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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들어가는 글

   ‘독재자(Dictator)’의 어원은, 고대 로마 공화정에서 국가 위기 상황 시 빠르게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6개월 시한부라는 조건 하에 원로원의 의결을 거치지 않고 단독으로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한정 관직인 독재관(딕타토르)에서 유래했다. 물론 로마 공화정은 오직 귀족 계급인 시민에게만 열려있었다는 점에서 현재의 민주주의와는 그 성격이 다르지만, 특정 상황에 있어 다수에 의한 ‘자유롭고 개방적인 의사결정’보다는 권력을 독점한 개인 내지 소수의 ‘추진력 있고 단호한 의사결정’이 보다 효율적이라는 인식은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 ‘dictator’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의미를 더한 인물로 평가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동상.

   근대 이후로 각국의 전반적인 경제 구조가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산업 혁명 이후 대량 생산 및 소비 체제가 정착되며, 자본은 폐쇄적인 귀족 및 군주 중심 사회에 비해 ‘보다 큰 시장’을 보장하는 대중 사회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한 상황에서 대중들의 의식 성장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기틀이 놓였고―――이로 인해 생긴,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와 자본주의라는 ‘경제 체제’를 동일시하는 오류는 현대까지 이어진다―――, 자본의 성장에 힘입어 대중 집단은 지금껏 가진 적 없는 권력의 주체가 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빈부의 격차와 그로 인한 사회 구성원의 계급화는 자본주의의 성립 이전부터, 넓게 보자면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언제나 있어왔던 일이며 소비 능력이 없는 사회 구성원에 대한 소외를 합리화하는 자본의 속성은 ‘대중’들 사이에서도 분열을 가져왔다.

   자본주의의 폐단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던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무선전신, 신문,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한 공공에 대한 교육과 정보 공유가 그러한 괴리를 비교적 좁힐 수 있으리라고 계몽주의자들은 낙관했지만, 그를 생산 및 전파하는 주체들 역시도 보다 더 많은 부, 보다 높은 지위에 대한 욕구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었고 세계가 좁아져 가며 권력의 편중은 오히려 더욱 심화되었다.

   정치적 목적에 따른 강대국의 묵인 아래 자신이 통치하는 국가에서 절대 권력을 누리는 전통적인 형태의 정치적 독재는 물론 국민 다수의 사상과 의식 구조를 저변에서 교묘하게 통제하는 언론 독재,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 보다 영속적이고 초월적인 가치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를 독점하고서 그에 관련한 지배력을 배타적으로 행사하는 종교 독재 등 다양한 형태의 독재와 독재자들이 존재해왔고, 반대급부로 많은 사상가와 창작자들이 역시 다양한 형태의 독재를 상상하고 그 가능성을 제시하거나 혹은 그 정도 선을 넘어 나름의 준거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비판해 왔다. 소설, 영화, 희곡 등 서사 매체에서 그러한 움직임이 두드러졌고, ‘독재’나 ‘독재자’를 다룬 픽션 한 두 가지 정도는 해당 분야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언급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나치를 풍자한 찰리 채플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 감시와 언어 통제를 통해 대중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독재 사회를 묘사한 조지 오웰의 소설 [1984], 얼핏 보기에는 자유롭고 행복해 보이지만 배후에서는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나기 전부터 모든 이들을 계급화하고 기존 질서 아래 묶어 놓는 사회를 묘사한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멋진 신세계]가 고전 중에서는 특히 유명하고, 대량 생산형 통속 문화산업의 아이콘인 헐리웃마저도 무자비하고 억압적인 독재 정권에 대한 묘사가 정치에 별로 관심 없는 이들에게마저도 보편적 정의감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즉 돈벌이에 도움이 된다는 것―――에 주목하고는 독재 사회와 독재자를 다룬 (주로 SF 장르의) 영화를 다수 제작했다. 그 성찰의 깊이나 진지함과는 별도로 그러한 성격의 픽션들은 이미 대단히 많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 익숙해져 있다.



▲ 찰리 채플린의 영화 [위대한 독재자](The Great Dictator, 1940)의 한 장면.

   그러한 현재의 상황에서 보자면 도서 출판 ‘뿔’에서 나온 이 테마 단편선, [독재자] 역시도 그런 성격을 가진 수많은 픽션들의 목록 최근 페이지에 한 줄을 더 하는 의미 정도 밖에는 가지지 못한다는 냉소적인 선입견도 가질 법 하다. 하지만, 이 단편선이 과연 그 정도의 얄팍한 의미 밖에는 가질 수 없는가? 이 단편선에 실린 작품들은 그저 단선적인 비판의식이나 게으른 접근법으로 쉽게 쓰인 작품들에 불과한가? 이 리뷰에서는 그를 중점적으로 살펴 보고자 했다.


  2. 작품에 관해

   파수(김창규)

   이 작품은 열역학 제 2법칙인 자연계의 모든 현상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발생하며 그 역전은 불가능하다―――모든 열 에너지가 엔트로피로 전환되고 나면 우주는 무(無)에 한 없이 가까운 상태가 되어 멸망한다는 것에서 기본 아이디어를 따 왔다.

   주인공 정채가 살아가는 세계는 ‘생태계와 열역학의 순환을 이해 못한 사람들이 에너지를 마구 낭비한’ 결과 멸망을 목전에 둔 시점이며, 불과 2458명 밖에 남지 않은 인류는 직경 374킬로미터의 원형 공간 내에 갇혀 단지 마지막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늦추기 위해 모든 신진대사와 에너지 소모량을 수치화해 그 기준에 맞춰 살아가야만 한다. 그 세계에서는 이상이나 신념은 물론, 증오와 원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계산할 수 없는 것’이며, 임박한 멸망 앞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다. 그 세계의 사람들은 매일 아침마다 자신에게 할당된 에너지 소비 허용 용량에 맞춰 노동하고, 쉬고, 먹고, 잠든다.

   그 세계의 사람들도 ‘계산할 수 없는 것’의 가치를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파멸을 미루기 위해서는 ‘계산할 수 있는 것’, ‘수치로 환산할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다른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 요소를 잘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탁월함이 드러난다. 이 작품에서는 제복을 차려 입은 비밀경찰도, 산 지하의 비밀 벙커도, 자유를 꿈꾸는 열사의 분신(焚身)도 없다. 모두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다가오는 마지막 순간을 두려워하며 한 치의 낭비도 없이 계산에 맞춰진 일상을 보낼 뿐이다. 조금이라도 멸망을 늦추기 위해서는 노동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나, 하려고 하지 않는 정치인 같은 이들은 원 바깥의 파멸로 밀어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간 이들은 세계와 파멸의 경계 저편에서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내며, 남아서 그리워하는 이들의 회한을 자극한다. 이 작품은, 매우 슬픈 우화다.

   개화(정소연)

   이 작품의 배경은 어용 언론에 의해 ‘불온한’ 견해가 통제되는 한국이다. 자세히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행간을 통해 추정해 보자면 정부는 모든 국민들을 대상으로 ‘출신 성분’을 공식적으로 부여하고, 성분 인증 체제를 기반으로 해 사상 범죄―――작중에서는 그러한 사상 범죄자를 ‘인폐 분자’라고 부른다―――를 연좌제로 처벌하는 것으로 보인다.
   외신을 비롯해 통제되지 않는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인터넷에 대한 접속에는 성분증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상의 풍경은 현실과 별로 다르지 않다. 인폐 분자로 분류되어 수배 당하다가 결국 잡혀 수감 중인 언니를 둔 화자는 말한다. “전 애당초 언니가 뭘 주장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인터넷에 접속하는 데 성분증명 필요한 게 그렇게 큰 문제였나요? 정보망을 정부가 괸리하는 것도 저는 불편한 줄 모르겠던데요. 텔레비전 없어서 뉴스 못 보는 것도 아니고, 신문 없어서 소식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다 보고 다 읽고 살면 됐지, 숨기고 싶은 게 있는 사람들이나 몸 사린 것 아니에요?”

   화자는 결코 악인이 아니다. 다만 그러한 정보 통제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 기회를 애초부터 가지지 못했고, 그렇기에 그에 대해 무관심할 뿐이다. 이 작품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특이한 점은, 언니의 활동 방식이다. 그녀는 피켓을 들고 언론 자유 보장하라고 외치거나 화자를 비롯해 무관심한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녀가 한 일은, 검열이 행해지는 유선 인터넷 망을 끊고는 그 대신 무선 공유기를 비밀리에 설치한 것이다. 권력의 목소리라는 테제 A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에 정면으로 칼을 들이대는 안티테제 B를 표방하는 대신,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결과 C, D, E라는 각자의 답을 내놓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다른 목소리가 파묻히지 않게 햇살을 심은” 그 결과의 모습은, 꽃들이 찬란히 만개한 풍경이다. 그 풍경은 더 없이 아름답다.

   신문이 말하기를(김보영)

   ‘이 작품은 무단도용, 표절, 저작권 침해로 점철되어 있습니다.’라는 도발적인 경고문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시각과 청각만이 아니라 후각과 촉각까지 속일 수 있는 고도의 입체영상 프로젝터가 보편화된 한국이 배경이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라고 해서 과연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시대, 무엇이 진실이며 개인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주인공은 자신의 감각을 부정하고, 유일하게 진실을 보도한다고 생각되는 신문만을 믿는다. 신문은 잇따라 자극적인 기사를 내보내며 은근히 ‘진실성’을 독점하려고 하고, 주인공은 그를 맹신한다. 최근 몇 년 동안의 한국의 모습이 계속해서 오버랩되는 가운데 서사가 진행되고, 주인공은 일주일 째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생각하다가 빛을 투과하는 재질로 만들어 착용자의 모습을 가시광선으로 포착할 수 없게 만든다는 투명 망토에 대한 기사를 보며 내 아이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여긴다. 인지부조화의 극한을 묘사한 블랙 유머다.

   주인공은 점차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고, 주인공이 믿는 신문 역시 내용이 정상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 정도가 되면 독자 역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신문이 거짓을 보도하고 주인공이 속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단계를 넘어서 신문 그 자체마저 스스로가 생산한 거짓에 휘둘리고 있는 것인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허위인가? 2차 세계대전의 파괴와 광기는 그 이전까지 믿어져 온 인간의 이성과 합리에 대한 믿음에 종지부를 찍었고, 철학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과연 무엇이 진실한 것이며, 무엇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그 과정이 이 작품에서 다시 리플레이되고 있다. 신문 발행이 멈춰지고 혼란이 임계점을 돌파했을 때 사람들이 결국 발견한 해답은 열려 있는 광장에서의 연대, 즉 실존이었다. 그 마지막이 과연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주어져 있다.

   평형추(듀나)

   이 단편집에 작품을 실은 작가들 중 아마도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을 작가인 듀나의 이 작품은, 거대 다국적 기업인 LK에서 개발한 궤도 엘리베이터(지구의 중력과 외부 천체의 중력이 균형을 이루는 지점인 라그랑쥬 포인트 상에 정거장을 건설하고 그로부터 지상까지 이어지는 엘리베이터를 건설해 우주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는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거대 구조물. 아서 클라크의 장편 [낙원의 샘]에서 최초로 언급되었다)를 중심으로 한 테크노 스릴러 물이다.

   SF 작품(특히 사이버펑크 계열)에서 흔히 묘사되는, 자본과 권력의 힘으로 초법적인 권한을 누리며 군소 국가들을 착취하는 전형적인 거대 기업인 LK의 사원인 주인공은 어느 날 자신이 감시하던, 죽은 회장의 유물 중 하나인 금고에 별 볼일 없는 말단 직원이 접근하는 것을 보고 호기심을 느낀다. 그리고 그를 발단으로 해 죽은 회장의 안배와 사랑, 그리고 우주를 향한 야망에 접근해 간다.

   이 작품에서는 강력하고 압제적인 거대 기업이 등장하긴 하지만 주인공은 그에 맞서는 정의의 투사가 아니다. 다만 자신의 이익과 야심, 그리고 호기심의 충족을 위해 움직이는 ‘차가운 도시 남자’일 뿐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그러한 면모는 도덕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현상의 서술에 충실한 작품의 분위기와도 잘 맞물린다. 잘 짜여진 SF 영화의 시놉시스를 읽는 듯한 정교한 구성과 흥미로운 전개, 속도감 있는 서사가 매력적인 작품. 억지스럽게 정치적인 메시지를 독자에게 던지는 법 없이 이야기로서의 재미에 충실하다.  

   낙하산(곽재식)

   연구소의 광물 분석실에서 일하는 주인공은 얼마 전부터 비행기에서 추락하는 악몽을 반복해서 꾸곤 한다. 왠지 모르게 OHP, 그 특이한 머리 손질 방식 때문에 Oily Haired Person이라고 불리는 신임 부소장이 온 이후로 더욱 자주 그 악몽을 꾸는 느낌이다. 광물 분석 연구라는 특이한 직업을 가진 주인공을 둘러 싼 인간관계와, 매사에 합리화와 선진화를 부르짖지만 현실 환경을 도외시한 독단적인 추진 방식을 고수하는 부소장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게 불합리하고 후진적인 구조로 퇴화하는 과정의 묘사가 재미있다.

   곽재식은 사소해 보이는 소재들을 잘 조합해서 의외의 재미를 끌어내는데 특히 뛰어난 작가고, 그러한 능력은 이 작품에서도 십분 발휘되어 있다. 시종일관 소리죽여 킥킥대고 OHP의 삽질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각종 조치에 주인공과 공분하면서 읽다보면 어느 새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 내려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주인공이 꾸던 꿈의 정체가 다소 엉뚱한 느낌을 떨치기 힘들고, 그로 인해 작품 전체의 흐름이 어딘가 삐걱거린다는 점이 아쉽다.

   목소리를 드릴게요(정세랑)

   이 단편선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이 어느 것인지는 읽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가장 괄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 어느 것이냐고 누가 개인적으로 묻는다면 나는 거리낌 없이 이 작품을 꼽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무언가 특이한, 그러나 위험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관리하는 수용소가 등장한다. 주인공 같은 경우, 그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그 내용과는 별도로 내면에 잠재해 있던 살인 충동이 증폭된다. 수용소의 다른 동료는 무슨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머리카락이 빠지면 그 머리카락과 접촉한 사람은 그 때 하고 있던 생각을 자신의 생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스스로는 어떤 병에도 걸리지 않지만, 심각한 각종 질병을 주변에 전염시키는 보균자다. 자신의 그러한 능력(혹은 저주) 때문에 평범한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아웃사이더 내지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이들은 일목인(一目人. 특별한 능력을 가진 건 아니지만 무언가 한 가지 개인적인 욕구만 충족된다면 무엇이든지 하는 사람들,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이들 역시 일종의 ‘괴물’이며 주인공을 비롯한 수인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간수들과 소장에 의해 운영되는 격리 수용소에서 서로 의지하며, 가끔은 고독하지만 그럭저럭 적응한 채로, 우울하지만 나름 평화롭고 목가적인 일상을 보내던 이들의 삶은 마지막 ‘괴물’이 수용되며 변화하기 시작한다.

   마지막 수인의 능력은 모든 주변 사람들을 알콜, 쇼핑 등 무작위적인 대상에 집착하는 중독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잡혀 들어온 게 자신에게 정말로 그런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언가 오해이며 반드시 다시 나갈 거라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고, 함께 생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다가갔으며 오래지 않아 주인공을 비롯한 수인들에게 그녀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연선은 그렇게 여 선생 뿐 아니라 누구에게든 아주 태연하게 파고 들었다. 마치 연선을 위한 일종의 홈이, 연선이 오기 전부터 여기저기 파여 있던 것 같았다. 연선이 오면서 그 홈이 꼭 채워졌다. 그녀는 수용소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가 되었다. 수용소는 그녀를 위해 지은 것 같았다. 끊임없이 바라봐야 하는 얼굴의 여왕이 다스리는 태평성대였고 백성들은 그저 찬탄했다. 모두가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다. 심지어 일목인들마저도 조금은 더 친절하게 보였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헌신하게 만드는 독재자. 어쩌면 모두가 그녀에게 중독된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작가였다면 이 지점에서 무언가 정치적인 메시지를 넣거나, 그렇지 않다 해도 무언가 권력과 지배에 관한 나름의 함의를 넣고 싶다는 유혹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유혹에의 굴복은 높은 확률로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이 되어 작품의 전체적인 균형을 망가뜨리게 된다. 그러나 정세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마지막까지 일관된 기조를 유지하며, 약간 씁쓸하면서도 상당히 낭만적인―――그러면서도 결코 촌스럽지 않은 결말에 도달한다.    

   오라데아의 마지막 군주(정보라)

   이 작품은 루마니아와 헝가리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도시 오라데아의 성곽 지하 폐허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원고가 발견되었다는 내용의 서두로 시작되는 액자 소설이다. 실존하는 도시인 오라데아와 가상의 ‘왕’에 대한 기록을 병치시켜 현실과 창작의 경계를 흐린 기법은 보르헤스를 연상케 한다. 이 원고에서 묘사되는 왕은 ‘시간의 구슬’이라는 초자연적 수단을 통해 시간과 기억을 지배하는 절대 군주지만, 자기 합리화를 거듭하다가 결국 덫에 걸리고, 최후를 맞이한다. 꽤나 불친절하지만 여기저기에 행간을 읽을 수 있을 만한 힌트가 흩어져 있어 왕의 시점에서 이뤄진 서술과는 별도로 ‘정말 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를 능동적으로 추리해 가는 과정이 독자의 지적 흥미를 자극한다. 견고한 구성과 왕의 허위의식과 자기기만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문장, 작품 전체에 감도는 중세적인 분위기 재현이 특히 훌륭하다. 3인칭으로 쓰였다면 비교적 평이하고 단순하게 끝날 수 있는 내용을 서술 트릭이 가능한 1인칭 시점으로 쓰고 거기에 현실의 액자를 씌움으로써 대단히 매혹적인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황제를 암살하는 101번째 방법(임태운)

   비교적 전통적인 형태의 ‘폭군’과 그를 암살하고자 하는 한 남자의 대립을 그린 이 작품은 이 책에 실린 다른 작품들에 비해 약간 이질적인 색채를 갖고 있다. 다른 작품들이 대체로 SF의 장르적 관습을 충실히 따르면서, 화자와 서술자 간에 거리를 유지한 채로 비교적 객관적인 서사를 펼쳐나가는 반면, 이 작품은 황제를 암살하려고 하는 주인공에게 서술자의 시각이 상당히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주관적으로 서사를 이끌어 나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폭 넓은 시야를 희생한 대신 주인공의 심리와 주변 환경의 세부 묘사에 보다 충실할 수 있는 이러한 서술 방식에 걸맞게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활극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흥미롭고 읽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지만 역동적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고식적으로 마무리를 지어 버린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입이 있다 그러나 비명 지를 수 없다(박성환)

   할란 엘리슨의 디스토피아 단편 {나는 입이 없다 그러나 비명을 질러야 한다}의 제목을 패러디한 이 작품은, 모든 이의 두뇌를 연결해 일종의 그리드 컴퓨팅 구조를 이룸으로써 구현한 가상현실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도 단연 가장 뜨거운 문장으로 쓰여 있다. 소설을 씀에 있어서, 작가의 독트린을 직접적으로 설파하는 것은 절대로 피해야 할 일 중 하나다. 그렇게 하면 소설은 예술로서의 미적 가치를 잃어  버리고서 단순한 선전물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원칙’이며, 작가의 기교와 역량이 뒷받침된다면 그 원칙마저도 초월할 수 있다. 이 작품이 과연 그를 초월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의 성취를 이루었는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노골적일 정도로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그대로 가져와 소재로 쓴 것도 사실이고, 작품 내에서 간접적으로 제시된 그 사건의 해석들에 대해 동의하기 힘든 부분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 열기는, 고통은, 절망은 너무나도 절절히 다가온다.


   3. 나오는 글

   독재자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넘치도록 많다. 그러나 정말로 위험하고 두려운 독재자는 패악하고 오만한 소수의 통치자도, 그 통치자의 존재를 합리화하는 전통이나 사회적 분위기도 아니다.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그것을 정당화하고 역설적으로 그를 수호하고자 하는 대중들의 본능이다. 그 독재자는 정치적인 의미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는다. 독재자는 유일하게 홀로 자유로운 존재이며, 독존하면서 무한한 지배력을 발휘한다. 모든 것을 발밑에 둔다는 그의 권위야말로 독재자에게 부여된 자유이며, 오직 그 자유만이 독재자를 구속할 수 있다. 마치, 엘프와 드워프, 인간들에게 주어진 모든 반지들을 불러와 어둠 속에서 한데 묶는 유일한 반지의 힘이 그러한 것처럼. 기존의 ‘독재자’를 다룬 작품들은 바로 그러한 점을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 단편집은 그렇지 않다. 이 단편집은 묻는다. 지금 당신을 지배하는 독재자는 누구인가, 라고.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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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ME 11.01.12 19:44 댓글 수정 삭제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왠지 알 것 같고 또 책을 정말 읽고 싶네요..!

    독재자.... 대중들의 본능이 수호한다는 글귀가 참 와닿는것 같아요
  • No Profile
    세뇰 11.01.14 00:10 댓글 수정 삭제
    졸문을 좋게 봐 주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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