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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기 전에 그 냄새부터 맡아보는 버릇을 가진 친구를 하나 알고 있다. 팔랑팔랑 넘어가는 책장에 얼굴을 대고선 그 친구는 누런 페이퍼백 종이에서 시큼한 식초 냄새를, 희고 매끈한 교과서 종이에서는 달달한 차 향기를 분간해내곤 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책을 장르나 작가뿐만 아니라 크기나 제본 형식에 따라서 진열해놓는 일에 상당히 집착하는 편이다.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귀중한 책을 찾아 헤매는 책 사냥꾼이라든가(레베르테, [뒤마 클럽]), 스스로 책의 주인공이 되어 보는 환상적인 이야기(엔데, [끝없는 이야기])?

   [꿈꾸는 책들의 도시]는 보다 직접적으로 책에 대한 온갖 종류의 환상과 광기에 가까운  집착을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는 놀랄 만큼 감각적이고 유쾌하지만, 독자에 따라서는 기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혹자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항상 꿈꾸어 오던 환상을 발견하고 기쁨에 사로잡힐 테고, 혹자는 주인공의 어둡고 긴 모험에서 답답함을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보장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작품에 경탄한 나머지 그 작가의 작품이라면 모조리 찾아다 읽는 사람, 책을 소장하고 빈 서가를 채우는 일에서 뿌듯함을 느끼는 사람, 모두가 잠들어 있을 것 같은 한밤중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장을 넘겨본 적이 있는 사람, 바로 당신 같은 이라면 누구나 빠져들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이다.

   이 놀라운 이야기를 듣기 위해 1장에 들어서면서 독자가 제일 먼저 부딪히는 것은 다름 아닌 경고다.

   ……나는 독서 행위를 광기로까지 몰고 갈 수 있는 어느 장소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책들이 상처를 주고, 중독 시키고, 심지어 생명까지 빼앗을 수도 있는 곳에 대해서 말이다. 이 책을 읽어가는 동안 그 같은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면서까지 내 이야기에 동참하겠다는 각오가 진정 되어있는 사람만이 나를 따라 이 이야기의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작가인 미텐메츠의 이러한 경고를 읽고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를 망설이는 독자는 아마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의 경고는 호기심을 더욱 자극한다. 책이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곳이라니! 도대체 어디에 그런 곳이 있단 말인가? 게다가 나를 굴복하기 좋아하는 토끼 같은 겁쟁이로 취급하려고 하다니, 정말 괘씸하기 짝이 없다. 짐짓 심각한 그의 경고를 읽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음 장으로 눈을 옮긴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세계는 차모니아. 공룡 시인들이 모여 사는 린트부름 요새에 대한 회상에서 출발한 미텐메츠는 곧 이야기의 주 무대인 ‘꿈꾸는 책들의 도시’ 부흐하임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책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는 대형 서점을 비롯해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살 수 있을 만큼 값진 책들이 숨어 있는 고서적상,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 낭송회와 책과자나 영감 커피 따위를 파는 음식점이 있는 부흐하임은 가히 책 읽는 자들의 천국이라고 할 만 하다. 과장이 아니다. 여기서부터는 책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어딜 가나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할 듯이 쏟아져 나오는 책, 책, 책들……. 정신없이 뒤섞인 책 이야기는 감각적인 묘사로 독자를 이 신비한 도시의 떠들썩함에 반쯤 취하게 만든다. ‘들었어요? 아무개의 새 책 낭송회가 있대요.’, ‘조심해서 펼쳐요! 책이 폭발할지도 모르니까!’, ‘잠깐, 그걸 읽으면 안돼요! 그건 실제 저주라고요!’, ‘압축 상아로 만든 종이에 다이아몬드로 쓰인……’, ‘이걸 읽으니 오싹해지는군!’, ‘고전 소설들에는 특히 자양분이 많지요. 요즘에는 엄격한 서정시 다이어트를 하고 있답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이 도시의 하루는 시끌벅적한 유쾌함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화려함 이면에는 불쾌한 것들이 숨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오직 값비싼 책을 찾아 도시의 지하에 있다는 어두컴컴한 미로를 홀로 헤매는 책 사냥꾼들과 그들 사이의 피비린내 나는 암투, 누구에게나 매수되는 독기에 찬 비평가들과 경박한 문학 에이전트들에 대해서 묘사할 때는 유머와 함께 날카로운 풍자가 엿보인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혐오스러운 존재는 바로 출판 시장을 온갖 너절한 책, 덤핑 책들로 꽉 메워서 정작 문학이 발 디딜 수 없게 만들려는 고서적상 스마이크이다. 좋은 문학을 알아보는 안목을 가졌으면서도 그것들을 말살하려는 그의 혐오감은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제까지 본 중 가장 완벽한 글을 지어낸 작가를 찾아 그에게 온 미텐메츠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전신이 마비되어 책들이 가득한 어두운 지하 미로에 버려진 미텐메츠. 책들 사이에? 그것 참 이상적인 감옥이 아닌가? 천만의 말씀. 영화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에는 독자의 손을 뜯어 먹으려고 하는 책이 나온다.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승들을 차례로 독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은 어떤가? 이들이 바로 ‘위험한 책’들이다. 그는 이런 치명적인 책들과 거칠고 비열한 책 사냥꾼들, 이름 모를 지하 괴물들과 함께 갇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도시의 사람들이 모두 들어서 알고 있지만 본 적은 없다는 전설적인 괴물, 그림자 제왕도…….

   독자의 즐거움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여기에서 그림자 제왕의 정체를 밝히지는 않겠지만, 정체 모를 이 괴물이야 말로 부흐하임의 어두운 면이 그대로 반영되어 만들어진 슬픈 피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별명이 ‘그림자’ 제왕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진정한 작가인 발터 뫼르스는 그를 통해서 문학 자체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려고 한다. 책의 내용을 먹고 살며, 자신이 택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암송하며 그와 닮아가는 외눈박이 종족 부흐링들이 책 읽는 것을 진정한 기쁨으로 아는 이들의 환상을 담고 있다면, 그림자 제왕은 문학을 창작하는 이들의 환상을 보여주며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오름’이라는 개념이다.

   ‘오름’을 우리말로 뭐라고 해야 할까? 단순히 ‘영감’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한 듯하다. 영감과 창작욕으로 태어나는 것이 반드시 위대한 작품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작품 속에서 훌륭한 작가들은 ‘오름’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이 관통해야만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별들의 알파벳으로 쓰인 책이라든가, 이야기로 가득한 우주 따위는 나이든 작가들의 케케묵은 허언 속에 등장하는 망상에 불과하다. 미텐메츠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환상에 불과하다면 도대체 무엇이 독자를 전율케 하는 것인가? 때로는 흐느끼고, 때로는 탄성을 내지르며 식음까지 전폐해가며 독서에 빠져버리는 미텐메츠를 보면 진정 위험한 책은 독자를 독살하거나 폭발하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험할 정도로 강력하게 독자를 끌어당기는 책들, 이들에게 이런 종류의 위험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오름’이다.

   긴 모험 끝에 드디어 ‘오름’에 도달했다는 공룡 시인 미텐메츠의 수다는 그 모험담으로 독자들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다. 트럼나팔 연주회가 불러일으키는 환상이라든가, 살아있는 책들, 지하 미로에 대한 그로테스크한 묘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그 환상을 눈앞에 그리게 하기에 충분할 만큼 감각적이다. 게다가 작품 전반에 흐르는 유머 감각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출판 시장의 현실에 대한 풍자는 날카로우면서도 냉소적이지는 않고, 1인칭 서술의 성장 소설이 가질 수 있는 재치 있는 어투에, 특히 차모니아의 문예 사조를 재구성하는 부분에서는 작가의 유머가 넘쳐난다. 가장 자극적인 문장으로 시작되는 낭만주의 문학이나 말더듬이 문학 ‘가가이즘’―――다다이즘?―――등을 대표하는 작가들과 그 작품들은 이 이야기를 더욱 유쾌하고 다채롭게 만들어준다. 받아들일 준비가 된 독자들에게 [꿈꾸는 책들의 도시]는, 그들이 책에 대해서 갖고 있는 환상을 충족시킬 재료들을 충분히 제공한다. 자, 준비가 되었는가?

   책과 문학을 위한 책 이야기. 위대한 문학에 대한 호들갑스러운 찬사.
   ‘오름’을 위해, 아주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 드디어 빛을 보게 된 이들을 위해 건배.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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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酒客 06.02.14 18:49 댓글 수정 삭제
    꿈꾸는 책들의 도시. 호기심이란 것만으로도 충분히 책이 시선을 사로잡는 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죠. 게다가 1권 후반부에 나오는 "당신은 방금 독살되었습니다."의 압박은 '이건 일러스트야!'라고 단정 짓게 만든 작품입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 견해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