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summer.cats@gmail.com

지나간 시간의 기록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 단편집 2호, 공주를 구하는 것은 언제나 왕자



거, 왜, 읽다보면 희한하게도 옛 기억이 되살아나는 책들이 있잖아요? 책 내용이 옛 일을 기억하라던가 그래서가 아니라, 아 나도 그랬어, 하고 동감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그 책 자체가 그 시간
―――그 시기에만 나올 수 있는 책이었기 때문에, 그 책 자체가 그 시기에 속해있는 책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시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거요. 그건 책 자체의 매력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한계가 되기도 하는 거겠죠.

그러니까, 이 책, 환타지 동호회에서 낸 단편집 2호 말이죠. [공주를 구하는 것은 언제나 왕자]를 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1998년, 드래곤 라자의 출간이 생각나고 드래곤 라자가 생각나기 시작하면 그 이후로 우후죽순 쏟아지기 시작한 장편들의 출간이 생각나고, 그게 생각나기 시작하면 또 한없이―――완결되지 않아서 가슴만 치며 하드디스크에 쟁여두다가 포맷으로 잃어버린 작품들이 생각나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 때가 생각나는 거예요. 통신소설의 출간이 아직은 다소 낯설기 때문에 작가도 약간은 흥분되어 출간을 독자에게 알리고, 독자 역시 덩달아 흥분했던 그 초기. 98년, 99년의 그 막 붐이 시작되어 새로운 장르가 통속소설로 진입하려던 그 초기 말이죠.

이 큼직한 단편집은 그 때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책처럼 보여요. 총 25편에 달하는, 결코 적지 않은 단편들의 들쭉날쭉한 편차도, 중간중간 보이는 편집상의 실수와 오타가 풍기는 아마추어 냄새까지도 그 때의 편린같이 보이죠. 지금도 판타지는 그다지 오래된 장르라고 할 수 없지만 그 때는 그야말로 막 태어난 신생장르였고 아마추어 티를 벗기 힘들었으니까.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그런 가치판단을 떠나서, 그 때의 장단점을 모두 포함해서 그 때 자체를 담고 있는 책처럼 보인다는 거지요. AD&D의 룰을 차용한 판타지가 조금씩 식상해지기 시작하고, 역할 바꾸기의 서술조차도 조금씩 식상해지기 시작하던 시절, 하지만 장편은 아직도 익숙한 코드들에 발목 잡혀 있었던 반면 단편은 새로운 판타지를 찾아서 이야기를 낯설게 하기 위해 애쓰고 있던 때.

어떠한 장르가 보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추기 위해선 그 장르가 보다 견고해져야 하죠. 그 장르가 그 틀을 더욱 발전시키고 형식을 최대한 끌어올렸을 때, 장르가 틀 안에서 그 틀을 견고히 하며 특색을 완전히 갖추었을 때 비로소 장르 외적인 요소가 받아들여질 여지가 생기는 게 아니겠어요? 시조가 그 틀을 완전히 확립하고 규칙의 미를 완성했을 때 사설시조며 연시조 등의 파격이 나올 수 있었듯이.

그런 장르 외적인 틀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틀을 인식하고 깨려는 움직임이 벌써부터 보이는 초기의 특성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 보여요. 여러 경향의 작품들이 뒤섞여 있거든요. 익숙한 판타지의 코드들을 다루는 작품들, {공주를 구하는 것은 언제나 왕자}(황계환), {잠자는 공주}(박수민), {핏빛 눈동자의 앤}(권용찬) 등의 작품과, 그 익숙함을 역으로 비튼 작품들, {라면 먹을 땐 조심하세요}(송세현), {세상의 마지막 공주와 마녀}(김지원), {무서운 이야기}(이지연), {사라지는 모든 것들}(홍성백), 그리고 판타지를 보다 풍성하게 낯선 영역까지 넓히는 작품들, {꿈사냥꾼}(이수현), {좌변기를 찾아 떠나는 모험}(정혜란), {그녀는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전민희), {산책의 대가}(김시덕), {이만 오천 원}(정대영) 같은 작품들이 혼재되어 있으니. 작품들 간의 배치에 어떤 규칙성이 보이지 않는 게 다소 아쉽군요.
그리고, 그 시기의 기억을 되살리는 건 개인적인 느낌의 영향도 적지 않아요. 저는 작가 이수현을 알게 된 작품이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 단편란에 올라온 꿈 연작을 보면서부터였으니까요. 기억하는 것으론 모두 세 작품이네요. {꿈사냥꾼}과, {꿈사냥꾼}에 이어지는 연작 한 편, 그리고 ‘꿈’을 소재로 한 단편 한 편. 멋대로 꿈 연작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계속해서 꿈을 꾸는 그 단편에서 인상을 깊게 받으며 작가 이수현을 기억할 때에는 이렇게 거울에서 같은 필진이 될 줄은 미처 몰랐었지요. {꿈사냥꾼}을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특유의 느낌은 여전히 살아있어요. 환상적인 것을 천연덕스레 부드러운 설득력으로 플롯을 풀어나가는 필력은 이 작가 특유의 것이죠. 최근작을 읽고 보면 부분부분 서툰 것이 없지는 않은데 그래도 이 때부터 작가가 이러했구나 하는 느낌이 강한 반면에, 그와는 대조적인 작품이 {이만 오천 원}(정대영)이에요. 거울에 차례차례 올라왔던 판타스틱 시리즈를 보면, 점차 최근작에 이를수록 필력이 안정되어간다는 느낌이 강해져요. {이만 오천 원}을 보면 단숨에 알아차릴 수 있달까, 물론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을 세세한 것까지 서술하면서도 특별하게 만드는 작가의 특기는 ‘이만오천원’에서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 개성을 작가가 갈고닦아왔구나 싶어지는 거지요.

그 시기에는 출간작들도 많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출간되지도, 완결되지도 못한 작품들도 유난히 많았더랬지요. 하이텔 시리얼 란의 [저주회사 효연 철학원](송세현)을 기억합니다. {라면 먹을 땐 조심하세요}(송세현)를 보면서 [저주회사 효연 철학원]에서의 재기가 그대로 살아 있는 걸 보면서 몹시 반가웠어요.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 장편연재란에서 극악의 연재주기를 자랑하던 작품들 가운데에는 [아시아 이야기](이지연)가 있었는데, 이 작가는 장편뿐만 아니라 단편에서도 인상이 깊어요. 환타지 동호회 단편란에 {던전}(이지연)이라는 단편이 있었어요(PC 통신 환타지 관련 동호회에서 우수 단편들을 모아 출간한 명상 출판사의 [윈드드리머]에 실려 있습니다. ―――편집자 주). 던전 안의 미로를 헤매는 자를 서술한 단편이었죠.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에 실린 {무서운 이야기}(이지연)보다 그 쪽이 더 강렬하지만 {무서운 이야기}도 특색 있는 단편이에요. 귀신들이, 괴물들이 나를 쫓아와, 나만을 의식해, 라는 건 공포도 되지만 뒤집어보면 그만큼 나는 특별해, 이기도 하다고 꼬집는 건 통찰력 없이는 나오기 힘든 이야기니까요.

위에 든 두 작품들이 이미 알고 있는 작가의 개성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키는 단편이라면 정 반대의 경향도 있어요. 이 작가가 이런 글도 썼나, 깜짝 놀라게 만드는. 나우누리 SF & Fantasy란에서 연재되었던 [세월의 돌](전민희)은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지요.  눈에 보이는 듯한 음식에 대한 묘사들, 소년의 경쾌한 성격과 소녀의 날카로운 입담 같은 것이 재미있었는데, 제게는 그런 것보다 당시 통신소설 작가들의 연령대와 특성상 거의 나오지 않았던 경매에 대한 묘사가 세세했던 것이 기억에 남네요. 어쨌건, [세월의 돌] 이후의 작품들은 점차 음울하고도 가슴 아픈 삶, 고통을 참고 이겨내는 삶을 그리는 경향이 짙지만 [세월의 돌] 때만 해도 여전히 경쾌함이 남아 있었고, 그런 작품을 기억하기에 {그녀는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전민희)가 놀라웠어요. 음울한 사념과 명쾌하지 않은 플롯이 마치 다른 작가인 것 같기도 해요. [세월의 돌], [태양의 탑], [룬의 아이들]과 같은 장편에선 스토리를 한 줄로 압축하기 힘들긴 해도 문장을 따라간다면 플롯이 명쾌하게 들어왔으니까요. 그렇게 작가의 놀라운 면모를 보이는 단편은 비단 이 것뿐만은 아니고, {산책의 대가}(김시덕)도 있어요. 거울 단편선에 실렸던 {소금 엉덩이}의 간결한 위트를 기억해보면 {산책의 대가}는 역시 낯설어요. 작가 이름을 보지 않고 읽었다가 뒤늦게 차례를 보고 아아, 하고 알았을 정도이니까. 전혀 다른 측면의 글쓰기거든요.

여러 작가들의 단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이라는 건 주제만큼이나 다양한 형식을 볼 수 있는 즐거움도 있잖아요. 이 단편집에선 보기 드물게 대조적인, 물론 주제가 아니라 기법과 형식만 놓고 보자면 대조적인 두 편이 있어서 몹시 즐거웠어요. 동화를 비트는 것은 환상 계열의 작가들이 종종 쓰는 기법이죠. {엘리베이터}(송경아)는 단편 속에 비틀어놓은 동화를 살짝 양념처럼 삽입하는 기법을 썼고, {세상의 마지막 공주와 마녀}(김지원)는 단편 자체를 동화적으로 구성했지만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동화라고 보기 힘든 기법을 썼어요. 이것도 대조적인데, 삽입된 내용물도 전혀 달라요. {엘리베이터}를 보자면 서두만큼은 헨젤과 그레텔 그대로였지만 엄마는 다 알고 있어서 지루해하는 아이에게 감동적으로 다음 구절을 읽어주죠. “맛있는 냄새 때문에 헨젤과 그레텔은 순대가 찢어지는 것 같아서” 읽는 순간 웃어버렸는데, 이 구절이 {엘리베이터} 내에서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순간이 아닌가 해요. 하지만 {세상의 마지막 공주와 마녀}는 처음부터 실소하게 만들죠.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는 마녀를 힛치하이킹 하듯 불러세우는 왕자는 달을 따러간다면서 준비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달을 어떻게 들고 갈 거냐고 묻는 마녀에게 예쁘게 리본을 묶어서 가져갈 생각이라고 대답해요. 그리고 마녀는 진지하게 대답하죠. “그러기엔 달이 좀 크지.”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적지 않은 즐거움을 준 단편집이 벌써 몇 년 전의 것이군요. 그 이후 단편집 3호가 기획되다가 무산된 채 시간이 흘렀고요. 아마추어 시장에서 어떠한 기획이 계속될 수 없는 이유는 열정과 지속력의 문제도 적지 않지만, 그보다는 자금의 문제인 경우가 더 많지요.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 단편집 3호가 무산되었던 것도 결국은 자금의 문제였고요. VT가 소멸해가는 지금 단편집 3호가 나오지 않는다면 2호에 실린 작가들의 신작을 더 이상 볼 수 있는 길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독자로서도, 환상 계열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으로서도 안타까운 일이에요. 2호의 작가들 가운데에는 현재 거울에서 활동 중인 필진도 몇몇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작가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지금도 하이텔 환타지 동호회는 여전히 VT에 남아있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동호회는 지속될 테지요. 그렇다면 언젠가는 3호가 나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며, 2호와는 사이 흐른 시간만큼이나 새로운 모습으로 나올 거라는 희망을 걸면서, 2호 감상 끝.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