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여보세요?”

낭랑한 목소리의 여임이가 받을 줄 알고 잔뜩 기대했는데 냉랭한 목소리의 여자가 받기에 살짝 위축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리안이라고 하는데요. 여임이 있나요?” 나는 최대한 예의바르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렴. 여임아!” 그녀는 수화기도 막지 않은 채 크게 소리쳐 불렀다.

! 엄마!”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임이의 엄마였다. 예전에 한 번 봤던 기억이 났다. 그녀는 샤넬풍의 까만 원피스를 입고 짧은 머리칼을 귀 뒤로 쫙 넘겨 빗었는데 아무리 인사를 해도 그 머리칼이 흘러내리질 않았다.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걸어가는 그 자태가 어찌나 꼿꼿한 지 다른 학부형뿐만 아니라 선생님들조차 그녀를 대하는 것이 어려워보였다.

네 전화다! 길게 하지 말고 빨리 끊으렴.”

아직 받지도 않은 전화를 빨리 끊으라고 말하다니! 나는 기분이 퍽 상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나는 반가움에 절로 미소가 번졌다.

여임아! 나 리안이야!”

정말? 정말 리안이야?”

여임이의 반색하는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기분이 좋아졌다. “! 그 동안 잘 지냈어?”

잘 지냈어. 싱가포르에서 며칠 전에 막 도착했어. 그 때 너 병원에 있을 때 만나러 몇 번 찾아갔었는데, 네가 의식이 없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 싱가포르에 가서 너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친구들 전화번호를 적은 수첩을 잃어버렸지 뭐야.”

나는 포크로 사과를 콕콕 찌르며 말했다. “병문안 온 반 애들한테서 네 이야기 들었어. 너 싱가포르에 갔다고. 지금이라도 연락 줘서 고마워. 그리고 신경 쓰지 마. 미안해 할 필요 없어.”

그래.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고!”

내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번졌다. “그럼 너 여기서 계속 사는 거야?”

. 당분간 떠날 일은 없을 것 같아.”

학교는? 언덕길중학교? 아님 다른 데 다녀?”

다른 데 다녀. 한 국립 예술중학교에 다니고 있어.”

한 국립 예술중학교? 한 국립 예술중학교! 전국 14살에서 16살까지의 예술 수재들만 모인다는 그 명문 중학교?!

멋지다!”

?”

병구가 벽에서 슬그머니 나왔다.

사고 이후로는 학교에 못 갔어. 수술도 많이 했고, 3년간 안 보였었거든. 그것 때문에…….”

여임이가 내 말을 자르고 화들짝 놀란 어조로 물었다. “정말? 앞이 안 보였어?”

지금은 다 보여. 놀랄 정도로 다 보여. 전부 다병구가 딸기를 손가락으로 만져보려 애를 쓰는 걸보면서 대답했다.

미안. 내가 너무 생각 없이 물었네.”

아냐. 곧 다닐 거야. 다녀야지. 학교에.”말이 뒤죽박죽 섞여 나왔다.

멀리서 여임이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여임아! 미술선생님 오셨어! 얼른 전화 끊으렴!’여임이가 급하게 수화기를 막았는데 그 소리까지 다 들렸다.

여임이가 다급하게 물었다. “미안. 너 예전 그 집에 살고 있니?”

. 그대로야. 너 바쁜 거 아니니?”

미안. 미술선생님 오셨어. 리안아. 자세한 이야기는 우리 만나서 하자. 괜찮지?”

나는 내가 푹푹 찔러놓은 사과가 점점 갈색으로 변한 걸 보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래. 안녕.”

. 안녕.”

전화가 뚝 끊겼다. 거센 바람이 날 훅 밀치고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뭔가 씁쓸하기도 했다.

병구가 물었다. “그 친구야? 반장이라던? 마녀임? 아니, 마여임?”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노인과 바다 맨 앞장을 펼쳤다. 맨 앞장은 빈 종이였는데, 나는 연필로 여임이의 얼굴을 그렸다. 반가움과 흥분이 여전히 가슴속에 남아있었지만, 한 줄기의 우울함이 넝쿨줄기처럼 뻗어 나와 그 기분을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달걀 같은 예쁜 두상에 발레리나 같이 가느다란 체형에 시원한 하늘색 모슬린원피스가 잘 어울렸던 여임이. 수업 도중 창 너머의 풍경을 무심하니 바라보던 묘한 표정, 그리고 그녀에게서만 나는 독특한 향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여임이가 부러웠다.

병구가 옆으로 다가와 나직이 물었다. “왜 그래?”

그냥…….” 나는 풀이 죽어버렸다.

병구가 그림을 슬쩍 보았다. “너 그림 잘 그리네.”

내가?”

나는 눈을 크게 몇 번 깜빡이고 내 스케치를 가만히 살폈다. 창밖을 바라보던 여임이의 옆모습이었다. 그렇게 못 그린 건 아니었지만 뛰어나게 잘 그린 것 같지도 않았다. 여임이는 내가 그린 이 그림보다 훨씬 더 예뻤다. 그가 그냥 내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그렇게 말한 것 같았다.

병구가 허공을 날다가 갑자기 시합을 청했다. 내 기분을 풀어주고픈 모양이었다.

누가 먼저 더 웃긴 걸 만들어내는지 시합하는 거야. 너는 그리고 나는 만들고. 어때?”

나는 머뭇거리다 승낙했다. “……좋아!”

나는 연필로 그림을 그렸고, 병구는 손가락으로 그려서 만들었다. 왠지 모를 승부욕이 생겨 열심히 그렸지만, 머리가 반쯤 벗겨진 뚱보 아저씨의 머리카락을 쥐가 먹어 치우는 그림이 으깬 토마토 무더기에서 코브라가 스멀스멀 기어 나와 춤을 추다 날름거리는 혀 대신 스파게티 면을 뿜어내는 데엔 이길 수가 없었다. 나중에 그는 한 가지 더 만들어냈는데, 원숭이 콧구멍에서 폭죽이 번갈아 튀어나와 빵빵 터지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시합이란 건 알고 있었기에 나는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다. 그렇게 웃고 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병구가 벽시계를 흘끔 쳐다보았다. 오후 410분이었다.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병구가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보려 전화기를 만들려는 그 때, 벽시계에서 시꺼먼 머리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고개를 휙 쳐들었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는데 좀 전에 콧구멍으로 폭죽을 터뜨리던 원숭이가 낼 법한 소리였다.

병구가 위로 붕 날아올랐다. 그의 유령친구는 왼쪽 눈이 가려질 정도로 긴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고, 둥그런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매는 아래로 축 쳐져서 마냥 웃고 있는 듯이 보였고 코는 마늘 두 쪽을 붙여놓은 것처럼 작았다. 그는 병구를 향해 잇몸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씩 웃었다. 그는 곰팡이 색과 비슷한 초록색 티셔츠에 정강이가 반쯤 보이는 청색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고 기다란 보라색 줄무늬 양말을 신고 나무껍데기로 만든 것 같은 회갈색 신발을 신고 있었다.

병구야!”

용희야!”

병구는 용희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찬찬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날 소개시켰다. 날 보자 장난기 가득한 용희의 표정이 한 순간에 석고상처럼 굳어졌다. 나는 마치 크게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왼쪽 눈을 가리던 머리카락까지 들추며 날 뚫어져라 보았다. 작을 줄 알았던 눈이 생각보다 꽤 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얘한테는 잡귀신도 안 붙어 있잖아!” 그가 내 주위를 빙빙 돌았다.

병구가 말했다. “우릴 볼 수 있는 사람들한테 잡귀신이 달라붙어 있다고 했었지? 그 말이야.”

그가 활짝 눈웃음을 지으며 내가 잘 듣지 못하는 냥 크게 소리쳤다. “우와! 너 들을 수도 있네! 반갑다. 내 이름은 조용희! 너무 시끄럽게 울어대서 계부가 조용히 좀 하라고 조용희라고 지었대! 계부 성이 조 씨거든!”

난 이리안. 작게 말해도 다 들려.”

용희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병구가 재촉했다. “용희야. 어서 가보자. 유령빌라지에.”

용희가 멜빵바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게 뭐야?” 내가 물었다.

이 근방에 있는 유령빌라지를 가리켜줄 거야. 유령빌라지를 가리켜주는 일종의 나침반?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병구가 손을 내밀자 그가 그 나침반을 건네며 이어 설명했다. “이건 우리가 만들 수는 없는 거야. 유령빌라지 나침반을 만들어주는 장인들이 몇몇 있어. 난 스위스에서 샀어. 스위스 장인들이 정말 잘 만들거든. 구하기 힘들어. 정말이야.”

병구가 다시 용희에게 건넸다.

그건 얼마니?” 내가 물었다.

우린 돈 같은 건 필요 없어. 대신 대가를 지불해야해. 심부름이라든지, 청소라든지 그런 잡일을 해주는 거지. 뭐 시킬 게 없으면 공짜로 주기도 해. 나는 불고기를 갖다 바쳐야 했지. 불고기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맛이 없다고 몇 번이나 퇴짜를 놓았어! 정말 만드는데 애를 먹었지. 어떻게 만드는지 잘 모르니까.” 그가 막 투덜거렸다.

그는 나침반 같다고 설명했지만 내 눈엔 새우 표본 같았다. 까맣고 동그란 플라스틱 재질로 보이는 받침대에 은으로 도금 된 것 같은 새우가 아주 가느다란 바늘에 꽂인 채 있었다. 용희가 새우 등딱지를 툭 건드리자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곧 새우의 등껍질에 2.1이라는 숫자가 나타났고, 새우의 뾰족한 주둥이가 북쪽을 가리켰다.

그 스위스 장인이 새우를 좋아해서 새우모양으로 만든 거야. 치즈모양보단 새우모양이 낫더라고.”

용희는 그렇게 말하면서 벽을 통과해서 가려 했다. 병구가 그를 잡았다. 용희는 벽에 집어넣었던 다리를 쑥 빼내고 날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이다 방향을 틀어 방문으로 향했다.

여기서 멀어?” 내가 물었다.

용희가 새우를 내 눈앞에 들이밀며 답했다. “2.1km거리야. 여기 등껍질 보면 알 수 있잖아.”

그럼 우리 동네에도 유령 빌라지가 있다는 거야?”

용희가 말했다. “동네마다 다 있는 건 아니야. 우리도 살아있는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서 지낼 곳이 필요해. 혼자만의 공간이 없다면 얼마나 피곤하겠어? 덧붙여 설명하자면, 유령빌라지는 유목민족들의 집처럼 그 자리에 생겼다가 없어질 수도 있어. 대개는 계속 존재하지만 그 규모가 작은 곳은 없어지기도 하지. 그냥 쉽게 심판 받기 전까지 묵는 유령들만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돼. 물론 심판을 받지 않고 이 세상에 계속 있는 건 위험한 일이야. 어둠에 뜯겨 먹히면 그걸로 끝이니까. 어둠이 습격할 때도 있어. 누 떼가 사자에 습격당할 때처럼.”

거기도 위험하긴 마찬가지구나.” 내가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어둠에게 당하는 유령들은 대개 어둠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막 죽어서 육신을 빠져 나온 영혼들이나 힘없는 유령들이야.”

그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물었다.

일정거리를 유지하는 게 전부지. 놈들은 저 깊숙한 지하에서부터 올라오거든. 미약하지만 땅이 흔들흔들하는 게 느껴져.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느끼지 못해. 내가 알기론 그래. 어둠은 사람에게 물리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말이야. 정신적인 영향은 끼치지. 악한 마음을 조종하는 경우가 그 중 하나야. 살인, 강도 그런 범죄를 일으키게끔 말이야.”

이상했다. 어둠의 혓바닥이 내 허벅지와 종아리를 찰싹 달라붙으면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상처부위가 거뭇거뭇해진 것을 보았다. 내가 반박했다. “하지만 그 때 난 다쳤어. 상처를 입었는걸.”

병구가 고개를 휙 돌려 날 쳐다보았다. 용희의 입이 떡 하니 벌어졌다. 내가 상처를 가리켰다. 그들은 그제야 내 다리에 생긴 상처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병구가 흥분한 어조로 물었다. “언제? 설마 그 때? 나 막아줬던 그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구는 사뭇 진지한 어른스런 표정을 지으며 용희를 바라보았다. 용희가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긴 앞머리가 턱까지 내려오고 안경도 콧등 아래로 내려왔다. 그가 콧등 위로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했다. “넌 어둠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어떤 힘이 있나 봐. 아까도 말했다시피 어둠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하지만 물리적인 영향은 절대 미칠 수가 없지.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야. 우린 그들을 영혼 포식자라고도 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으으, 갑자기 머리가 아프네.” 용희가 머리를 막 흔들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어둠의 공격으로 상처가 생겼다는 건, 바꿔 말하면 넌 죽었다는 말인데, 근데 그건 아니잖아?”

나는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티슈 한 장을 뽑아들어 내 코 아래 두었다. 병구와 용희는 티슈가 팔락이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용희가 눈웃음을 지으며 결론을 내렸다. “네가 그렇게 다친 이유는 모르겠지만, 넌 특별한 것 같아.”

왠지 김이 빠졌다.

너한테 각막을 제공해준 사람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그 사람도 유령을 볼 수 있었다거나.” 병구는 그렇게 묻곤 양 손으로 머리를 헝클였다가 다시 쭈뼛 세워 올렸다.

모르겠어. 하지만 사고가 일어난 이후에 너희들을 볼 수 있게 된 건 확실해.”

맨 처음으로 본 유령 기억나?” 병구가 물었다.

. 노인이었어. 횡단보도에서 봤었어. 날 통과했고…….”

병구와 용희는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계속해서 설명했다. “노인을 보기 전에 번개가 내리쳤어. 눈이 엄청 부셨고 그 뒤로 그 노인 유령을 보았지.”

이유는 우리도 모르겠어. 일단 유령빌라지에 가보자. 묻는 것만큼 빠른 건 없으니까.” 용희가 말했다.

용희가 방문을 통과해 나갔다. 시계는 벌써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병구와 함께 우린 서둘러 집을 나섰다.

태양은 시들어가는 붉은 꽃처럼 뒷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우리는 언덕길초등학교 방향으로 향했다. 하교를 하는 중학생들이 무리지어 반대방향에서 내려왔다. 은색 새우가 가리키는 방향은 계속해서 북쪽이었다. 우리는 빵가게, 태권도 도장, 해물칼국수식당, 슈퍼마켓, 등산복매장, 서점, 파출소, 버스정류장을 지났다. 이 방향은 계속해서 등굣길이었다. 설마 했는데 새우는 꼼짝 않고 계속해서 북쪽을 가리키다 사고가 났던 횡단보도 앞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설마 했는데 새우가 가리킨 곳은 언덕길초등학교였다. 나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고 바짝 긴장했다. 차들이 씽씽 지나가는데도 용희는 아랑곳 않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곧 신호가 바뀌었다. 두려움이 땅 속에 묻혀있던 좀비 손처럼 튀어나와 나를 붙들었다. 그렇게 긴장하니 헛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횡단보도의 흰 선과 검은 선이 뱀으로 변해 날카로운 독니를 드러내고 내가 움직이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병구와 눈이 마주쳤다. 병구가 가까이 다가왔다. 이겨내고 싶었지만 두려움이 너무 컸다.

왜 그래?” 그가 내 눈동자를 살피며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얼굴이 창백해.”

병구가 걱정스런 눈길로 날 바라보았다.

나는 힘겹게 말했다. “여기서 오토바이에 부딪혔었어.”

병구가 당혹스러운 듯 말없이 날 보다가 용희에게 돌아오라고 손짓을 했다. 용희가 소리치며 되돌아왔다. “무슨 일인데?”

병구가 용희에게 사고에 대해 설명했다. 용희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갑자기 위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두리번거렸다. 그가 다시 아래로 내려와 말했다. “저기 얼마 안가서 육교가 있어. 육교로 가자.”

병구가 횡단보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내게 작은 음성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곳만 보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차들이 빵빵거리는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며 인도 안쪽으로 바짝 붙어 서서 걸었다. 우리는 육교를 건넜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학교정문에 다다랐을 쯤 나는 은색 새우를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런데 새우가 대가리를 위로 번쩍 세우더니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래?” 내가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이 근처에 있다는 거야.” 용희가 주위를 둘러보며 대답했다.

언덕길초등학교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암적색 정문을 중심으로 담벼락이 높게 솟아있었고 담벼락엔 온갖 동물들을 그려놓은 벽화가 있었는데 세월에 퇴색되어있었다. 담벼락 안쪽엔 뻣뻣한 풀들과 노랗고, 하얗고, 빨갛게 흐드러진 꽃들이 피어있었고 꽃과 풀 사이사이엔 밟지 마세요, 라는 하얀색 팻말이 꽂혀있었다. 바람에 실린 달달한 꽃향기에 긴장이 살짝 풀렸다. 운동장 가엔 철봉이 줄지어 세워져있었고, 곳곳에 구름다리, 정글짐, 미끄럼틀이 놓여있었다.

병구와 용희가 학교건물 높이보다 더 높이 날아올랐다. 그들이 동시에저기 있다!’라고 소리치며 한 곳을 가리켰다. 학교건물 뒤편이었다. 건물 뒤편엔 매점이 있었는데, 쉬는 시간이면 핫도그나 빵이나 사탕을 사먹는 아이들로 북적였다. 저 곳에 유령빌라지가 있었다니…….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기가 입구야!” 용희가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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