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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C인사이드 판타지 갤러리 (이하 판갤)의 첫 작품집 [첫 번째 비상](김보민 외, Fangal.org, 2008년 12월)은, 그 이름만큼이나 아마추어적이다. 제책 방식부터가 학사 논문 수준의 투박한 검은 하드커버 제본이라 마치 70년대의 동인지를 보는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있지만, 수록된 작품의 수준에서도 역시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록된 작품 수는 22편, 422쪽으로 상당한 분량을 자랑하지만, 딱히 눈에 띄는 작품은 없다. 가장 잘된 작품도 돈 주고 사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으며, 부족한 작품의 경우에는 그것을 읽는 시간이 그다지 유용하게 쓰이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 유명한 DC의 분과 격인 동아리에서 만들었기에 선입견으로 짐작했던, 자극적인 유머나 비속어의 난무는 의외로 전혀 없다시피 했고, 오히려 표준적이다 못해 평이한 작품들만 모인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실렸다는 것이 판갤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판갤에서 활동하지 않았기에, 이것이 DC 인사이드 특유의 자극적인 내용들을 자체 검열한 결과인지, 아니면 함량 미달의 글들을 솎아내고 나니 남은 글들이 이런 것밖에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반적으로 너무나도 담백하고 평이하여 읽는 내내 양념 안 한 밀가루떡을 씹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제 작품을 하나씩 돌아보기로 하자.

 김보민의 {안개의 숲}은 제목이나 전개 부분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는 환상적 전개 외에는, 그저 흔하디흔한 문학 지망생들의 사소설 중 하나에 불과하다. 확실히 구성에는 별 무리가 없고 인물 표현은 꽤 괜찮으며 장면 묘사는 생생하다는 장점이 있다. 덕분에 이 단편집 전체에서 볼 때 상위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는 수준에 올라 있지만, 반대로 대단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어서, 소재도 주제도 서술도 평이하고 그다지 인상이 남질 않는다. 대중 소설보다는 순수 문학에 가까운 작품.

 {그들은 여신을 꿈꾸고 아마조네스는 눈물을 흘린다}라는 긴 제목을 가진 글은, 마초와 페미니즘, 기타 등등의 성에 관한 ‘현대적인’ 담론들을 성공적으로 풍자해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에 짤막한 두 개의 일화로 이루어져 있지만, 배경 설명도 집필 의도도 인물 묘사도 명확해서 유쾌하게 읽혀진다. 지나칠 정도로 비꼬인 마초이즘과 페미니즘은 특정 사상에 경도된 사람에겐 불쾌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균형과 통찰력을 잃지 않고 있다. 귀우혁의 글은 이것 외에도 두 편이 더 수록되었는데, 그 중 제일 나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단편집 전체에서도 가장 좋은 편에 속한다.

 말종메론의 {오컬트 박물관의 우울}은, 작품 안에서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사, 1996년 6월)를 언급하지만, 실제로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을 못 벗어난 글이다. 도시적으로 건조하면서도 산뜻 발랄한 아이스크림 같은 작품을 의도한 것이 분명하고 실제로도 그런 분위기를 내는데 성공했지만, 반면에 그 이상의 무언가를 느끼기는 힘들다. 매력적인 맛이 있지만 다 먹고 나면 뇌 속에서 스르르 녹아버려 무슨 맛이었는지조차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게 되는, 합성 착향제로 범벅이 된 것 같은 작품. 분위기는 나쁘지 않으나 읽어도 도움이 안 되는 글이다.

 {노래하는 도시}는 제목이나 내용 면에서 뒤의 {존재하지 않던 별}과 연작으로 쓰인 듯한 느낌이 들지만 명확한 연결점은 찾을 수 없다. 사실 이 글은 문학 작품이라기보다 소년 과학 잡지의 미래 예상 기사 같은 것으로, 아주 희망적이긴 하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자위적 문장의 나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소설로서의 가치도 전무하다. 그냥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런 글을 쓰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를 느끼게 해 주는 정도의 가치를 가진 글덩이.

 {존재하지 않던 별} 역시 {노래하는 도시}와 마찬가지로 니그라토의 작품이다. 이것은 그래도 비교적 소설에 가까운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별로 공감이 안 가지만 내재적 갈등과 외부적 위협 같은 것도 도입되어 있다. 하지만 마지막 뒤집기는 이야기를 완성하는 반전이라기보다 B급 공포 영화의 말도 되지 않는 후속편 암시 장면에 가까워, 쉽게 납득하기가 어렵다. 슬프게도, 이 작품은 이 단편집 전체로 볼 때는 딱히 하위권이라고 끄집어내긴 힘든 수준이다.

 Roland의 {필스터 가의 피}는 전세기 초의 탐정물이나 쓰릴러 소설을 닮았다. 분위기가 그렇고 이야기 전개가 그렇고 등장인물들의 설정이 그렇다.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그런 고전적인 분위기를 훌륭히 재현하는데 성공했음에도, 내용 면에서는 한 눈에도 보일 만큼 부실하게 짜인 얼개가 많아, 대가의 작품에 감히 비견되지 못한다. 겉만 그럴듯하고 알맹이는 거기에 못 미친다는 면에서, 그러나 그 알맹이가 또 딱히 거슬릴 정도로 나쁘지는 않다는 점에서 {오컬트 박물관의 우울}과 비슷한 작품이다.

 노기욱의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은 상당히 고전적인 느낌의 히로익 판타지지만, 개성 없이 선구자들의 설정을 앵무새처럼 따라 하는 양산품과는 격을 달리하고 있다. 주제도, 소재도, 구성도 모두 고전 느낌이 물씬 풍기지만 적절한 구도로 배치되어 있어 독자가 안정적으로 이야기에 몰입하게 해 주며, 특히 고전이나 아키타입에 대한 이해가 적은 사람이라면 아주 매력적으로 느낄 수 있는 흡인력을 가졌다. 게임에 빗대어 말하자면 D&D보다 디아블로에 가까운 느낌으로, 따지고 보면 새로운 건 없지만 읽는 동안 충분히 재미있다.

 {뮤즈} 는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씩은 다 건드려 보았을, 바로 그 뮤즈에 대한 글이다. 아주 흔한 소재인데다가 이야기를 서술한다는 점에서는 별 게 없지만, 장면을 묘사한다는 점에서는 마치 말라붙은 숲에서 잘 꾸며진 식물원까지를 한꺼번에 보는듯한 느낌이 상당히 좋다. 거기에 미묘하게 꼬인 결말이 작품 전체의 향취를 죽이지 않고 글을 읽은 후까지 지속시켜주는 느낌이다.

 미노구이의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감정입니다}는 글쟁이들이 한 번씩 건드려보고 싶어하지만 쉽게 다루지는 못하는 감정이라는 소재를, 정면으로 상대하여 아주 멋지게 요리해내고 있다. 도입 부분이 상당히 평범해서 처음에는 큰 매력을 못 느끼기 쉽지만, 절정 부분의 카타르시스는 상당하다. 다만 결말은, 이런 짧은 작품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납득은 되지만, 역시 B급 공포 영화의 어설픈 마지막 같아서 좀 아쉬운 면은 있다.

 {그가 내게 묻기를}에서 프로그래밍과 힌두 교리와 장자의 꿈을 결합한 17호의 통찰력은 대단하다. 질보다 양이 장점이라고 할만한 이 단편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작품이며, 별 볼일 없는 책벌레인 나로서는 이 작품에서 어느 한 줄기 뜯어내거나 버릴만한 부분을 찾아내지 못했다. 성과 쾌락을 표면에서 다루고 있는 것에 비해 주인공의 성격이 너무 중성적이라는 흠은 있지만, 그조차도 작품 안의 세계가 우리의 현실의 중복이 아니며 주인공이 프로그래머라는 특수한 직업인인 것을 생각하면 그리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이 정도 되는 작품이 두어 편만 더 있었어도 나는 이 책을 혹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래의 {아래에서} 는 어렸을 적 보았던, 지저인이 등장하는 이름 모를 SF를 생각나게 한다. (왠지 비슷한 설정을 가진 일어 중역판이었는데, 안타깝게도 희미하게 남은 단편적 기억만으로는 그 작품이 뭐였는지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당당하게 비현실적인 진행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인물들 덕분에 이 작품은 특유의 독자성을 지킬 수 있었으며, 건조한 웃음을 자아내게도 한다. 그러나 그런 특이성이 전부일 뿐, 개인의 잡상을 넘어 대중적 예술의 경지로 오르기에는 한계가 있다.

 호두빙수의 {미망}은 단편이라기보다 엽편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짧은 글이지만, 제목 그대로 미망에 대해, 인생과 집착에 대해 한번 생각하게 해 준다. 결코 나쁘지 않은 작품이나, 이 정도 분량의 작품은 어지간히 충격적인 것이 아니면 그냥 다른 작품에 묻혀갈 수밖에 없는 것이 단편집의 약점이기도 하다.

 {기관총수 리철민}은 6.25 전쟁 당시 사슬에 묶여서 죽을 때까지 싸워야 했다는 북한 학도병의 이야기를 새롭게 고친 것이지만, 그런 이야기를 어린 시절부터 수도 없이 들으며 자란 나로서는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리지널리티도 없고 그렇다고 이미 있는 기본 골격에 추가되는 요소도 없는 단순한 이야기의 재구성은, 그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모르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반공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어설픈 변주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희오의 {보이지 않는 세계}는 환상, 혹은 꿈과 현실을 나란히 늘어놓고서 서서히 합쳐가는, 이런 계열에서는 보편적이라고 할 구성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갈등 없는 서술의 계속으로 긴장감이 떨어지며, 결말 역시 무난하지만 와 닿는 것은 없는, 그저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글이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습작 이상의 가치를 주기는 어려운 작품.

 {화성에서 온 여자} 역시 17호의 작품이긴 하지만 {그가 내게 묻기를} 만큼 잘 짜여진 작품은 아니다. 적당한 쓰릴과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것 같은 구조가 일품이지만, 너무 정석에 따른 진행을 하다 보니 결말은 지나치게 식상하고 평범한 것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단편집 전체에서 볼 때는 물론이고 그냥 하나의 작품으로 떼 놓고 생각해도 꽤 괜찮은 수준인 것은 분명하며, 어떤 면에서는 통속적인 대중 추리 소설 같은 느낌도 드는 것이 재미있다.

 {누가 내 김치통을 건드렸는가?}는 같은 작가의 작품인 {미망}과는 전혀 궤를 달리하는 글이다. 담담하지만 흐뭇한 서민적 유머가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며, 이야기 전개도 조곤조곤 잘 되어 있다. 특히 탐정 만화에서 흔히 나오는 문제풀이 식의 사건 해결은 꽤 재미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전형적인 인물들은 글을 소설이라기보다 우화에 가깝게 만들어주며, 사건과 결말 자체도 대단할 것이 없어서 저녁을 배부르게 먹은 후 허리띠를 푼 듯 느슨한 느낌이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작품은 판타지와는 거리가 멀다.

 귀우혁의 작품인 {코페르니쿠스의 우울}은 특히나 사소설적이고 밋밋하다. 주제는 비교적 잘 드러나고 있지만 사건은 없다시피 하고 서술이 너무 평이해서 별 맛이 없다. 문학 작품으로서는 (작가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대중 소설로서의 가치는 전무하다시피 한 작품.

 노유의 {스트라이크} 블랙 코미디 SF 단편이다. 적당히 참신하고 적당히 활극적이며 적당히 비꼬아 놓았다. ‘육식을 탐하는 이성적 외계인’이라는 설정은 아주 매력적이고, 어딘가 배명훈의 SF를 생각나게 만드는 면도 있다. 블랙 코미디로서 당연한 결말을 적절히 제시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허전한 것은 내가 이 재미있는 작품에서 코미디 이상의 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니체리의 {소포클레스와 프로이트를 증오하며}는 제목 이상도 이하도 아닌 글이다. 오이디푸스 신화의 현대적 해석. 그 외엔 별 게 없다. 문장이 깔끔하긴 하지만 탁월한 정도는 아니며, 플롯도 캐릭터도 그냥 그저 그런 정도. 마치 탐 크루즈 주연의 우주전쟁이 H. G. 웰즈의 명작 소설을 범작 영화로 만들어버린 것처럼, 이 작품도 유명한 신화를 평범한 단편으로 탈바꿈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

 장세진 작 {딸기파이 살인사건}은 과장을 좀 보태면 웃대 추천 게시물들 중 하나에 끼어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글. 더 평가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호워프의 {나루터의 곰}은 이 단편집의 많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습작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는 글이다. 창작 수업 리포트로 제출하면 깐깐한 교수에게서 B+ 정도 받을 것 같은, 전형적인 자기 계발용 창작물. 나쁜 글들은 아니지만, 창작에 뜻을 두지 않는 이상 이런 글을 일부러 시간 내서 볼 가치는 없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 실린 귀우혁의 세 번째 작품 {무협연작: 남녀낙화}은 선연한 장면과 강렬한 캐릭터가 부각되는 작품이다. 하지만 중간에 쓸데없이 끼어 있는 설정 설명이 마치 최신 연출 기법을 사용한 무협 영화에서 갑자기 갱지로 된 싸구려 무협지가 튀어나오는 듯한 위화감을 느끼게 한다. 비현실의 극단으로 치닫는 캐릭터성은, 멋은 있지만 공감하기가 어려워 깊은 몰입을 주지는 못한다. 강하게 눈길을 끌며 멋있다는 감각을 이끌어내지만, 그 감각이 마음속의 감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하는 작품.

 이렇게 총 22편의 많은 글을 살펴보았다. 개중에는 분명 주옥같은 작품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는 아무래도 평균 수준이 높다고는 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읽는 것이 시간 낭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꽤 있었다. 차라리 함량 미달인 글 몇 개는 빼내고 300페이지 정도로 구성했으면 훨씬 가치 있는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다면 적어도 지금까지 거울에 리뷰를 올렸던 책 중 가장 재미없게 읽은 것이라는 평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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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집인지라 시간날 때마다 한두 편씩 보고 있습니다. 다 보고 나서 댓글을 달면 좋았을 텐데, 다 읽기 전에 거울 다음 호가 올라올 것 같아서요.
    르혼 님 말씀대로 이 책에 있는 글들은 어쩌면 너무 평이한 지도 모릅니다. 각 단편에 대한 평도 아주 맞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모든 책은 그 책을 읽는 방식이 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거울처럼 동인형태로 책을 많이 찍는 곳에서 올리는 동인형태의 책에 대한 리뷰라면, 작품집이 갖는 의의 역시 살펴봐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출판계에서 연 많은 공모전이 몇 회를 못 버티고 사라지고, 새로 열리는 거액의 공모전도 얼마나 지속될 지 의심스러운 지금, 한 사이트에서 수차 공모전을 열었고, 그 성과를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에 대한 가치 평가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지나치게 기성의 잣대로 가혹하게 평가하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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