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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판타지의 원류를 찾아서

어떤 대상에 관심이 생기면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게 마련이다. 사람이라면 그의 부모나 집안 환경, 성장과정도 궁금해지듯이. 무엇이 지금 현재의 그를 만들었는지 알고 싶다면 과거를 거슬러 올라 살펴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같은 이유로 장르 판타지를 단순한 읽을거리 이상으로 생각하게 된 사람이라면 자연 판타지의 탄생과 (현재와 같은 서브 장르로 굳어진) 성립 과정을 알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 비평서 같은 학술서적을 읽는 건 너무 딱딱하고 지루한 일이다(판타지에 대해 논문이라도 쓸 심산이 아니라면). 가장 좋은 방법은 개별 작품을 읽으면서 어떤 경향이나 표현양식의 흐름이라든가, 어떤 식으로 (장르의 법칙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정착되고 변해갔는가를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려고 읽을 만한 책을 찾는데 이럴 수가! 장르 판타지의 시조(?) J.R.R. 톨킨 이전의 작품은 눈씻고 봐도 찾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아서왕 이야기나 안데르센 동화를 읽자니 너무 폭이 넓어져서 그도 곤란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판타지 소설에 대해 말하려면 톨킨부터 시작하고, 그로 인하여 톨킨이 판타지의 발명가처럼 언급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본서의 편집자 서문을 보면 영미권의 사정도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적어도 일반 독서대중(판타지를 심심풀이삼아 어느 정도 읽는 이를 포함)에게는 J.R.R. 톨킨이 판타지의 알파요 오메가라는 사실. 근대 판타지의 빅3(*1)라 할 수 있는 조지 맥도널드, 윌리엄 모리스, 던세이니 경의 작품은 우리나라에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다(*2).

이런 상황이라 이 책은 목마른 장르 독자들에게 좋은 샘물이 될 것이고, 판타지의 근원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또한 작가에 대해 소개를 할 때 '이 작가의 작품은 아직 국내에 출간된 적이 없다'는 부끄러운 문구가 등장할 일이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점도 이 단편집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3).



2. 추천 작품과 간략 감상

수록작이 너무 많은 관계로 개인적으로 좋다고 생각한 작품 다섯만 추려서 소개를 한다.

황금 열쇠 / 조지 맥도널드
시간의 흐름, 죽음에 대한 은유, 순차적으로 만나는 조력자, 미지에 대한 경외와 동경 등 신화와 전설로부터 물려받은 풍부한 원형적 심상을 담아낸 아름다운 글이다.
호시 신이치의 {열쇠}([기묘한 이야기] 수록)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문제의 해답을 주인공이 처음부터 갖고 있다는 오랜 테마를 바탕으로 한 점은 같지만 두 글이 어떻게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지 살펴볼 만 하다.

검은 심장과 하얀 심장 / 헨리 라이더 해거드
[그녀]([동굴의 여왕]이란 제목으로 더 유명)로 알려진 해거드의 중편. 아프리카를 무대로 줄루 족을 다룬, 평소 접하기 힘든 소재라는 점도 특이점.
흑인과 백인의 갈등, 사랑과 탐욕이 빚은 비극을 다루고 있으며, 모험소설의 대가가 쓴 작품답게 몇 번의 반전이 일어나 끝까지 읽기 전까지 결말을 속단할 수 없다.

용 조련사들 / 이디스 네스빗
읽고 나서 흐뭇한 웃음을 머금게 만드는 작품. 용의 정체가 그 동물이었다니! 그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이 글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어른들도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영특하고 순수한 아이들이 나서서 해결한다는 중세 유럽 동화의 구조를 잘 활용한 글.

요정의 덫 / 프랜시스 스티븐스
러브크래프트를 연상시키는 환상공포소설. 아니 러브크래프트보다 먼저 활동한 작가니까 그가 이 작품에 영향을 받았을지도. 요정을 통해 아름다움 속에 담긴 공포를 그렸다는 점에서 같이 수록된 {숲의 여인}과 흡사한 느낌이 드니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 듯.

숲의 여인 / 에이브러햄 메릿
숲과 나무를 움직이는 것처럼 그려낸 걸작 단편.
서로의 생존을 위해 상대를 죽여야 하는 인간과 숲. 어느쪽이 선이고 악인지, 그리고 숲의 대리인(혹은 꼭두각시)이 되어 인간을 공격한 주인공의 행동은 옳은지 등 풍부한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도시}([토탈호러] 수록)와 비교한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숲과 도시라는 전혀 다른 소재를 가지고 인간에 대한 증오와 복수(그것도 인간을 조종한다는 점까지)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놀랄 만큼 유사한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석

1. 이들 셋을 하나로 묶은 건 본 필자의 자의적 분류이며 빅3라는 명칭 역시 이 글을 쓰면서 마음대로 붙인 것임.

2. 조지 맥도널드의 작품은 [북풍의 등에서], [공주와 고블린], [공주와 커디]가 아동용 동화로 소개되었으나 동화 작가 이상으로 대접받진 못하고 있다. 윌리엄 모리스는 환상소설 관련 해설서나 비평서에는 언급이 되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베오울프]의 번역자로 더 유명하다. 던세이니 경은 문학 관련 서적에 ‘아일랜드 출신의 희곡가’로 언급되었으며 추리 단편 {두 병의 소오스}([한밤의 지하철] 수록)가 번역된 적이 있을 뿐이다. 조지 맥도널드는 빼더라도 다른 두 사람의 환상소설은 이 선집으로 처음 소개된 셈이다.

3. 비슷한 역할을 [21세기 SF도서관], [세계 환상문학 걸작 단편선] 등 장르 쪽만이 아니라 [붐], [천국에도 그 여자의 자리는 없다] 등의 단편집이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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