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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항해술

어슐러 K. 르 귄, 김지현 옮김, 황금가지, 2010년 7월


pena (pena12@naver.com)



 70년대와 80년대 초에 쓴 작법서인 딘 쿤츠의 책에서는 유행에 휩쓸리지 말고, 우물 안에 갇힐 염려가 있으니 장르 작가로 자신을 규정하게 놔두지 말라는 말이 빈번하게 나온다. 처음부터 나와서 끝까지 몇 번이고.

 철이 들어 이렇게 자신을 돌이켜보니 나에게는 이미 출판사와 편집자 또 평론가들이 붙여놓은 SF 작가란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편집자는 독자들에게 혼동을 주지 않기 위해 그 작가의 전문적인 장르 이외의 작품을 사는 것을 꺼린다. 이런 것 또한 출판계가 독자들의 지성과 견식을 얼마나 얕보고 있는 처사인가. 어쨌든 ‘SF 작가’란 꼬리표가 붙으면 끝장이다. 그런 수식어가 붙지 않은 ‘작가’로서 인정을 받으려면 꾸준히 피나는 온갖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 pp. 35~36

 딘 쿤츠가 이토록 계속 신경질적일 정도로 장르 작가의 꼬리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첫째로 한 작품이 뜨자 그를 모방한 작품을 출판사마다 줄줄이 내고, 장르의 질적 저하가 찾아오면서 갑작스럽게 장르 자체가 괴멸해버리는 패턴을 몇 번이나 겪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장르 소설과 일반 소설의 시장 크기가 엄청나게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첫째 이유에 대해서는 20년 후에 글을 쓴 오슨 스콧 카드도 동감하는데, 구분하기 쉽고 포장하기 쉽기 때문에 소설에 장르를 도입한 출판 문화나 한 작품이나 한 작가가 뜨면 모방작이나 작가의 초기작을 가져다가 내서 독자들이 환멸을 느끼고 그 시장이 사라져버리는 패턴에 대해서 비판한다. 이는 세월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문제이며, 우리나라 출판시장과도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이는 실정이다.

 딘 쿤츠는 계속해서 장르작가의 꼬리표에 매이지 말라고, 일반 대중 소설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말라고 간곡하게 조언하지만, 그렇더라도 장르소설을 하고 싶은 독자를 위한 조언까지 준비한다.

 플롯에서 보는 한 장르 소설과 일반 소설 간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일반 소설의 플롯은 저자가 그 위에 액션, 성격 묘사, 테마, 배경, 무드 등을 조화시켜 생동력 있는 인간을 창조하는 골격의 역할을 한다.
 장르 소설에서 플롯은 골격일 뿐 아니라 힘줄이고, 기관이고, 근육 그 자체인 것이다. (중략) 일반 소설로 대성하려면 작가는 작품의 모든 요소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여유를 담은 플롯 만들기에 노력해야 한다.
― p 113

 또한 장르 소설을 굳이 해야겠다면, 그 벽을 넘어설 만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말라고 한다.

 이는 오슨 스콧 카드도 마찬가지로 말하는데, 그는 자기 안에 생겨나는 이야기가 이 장르의 것이라면 이것을 택하되, 무엇이 이 장르에서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를 알기 위해 노력을 들여야 하며, 그저 패턴으로 이루어진 글이 아닌, 좀 더 가치 있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라고 한다. 또한 장르 사이의 경계는 잘 알아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작가가 그 안에 갇힌 죄수는 아니며, 언제든 새로운 영토를 만들고 길을 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미지의 문학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오슨 스콧 카드는 그래도 딘 쿤츠처럼 비관적으로 말하지는 않으며, 장르문학의 독자들이 상상력이 많고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머리를 쓸 줄 아는 대단한 독자층이라고 애정 어린 평가를 한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상당히 들어맞는 평가지만 애석하게도 독자층의 절대넓이가 워낙 얇은 편이라는 점은 확실히 알아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스티븐 킹과 어슐러 르귄은 장르에 대해서 하는 말은 많지 않다. 르귄은 솔직히 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장르 이야기 자체를 하지 않는다.

 스티븐 킹의 경우에는 이야기의 종류에 따라 가치매김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위의 두 작가가 하는 조언과는 어쩌면 반대 되는 말 또는 격려를 한다. 일단 그는 어린 시절에 직접 만든 잡지를 선생님께 뺏겼을 때의 일화를 대면서 문학 장르 사이에 서열을 매기는 행위에 대해 일침을 먹인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말이다, 스티브. 네가 애당초 왜 이런 쓰레기 같은 글을 썼느냐는 거야. 너에겐 재능이 있어. 그런데 어쩌자고 이렇게 제 능력을 낭비하는 거냐?”
 그녀는 V.I.B 1호 한권을 말아 쥐고 마치 양탄자에 오줌을 싼 개를 신문지 몽둥이로 위협하듯 나를 향해 휘둘러대고 있었다. 선생님은 내 대답을 기다렸지만―――그녀의 말이 아주 꾸지람만은 아니고 물음이기도 했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나는 할 말이 전혀 없었다. 부끄러웠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쓰는 작품들을 부끄러워하면서 꽤 오랜―――너무 오랜―――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시든 소설이든 단 한 줄이라도 발표한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에게서 하늘이 주신 재능을 낭비한다는 비난을 듣게 마련이라는 것을 내가 비로소 깨달은 것은 아마 마흔 살 때였던 것 같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있으면 (그림이나 무용이나 조각이나 노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의 기분을 망쳐놓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다.
― pp. 58~59

 좋은 글을 쓰려면 근심과 허위 의식을 벗어던져야 한다. 허위의식이란 어떤 글은 '좋다', 어떤 글은 '나쁘다'라고 규정하는 데서 비롯되는데, 이런 태도도 역시 근심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글을 쓰려면 연장을 잘 선택해야 한다.
― pp. 155~156

 또한 장르 선택에서도 제한을 두지 않는다.

 장르에 대해서는 각자 자기가 즐겨 읽는 장르의 소설부터 쓸 것이라고 추측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후략)
 (전략) 어떤 소설을 쓰고 싶어 해도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자기가 잘 아고 또 좋아하는 (혹은 내가 공포 만화나 흑백 공포 영화를 사랑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소재를 회피하고 친구나 친척이나 문단 동료들이 좋아할 것 같은 소재를 택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큰 잘못이다.
그리고 돈을 벌겠다는 목적으로 일부러 특정 장르나 소설 유형을 선택하는 것도 역시 심각한 잘못이다. 우선 도의에 맞지 않는다. 소설의 소임은 거짓의 거미줄로 이루어진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지, 돈벌이를 위해 지적인 사기를 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친애하는 신사숙녀 여러분, 그런 방법은 통하지도 않는다.
― p 194

 이는 사실 오슨 스콧 카드나 딘 쿤츠가 했던 말과 결론적으로는 같은 말이다. 하지만 스티븐 킹이 무슨 장르는 하지 말라든가 하는 말을 거의 하나도 하지 않은 것 자체가 특징적인 일이다.


 4. 작가의 삶에 대하여

 이 주제에 대해서 언뜻 보기에는 성실 노력파와 천재파가 나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스티븐 킹이 “하루에 3시간씩 쓰면 3개월이면 한 권을 탈고할 수 있다”고 한 부분을 읽거나 아이작 아시모프가 자기는 다 쓰고 난 다음에 옮겨 적을 때만 한 번 고치는데, 하인라인은 왜 고치느냐, 처음부터 잘 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한다는 이야기를 읽으면 작가란 이런 사람들만 하는 일인가 싶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을 포함해서 모든 작가가, 작가란 끊임없이 정기적으로 글을 써야 하고, 체력과 심력이 심히 고갈되는 직업이며, 책과 글에서 무한한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은 똑같이 말하고 있다. 스티븐 킹도 이렇게 말한다.

 작가가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두 가지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슬쩍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 p. 176

 심지어 콧대가 하늘을 뚫고도 남으며 그 사실을 본인이 인정하기까지 하는 아시모프도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아이작 뉴턴은 이러한 질문을 받았다.
 “다른 사람이 풀 수 없다고 생각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냈습니까?”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요.”
 그 외에 다른 무슨 대답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영감'이라는 게 있어서 천상의 뮤즈가 내려와 머리에다 하프를 타주면, 만세! 일이 끝났다는 식의 낭만적 관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다른 낭만적 관념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낭만적인 관념일 뿐이다.
 물론 다른 사람보다 문제를 풀어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더 잘 얻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상상력이 풍부하거나 있는 결론을 더 잘 잡아내는 재주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은 열심히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낙착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생각을 잘하느냐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얼마나 끈질기게 오랫동안 생각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총명한 사람이라도 자기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서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별로 똑똑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악착같이 매달려서 뭔가를 뽑아내고야 마는 사람이 있다.
― pp. 136~137

 딘 쿤츠의 경우 일주일에 70시간을 집필에 바쳐왔다고, 자신이 작법이란 것을 쓸 자격이 있다면 그 시간 때문이리라고 말한다. 뮤즈는 매일매일, 돌아봐줄 때까지 괴롭히고 간질여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작가보다도 작가의 성실성과, 글과 밀착한 삶을 강조한다.

 “난 재능을 팔고 싶지는 않다”는 말은 독선과 오만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머리만 조금 수그리고 참으면 글 쓰는 걸로 어떻게든 생활해나갈 수 있는데, 재능을 팔고 싶지 않다는 고집만으로 비서, 세일즈맨, 하수도 공사 인부, 도넛 가게의 웨이터 같은 직업을 택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작가가 자기의 재능을 파는 대신 그런 세속적인 직업을 택하면 간신히 먹고 사는 정도인 게 고작이다. 그러다 보면 임시변통이었던 직장이 어느새 고정되어버리고 글을 쓴다는 건 주말 아니면 직장에서 돌아온 저녁 시간 이후로 밀려나게 된다. 그 결과, 피곤하다는 이유도 겹쳐서 이전 같으면 충분히 쉽게 소화시켜버릴 수 있었을 단편조차도 만족스럽게 해내지를 못하게 된다. 한때는 작가로서 위치를 굳힐 기회에 서 있었으면서도 자신을 낮추기를 두려워한 나머지 두 번 다시 작가의 길을 되찾지 못한 예를 나는 많이 보아왔다.
― pp. 30~31

 책과 독서에 대한 사랑 또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다. 독서란 물론 작가로서 공부를 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스티븐 킹은 이렇게 말한다.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평범한 작품과 아주 한심한 작품들을 경험한다. 이런 경험을 쌓아두면 나중에 자기 작품에 그런 단점들이 나타났을 때 얼른 알아보고 피해갈 수 있다. 또한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훌륭한 작품과 위대한 작품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목표를 정하고, 과연 이런 작품도 가능하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 p.178

 그리고 독서를 통하여 우리는 다양한 문체를 경험한다.
 여러분은 그 중에서 특별히 멋있어 보이는 문체를 모방하게 될 수도 있는데, 그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중략) 이렇게 여러 문체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만의 문체를 개발하는 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폭넓은 독서를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작품을 가다듬어야(그리고 갱신해야) 한다.
― pp. 178~179

 독서가 정말 중요한 까닭은 우리가 독서를 통하여 창작의 과정에 친숙해지고 그 과정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작가의 나라에 입국하는 각종 서류의 증명서를 갖추는 셈이다. 꾸준히 책을 읽으면 언젠가는 자의식을 느끼지 않으면서 열심히 글을 쓸 수 있는 어떤 지점에(혹은 마음가짐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미 남들이 써먹은 것은 무엇인고 아직 쓰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진부한 것은 무엇이고 새로운 것은 무엇인지, 여전히 효과적인 것은 무엇이고 지면에서 죽어가는 (혹은 죽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등에 대하여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책을 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여러분이 펜이나 워드프로세서를 가지고 쓸데없이 바보짓을 할 가능성도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 p. 183

 그러나 독서를 꼭 뭘 배우려고 하는 건 아니다. 딘 쿤츠가 한 줄로 정리한 것과 같다.

 작가라면 글을 읽는 즐거움이 스키나, 춤, 낚시질 또는 텔레비전에서 얻는 즐거움 이상이어야 한다.
― p. 45

 그러나 몇 가지 부분에서는 또다시 의견이 갈리는 편인데, 글을 쓰는 과정이나 특히 합평회에 관한 생각이다.

 딘 쿤츠는 매일매일 정기적으로 무엇이라도 두드리기 시작하면서 워밍업을 하면 처음에는 쓸모없는 것들이 막 쏟아질지라도 이후에 좋은 실마리나 좋은 생각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뮤즈를 다각도로 괴롭힌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오슨 스콧 카드의 경우에는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 바로 이야기를 쓰면 좋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다. 묵혀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무엇이든 왜? 어떻게? 그 결과는? 이라고 묻는 아이디어 그물을 끌고 다니며 모든 것을 소재로 만들고 다원화해야 한다.
 스티븐 킹은 “만약에 ~한 일이 일어난다면?” 이라는 물음을 통해 소재를 얻고 그것을 이야기로 만든다.

 소설을 쓰는 도중을 특징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스티븐 킹이다. 스티븐 킹은 소설 쓰는 속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단 어떤 작품을 시작하면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도중에 멈추거나 속도를 늦추는 일이 없다. 날마다 꼬박꼬박 쓰지 않으면 마음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생기를 잃기 시작한다. 진짜 사람들이 아니라 등장인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서술도 예리함을 잃어 둔해지고 이야기의 플롯이나 전개 속도에 대한 감각도 점점 흐려진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의 흥분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집필 작업이 '노동'처럼 느껴지는데,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그것은 죽음의 입맞춤과도 같다. 가장 바람직한 글쓰기는 영감이 가득한 일종의 놀이이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나도 냉정한 태도로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방법은 도저히 손댈 수 없을 만큼 뜨겁고 싱싱할 때 얼른 써버리는 것이다.
― p. 186

 이것은 글을 언제, 얼마나 빨리 써야 좋은가만이 아니라 글을 쓰는 일이 즐거워야 하는가 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건 어느 작가도 똑같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즐거움의 정의조차도 다를 것이다. 바이오리듬이 높은 상태에서 글을 쓰는가, 낮은 상태에서 글을 쓰는가? 직업이 되면 그 재미있던 컴퓨터 게임도 노동이 된다는데 그렇다 해도 취미적이고 오락적인 부분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글도 그 중에 하나가 아닌가? 딘 쿤츠는 즐거움‘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직업 작가라는 것을 매우 강조하는 편이지만, 그렇다 해서 작가라는 직업의 전제에는 즐거움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없는 걸까?
 오슨 스콧 카드는 즐거움하고는 조금 다르지만 이런 식으로 작가의 본령에 대해 말한다.

 최고의 이야기꾼은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이야기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쓰는 사람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행위이다. 심지어 당신의 이야기가 더럽고 불안하거나 음울해도,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둘 이상의 인간이 결합하는 행위이다. 당신이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해도, 당신은 그것을 믿는다. 아니면 애초에 이야기를 쓴다고 속을 썩일 일이 없을 것이다. 가장 '반사회적'인 소설마저도 근본적으로는 공동체를 만드는 행위이다.
― pp. 248~249

 오슨 스콧 카드는 작가들 사이의 공조나 연대에 관해서도 다른 작가에 비해서 많이 다루는 편이다. 경쟁하거나 비교하지 마라, 좋은 작가의 적은 다른 작가가 아니라 독자의 냉담과 무관심이므로 작가는 언제나 같은 편이다.


 그러나 오슨 스콧 카드의 말과는 반대로 작가의 작업은 혼자서 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가끔 공동 창작이나 공동 세계 작업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스티븐 킹은 이를 ‘문을 닫고 하는 작업’이라고 표현한다.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문을 닫을 수 있는 공간으로, 작업하는 중에는 그 문을 닫고, 완성하고 고칠 때에는 문을 열어야 한다. 이 같은 맥락에서 스티븐 킹은 합평회나 창작 교실 같은 것을 떨떠름하게 여기는데, 첫째로는 쓰고 싶은 마음이 아닌 써야 한다는 마음에 글이 오염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고, 둘째로는 문을 닫고 있어야 할 시간에 문을 계속 열어야만 하는 일이 많아서라고 표현한다. 창작 교실과 합평회의 장점에 대해서도 말은 하지만 여전히 떨떠름하다.

 반면 오슨 스콧 카드와 어슐러 르귄은 합평회와 창작 교실의 장점을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하라는 쪽에 가깝다. 물론 개인마다 차이점은 있을 수 있고, 합평회와 창작 교실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어슐러 르귄은 이에 대해 합평회에서 지키면 좋을 원칙들을 부록에서 상세히 밝히고 있고, 오슨 스콧 카드는 여기에 더해 합평회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책으로 쓸 수 있는 대처법에 대해서도 다룬다. 그리고 또한 합평회란 한 방편일 뿐으로, 어떤 방편을 쓸지 말지 판단하고 결정하는 사람은 자신임을 잊지 않고 강조한다.


 결론: 전제로 돌아가서

 이 결론은 작법서를 해부하는 이 기사의 결론일 뿐만 아니라, 작법서들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결론도 뜻한다.

 글을 쓰는 것이 즐거운 사람은 작가가 될 수 있다.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연습으로 닦을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으며, 연습을 계속할 수 있는 것 또한 재능이다.

 작가는 하늘이 내거나, 자기 스스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서로 많이 다르지 않다.

 할 수 있는 한껏 읽고 써라. 이것만이 이 모든 작법서의 결론이자 전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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