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2006.03.26 18:4203.26


흰 광풍이, 세상을 가득 휩쓸었다.

*

사내가 출발 할 때 까지만 해도, 하늘은 티끌 한 점 없이 맑았다. 정말 그랬다. 정오에서 약간 더 기울어진 태양은 여느때와 다름 없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목적지는 멀었지만, 하루 하고 반나절 정도면 충분히 닿을 거리였기에 그는 별다른 걱정 마저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걸었다. 서두르지 않고, 여유로이 걸음을 즐겼다. 바람은 상쾌했다. 약간 서늘한, 겨울의 태양도 좋았다. 풀빛을 잃은 풀과, 나무는, 싸늘하고, 높은 하늘과 어울려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걸음걸음 바스라이 부숴지는 흙내음은 그의 흔적이 되어 오래 머물렀다. 모든 겨울이 그의 여정을 축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양이 하늘을 하얗게 태우며 져갈 즈음에, 그는 한 움막을 보았다. 이미 짙게 깔려가는 땅거미 속에서, 푸르슴하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 딱 봐도 그와 같은 여행자를 위한 장소인 듯 했다. 그러나 그는 선뜻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시간은 넉넉했다. 딱히 빨리 가야할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이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여유있게 걸어오던 그였잖은가. 그러던 중, 그가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렇게 맑던 하늘에는 언제 온지 모를 구름들이 듬성듬성 묻어 있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는, 이제야 결심 한 듯 타박타박 움막을 향해 걸어갔다.

그를 재촉한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 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을 죄어오는 땅거미 였을 수도 있고, 괜히 한번도 쉬지 않고 목적지까지 다다르고 싶다는, 그런 조그만 호승심이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청아한 겨울의 하늘을 뒤덮은 기분 나쁜 잿빛 구름에 초초해 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됬건, 결국 그는 움막에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마치 원래부터 그런 용도인 양 마루 밑에 소복히 쌓여있는 흙을 한 줌 집어, 깊이 들이마쉬고- 또 조금은 입에 넣어 오독오독 씹기도 하였다. 그리고도 무엇이 아쉬운지 몇번인가 뒤를 돌아보기는 했지만, 그래도 끝내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다시 걸었다. 아까의 머뭇거림이 후회라도 되는 듯 한, 조급한 발걸음 이었다. 시간은 이미 흘러, 간신히 다음 걸음을 내딛 을 수 있을 뿐 다음은 끝없이 적막한 어둠 뿐이었다. 태양이 빛나던 하늘도, 별하나 보이지 않고, 다만 아까의 태양보다 수만배나 차가운 하얀 달이- 그를 조용히 내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조소에도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그런 것들 보다는 훨씬 덜 무서운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감촉을 의심했다.

차갑고, 작고, 어느 곳에라도 닿으면 금방 녹아버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 어떤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기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눈이었다.

사내는 당황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곳의 날씨는 대체로 편안하지만, 한번 뒤틀어지기만 하면 세상의 그 어떤 곳 보다도 격하고 위험해 진다. 그의 마음 속에, 최초의 두려움이 얼핏 비쳤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자신 조차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가 위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만약 아까의 움집에서 머무렀다면, 그는 또 며칠이란 시간을 지체해야만 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방 안에만 틀어박혀 날이 개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아무래도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 그는 걷고있다. 목적지를 향해서. 그는 그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아니, 최소한 사내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이 끝도 어둠 속에선, 시간 마저 정지해 버린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어둠을 밟으며 나아갔다. 조금씩 내리던 눈은, 어느새 눈을 뜨기가 어려울 정도로 거세어져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 속을 걸어가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그가 지금 걷고 있는, 자신의 손바닥 조차도 보이지 않는 이 어둠은, 원초적인 두려움을 넘어, 그보다 더욱 깊숙한 정신에 마저도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는 단지 '걷고' 있었을 뿐이기에 버틸 수 있었지만, 만약 그가 어둠을 견디기 위해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했었다면, 그는 이미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단단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그라 하더라도, 이런 어둠 속을 걸으며 눈보라까지 무사히 견뎌낼 수는 없었다. 그의 몸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그가 빛을 찾은 것은.

그래, 빛이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언젠가 갑자기 달이 사라져버린 그 때 부터 계속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단지 그것을 '문득' 발견했을 뿐이고, 그럼에도 헤아릴 수 없이 기뻤다. 그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빛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빛은 높은 언덕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고, 이 언덕을 넘으면 이것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많은 빛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아니, 어쩌면 바로 이 언덕 뒤에, 그가 그토록 원하는 목적지가 있을지도 몰랐다. 사내의 마음은 설렘과 희열로 가득 찼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었다.

*

그를 처음 맞이한 건,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빛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단순히 극히 미미한 여명의 흔적일 뿐이었지만, 온 천지에 덮힌 눈 덕분에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한 그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한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두번째는, 여태껏 그가 한번도 상상해 본 적 조차 없는 강풍이었다. 이 전까진, 이 거대한 언덕이 이 바람을 막아서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는 지금 그 언덕의 끝에 서 있는 것이다. 바람은 밀어낸다기 보다 차라리 할퀸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 거친 발톱에 찢겨진 세상이 울부짖는 소리가 섬뜩하리만치 사실적이었다.

그리고 세번째는…….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이 그를 맞았다.

간신히 빛에 익숙해져 앞을 바라본 그는, 말 그대로 감격하고 말았다. 세상은, 눈보라가 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새하얬다. 눈이 내린다는 것을 인식하기 조차 어려울 만큼 엄청난 눈보라였다. 아니, 눈보라 보다는 차라리 눈의 폭포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끝없이 아득한 지평선 위로 눈의 폭포가 격렬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폭포에 가장 깊숙한 기억까지 묻혀버린 대지……. 그 초 자연적인 광경이 역설적으로 그에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고야 그는 다시 걸었다. 이미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지옥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두려우면 두려울 수록,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 수록 그는 오히려 기뻤다. 전혀근거 없었지만,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련이라는 괴이한 확신이 든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확신이 들었다고 생각한 순간, 또 어쩌면 절대로 이 시련을 견뎌낼 수 없을것만 같은 절망감 역시 스멀스멀 차올랐던 것이다.

그러면 그는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는 태양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태양은 커녕 머리 위의 하늘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어마어마한 폭설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눈은 하늘을 가렸다. 하늘을 가리고, 태양을 가리고, 빛을 가렸다. 그가 하늘을 볼 수 없었던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끝없이 쏟아지는 눈 말고는 그 어떤것도 볼 수 없었다. 빛을 가린 눈은, 희기보다 오히려 검었다. 아까는 그렇게 밝다고 생각했던 빛은, 어느새 그 눈에 가려 꺼져가고 있었다.  그는 이 검은 눈이 태양을, 그리고 빛을 얼려 버렸는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혹한 속에서, 그는 어떤 광경을 목격했다.

새하얀 은빛 가루가 부숴져 흩날리고 있었다.

그는 맹세코 단 한번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어떤 거대한 유리 동상이 고운 가루로 부숴져 흩날리는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나무였다. 뼈만 남은 앙상한 나무에, 순식간에 눈이 쌓이고, 또 날아가며 쉬지않고 새하얀 눈을 흩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수십그루의 나무가, 그렇게 새하얗게 부숴지고 있었다. 그것에는 아까의 웅장함과는 또 다른 애틋함이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서서 나무를 바라 보았다.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생각은 어느새 잊혀지고 말았다. 계속해 걸어야 한다는 생각도 더이상 들지 않았다. 문득 속에서 무언가 울컥 하는 기분이 들어, 그는 하늘을 올려 보았다.

하늘은 여전히 끝도 없이 검었다.


검었다.

검었다.

검었다.


그래서 그는 웃을 수 있었다.












--------


에...

마감 직전의 단편...-_-;
댓글 1
  • No Profile
    배명훈 06.03.27 11:02 댓글 수정 삭제
    목적을 알 수 없는 걷기. 그것도 아주 힘들게 걷기. 등장인물도 한 사람. 그런 단칼에 베는 듯한 간결한 미학이 좋았는데요. 그런데... 뭘 베었는지는 잘... 전달이... 잘못 읽은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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