진했다. 정강이뼈로 코알라 복부를 친 요크셔테리어가 승리였다. 요크셔테리어를 만들어낸 꼬마유령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주 높은 곳에서 구령소리가 들렸다.

내가 위를 올려다보자 반실성이 말했다. “유령빌라지 대항전이 내년 여름에 있어. 올해 7월 초에 열렸지. 올해는 N84가 승리했어. 저 맨 꼭대기에 연습장이 있지.”

용희가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을 내리치며 말했다. “올해 결승전을 놓쳤어! 버뮤다 삼각지대 유령빌라지에서 빠져나오질 못했어. 자기장에 변화가 생겨서 입구가 무너져버렸거든! 근데 다들 고칠 생각이 없었어. 느긋하더라고…….”

무슨 경기인데?”

용희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했다. “저 꼬마애들이 하는 것과 비슷한 경기야.”

“저게 경기라고?”

“응. 두 팀이 '토이'를 만들어 결투를 붙이는 경기야. 다음에 직접 보는 게 더 좋을 거야. 정말 환상적이거든.”

나는 홀린 듯 이 세상에 눈을 떼지 못했다. 유령빌라지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난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반실성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유령빌라지 N115에서 가장 오래 계신 화가영감님을 만나보는 게 좋겠어.”

그 분은 어둠에 대해 잘 알고 계실까요?” 내가 물었다. 우릴 둘러싼 유령들이 어둠이란 말에 동시에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반실성이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곤(어찌나 크게 뜨는지 눈알이 툭 땅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나를 몇 초간 응시했다.

어둠을 본 적 있니?” 그녀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나는 병구를 쳐다보았다. 병구도 날 빤히 쳐다보았다. 반실성이 기가 막힌다는 어조로 물었다. “네가 어둠을 알아서 뭘 어쩌려고?”

위험한 존재니까요. 유령들에게도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도.”나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반실성은 계속 눈알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용희가 재촉했다. “어서 화가영감님을 만나게 해줘요.”

반실성이 검지로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위에 있어.”

용희가 먼저 날아올랐다. 나도 많은 유령들 사이를 벗어나 그를 따라 날아올랐다. 가까이서 봐도 유령들의 집은 아주 작았다. 6인용 식탁 두 개 합쳐놓은 정도의 크기였다. 저런 곳에서 두 다리나 뻗고 쉴 수나 있을까 싶었는데 열린 문으로 잠깐 봤던 내부는 꽤 넓었다. 막 집에서 나온 라일락색깔의 주름치마를 입은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둥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방실성이 화가영감님 집을 안내했다. 노란깡통 같은 집을 지나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실체가 없는 공간이라서 그런지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반실성을 따라 요리조리 날아가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는데 옹기종기 모인 장독대마냥 집으로 꽉 차있었다. 하지만 내 몸은 이 세상의 모든 걸 다 통과했다. 만약 이 종이비행기에서 떨어지면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진 수박 꼴이 될 게 분명했다. 나는 종이비행기에 바짝 엎드렸고, 다음번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경비행기 정도는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저기야!” 반실성이 소리쳤다.

파란색 컨테이너박스 같은 집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서 들어간 곳에 화가영감의 집이 있었다. 얼룩무늬에다 주둥이가 잘려나간 물뿌리개 형태였는데 창과 문은 하나씩 뚫려있었다. 창틀과 문은 에나멜 칠을 한 분홍색이었는데, 세련된 분홍이 아니라 촌스러운 내복색깔 같은 분홍이었다. 참 요란스러웠다.

반실성이 문을 두드렸다. 나무문이 열리고, 집주인이 밖으로 나왔다. 그의 차림새는 그의 집처럼 독특하다 못해 요상했다. 연두색 형광 쫄티에 밑이 축 늘어진 배기바지를 입고 있었다. 코가 뾰족한 갈색구두를 신고 있었고, 금색 팔찌와 목걸이를 치렁치렁 두르고 있었다. 얼굴만 보면 영락없는 6,70대 할아버지였는데, 하얗게 쉬어버린 머리칼은 양 갈래로 땋아져 있었고, 땋은 머리는 뱅글뱅글 말아 가느다란 핀으로 고정되어있었다.

! 실성인가? 그리고…….” 요상한 차림새와는 딴판으로 영국의 노신사처럼 말했다. “허허! 자네구먼. 놀라워. 참으로 놀라워! 어서,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게. 반실성 양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네.”

나는 웃음폭탄이라도 맞은 듯 그를 1초 이상 바라볼 수가 없었다. 용희는 웃음을 참느라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병구는 어깨를 으쓱하며 참을 만하단 표정을 지어보였다.

겉은 좁아 보였지만, 내부는 신기하게도 넓었다. 교실 두 칸을 합쳐놓은 크기였다. 푸른 바다색 테이블과 고사리무늬가 찍힌 진녹색 소파, 벽 여기저기 마치 대못처럼 박혀있는 화초들, 활활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 수십 개의 액자가 지그재그로 놓인 선반, 허공에 붕 떠있는 붉고 노란 점이 찍힌 주사위 그리고 고급스런 양복을 차려입고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짚은 그와 똑 닮은 사람을 그려놓은 유화그림과 먹으로 그린 대형 산수화에 기린과 원숭이, 코뿔소와 타조 모형을 붙인 희한한 작품까지.

화가영감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앉게나. ! 자네는 거기 계속 있어야 될 걸세.”

나는 앉게나, 하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비행기에서 내릴 뻔했다가 식겁했다. 나는 종이비행기에 바짝 몸을 붙였다.

반실성이 담임선생님에게 고자질 하는 얌체같이 말했다. “영감님. 이 친구 말이에요. 여기 온 이유가 어둠 때문이래요.”

화가영감이 앞으로 넘어온 머리칼을 뒤로 넘기려다 멈칫했다. 그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살아있는 사람이 어둠은 왜? 어둠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 건가?”

나는 내가 아는 대로 설명했다. “영혼을 잡아먹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나쁜 길로 빠지게 조종하는 괴물이죠.”

본적이 있단 말인가?” 그가 진저리를 치면서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병구가 끼어들었다. “우리가 이 빌라지에 온 건 어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아보려고 온 거예요. 이 세상에 오래 지낸 유령들이 여기엔 많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화가영감은 내 대답을 기다렸었는데 그가 막아버리자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런가?” 그가 못내 그렇게 되물었다.

화가영감이 테이블 위에 둔 서류를 정리했다. 서류에 유령빌라지 이동통로 지도사업 현황이라고 적혀있었다. 그가 종이를 치우며 허릴 숙이자 여러 겹으로 겹친 뱃가죽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살집이 많은 게 아니라 쫙 달라붙는 티셔츠 때문이었다.

그가 이어 말했다. “난 대략 200년 동안 이 세상에 있었다네.”

200년 전이면 조선시대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행색을 보면 200년 후의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고 해도 충분히 믿을 만했다.

용희가 내 귀에다 대고 거의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생전에 양반은 아니었을 거야.”

정조임금 14, 그러니까 순조임금께서 태어나신 그 해에 난 죽었지. , 그건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어쨌든 그렇게 오래 지냈다네. 하지만 나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화가영감이 손으로 뭔가를 그렸다.

다들 차 한 잔씩 하게나.”

그리고 기운을 불어넣었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홍차였다.

내가 200년이란 세월동안 이 세상에 지낸 이유는…….” 그는 두 눈을 스르르 감고 찻잔에 입술을 갖다 댔다.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보였다. 모두가 조용히 그의 눈과 입을 주시했다. 그가 홍차를 후루룩 마시며 눈을 뜨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유리찻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창피하지만 나는 심판이 두렵기 때문일세. 나는 이전에 큰 실수를 저질렀네. 언제 어둠에 잡혀먹을 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 머무르는 이유는 심판이네. 다른 몇몇 유령들도 그럴 거야. 인간의 본능적인 심리지 않을까 싶네. 불이 난 고층건물에서 타죽지 않기 위해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행위라고 설명하고 싶네.”

무슨 실수를 저지르셨는데요?”병구가 대뜸 물었다.

화가영감은 잠시 말없이 찻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뒤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도화서의 화원이었네. 쉽게 말하자면 궁중화가란 말이지.”

나는 벽에 걸린 괴상한 산수화를 보았다.

난 이름 없는 평범한 화원이었네. 최고상궁의 병풍 따위를 그려주던 위치였지. 동시대에 오무명이란 화가가 있었네. 도화서에 있는 자들이라면 그 이름은 몰라도 그의 그림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 이유는 서양화법으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라네.”

그 시대에 그런 화법으로 그림을 그렸다고요?” 용희의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빛났다.

그렇다네. 난파된 배에서 발견된 그림 한 점을 보고는 그렇게 그리기 시작했다고 했지. 하지만 그 시대에 그런 화법은 저질 중에 저질이었다네. 여백이 없는 그림은 과장 중의 과장이었고, 색감이 화려한 것은 사치 중의 사치였으니까! 어쨌든 그는 절대 인정을 받을 수가 없었다네. 하지만 뒷거래는 많이 있었지. 색감이 화려하고 아주 사실적이었으니까. 궁중아녀자들이 그의 그림을 좋아했다네. 그 자는 수염 한 터럭, 땀구멍까지 섬세하게 그릴 수 있었어. 돈 꽤나 있는 아녀자들은 직접 청나라 장사치들을 불러 비싼 값에 물감과 캔버스를 사댔고 돈을 대어주며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었네. 그는 그렇게 번 돈으로 생활을 연명하고 그림을 그려나갔어.”

화가영감님은 그 오무명이란 화가랑 친하셨나 봐요?” 내가 물었다.

그가 이마에 힘을 주고 눈썹을 바짝 들어 올리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대답했다. “나는 그의 그림을 좋아한 사람이었다네. 나보다 나이는 어린 친구였지만, 그의 작품은 뛰어났어. 그의 화실이 따로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의 집에 자주 찾아가 그림을 감상하곤 했다네. 하지만 그는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않았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의 그림 몇 점을 보게 되었다네. 아주 끔찍한 그림이었지.” 그의 표정이 한 순간에 어두워졌다. “그 날도 그냥 별 생각 없이 그림이 보고파서 갔던 것뿐이었는데 말일세. 방에 흩어지고 너부러진 그림들은 하나같이 흉측하고 끔찍했다네. 아녀자들이 토막토막 잘려나가고 눈알이 뽑히고 도깨비 같이 생긴 것들이 그 살점을 뜯어먹고 피가 낭자하고! 나는 그 그림을 보는 순간 구역질을 했지. 그런데 하필 그 때, 그 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 걸세. 나는 그와 몇 초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네. 나는 그의 품속에 방금 사람을 찌른 피 묻은 칼이 들어있을 거라고 확신했네. 해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냔 말이야. 내가 도망치려들자 그는 날 붙잡았네. 나는 그를 힘껏 밀쳤지.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어. 내가 너무 늙었던 게지. 그가 말했네. ‘어르신. 제발 가지마세요.’ 참으로 황당했지.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아주 허겁지겁 도망쳤네.”

그의 표정이 격앙되었다. 나는 내 뒤에 누군가 칼을 들고 서서 노려보는 듯 등골이 오싹해졌다. 용희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병구도 바짝 긴장한 듯 보였다.

그 다음날 살인사건이 일어났네. 단순 살인사건이 아니었네. 아녀자들의 시신이 훼손된 채 발견된 걸세! 나는 기겁했어. 그리고 그를 떠올렸지. 나는 그가 범인이라고 생각했네. 망설임 없이 관아에 고발했단 말일세. 그는 집에서 그 끔찍한 그림과 함께 술에 취한 채 발견이 되었고…… 놀랍게도 그의 그림 속 아녀자들과 살해된 아녀자들의 얼굴은 일치했지. 그는 사지가 줄에 묶일 때까지도 자신이 범인이 아니라고 했다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지. 믿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네. 그림 속 아녀자들과 살해당한 아녀자들의 얼굴이 똑같았으니까. 고문을 당하는 그의 비명소리가 내 집까지 들렸네. 그는 이튿날 능지처참 형을 받았지.”

능지처참은 사지가 다 뜯겨져나가는 극형 중의 극형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건 얼마 지나지 않아 살인사건이 또 일어났다는 것일세. 아녀자들이 또 죽어나갔지. 똑같은 수법으로 말일세. 그는 정말 범인이 아니었던 걸세! 하지만 어떻게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냔 말인가!”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홍차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80년 전쯤 난 반실성 양을 만났고 뭔가 알 것 같았네. 그는 그림으로 예언을 했던 것 같네. 결국 난 죄도 없는 사람을 죽게 만들었지. 내가 사람을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그 재능 있는 친구를…….”

병구가 그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잖아요. 그가 범인일지도 모르잖아요. 그 뒤를 이어 모방범죄는 일어날 수 있는 거고. 게다가 그건 어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모방범죄가 아니었네. 진범이 잡혔단 말이네. 막 아녀자를 죽이려드는 진범을 말일세.” 화가영감이 약간 고조된 어조로 말했다. “어찌되었건 난 그런 이유에서 심판을 미뤘고 지금까지 버텨오면서 어둠을 많이 겪었다네.”

어둠을 없앨 방법이 있나요?” 병구가 기대에 찬 눈동자로 그를 보며 물었다.

그의 기대를 뭉그러뜨리려는 듯 재빨리 대답했다. “안타깝지만 그럴 방법은 없는 것 같네. 우린 피할 수밖에 없어. 이렇게 이 세상의 부유물처럼 지내면서 나는 안 가본 곳이 없네. 바티칸에 가서 교황의 성수를 훔쳐다가 어둠에 뿌려보기도 했고, 네팔에서 악귀를 쫓는다는 부적을 구해다가 던져보기도 했고, 인도의 고 사찰에서 불경을 훔쳐다가 외워보기도 했다네. 그것뿐만이 아닐세!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유명한 심령술사를 찾아가 물어보기도 했어.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생짜 중의 생짜였네. 해보지 않은 것이 없다네. 별의 별 짓을 다했단 말일세.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지. 어둠은 바퀴벌레보다 더 한 불멸의 존재일세.”

병구의 표정이 먹구름 낀 겨울하늘처럼 어두워졌다.

내가 물었다. “그 어둠들 말이에요. 땅 속에서 나타나던데…… 그럼 지하세계 같은 곳이 존재하나요?”

가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보네. 우린 이미 그곳을 알고 있지. 살아생전에 나도 많이 들었다네. 지옥이 바로 그곳이지.”

나는 병구를 곧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몸 안에서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바들바들 떨었다. “그럼 우리 아버지가 지금 지옥에 있단 말이에요?” 병구가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채 소리쳤다.

깜빡 졸았던 반실성이 자지러지며 테이블에 머리를 쾅 박았다.

화가영감이 반실성이 쏟은 홍차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어둠에 잡아먹힌 겐가? 안타깝네만 그렇게밖에 추측할 수가 없다네. 저런 끔찍한 존재가 어디서 나오겠는가? 지옥뿐이 없다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지만…….”

그만하세요!” 병구는 정말 크게 화를 냈다. “잡아먹힌 걸로 족하다고요! 지옥에 있다니…… 고통밖에 없는 그런 곳에 우리 아버지가 있을 리가 없다고요! 차라리 어둠의 뱃속에 녹아버린 게 낫다고요!”

그는 부들부들 떨며 반실성과 화가영감을 노려보곤 밖으로 뛰쳐나갔다. 용희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뒤따라 나섰다.

화가영감이 찻잔을 들고서 덤덤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가보게나. 다음에 보세. 살아있는 사람이여.” 반실성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홱홱 돌리기만 했다.

나는 그곳에서 나왔다. 병구와 용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병구가 걱정되었다. 그를 생각하면 가슴 언저리에 덩어리 같은 것이 묵직하게 걸렸다. 땅에 발이 닿고 더 이상 종이비행기가 필요 없단 생각을 하자마자 순식간에 내 손바닥만 하게 줄어들었다.

나는 유령빌라지 밖으로 나갔다. 아무생각 없이 걸어 나온 바람에 깜짝 놀랐지만 학교는 여전히 수업 중이었고, 매점주인도 재고정리 중인지라 다행히도 날 보지 못했다.

느릿느릿 짙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유령빌라지에선 느낄 수 없는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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