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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생적 한계

일본의 라이트 노블 혹은 캐릭터 소설이라고 하는 부류는 그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따라 나뉘는 문학의 한 장르이다. 주로 청소년층을 독자로 하는 소설로 표지와 삽화를 만화풍의 일러스트로 쓰고 있다는 점을 주된 특징으로 하며 가볍고 밝은 내용이 주를 이루어서 영미권의 그래픽 노블이 소설 같은 만화라면, 이쪽은 만화 같은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내용이나 표현방식이 만화와 유사하다보니 라이트 노블/캐릭터 소설쪽에서는 SF, 판타지와 같은 장르가 많다. 유행에 민감한 특성상 순수한 장르물보다는 추리/판타지/청소년 로맨스/전기(*1) 등 몇 가지 장르가 혼재된 경우도 많다.

하지만 장르의 오랜 팬들은 알고 있듯, 엄청난 양의 장르 소설이 쏟아져 나오고 베스트 셀러도 많이 배출되는 미국과 일본에서조차 장르 소설에 대한 차별은 존재한다. 가령 예를 들자면 SF 쪽에서 평단과 독자의 지지를 동시에 받은 명작인 코니 윌리스의 [둠즈데이 북]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인지도는 매우 낮다(우리나라엔 나온지 10년이 넘은 2005년에 번역 출간되었음). 반면 그와 유사한 장르(시간여행물?)이면서 훨씬 졸작인 마이클 크라이튼의 [타임라인]은 유명 작가가 유명 출판사에서 냈다는 이유로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순수한 장르물도 천시받는데 그보다 못한 것으로 치부되는 라이트 노블이야 어련할까. 일본에서조차 라이트 노블이 제대로 소설로 대접받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물론 만화도 예술작품이며 소설보다 뛰어난 만화도 얼마든지 있지만, 아직 소설보다 낮은 것으로 인식되는 만화의 한 종류로 취급받고 있는 게 라이트 노블의 실상이다. 최근에는 라이트 노블 출신 작가들이 일반 소설계에서 베스트 셀러를 내거나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며 라이트 노블을 다루는 문예지 [파우스트](최근 한국판도 출간)가 높은 발행부수를 기록하는 등 점차 위상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긴 하다.

논란의 여지도 있고 반대의견을 지닌 사람도 있으나 한국의 판타지는 일본의 라이트 노블과 흡사하다는 입장(*2)을 가진 본 필자로서는 라이트 노블/캐릭터 소설에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는데, 위의 예에서처럼 좋은 작품이 장르의 꼬리표를 달고 나와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경우가 한둘이 아니라서, 이번에 소개할 [NHK에 어서 오세요!]도 그 중의 하나로 넣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 믿는다.



2. NHK에 어서 오세요!

주인공 사토 타츠히로는 대학을 중퇴하고 하는 일도 없이 몇 년째 좁은 하숙방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는 히키코모리(방구석 폐인, 은둔형 외톨이)다. 그는 자신이 히키코모리가 된 것이 누군가의 음모 때문이라고 믿게 된다. 세상 속에 숨은 악의 조직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 그는 그 조직을 NHK라 부르며 맞서 싸울 것을 다짐한다.

어느날 종교전도사 아줌마가 방문하자 별 생각없이 쫓아낼 작정이었지만 함께 있던 소녀 나카하라 미사키와 만나게 되고, 그의 앞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된 타츠히로는 스스로를 비하하며 고통스러워한다. 하지만 미사키는 그에게 다가와 한 가지 제안을 하게 된다. 자신의 히키코모리 탈출 프로그램을 따른다는 계약을 맺자는 것.

미사키는 왜 타츠히로를 도와주려는 것일까? 과연 타츠히로는 미사키의 지도를 따라 히키코모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우연히 옆방에 살던 고교 후배 야마자키와 만나게 되고, 그의 영향으로 오타쿠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데…….



3. 스스로를 유폐한 우울한 청춘의 초상

이 소설은 라이트 노블이다. 왜냐하면 출판사에서 라이트 노블로 냈으니까. SF의 정의가 그렇듯 라이트 노블의 정의 역시 무척이나 작위적이다. 표지와 삽화가 만화풍 일러스트여야 라이트 노블이다 라는 정의는 얼마전 삽화가 없고 표지도 그림이 아닌 라이트 노블이 나오면서 깨졌다. 따라서 이제는 작가와 출판사의 선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작품 역시 틀림없는 라이트 노블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내용은 라이트 노블답지 않다. 미소녀가 나오지만 학교를 무대로 한 연애물도 아니고, 괴물이나 외계인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무대가 우주나 미래도 아니며, 세계의 운명을 뒤바꿀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는다. 현대 일본의, 실제로 일어날 만한 개연성 있는 인물과 사건을 다룬 사실주의 소설이다. 적어도 내용상으로 분류하면 장르 작품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 라이트 노블로 태어난 이상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또한 작품 안에서 언급되는 인터넷/게임/마약 등 ‘오타쿠스러운’이야기, 일견 저질스럽게 느껴지는 몇몇 사건들로 인해 내용 자체도 캐릭터 소설 이하로 취급될 만한 여지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태생적 한계의 일부일 뿐, 원조교제를 다룬 무라카미 류의 작품이 저질로 분류되지 않는 것처럼 소재 자체로 작품을 재단하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잔인한 일인지는 장르소설을 읽어온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이 작품은 특이한 소재로 주목을 받았고 실제로도 그럴 만 하다. 히키코모리를 정면으로 다루고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으로는 아마도 최초일 것이다. 이는 작가 자신이 히키코모리 생활을 했던 경험이 있기에 가능했으리라 추측된다. 또한 주인공이 늘 방 안에서 혼자 지낸다면 어떠한 사건이 일어날 여지가 없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고정관념?)이 히키코모리를 다룬 작품이 여지껏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작가는 멋지게 히키코모리도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미소녀와 롤리타 사이트와 폭력과 마약과 사이비 종교와 정신병적인 망상 같은 양념을 뿌려서 말이다.

하지만 만약 위의 줄거리 소개를 읽고 주인공이 미사키의 인도로 히키코모리에서 벗어나 학교로 돌아가거나 좋은 직장에 들어간 후 미사키와 맺어지는 결말을 생각한다면, 이 작품과 작가를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그런 우리나라 TV드라마 같은 이야기와는 딴판이다.

이 작품의 분위기는 시종 우울하며, 군데군데 들어가는 오타쿠들이 좋아할 만한 소재 역시 허탈한 웃음만 나오게 할 뿐이다. 행운과 기적은 찾아오지 않고, 타츠히로와 미사키의 앞에는 비참하고 냉정한 현실만 있을 뿐이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고,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는 너무나 다른 존재인 것만 같았지만 사실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스스로의 육체를 가둔 타츠히로와 마음을 닫은 미사키는 슬픈 과거와 고통스러운 현재와 불안한 미래를 가진 이 시대 젊은이의 고뇌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런 슬픈 청춘을 위한 행복한 결말은 보여주지 않지만 따스한 희망의 기운은 남겨놓는다. 사람의 슬픔은, 고통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깨끗이 치유될 수 없는 것. 그러나 한쪽 날개를 다친 두 새가 서로의 날개로 상대방을 덮어주듯이 그렇게 위로해줄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은 그런 이야기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슬프고 힘들지만 살아가는 젊은날의 이야기.

결국 제목의 의미는 마지막에 와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3). 흔히 일본의 소설/만화/영상작품은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언젠간 돌아가야 곳(고향? 마음의 안식처?)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식상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사람의 관계 맺음에 대한 이야기를 이런 식상함에서 약간 벗어난 듯 하면서도 올곧게 표현하고 있다.



4. 소설은 소설, 비평은 옹호

결국 소설은 소설이다. ‘산은 산이다’ 같은 의미는 아니다. 소설이 소설 이하의 대접을 받는 건 그 소설의 안을 보고 결정할 일이지 결코 밖이 아니다. 세상엔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이 있을 뿐 고귀한 소설과 천한 소설이 있는 건 아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결코 천하지 않은) 소설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떤 소설일까? 아마도 상당수의 독자는 좋은 소설이라기 보다 나쁜 소설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너무 천박하고 가볍고, 저연령층을 노린 것 같아서? 단순히 '히키코모리'라는 유행의 시류를 탔기 때문에? 오타쿠 이야기를 다루면서 약간의 겉멋을 부리며 뭔가 있는 척을 했을 뿐이니까?

만화 원작과 소설을 쓰고 관련 비평서도 다수 낸 오오츠카 에이지의 [캐릭터 소설 쓰는 법]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자신이 만화와 라이트 노블의 비평서를 내는 이유는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와 작품을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 작품은 인간의 이야기를, 그 슬픔과 좌절과 고통을, 마음의 상처에 괴로워하고 서로의 상처를 바라보며 위안받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이야말로 더없이 진지한 글이며, 순수한 소설(*4)이다. 그러니 본 필자도 이 글의 목적을 오오츠카 에이지와 같은 이유였음을 고백하며 마치는 것이 가장 솔직한 마무리가 될 것 같다.



덧. 이 작품은 처음으로 완독한 일본어 장편소설이라는 점에서도 개인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마침 5월 25일 한국어판이 정식 출간되어, 미뤄왔던 이 작품의 비평을 빙자한 옹호문을 내놓는다. 그동안은 번역된다는 정보를 얻지 못하여, 절판된 번역 소설 소개하는 것도 미안한 판국에 번역되지도 않는 작품을 소개할 엄두도 내지 못하여 초안만 잡아놓은 이 글을 공개하지 못하고 있었다.

덧2. 같은 제목의 만화는 이미 번역 출간되고 있다. 하지만 원작의 무겁고 우울하며 진지한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인, 그저그런 밝고 코믹한 오타쿠 개그 만화이기에 전혀 권하고 싶지 않다(원작자가 직접 스토리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또한 2006년 여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방송될 예정이지만 만화판과 흡사할 것이라 추측(우려)된다(그래도 한가닥 기대를 버리진 못하겠다).



주석

1. 傳奇. 일본식 무협이라고 하면 너무 단순하게 설명한 듯 싶으나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전기의 의미와 발전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나스 키노코의 [공의 경계] 해설을 볼 것을 추천한다.

2. 우리나라의 판타지 장르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은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아니라 미즈노 료의 (TRPG 리플레이를 소설로 쓴) [로도스도 전기]와 애니메이션 [슬레이어즈](원작이 라이트 노블이지만 원작소설보다 애니메이션이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다)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기정사실이다. 비록 우리나라의 판타지를 많이 읽진 않았으나 상당수가 영미권 판타지보다 (같은 판타지지만) 라이트 노블(로 분류되는 일본의 판타지)과 더 흡사하다는 건 직접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3. 번역출간되었기 때문에, 원래 초안에는 있었던 결말 부분의 내용소개를 삭제하였음.

4. 환상문학웹진 거울의 독자들은 다 알고 있겠지만, 대다수의 독서 대중조차 순수문학과 대중문학이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잘못 알고 있다(뿐 아니라 주류문단쪽에서 그렇게 생각하도록 부추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순수문학의 반대는 계몽소설/참여문학이다. 소설이 교훈이나 의미, 지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근대소설의 개념에 반대하여 순수하게 예술성을 추구한 것이 순수문학이므로, 순수하게 소설의 재미를 추구한 장르소설이야 말로 진정한 순수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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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6.07.20 12:51 댓글 수정 삭제
    저도 얼마 전에 한글판이 나와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워터가이드 시절에 어떤 분이 극찬(?)을 하셔서 기억하고 있는 책이었죠. 제가 히키코모리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기대가 컸던 탓에 약간 아쉬움도 들었지만요. 엔딩이 좀 기운빠지는 느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독특한 소설이고, 속도감 있게 읽히는 문장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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