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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chizedek@naver.com   1. 가연 단편선, [신체의 조합]

   나는 이 작품집이 가연의 전부를 보여주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연의 이제까지의 흔적, 즉 이제껏 그가 걸어온 작품관을 이만큼 또렷이 보여주는 서적도 없다고 생각한다.(물론, 이제껏 내가 본 것이라곤 넷상에서의 몇몇 단편들과 거울 단편선에 실린 아도니스 정도뿐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가연이 가진 가능성과 아직 가능성으로만 남아있는 몇 가지 아슬아슬한 심리적 경계를 본다.

   단편들을 모아놓은 단편선이란, 그것도 한 작가 개인의 작품만을 모아놓은 개인단편선이란 그 의미를 정의하기 모호한 구석이 많다. 테드 창의 단편선처럼 다년간의 다채로운 성과작을 내놓은 것이 있는가 하면 이영도처럼 못다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장편의 연장선상 같은 작품도 있다. 어떤 경우엔 그저 작가의 유명세를 타고 출판된 기대에 못미치는 작도 있을 수 있다. 개인단편선에 실린 단편들의 성격은 그 작가가 혹은, 편집장이 무엇을 나타내고 싶어했는가에 따라 판이하다. 같은 작가가 썼는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른 작들의 모음인 경우도 있고 연속해서 읽으면 지루할 만큼 패턴이 반복되는 글들도 있다. 가연단편선은 이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단편선에 수록된 아홉 개의 작품은 다르면서도 미묘하게 닮았다.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소재 자체도 다양해서 지루함은 주지 않을지라도, 이 작품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는 한결같이 한 가지 줄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 단편선은 다채로움과 지루함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편선 전체가 꿰뚫고 있는 삶에 대한 일관된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은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혹자는 한 번 읽고 아직도 멈추지 않은 갈증을 느끼며 첫페이지를 다시금 펼쳐들지도 모르겠다. 나는 후자에 속했다.

   그렇다. 분명 흥미롭고, 멋지다.
   한 번쯤 길게 이야기 해 보고 싶을 정도로.



  2. 진득한 에로티카; 가장 소중한 것, 愛

   {아도니스}가 꽤나 성공적으로 팔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가분이 로맨스 분야에 있기 때문일 거라고 살짝 겸손한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아도니스가 로맨스적인 성격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외의 좀 더 독특한 측면이 아도니스를 정의한다. 그것은 로맨스보다도 진하며 강해서, 독자의 마음을 미묘하게 잡아끈다.

   가연단편선은 ‘사람’간의 미묘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맨스 소설과 비슷하다.(가연은 기본적으로 화자의 심리 변화가 중심이 되는 인간주체의 이야기를 쓴다.) 하지만 가연의 이야기들은 사람간의 관계를 단순히 남/녀, 애/불애로 이원화 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점이 가연의 이야기들을 로맨스보다 좀 더 특화되고 깊이 있게 만든다.
   사실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가연단편선은 로맨스라기보다는 18금 에로물에 가깝다. 처음에 소설을 읽었을 때 작가가 생각보다 과격하게 이야기를 끌어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 작가가 사건을 서술하는 방식은 그리 파격적이지 않다. 그저 사건 자체가 파격적일 뿐이다. (그런데 읽다보면 당연하게 느껴지니 작가의 필력이 감탄스럽다.) 근친상간적 성향과 동성애적 코드, 일명 3p라 불릴 만한 관계형식에 이르기까지 가연이 인간관계를 이원화 시키지 않음으로서 발생하는 여러 조합은 실로 재미있고 흥미롭다.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 은근슬쩍 드러나는 그런 코드들은 잔잔한 서술과 부딪혀 꽤 큰 반향음을 낸다. 에로틱을 넘어서 좀 더 찐득한 느낌을 발하는 미묘한 경이감, 일반적인 관계 성향을 넘어섬으로서 보이는 또 다른 지평선들. 그것이야말로 진정 에로티카라 부를만 하다.

   가볍게 愛라고 표제했지만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관계 지향점을 딱히 표현할 언어가 없었기에 썼을 뿐, 정확한 단어는 아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사랑과 닮았지만 아주 미묘하게 다르다. 단순한 사랑보다 시작점은 감정적으로 깊고 도착점은 이성적으로 냉철하다.
   일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랑을 구하는 방식은 괴상할지라도 가연단편선의 화자들이 인간관계를 구축하는 시작점은 감정적으로 훨씬 더 긴밀하다. 동성애, 근친상간, 3p로 보이는 행위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바에 따르자면 도착(倒錯)적인 것이 아니라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행동이다. 「누가 나의 오리…」에서 보여주는 비틀어진 남녀의 구분점은 「밤의 시간」에서 ‘성별이 달라도 종도 다르면 싫다. 같은 종이라도 성별이 같으면 그것도 싫다. 넌 도대체 뭘 기준으로 같고 다른 것을 나누는 거냐?’라는 화자의 친구의 일갈을 통해 통쾌하게 부서진다. 이미 혼란해진 일반적인 관점은 「신체의 조합」에 이르면 공중분해된다. 도대체 인간이란, 인간과 인간의 관계란 무엇이란 말인가.「완전한 결합」에서 아메, 주트, 샤하의 구분법은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만은 아니다. 멀게는 이집트의 바와 카와 아크트 사상,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에서 가깝게는 우리의 천지인 사상에 이르기까지 3이라는 숫자는 완전한 합일을 의미했다. 세 명의 성행위는 오히려 둘로는 도달할 수 없는 극의 이해상태를 가능하게 하는 관점이다.

   이렇듯 가연단편선의 화자들이 다양한 관계성을 통해 추구했던 것은 그들에게 있어 잃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 그들이 ‘그것’을 찾는 과정, 그리고 찾은 후의 여정이 이 단편선 전체를 꿰뚫고 있는 핵심이다.
   소설의 주인공이나 화자가 가지게 되는 인간관계는 일반인도 한 번쯤은 절실히 소원하는 소울메이트찾기와 닮아있다. 그것은 성별, 나이, 국적을 초월하며 여러 가지 관계의 조합으로 추구된다. 단편 하나로 읽었을 때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을 이것이, 단편선이라는 이름 아래 모이게 되자, 작가가 얼마나 동분서주하게 움직였는지 알 수 있다. 사회의 통념도 상관없으며 주변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는다.
   가장 자신의 영혼 깊은 곳을 울릴 수 있는 관계맺기, 그것은 사회적으로 인정받은 남녀 배우자 간의 교류를 뛰어넘는 그 무엇이다.



   3. 소중한 것, 잃다; 喪失

  그런데 이런 일렬의 과정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공통점 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주인공들이 결국 소중한 그 관계를 ‘상실’하게 된다는 점일 게다. 재미있을만치 단편선의 작품들은 하나 같이 주인공이나 화자가 무언가를 잃은 후(그것은 하나일 때도 있고 복수일 때도 있다)에 종결된다.

   가연 단편선의 표제작이자 대표작이라 할 만한 「신체의 조합」은 탁월하다. 도입은 플라톤의 동굴론을 떠올리게 할 만큼 형이상학적이고 기호학적이며 신화적이다. 그것들이 담고 있는 상징들을 떠올리다 보면 어느 새 그것은 초등학생이 만든 찰흙 인형들처럼 이곳저곳이 부서진 채 짜맞춰지지 않는 퍼즐조각이 된다.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시키는 탈출신 후에 남는 것은 끝없는 자괴감이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데아적 환상이나 환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가연단편선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극단적으로 부풀리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매우 뛰어나지만 그만큼 불안하고 위태롭다. 비평가답게 이 상징을 작품 외부적으로 분해하기 전에, 나는 이 작품을 가연단편선 전체를 해석하는 데 먼저 사용했다.

   얻은 것과 잃은 것의 무한 제로섬 게임, 가연은 인간관계를 그렇게 정의한다.

   「신체의 조합」에서 화자는 마치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바로 완전한 신체의 복구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 자체는 목적이 아니다. 화자는 신체를 완전하게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안정성을 통해 더 이상 악귀처럼 뺏고 뺏기는 싸움이 아닌 이성적인 교류와 화합을 원했다. 오히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는 탈출 후보다 탈출과정을 통해 그 교감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탈출 후의 세계가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망가져 버린다. 과정은 어디까지나 과정일 뿐, 추구하는 자체가 될 수 없다. 그런데 그 추구하는 목표가 잘못된 것이라면? 결말에 그가 망가뜨리는 것은 자신의 신체가 아니라 이미 잃어버린 목표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는 일견 화자가 교감했던 것이 마치 인형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리아로가 마지막에 네므를 죽이는(?) 사건을 통해 그녀가 진정으로 교감하고자 했던 것은 인형 자체가 아니라 인형을 가짐으로 생기는 이해자, 인간 친구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좌절되었을 때 리아로는 더 이상 인형을 가지고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신체의 조합」의 화자가 원했던 것이 완전한 신체가 아니라 완전한 공동체였듯이 리아로 역시 인형을 통해 남들과 다른 특별한 교감 공도에를 이루고자 했던 것이다.
   소설의 화자들은 일반인들보다 좀 더 깊은 관계를 원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정에 굶주려 있고 사랑을 주기를 원한다. (이것도 재미있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하기 마련인데 가연의 화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퍼 줄 만한 인격체를 찾는다.) 하지만 결국 그 관계성은 다시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부서지고 만다.



   4. 소중한 것, 원래 없었다; 不在

   하지만 잃은 것 자체가 그 사람에게 커다란 심리적 압박감을 줄지라도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별 타격을 주지는 못한 것처럼 보인다. 이 점이 일반적인 남녀의 사랑의 끝마무리와 다른 점이다. 당신은 「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의 화자가 앞으로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 보는가. 「완전한 결합」의 사스카, 그녀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울음을 그칠 수 없을 것이라고 보이는가. 「루운 평원」의 키건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이는가.

   그들의 시작은 사랑보다 깊은 감정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잃은 후 돌아서서 회복하는 속도는 생각보다 빠르다. 그것은 단순히 작가의 담담한 서술 방식 때문일수도, 그 깊이를 알 수 없게 위장하고 있는 본인들의 허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근원적으로 그들이 그리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은 본래 그들이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 소중히 붙들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 자체가 완전히 허구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원했던 관계는 처음부터 대상이 존재 할 수 없었기에 포기하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다른 사람들처럼 단절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깨닫고서.

   그렇다. 사실 그들은 ‘상실’한 것이 아니다. 단지 처음부터 그들이 추구하고 있었던 목표 자체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뿐이다. 처음 벽에 도달했을 때 그들은 이건 뭔가 잘못된 거야(「신체의 조합」) 라고 절규하며 그들은 소중한 인형을 찢고(「나의 사랑스러웠던 인형 네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완전한 결합」) 하지만 결국 그 목표가 얻을 수 없었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빠르게 현실로 복귀한다. 잠시간 애도하고 애통해 하기는 하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당면한 현실을 인정하고 돌아서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청소년시기, 한 때의 사춘기를 닮았으며(「왜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지?」) 통찰하기 힘들 정도로 짧은 찰나의 순간(「루운 평원」)이기도 하다. 남는 것은 씁쓸한 여유와 돌아오지 않을 정열에 대한 회상뿐이다.

   그들은 담담하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는 짙은 절망감과 좌절은 감정의 격렬한 폭풍이 지나간 이성적인 냉철함 앞에서 잔잔하게 포장되고 부드럽게 서술된다. 그래서 더 씁쓸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지고 있는 절망의 깊이에 비해 너무나 침착한 화자의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더욱 혼란스럽다. 화자는 이미 포기하고 인정한 부재의 사실에, 독자만은 어쩐지 안절부절하게 된다.

  가연 단편선의 재미는 여기에 있다. 작가가 던진 화두를, 이미 포기해 버린 화자를 대신하여 독자는 이어받는다. 영혼과 영혼사이의 밀접한 교류, 그것은 과연 불가능할 것인가? 포기하고 돌아서는 화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번엔 독자가 그 바톤을 이어받아 고민하기 시작한다.
   좀 더 적극적인 읽기가 시작되고, 평범한 일상에서 예전에 잊고 있었던 순수를 떠올려 본다.
   이렇게 가연의 환상단편은 존재의 희구(希求)로 우리를 이끈다.



   5. 가연, 멈춰 선 절망

   가연 단편선 [신체의 조합]은 인간의 관계적 성향을 골똘하게 탐구하는 연구보고서다. 탐색하고 실험한 자료들이 한 켠에 모여 연구 결과를 완성해 낸다. 각각의 단편(斷片)들은 그 자체로도 재미있는 빛을 발하지만 하나의 결과물로 산출된 순간, 더더욱 흥미롭다. 공통점과 차이점, 획득한 것과 상실된 것의 대비. 이런 것들은 가연단편선을 다르면서도 비슷해 보이게 한다. 내가 보았을 때, 그것은 상실과 부재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연결된다. 잃은 사실에 절망하는 그에게, 실은 원래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작가는 차갑게 말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파라다이스를 꿈꿨던 이야기 조각들은, 그래서 더욱 쓸쓸하다.

   가연 단편선을 읽는 것은 재미있는 여가였고 흥미로운 작업이었지만 그 끝이 어쩐지 쌉쓰름하기도 하다. 단편을 읽으며 어딘가 끊어진 듯한, 미완성의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파국을 향해 가파른 곡선을 그리는 호흡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파국 자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작품 자체가 가지는 한계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약 작가가 이야기를 만드는 데 있어 현재 어떤 벽에 부딪혀 있다면 그것은 형식적인 문제는 아닐 것이다. 단편에서 보여진 작가의 세계관은 절망이었다. 좌절이었다. 그냥 좌절이나 절망도 아닌, 침체되고 오랫동안 고여 있는 멈춰 선 절망이다.
  가연의 단편이 앞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로 하는 것은 적당량의 완급조절이 아니다. 기승전결의 조화로움도 아니다. 진정으로 작가를 성장시키는 것은 세월이며 경험일 것이다. 지금은 침제되어 있는 작가의 세계관이 언젠가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때, 소설 또한 앞으로 한 단계 도약하게 될 것이다. 현재의 작품도 좋지만 나는 그 이후가 더욱 기대된다. 아직 이 한 단편선으로 가연의 모든 것이 보여졌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과정이며 앞으로 도달할 곳을 향한 수단이 될 것이다.



   가연 단편선을 읽는 것은 행복한 경험이었다. 독자에게 화두를 던지고 대화할 수 있게 만드는 책은 그리 흔하지 않다.
   가연 단편선은 작은 책이지만(물리적 크기로 보나 출간목적으로 보나) 읽는 재미는 작지 않았다.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자의식 과잉 환자들이다. 마음속에 담아둔 것을 삭이지 못해 뱉어내는 글쟁이는 얼마 정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불쌍한 정신병자다. 사실 이렇게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말은 단 한 단어면 족했다.
   ‘참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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