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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 분홍토끼의 음모

2023.12.01 00:0012.01

분홍토끼의 음모

빗물

 

하나가 영원히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눈앞에는 분홍 토끼가 있었다. 하나는 등을 동그랗게 말고 하악, 소리를 질렀다. 수염이 부르르 떨릴 만큼 큰 소리였다. 하지만 토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계속 위협을 하고 도톰한 앞발을 휘둘러도 토끼가 겁을 먹지 않아서, 하나는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미루 공원 토끼들은, 이렇게 하기도 전에 겁에 질려서 나를 보면 도망갔는데. 그러고 보니 그 토끼들은 눈 같고 밤 같고 나무 빛이 났는데, 저 토끼는 꼭 진달래 같지 않나. 하나는 유리알 같은 눈을 굴리며 잠시 생각했다. 분홍 토끼도 먹을 수 있는 건지.

 

 

 

“순진한 놈.”

 

그러니까 분홍 토끼가 이렇게 말했을 때, 하나는 아주 그냥 깜짝 놀라버렸다.

 

“네가 왜 여기에 왔는지는 알아?”

 

하나는 다시 하악, 소리를 내려고 입을 벌렸다.

 

“시끄러워!”

 

그런데 사람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하나는 어디 사람이 있나 하고 두리번대보았다.

 

“뭐지? 뭐야옹.”

 

“고양이처럼 말하려고 애쓰지 마라.”

 

그제야 하나는 자기 입에서 사람 소리가 나오는 걸 알아차렸다.

 

“나는 고양이가 아니라 하나야.”

 

“언제부터?”

 

“저녁마다 와서 맛있는 걸 주고 물도 주고 쓰다듬던 사람이 내 이름은 하나라고 했단 말야.”

 

“그래서 사람을 믿어서 냉큼 품에 안겼니?”

 

하나는 저 진달래색 토끼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서 쪼쪼쪼, 소리를 내면서 나를 부르길래 좋아서 꼬리를 세우고 다가갔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 품에 나를 안았어...”

 

“그리고 차에 태웠지.”

 

“무서워서 계속 울었더니 그 사람이 그랬어. 이제 사람한테 의지하지 말고 야생에서 네 힘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라고.”

 

“미친놈. 지는 그럴 수 있대?”

 

“그러더니 한참이 지나서 난생처음 보는 곳에다가 나를 내려놓고 갔어. 밥을 주고 나를 하나라고 부르던 사람들도, 쪼쪼쪼, 하고 나를 부르던 그 사람도 다시는 오지 않았어.”

 

“그렇지. 너, 그다음부터 거기를 헤매다가 미루공원에 버려진 토끼들이 많은 걸 알고 공원으로 갔잖아. 네가 가기 얼마 전이 어린이날이어서, 그맘때 토끼 집단 유기 사건이 있었거든. 아무튼, 사냥도 못 하는 게 어설프게 토끼 몇 마리 잡아먹고 나니까 먹을 것도 없고, 서열 싸움에선 밀리고, 낯선 지역에서 배고프고 추워하다가 이리로 온 거야.”

 

“그 사람은 왜 거기에 나를 버려두고 갔을까? 살던 동네에서 나는 그럭저럭 잘 지냈는데.”

 

“재밌으니까.”

 

“뭐가? 나는 하나도 재미있지 않았어.”

 

“너 말고 그 사람한테 재밌으니까. 너를 괴롭히는 게 재밌으니까. 이유는 그게 다야.”

 

“나를 괴롭히려고 그랬다고?”

 

“그래. 이제 알겠어?”

 

“그럼 역시 그 사람은 내가 미워서 그런 걸까?”

 

“못 들었어? 재밌어서, 가 전부라니까.”

 

“...”

 

하나는 저 토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아?”

 

“하, 이제야 말할 시간이 왔군.”

 

분홍 토끼는 기지개를 쭉, 펴더니 커다란 귀를 펄럭, 펼쳤다. 그리고 그 귀로 하나의 머리를 포옥 감쌌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게 썩 기분이 좋다고 하나는 느꼈다. 토끼는 하나의 몸통을 귀로 똘똘 감았다. 그리고 둘이 함께 발을 디디고 있던 구름 위를 붕 날아올랐다. 아무리 봐도 토끼처럼 생겼었는데 비둘기였나 보다, 하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나가 무어라고 생각하든 엄연히 토끼인 분홍 토끼는, 하나를 데리고 거대한 토끼굴 입구 앞에 내려앉았다. 구름으로 가득한 곳이어도 토끼굴이 생긴 모양은 미루 공원에서 보던 것과 비슷했다.

 

“으악!”

 

그때 분홍 토끼가 하나의 등을 뻥 찼다.

 

“밍기적거리지 마!”

 

고개를 들자 분홍 토끼가 그렇게 말하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하나는 똑같이 성질을 내줄까 하다가 아무래도 무서워서 꾸웅, 하며 고개를 숙였다. 성깔을 보니 역시 토끼가 맞는 것 같았다. 하나가 떨어진 발밑에는 폭신폭신한 무언가가 가득했다. 하나는 토끼굴을 가득 채운 그것의 냄새를 킁킁, 맡아보다가 생김새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냉큼 입을 벌려 물었다. 토끼굴 안에는 진달래색 토끼들이 가득했는데, 모두 죽어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맛을 보고 금세 이건 먹을 게 아니란 걸 깨달은 하나는 시무룩하게 입에 문 토끼를 떨구었다. 죽으려면 우선 뛰어다녀야 했는데, 이 토끼들은 어째 그랬던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으휴, 이건 인형이라는 거야.”

 

“생긴 게 너랑 똑같아! 그럼 너도 인형이야?”

 

“나는 달라! 나는 살아있었다고.”

 

“살아있는 게 뭔데?”

 

“배고프고, 아프고, 똥오줌을 누는 것. 그리고 바람이 불면 시원해하고 햇빛이 비치면 따뜻하다고 느끼는 것. 밤이 되면 졸리고 추운 것.”

 

“나도 그랬는데? 그럼 나도 살아있던 거야?”

 

“그래, 바보야.”

 

분홍 토끼는 그렇게 말하더니, 하나의 이마를 슬그머니 핥아주었다. 하나는 꽤 기분이 좋아졌다. 토끼도 그랬다.

 

“우리는 매일 어마어마하게 많은 토끼 인형을 만들어서 지구에 뿌린다.”

 

“지구가 어딘데?”

 

“살아있는 것들이 있는 곳.”

 

“왜 거기에 이걸 뿌려?”

 

“사람들은 가끔 살아있는 것보다 인형을 좋아하니까. 너, 살아있는 분홍 토끼를 본 적 있어?”

 

“아니.”

 

“그렇지? 하지만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건 분홍 토끼라고. 왜냐?!”

 

그렇게 말하며 토끼는 토끼굴 벽 한쪽을 가리고 있던 돌문을 힘차게 밀었다.

 

“바로 우리가, 지구 인간들이 우리를 친숙하게 여기도록 만들기 위해 작업 중이란 말이다!”

 

앞발을 마구 휘저으며 킬킬대는 분홍 토끼와 하나의 앞에, 돌문 너머 풍경이 펼쳐졌다. 그 안에는 온통, 온통 진달래색 토끼들이 와글거렸다. 토끼들은 놀란 눈으로 귀를 삐죽 세우고 이쪽을 쳐다봤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고 하던 일에 다시 열중했다. 앞쪽에 있는 토끼들은 아까 본 분홍 토끼 ‘인형’에 눈알을 붙이고 있었다. 본드 칠을 하고 바느질을 하다가 피곤한 듯 눈을 깜빡거리곤 해서, 하나는 그 토끼들이 살아있나보다 생각했다.

 

“우리 분홍 토끼들은 지구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분홍 토끼 인형을 뿌리고 있지.”

 

분홍 토끼는 또 앞발을 뻗어 한쪽을 척 가리켰다.

 

“그리고 저걸 봐라! 우리는 캐릭터 개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진달래색 토끼 여럿이 삼삼오오 모여 벽에 붙은 종이를 보며 회의를 하고 있었다. 포스터 속 그림에서는 속눈썹이 긴 분홍 토끼가 입에 거품을 묻혀가며 핫초코를 먹고 있었다.

 

“지구 인간들이 너희를 친숙하게 여기면 뭐가 좋은데?”

 

“귀만큼이나 생각이 짧구나.”

 

분홍 토끼는 저 뒤쪽에서 무언가를 하는 친구들을 가리켰다. 그 토끼들은 넓은 모종판에서 당근을 거두거나 풀을 심고 있었다.

 

“지구 인간들은 당근을 좋아하지. 지구 토끼들은 라이스 그라스 같은 풀을 좋아하고.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식물들을 기르고 있다. 하지만 이건 그냥 식물이 아니야! 서로 잡아먹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성분이 아주 그냥 가득하지.”

 

“잡아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말도 안 돼!”

 

“그럼 네가 인간들에게 당한 일은 말이 되느냐?”

 

하나는 그만 말문이 막혀서 억울한 마음에 야옹, 하고 울 뻔했다.

 

“우리는 이걸 키워서 잔뜩 모아뒀다가, 지구의 살아있는 것들에게 온통 먹일 수 있을 만큼이 되는 날 작전을 개시할 거다.”

 

“무슨?”

 

“분홍별 이주 방사 작전.”

 

“이주 방사가 뭔데?”

 

“사람들이 뺏어간 분홍 토끼들의 언어.”

 

“대체 무슨 소리야.”

 

“아무튼, 더는 잡아먹지도 도망치지도 않을 수 있다니 멋지지 않아?”

 

“...”

 

“너는, 우리를 잡아먹을 때 재밌었니?”

 

하나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게 할 거야.”

 

“그런데, 그렇게 많은 당근이랑 풀을 한꺼번에 먹일 수 있어?”

 

“바보. 이미 작전은 시작됐다고.”

 

“응?”

 

“우리가 분홍 토끼 인형을 뿌릴 때, 풀이랑 당근도 슬쩍 같이 뿌리거든. 그걸 먹는 사람들은 서서히 세뇌되어 가는 거야. 우리 편이 늘어나는 거라고.”

 

“뭔 말인지 모르겠네. 어쨌거나 풀 좋아하는 인간들이 착하긴 해.”

 

“잘 알아들었군.”

 

“...아무튼, 나를 하나라고 부르던 그 사람들이 보고 싶어.”

 

분홍 토끼는 하나를 쳐다보다가, 옆구리에 몸통을 슬그머니 맞대며 말했다.

 

“그럼, 지금은 내가 불러주마.”

 

하나의 몸이 서서히 따뜻해졌다. 그리고, 분홍으로 물들어갔다.

 

“분홍별에 온 걸 환영한다, 하나.”

 

분홍토끼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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