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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의 구
  김이환 지음, 위즈덤하우스

  서울 시내에 갑자기 검은 구가 하나 생겨나더니 슬슬 움직이며 사람들을 쏙쏙 집어 삼킨다. 그러면서 점점 늘어난다. 이 구는 막을 길이 없다. 벽을 통과하고 물 위를 미끄러지며 날아올라 살아 있는 사람을 집어 먹는다. 사람을 향해 쉬지 않고 움직이며, 권총이나 대포를 쏴도 끄떡 없고, 뭘 많이 집어 삼킨다고 내부가 차는 것 같지도 않다.

 ● 익숙한 종말물, 묘한 질감
  검은 구는 어떻게 생겨난 거지? 어떤 원리로 작동하고, 어떤 에너지로 움직이는 거지? 어떻게 사람의 육신을 무한정 빨아들일 수가 있지? 어떻게 하고 많은 물체 중에 가시광선과 살아 있는 사람의 육체만 선별해서 삼킬 수 있는 거지? 어떻게 증식하는 거지? 왜 생겨났고, 어떻게 사라진 거지?
  1회 멀티문학상 수상작인 《절망의 구》를 읽다 보면 이런 질문을 하는 게 몹시 겸연쩍어 진다. 작가는 소설 내의 설정에 대해 “이건 상징이고 은유니까 물리법칙 따위는 묻지 마”라고 외치는 듯한데, 딱히 그에 대해 큰 불만이 일지 않는 것은 우선 검은 구가 그다지 상상력을 자극하는 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구라는 형체 자체가 실재보다는 관념에 가까운 것이어서, 애초에 그런 대상에 대해서는 목적이나 의도, 작동 메커니즘이 궁금하지 않다. 좀비 아포칼립스 물의 클리셰를 쫓아가면서도 이야기가 묘한 질감을 얻는 데에는 이런 요인이 크다. 생김새나 목적이 인간을 닮아서 여러 가지 감정을 일으키는 좀비와 ‘불가해함’을 전제로 하는 듯한 검은 색 구를 비교해 보라. 좀비와는 물리고 쫓기고 격투를 벌이고 심지어 사랑까지 할 수도 있지만 검은 구와는 할 수 있는 일도 거의 없다.

 ● 건조하고 세련된 스타일
  저자도 검은 구를 놓고 쓸데없이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지 않는다. 어차피 수습할 수 없는 떡밥임을 작가도 잘 알고 있다. 그럴싸한 개똥 철학을 늘어놓다가 ‘나도 모르겠다’며 도망쳐 독자에게 배신감과 허탈함을 안기는 대신 김이환은 영리한 태도로 검은 구가 아닌 사람들의 행동에 초점을 맞춘다. 이 과정에 갑자기 구가 행동 양식을 바꾼다거나 이상한 예외를 보이는(화자는 검은 구에 닿아도 흡수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인데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등의 약간의 반칙도 나오지만 몰입을 심각하게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전지구적 재앙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400여 페이지에 걸친 사건이 거의 대부분 한 남자의 시점에서만 소개된다. 복잡한 묘사와 그에 필요한 취재를 피하려는 작가의 꼼수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런 서술이 폐소공포증에 걸릴 듯한 기이한 답답함을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종말물로서 줄거리나 결말은 평이한 편이다. 그러나 사건을 끌어가는 저자의 집중력과 호흡이 좋고, 문장도 안정적이어서 지루하다는 느낌 없이 페이지가 잘 넘어간다. 검은 구라는 비인간적인 소재와, 작가가 작중 인물들에게 취하는 ‘거리 두기’ 화법, 인간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도 잘 어울린다. 건조하지만 세련되고 분명한 이런 스타일은 국산 장르소설에서 흔치 않은 것이고, 그런 개성을 작품 내용과 잘 버무려낸 솜씨는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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