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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lza2.compilza2@gmail.com1. 대화 소설

소설의 내용이 아무런 설명이나 지문 없이 인물간의 대화(채팅을 포함)만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흔치 않으나 몇몇 있다. 장르팬에게 유명한 작품으로는 환상문학웹진 거울에도 실린 테리 비슨의 {그들은 고기로 되어 있다}를 들 수 있으며, 호시 신이치의 단편 중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퇴마록]에도 PC통신상에서의 채팅만으로 이루어진 에피소드가 있다. 화제가 되었던 [전차남]의 경우는 실제 게시판의 대화 기록을 묶은 논픽션이지만 실제 주인공이 처음부터 출판을 의도하고 거짓으로 사건을 꾸몄다는 의혹이 있어(실제 한일 양국에서 소설로 분류되어 출간되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함께 다루어도 될 듯 하다.
   이러한 작품들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 대부분 실험적이거나 특수한 위트를 표현하기 위한 기교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만만치 않은 분량의 장편 전체를 오직 대화만으로 이끄는 작품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서문을 제외한 본문 전체를 컴퓨터의 채팅창 안에서 벌어지는 대화만으로 이끌어가는 이 작품은 작품의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이러한 무모할지도 모를 표현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렇듯 내용이 마치 채팅 로그를 보는 듯 인물 이름과 대사만으로 이루어지니 처음에는 술술 읽힐지 몰라도 갈수록 혼란스럽고 내용 파악이 어려워진다. 더구나 중반 이후, 잠겼던 방문이 열리며 밖에 나갈 수 있게 되자 대화보다는 각자 자신의 체험(밖에서 본 것)을 이야기하는데 주력하고 있어 더욱 혼란스럽다. 충분히 의도한 이러한 장치는 소설의 내용만이 아니라 외형부터 하나의 거대하고 복잡한 미궁을 이루고 있다. 그건 바로 ‘포스트모던’한 미궁이다.



2.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미궁

이 작품은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신화를 바탕으로 다시 쓴 소설이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미궁 이야기인 이 신화는 미궁과 수수께끼에 대한 소재와 상징으로 숱하게 인용되었는데, 설화와 전설에서의 전통적인 미궁은 주인공이 결국은 빠져나가는 시련으로 일종의 통과의례 역할을 한다. 하지만 보르헤스를 필두로 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서 미궁은 출구를 찾지 못하고 헤매는 혼란과 공포를 상징하게 된다.
   김성곤 교수가 언급했듯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주제 중 하나는 미궁 의식과 권위(아우라)의 상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자로 거론되는 보르헤스와 존 바스가 미궁을 소재로 글을 쓴 것도, 도널드 바셀미의 대표작이 동화 다시 쓰기(패러디)인 [백설공주]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주제가 [공포의 헬멧]을 설명하는 핵심이 된다.

   우선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미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미궁 의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외적인 구조를 보면 채팅방(독자가 눈으로 읽는 활자로 구현된)이 있고 그곳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인물들이 이유도 모른 채 납치되어 수감된 방이 있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서 각자 체험하게 되는 방밖의 공간(역시 밀폐된 혹은 출구가 없는 미로)이 있고 이 미궁의 수수께끼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인물 아리아드네의 초현실적인 꿈과 그 꿈 안에서 언급된 ‘공포의 헬멧’이 있다. 또한 그 꿈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으로 너츠크래커가 언급한 헬멧 속의 가상현실이 등장하여, 이 모든 체험이 하나의 가상현실일지 모른다는 의견(의혹?)이 제시된다. 이러한 ‘채팅방―구속방―방 밖―공포의 세계 혹은 가상현실’ 로 이어진 일련의 구조는 그 하나하나가 각기 폐쇄된 상태에서 다음 단계로 이어져 있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지적대로 아리아드네의 꿈을 통한 설명에 의하면 미궁은 헬멧 안에서 생겨난 것인데 그 미궁 안에서 공포의 헬멧이 출연하게 된다. 이는 자신을 그리는 손을 그리는 에셔의 그림과 같은 순환구조를 연상시키며 위의 구조가 사실은 서로를 감싸는(포함하는) 점층적 관계가 아니라 클라인 병과 같이 속과 겉이 이어진 순환 관계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작품이 그리는 공간이 실체가 없는 허상만의 세계라는 점이다. 이 소설 자체가 실제 인물들의 대화가 아닌 가상의 대화이며 조작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작품 전체를 통해(특히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두드러짐) 제시되는데, 가령 ID만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서술이 진실인지 거짓말인지, 이 ID를 쓰는 인물이 실제 존재하는지 전혀 보증할 수 없다. 익명성이 강조되는 네트워크의 세계에서 이러한 현상은 게임『타뷸라의 늑대』에서처럼 중요한 트릭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이 작품에서처럼 혼란과 불안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작품 자체에 대한 의심 역시 독자가 헤매는 미궁의 하나이다.
   또한 초반에 자신의 본명이나 지식 등이 삭제되는 일과 맞춤법에 대한 지적을 하며 제기한 의혹도 그렇고, 일시적인 버그나 조작로 여길 수도 있는 말미의 합창(?) 부분은 등장인물 전원이 테세우스일 수도 아리아드네일 수도 크레타의 왕일 수도 미노타우로스일 수도 있음을 말하는데, 이들은 모두 등장인물의 모든 행위와 발언이 조작 혹은 통제의 산물일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원래 소설이란 작가가 쓴 거짓임을 모두 알고 읽기는 하지만, 작품 안에서 구현되는 개연성과 사실감에 대해 의심하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관념/실체에 대한 부정에서 생겨난 이 글은 독자가 끊임없이 소설을 외적/내적으로 의심하고 혼란스러워 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당혹스러운(혹은 능동적인) 독서행위 자체도 결국 소설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결국 독자 역시 공포의 헬멧 안에서 미궁을 함께 헤매야 하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4장에서 다시 다루겠다).



3. 데이터베이스 구조로서의 미궁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미궁 안에서 등장인물은 결코 미궁의 구조도 출구도 실체도 밝혀내지 못한다. 처음에 잠겨 있다고 생각했던 문이 쉽게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모두들 각기 희망과 기대감을 갖고 방밖을 나서지만, 그곳엔 또 다른 미궁이 있을 뿐 다른 이들과 만나지도 못하고 저마다 다른 체험을 한 후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돌아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채팅창에 털어놓는다. 그 이야기는 하나의 큰 미궁 안에서 일어났다는 짐작만 될 뿐 각자 겪은 작은 미궁의 경험에 불과하다.
   이야기(미궁)를 하나로 모으고 결과(출구)를 제시하는 ‘큰 이야기’가 없다. 이는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말하는 데이터베이스 소비 구조와 같다. 종래의 이야기 구조를 하나의 원전이라 규정할 수 있는 큰 이야기가 있고 ‘나(독자/소비자)’는 그러한 큰 이야기의 부분/표피/복제와 같은 작은 이야기를 통해 전체를 파악해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데이터베이스 구조는 원전과 같은 큰 이야기가 애초에 없고 수많은 설정/작은 이야기를 통해 큰 비(非) 이야기=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간다. 이러한 데이터베이스 구조에서 원본과 복제, 원작과 2차 창작의 구분은 무의미해지고 대신 동등한 가치를 지닌 시뮬라르크가 무수히 많이 있을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제각기 ‘미궁’이라는 데이터베이스를 이루는 하나의 시뮬라르크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하는 진위의 파악이나 무엇이 상위인지 하위인지 하는 계층으로 나누는 일은 모두 무의미하다. 인물들이 가진 자신만의 공간(이야기)은 서로의 서술을 통해 알 수 있을 뿐 서로 만나지도 못했고 상대방의 공간을 가보지도 못했으니 그것이 사실인지 알지도 못한다. 결국 작품의 결말에서도 명확한 사건의 ‘해결’은 기대할 수 없다. 결국 미궁이 무엇인지, 미궁 자체가 가상현실인지 모든 수수께끼는 저마다 다르며 모든 게 진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실체 없는 가상의 미궁은 독자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보고 겪은 것의 총체(데이터베이스)이며 미궁을 파악하는 일련의 행위 자체가 미궁을 헤매는 탐험의 과정인 것이다.



4. 신화를 찾아 헤매는 탐험

세계 신화 총서는 신화를 소재로 한다는 것 외에는 내용상의 제약이 없이 작가에게 일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상당수 작가들은 신화 속의 인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거나 하는 식의 글을 쓰는데, 이 작품은 총서 안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이고 특이한 내용을 갖고 있다. 하지만 총서의 의도가 오늘날에 있어서 신화의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 작품이야말로 그에 가장 적합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신화는 인류가 낳은 가장 큰 이야기요 원전이다. 오늘날에 와서 신화는 아우라를 잃어버리고 패러디의 대상이나 이야기의 소재나 설정으로 소비되고 있는데, 이것이 신화의 몰락이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저자는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닐까. 앞서 언급한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미궁 의식을 상기하면 ‘신화 다시 쓰기’라는 주제에 대한 저자 빅토르 펠레빈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서문 ‘신화에 관한 잡설’을 통해 신화가 오류투성이 과거요 진보가 신화에서 멀어진 개념이라는 이분법을 부정하고 신화의 참된 의미를 탐구하고자 했다. 이러한 생각 아래에서 거대 담론의 실종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하나의 거대 담론으로 자리잡은 현대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데 가장 적합한 소재가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이야기이며, 미궁 속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는 행위가 데이터베이스 소비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앞서 2장과 3장의 말미에서 책을 읽고 미궁의 의미를 생각하는 행위도 미궁을 헤매는 과정의 일부라고 말한 바 있다. 미궁을 낳은 공포의 헬멧이 미궁의 일부인 것과 같다는 소설 안의 언급과 함께 생각해보면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 책이 말하는 미궁이란 책 안에 제시되는 인물들이 갇힌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인물들이 만든 여러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모인 책, 그 책을 읽은 독자들의 체험 전체를 아우른 데이터베이스를 뜻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명료한 해답(출구)을 찾아내기 어려운 일이다. 데이터베이스가 되어버린 신화 속을 헤매는 것은 실이라는 희망을 가진 테세우스보다 험난하고 비관적인 탐험이다. 그렇다 해도 시도할 가치는 있다. 이 [공포의 헬멧]은 하나의 원전이요 완성된 ‘큰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작은 이야기로 이루어진 데이터베이스의 일부임을 이미 말했다. 작품 말미에 암시했듯, 이 모든 사건은 각자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며 그것은 독자에게도 해당하는 일이다. 적어도 이 작품을 읽는 동안에는 독자 자신도 신화라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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