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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에서의 모든 문제의식은 작중에서는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나, 그것이 무엇이든 시작은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고민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의도론적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해도, 작품 읽기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 예로, 여기 <<할티노>>라는 매력적인 단편선에 들어있는 치열한 고민들은, 그 작가인 은림이 여성이기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세상은 지독하게도 언제나 내가 여자라는 걸 일깨워 주었다'고 후기에 밝히고 있다. 그러한 자각과 성찰의 질곡을 거친 은림은 이제 그 특유의 이야기솜씨로 우리에게 자신의 사유의 세계를 들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은림의 이 이야기들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일깨우고' 있는 것일까.



  1.

   은림의 시선은 연민과 서정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더없이 냉철하다. 은림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여성들은 타자와의 특정한 관계 속에서 사랑하고, 상처받고, 이별하고, 배신당하고, 갈등하고, 삶과 죽음을 바라본다. 동화적인 환상에 깃든 그 이야기들은 얼핏 그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담론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그들만의 동화, 전설, 로맨스가 아니며, 더 나아가 그들과 얽힌 세계와 그 구조, 에피스테메와 밀접히 결부되어있다. 이를테면, 은림이 그리는 여성은 흔히 연인인 남성에게서 배신당한다. <얼음공주>의 이세가 노마에게 그랬고, <이상한 무도회>의 닐라와 민트가 선박왕 크루에게, <할티노>의 네블라인이 베트레이에게 그러했다. 그러나 이 여성들은 단순히 자신의 비극적 로맨스를 독자들에게 토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들과 그녀들의 삶은 그 자체로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의 권력구조를 선명하게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 여성들이 성적으로 억압된 문화 속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남성에게 억압당하거나 굴욕당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상한 무도회>의 닐라는 자신을 구원해줄 왕자님과도 같은 존재인 크루에 대한 달콤한 사랑의 환상에 젖고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여리여리한 몸매, 부드럽고 창백한 피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스스로 '사육당한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끔찍한 파멸뿐이다. <밤의 연상>의 라트리가 마족과 가지는 위태로운 관계는 여성이 남성과의 폭력적 관계에서 가지는 모멸감과 상실감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할티노>의 네블라인이 베트레이에게 배신당하는 과정에서 그녀 자신은 역사의 뒤안으로 묻히고 베트레이는 영웅왕으로 추앙받으며 승자이자 정의로서 기록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가 배제된 사회와 역사의 권력구조를 확인하기도 한다. 또한 <이상한 무도회>, <낙오자>, <할머니 나무>에 이르기까지, 여성은 학문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있음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할머니 나무>에서는, 주인공을 비롯한 그 가계의 여성들이 늙어서 나무로 변하게 되면서 '소리 없는 느낌표로 세상과 맞닿아' 호흡하며 한 그루의 자연으로서 세계를 인식하고 소통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음봉의 공장단지', 폭력적 '철거', '1mm의 오차도 없는 알루미늄 샷시' 등은 그녀들의 삶의 방식을 위협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차갑게 대립한다. 이는 남성중심적이며 이성중심적, 과학중심적, 주체중심적인 근대적 사유체계를 비판하는 페미니즘적인 목소리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은 에서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2.

   은림의 세계관이 가장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바로 그러한 여성의 사회체계가 180도 전도되는 때이다. 대표적으로, <할티노>의 북쪽나라와 <낙오자>의 세계는 모계혈연사회이고 여성중심사회이다. 이러한 전복은 <이갈리아의 딸들>과 같이 '거꾸로 생각하기'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를 재인식하는 과정과 닮아있는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은림은 다만 그러한 뒤집기에서 멈춰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거기에서 더 나아간다. 세계관의 의도적 전도는 그 자체로 인식의 전환을 꾀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사실상 그 것이 한계일 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권력구조는 정 반대로 답습되거나 다른 유형으로 나타나며, 그 간극에서 나타나는 단절, 몰이해, 괴리는 여전히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은림은 알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력의식과 폭력의 토로가 아닌, 관계의 극복과 올바른 방향성에 대한 고민하고 있다.
   <할티노>의 북쪽나라는 대대로 여왕이 다스리는 국가로, 왕위는 왕녀가 계승하는 것이 전통이다. 그러나 그 남쪽에 있는 나라는 왕이 다스리는 부계사회이다. 이 두 국가의 끈질긴 대립에 대한 은림의 시선은 냉정하며 객관적이다. 양국의 분쟁에 대해 평가하는 네블레인 왕녀의 목소리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남쪽나라 사람들은 북쪽나라 여왕과 국민들이 마녀이며 귀신들린 힘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자신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몰이해를 보여주지만, 그와 동시에 북쪽나라 사람들 역시 남쪽나라 왕을 늙은 고집쟁이라고 생각하며 호전적이라고 폄하한다는 것이다. 두 국가간의 대립은 단순히 국가간의 문제가 아니라 성별 대립으로 확장된다. 서로에 대한 양국 국민의 편견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에 가지는 편견과 너무나도 닮아있다. 여성이 남성으로부터 불합리한 편견으로 재단 당하듯이, 남성 역시 여성에게 별 다를 것 없는 시선을 받고 있다고 역설하는 네블레인 왕녀는, 두 국가의 평화와 화합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남성과 여성의 관계의 개선과 올바른 방향성을 모색한다.
   <낙오자>에서 그러한 고민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낙오자>에서 여성은 권력과 재산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으며 그 후계자 역시 오로지 여성만이 될 수 있다. 여성은 남성을 <그자들>로 이름붙이고 사회의 정당한 일원에서 배제하면서, 그들을 혐오하고 두려워하며 불가해한 존재로 생각한다. 그녀들은 <그자들>로부터 '씨앗'을 받아와 열매를 맺고 후계자를 탄생시키지만, 그 과정에서 결코 <그자들>과 접촉하거나 개인적인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계율을 가지고 있다. 두 성별간의 사랑은 철저히 금기이다.
   그러나 남성의 배제는 그녀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 사회는 일그러져 있고, 그 여성주도적인 구조 속에서 여성들은 스스로 자괴에 빠져든다. 그녀들의 행복은 남성의 부정이나 일방적인 권력 수복이 아니라 서로와의 사랑 속에서 관계를 고민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든과 마일드의 금단의 사랑, 그리고 메이든이 서쪽 신전지기와의 관계 속에서 가지는 갈등은 그러한 과정을 대변하고 있다.



  3.

   그렇다면, 그러한 고민 끝에 은림의 '그녀들'이 선택하는 길은 무엇인가?
   <이상한 무도회>와 <할티노>는 각각 그 해결방식에서 두 극단에 자리하고 있다. <이상한 무도회>의 닐라와 민트는 남성 지배적인 체제 속에서 각각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가지만 결국 선박왕 크루에게 말 그대로 '잡아먹힘'으로써 종말을 맞이한다. <할티노>의 네블레인은 베트레이에게 결국 복수함으로써 그의 배신을 응징한다. 그러나 이 두 방식은 그야말로 극단적이며, 다시 말해 단편적이다. 네블레인이 베트레이에게 건네는 발화는 소통되지 못하며, 베트레이는 여전히 악역으로 남아 네블레인을 끝까지 저주하는 모습을 보인다. 크루 역시 베트레이와 마찬가지로 일방적 악역이다. 그들에게 파멸당하거나 그들을 파멸할 뿐, 관계의 개선 방향은 찾을 수 없는 극적인 비극이다.
   <낙오자>와 <밤의 연상>은 두 작품의 주인공이 모두 자기괴리로 갈등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선상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밤의 연상>의 라트리는 마족을 죽여 버리고 자신이 '여신'이 아니라 '신'이라며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면서 상황을 매듭짓는 자기부정의 패턴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의 고독은 결코 구원받지 못하며 그녀의 선언은 서글픈 어조로 독자의 귓가에 맴돈다. <낙오자>의 메이든은 사회에서 더도 없는 낙오이며, 불명예이자 죽음이고, 나아가 '병'으로 치부되기까지 하는 사랑-이는 동성애가 근대 사회에서 병으로 치부되던 것을 연상케 한다- 속에서 고뇌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든처럼 사회에서는 낙오될지라도 용감하게 자신의 신념을 선택하고 기투하지도 못하고, 사회에서는 성공할지라도 자신의 사랑은 낙오시키는 길을 택하지도 못한 채 괴로워하다가 결국 자멸하는 길을 택한다. '나는 낙오되지 않아'라고 절망적으로 외치면서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낙오'로 이끄는 이러한 메이든의 탈주는 독자에게 짙은 반향을 남긴다.
   <할머니 나무>와 <얼음공주>, <태양을 삼키다>의 방식들은 앞선 작품들과는 다른 성격을 보여준다. <태양을 삼키다>의 주인공은 원희를 죽인다는 점에서 그 양상은 <할티노>와 비슷하기도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를 고찰하고 자신의 존재 방식과 사랑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훨씬 복잡한 통찰을 보여준다. <얼음공주>의 이세는 배신과 갈망의 비극 끝에 물이 되어 녹아버리면서 본래 얼음인 그녀의 정체성이 붕괴되지만, 그 후에 '드라이아이스'라는 제 3의 존재로 거듭나면서 나름의 극복점을 모색한다. <할머니 나무>의 주인공 지혜는 삶과 죽음 그리고 나무가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매우 깊은 통찰을 보여주며,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평온히 정립하고 삶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은림의 목소리는 격정적이면서도 차분하고, 서정적이면서도 냉혹하다. 그 목소리는 일차적으로 여성을 향하고 있지만, 나아가 우리를 둘러싼 세계와 삶, 관계에 대해서 총체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은림의 세계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매혹적인 색채를 띠고 있으며, 독자가 춤출 수 있는 알레고리의 무도회는 무궁무진하다. 그 연회에는 언제나 다양각색의 춤상대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 주최자인 은림은 이제 레이디들에게 그녀들의 젠틀맨을 결정할 권리를 주고 있다. 단, 춤에는 발을 밟거나 밟지 않거나의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엄중히 충고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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