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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내 이름은 콘래드

2005.05.28 01:47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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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주





해마다 [내 이름은 콘래드]를 적어도 한 번씩은 다시 읽게 된다.

   물론 좋아하는 작가의 좋아하는 작품을 다시 읽는 행위는 그렇게 드문 것이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내 이름은 콘래드]를 다시 읽는 것에는 그 이상의 어떤―――뭐라고나 할까―――일종의 제의적인 느낌이 있다(이게 지나치게 거창하게 들릴만한 표현이라는 건 인정하지만 동시에 꽤 정확한 표현이기도 하다. 매년 한 번씩은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다시 읽는다는 크리스토퍼 “사루만” 리 선생이시라면 내 기분을 조금은 이해해 주실지 모르겠다). [내 이름은 콘래드]는 로저 젤라즈니 이야기의 원형이고 내가 좋아하는 그런 이야기 유형의 원형이며, 따라서 이 작품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그 원초적인 지점을 다시 확인하는 기분을 만끽하게 해주는 것이다.

   현학적(비아냥거림이나 장난기를 섞자면 “자기 과시적”)이기까지 한 문학적, 신화적 은유들, 반신에 가까운 남성 초인 주인공, “문학적인” 문장들, 화려한 액션 등 로저 젤라즈니의 주요 작품군에서 기대할만한 거의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는 이 작품은 한국에서는(외국이야 어떤지 알 도리는 없다) [신들의 사회]나 [앰버 연대기]와 같은 그의 다른 대표작들에 비해 천대 받는 듯 하다. 하긴, 굳이 다른 출판사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지 않고 책 자체만 보더라도 함께 실린 단편 {프로스트와 베타} 앞에 항상 한 발 뒤로 물러서야 했던 작품이긴 하다. 하지만 젤라즈니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던 {프로스트와 베타}의 완성도와 비교하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많은 훌륭한 작가들의 데뷔작들이 그렇듯―――혹은 대부분의 걸작들이 그렇듯―――이 작품 역시 과잉과 균열로 치장된 작품이다) [신들의 사회]나 [앰버 연대기]를 언급하며 주인공 성격이 여전해서 재미가 없다든지 스케일이 너무 작다든지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 작품의 열렬한 지지자로선 꽤나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젤라즈니 이야기에 흔히 따라붙는 은유나 아름다운 문장의 문제를 젖혀두고 [내 이름은 콘래드]가 정말 [신들의 사회]와 [앰버 연대기]의 불완전한 프로토 타입에 불과한 소품일 뿐인지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먼저 스케일 문제를 보자. 굳이 “젤라즈니 전담 역자” 강수백/김상훈 씨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에 수록된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폭풍의 이 순간} 등을 보자면 젤라즈니의 글 솜씨가 단편이라기엔 길고 장편이라기엔 짧은 어느 지점에서 빛을 발하는 경우가 잦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신들의 사회]와 [앰버 연대기]의 지지자들이 이런 “소박한” 중편들(물론 글의 길이가 작품의 스케일을 결정하지 않음을 우리는 폴 앤더슨의 시간여행 단편 {영원으로의 비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젤라즈니의 중편들은 낚시를 하고, 시를 쓰고, 수해 대책 본부를 운영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마저 스케일이 작다는 이유로 등한시하지 않는다면, 굳이 [내 이름은 콘래드]만 작은 스케일을 문제 삼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지구를 구하는 문제인데 스케일이 작다고 하면 그것도 나름 아쉬운 일이다.

   물론 제법 큰 차이가 있긴 하다. [내 이름은 콘래드]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신화에서 잘라 붙인 [신들의 사회] 이상으로 신화에 기대는 부분이 크다. 그렇지만 작품 자체가 그 신화의 이미지를 특유의 거창함을 통해 확장시키면서 그 자신이 또 하나의 신화가 되지는 못하는 듯 하다(혹은 그럴 욕심이 없는 듯하다). 아마도 이런 점에서 독자들은 [내 이름은 콘래드]를 다른 중편들보다는 젤라즈니의 대표 장편들과 비교하며 스케일을 이야기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러나 [내 이름은 콘래드]가 그 “신화적 스케일” 때문에 닿지 못한 지점이 있다면 동시에 그 “소박한 스케일” 덕분에 닿은 지점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에서 콘래드 노미코스가 [신들의 사회]의 샘이나 [앰버 연대기]의 코윈과 같은 인물이라는 지적에 고개를 갸우뚱 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세 사람 모두 압도적인 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인물이며(사실 여기서부터 뭔가 이상하다. [앰버 연대기] 초반부 코윈의 투쟁 대상은 콘래드나 샘과는 한참 달라 보인다. 그는 정권을 노리는 야심가이고 복수에 불타오르는 자이지 억압적인 체제를 전력을 다해 두들기려는 존재는 아니다. 젤라즈니의 캐릭터를 지나치게 획일화하는 것은 그다지 옳지 않다고 본다. 캐릭터는 그 자신 이상으로 주변의 갈등에 의해 규정되므로), 젤라즈니 특유의 냉소적인 초인 이미지, 그리고 다중 자아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콘래드의 위치는 샘과 코윈의 그것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핵전쟁 이후 외계인인 베가인들에 의해 휴양지용 부동산 신세로 전락한 지구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 투쟁한 집단 래드폴의 창시자 콘스탄틴 카라기오시스의 이야기는 분명히 [신들의 사회]에서 천상의 신들에 맞서 싸운 촉진주의자 샘을 연상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과거의 일이며 이제 그는 “카라기오시스”가 아니라 “콘래드”(“내 이름은 콘래드야!”)라는 사실이다. 래드폴의 저항으로 인해 베가인들의 간섭이 정체된 상황에서 래드폴 일을 그만 두고 지구 정부의 예술 유적 문서 보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콘래드는 어느 날 은하계의 저널리스트 코르트 미슈티고를 대륙의 오염지대(지구는 핵전쟁으로 인해 대부분 오염된 상태이고 사회는 도서 지역을 중심으로 이뤄져 있다)로 안내하여 그의 조사를 돕는 임무를 맡게 된다. 콘래드의 일행에는 그의 친구들과 더불어 래드폴의 서기장 도스 산토스 일행이 포함되는데, 그 중에는 전설적인 암살자 하산도 끼어 있다. 그 누구도 미슈티고가 정말 책을 집필하기 위해 지구를 조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가운데, 래드폴 측은 아마도 그가 다시 “부동산 조사”를 위해 왔으리라고 추측하여 그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콘래드는 둘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여기서 콘래드의 갈등은 분명히 샘이나 코윈이 가진 갈등과는 사뭇 다르다. 그에게는 예전처럼 굳건히 의지할만한 이상이 없다(래드폴은 지구로의 귀환주의를 주창하지만 이제 그는 지구로 돌아오는 지구인들은 아무도 없음을 알고 있다). 그는 여전히 지구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고, 과거 저항 시절의 영광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에게 따뜻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미슈티고를 보호하는 데에 (냉소적이긴 하지만) 헌신적인 인물이다. 즉, 그는 두 가지 대립되는 이상 속에서 갈등하고 있으며,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 수 있을 만한 증거가 없기에 결정을 지연시킨다. 이와 같은 콘래드의 성격은 상징적인 몇 개의 사건들 속에서 이야기의 핵을 이루는데, 이는 분명 [신들의 사회]나 [앰버 연대기]가 보여주는 정쟁 음모극의 외부적 싸움과는 다른 형태의 내부적 투쟁이다. 그는 이미 어떤 방향으로든 명백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산 인물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하고 싶은 이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 모순적인 인물이다. 그렇기에 [내 이름은 콘래드]는 읽으면 읽을수록 주인공의 헤라클레스식 업적보다는 햄릿식 갈등 상황이 돋보이는, 일종의 영웅-심리 소설이기도 하다. 물론 [신들의 사회]와 [앰버 연대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심리가 얄팍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외부적 투쟁의 끝 무렵에 변화하는 것과 달리 콘래드는 이미 한 차례의 투쟁을 거쳐 변화를 겪은 인물이며, [내 이름은 콘래드]는 처음부터 그의 그런 성격을 면밀히 다뤄나가고 있다.

   몇 번을 되풀이해 읽은 다음에서야 나는 이 사실을 뒷받침 할만한 이 작품의 주목할만한 특징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영웅” 콘래드가 거의 모든 위기 상황에서 최후의 해결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부두교 의식 중 폭주한 하산을 쓰러뜨리는 것은 미슈티고이고, (일행들을 위협하게 되는) 콘래드 자신을 막은 것은 하산(의 롤렘)이며, 보아딜레의 공격을 저지한 것도 하산이다. 콘래드와 하산의 결투는 콘래드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쿠레테족의 습격으로 인해 무산되며, 사자(死者)를 쓰러뜨리는 것은 하산, 붙잡힌 콘래드와 하산을 구하는 것은 사냥개 보르탄과 사티로스, 흑수(黑獸)를 죽이는 것은 카산드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구를 구하는 것조차 미슈티고 일족의 힘이다. 흥미롭게도, 콘래드는 보통 갈등 앞에서 행위를 시작하는 원인 제공자이지(“나는 언제나 충동적이다. 생각은 대체로 깊은 편이지만, 늘 말부터 먼저 꺼내놓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러고 나면 대게는 더 이상 대화를 이끌어나가기 힘들어진다.” / “당신과 함께 일할 때면 언제나 힘든 일이 생깁니다, 카라기.”) 결과를 만드는 인물이 아니다. 그는 일을 만든 뒤 그것을 고민하는 유형의 인물이며, 따라서 그는 어떤 면에서 파괴를 꿈꾸는 진정한 칼리칸자로스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논의대로, 칼리칸자로스의 파괴는 곧 생성의 다른 말이 된다(그렇다면, 피라미드의 파괴를 되돌려 재생하는 것은 예술일 수 있을까?). 그가 저지르는 모든 일들은 (액션을 두고 말하자면 다소 유치한 감은 있으나) 자신 외의 다른 이들이 활약하고 문제를 해결할 여백을 제공하는 배경이 된다. 따라서 [내 이름은 콘래드]의 콘래드 노미코스는 모든 일을 앞장서서 해결해내는 서사 무용담의 파괴적 영웅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절름발이-추남-헤파이스토스-대장장이로서 세상을 파괴한 뒤 부활시켜 다른 이들로 하여금 거기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창조자로서의 영웅이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젤라즈니가 창조한(그리고 우리나라에 소개된) 모든 영웅들 중 가장 납득할만한 인간적인 영웅이다. 콘래드 또한 세상을 바꿔보고자 하는 이상적인 바보이지만 그의 고뇌와 고통은 결과적으로 그 어떤 다른 작품들의 결말보다 더 부드럽고 즐거운 결말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분명 독자가 로저 젤라즈니의 글에서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결과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그리고 이 글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 이름은 콘래드]가 [신들의 사회]나 [앰버 연대기]처럼 그 자체로서 하나의 신화가 되지 못할 건 또 뭔가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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