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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 (askalai@gmail.com)




신화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끼리 엘리아데의 [성과 속](미르치아 엘리아데/이은봉, 한길사, 1998년 5월)을 읽고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서로 엇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지식을 지닌 친구들이었던 만큼, 명확한 결론을 얻어낸다기보다는 부담없이 자기 생각을 확인하고 남의 생각을 듣는 난상 토론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처 신화와 종교가 왜 존재하는가에 끈질기게 매달리던 친구 하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역시 난, 신화나 종교는 다 죽음 때문에 생기는 거라고 봐.’

그 말에는 부정하기 힘든 진실이 담겨 있다. 사람은 왜 죽는가? 그 질문을 빼고는 우리가 왜 사는가를 물을 수 없다. 죽음이 항상 우리 곁에 있으며, 동전의 앞뒷면처럼 삶과 붙어있다는 사실은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신은 믿지 않을 수 있지만 죽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 누구도, 죽음이 존재하며, 언제든 우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앗아갈 수 있음을 안다. 죽음을 내세로 가는 통로로 여기는 이도 있고,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죽은 혼이 귀신이 된다고 믿는 이도 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은 죽음이 어떤 것인지 판단을 내려야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처음 경험한 순간부터.

아, 거창한 이야기는 그만두자. 내가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려고 생각한 것은 죽음에 대한 철학을 구구절절 풀어보려고 한 게 아니다. 그저 이 책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것 뿐이다. 죽음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며, 또 저들에게는, 또 그들에게는 어떤 현상인가? 사람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죽음을 경험한다. 죽음의 순간만큼 인간성의, 그리고 문화의 본질을 드러내는 순간은 달리 없다. 인류학자들은 현지조사기간에 마을에서 장례식이 치뤄지면 운이 좋았다고 여긴다. 현지인들에게 불길한 일을 좋아하는 까마귀라고 불린대도 변명할 여지가 없겠지만, 장례식이라는 절차 자체에 관심이 있지 않더라도 장례식만큼 마을 사람들간의 인간 관계가 뚜렷이 드러날 때가 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죽음만큼 삶을 잘 비추는 거울은 없다는 말이다.



[죽음의 얼굴](니겔 발리/고양성, 예문, 2001년 7월)―――개인적으로는 ‘무덤에서 춤추기(Dancing on the Grave)’라는 원제가 더 마음에 들지만―――은 어찌 보면 잡기에 가까운 짤막짤막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다. 저자가 조사 중에 직접 겪었던 에피소드를 나직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저명한 학자의 근엄한 진술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죽음의 기원에 대한 동화같은 신화들이 나오고 뒤이어 신문에 실린 기사 한토막이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과거에서 현재, 미국에서 아프리카까지 온갖 시간과 장소를 넘나들며 죽음을 둘러싼 삶의 조각들이 진열되어 있다. 그것이 이 책이다. 죽음에 대한 다양하고 풍성한 기록들. 그리고 그것은 학자들과는 무관하게 다른 이들의 생각과 내 생각을 들여다보는 재미를 준다.

수필과 기획 기사 중간쯤 위치한 듯한 애매함이나 산만한 구성이 딱 마음에 차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처럼 죽음의 존재를 부정하고 삶에서 밀어내려 하는 시대에 이런 책 한권쯤 봐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차례
1. 죽음, 그 필연과 보편
2. 사실 이전과 사실 이후
3. 죽음의 신화적 공산
4.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
5. 살과 피
6. 정치적 죽음
7. 죽음의 시간과 장소, 무덤
8. 죽음의 메타포
9. 요람에서 무덤까지
10. 전쟁, 살인, 사형
11. 죽음과 도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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