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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사 (gardener_77@hotmail.com)



몇 년 전 온라인에 돌아다니던 지도를 기억한다. 아마 미국인들이 본 세계 비슷한 제목이었을 것이다. 미국만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고 그 외에는 소수의 ‘우방’과 ‘적’만이 모호하게 존재할 뿐인, 수많은 나라와 그 안의 문화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지도.

[마음의 땅, 보이지 않는 자들]. 이 나라 저 나라에 흩어져 있는 쿠르드족의 서사시를 기록한 이 책을 잡으면서 문득 그 지도를 떠올렸다. 물론 미국 외에 다른 세계를 보지 못하는 미국인들의 오만함을 비웃기에는 우리 역시 너무나 편협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세상에 내가 알지 못하는, 그래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나라나 민족의 이름을 안다고, 혹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안다고 착각하는 일조차 수없이 많으니 알지 못하는 것들이야 오죽하랴.

물론 개개인이 전세계의 모든 문화와 민족에 대해 알 필요는 없으며, 그런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그 방면의 전문가로 족하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수없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알고 사는 편이 좋지 않을까. ‘알려지지 않은 쿠르드족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책을 다 읽고 제목의 의미를 생각하다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사명감을 품고 읽으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멀고 낯선 세상들을 한 조각이나마 들여다보는 재미를 모른다는 것도 아까운 일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다.

이라크 파병지 때문에 조금은 귀에 익?이름이 되었을까. 쿠르드족은 현재 이라크에 약 300만 명, 터키에 1000만 명, 이란에 500만 명, 그밖에 시리아 및 구소련 아르메니아 등의 지역에 4천 5백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숫자를 가지고 말한다면 절대 ‘소수민족’이라는 이름이 붙을 입장이 아니다. 그런데도 8천 년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쿠르드족 주체의 독립국이 존재한 적 없기에 이들의 입장은 철저히 ‘약자’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쿠르드족의 복잡한 역사를 반영하듯, 이 책을 읽다보면 조로아스터교,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마니교는 물론이고 현대적인 종교 해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과 신화와 교리가  아른거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창조에서부터 이어지는 여러 줄거리는 구약과(정확하게는 그 이전에 존재한 수메르 신화와) 비슷하고 빛이 창조됨과 더불어 어둠이 생겨났다는 대목은 조로아스터교를 떠올리게 하며 줄곧 강조되는 ‘결과들의 사슬’ 같은 철학은 천도(天道)마저 연상시킨다.

뿐인가. 인간이었다가 죽어 신성을 얻은 탐무즈가 돌아와 던지는 질타 - “현인 중의 현인들조차 삶의 가장 간단한 법칙인 상호 관용과 존중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인류가 언어들의 암초와 관념의 다양성, 민족들의 경계와 피부색의 다양성을 극복하겠느냐?”―――는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비추는 듯 뼈저리게 다가오며, “……그 중에 단 한명도 무한한 자유만이 신성의 개념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같은 대목은 불교 이래의 인도 전통에 가깝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복합에 서구적인 성찰이 더해져 있다는 점에서, 이 서사시의 몇몇 부분은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짜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가 쿠르드족 출신이었음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시점에서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란 조금씩 수정되기 마련. 이 책에 쓰인 이야기들 역시, 저자가 선조들로부터 전해진 대로 ‘외웠다’고는 하지만 매번 조금씩 살이 붙고 새로운 생각이 가미되었을 것이다. 강자와 약자, 관용의 부족, 서로를 증오하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철학들을 찬찬히 읽다보면 특히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마음의 땅으로, 자신들만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절실한 마음은 물론이고.

“그리고 자기들의 나라에 시움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비국(非國), 또는 무인지대라는 뜻이었다.”

시움은 깊은 산속에 자리를 잡고 현인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다가, 모든 민족이 신을 버리고 그 대가로 세운 독재자 아래 신음할 때 유일하게 그에 맞서 싸운 나라로 나온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쿠르드족이 원하는 자신들의, 자신들만의 나라가 아닐까. 역사적으로나 신화적으로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도 말이다.

저자인 힐미 압바스는 압바스 왕가 혈통으로 쿠르드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고 독일에 살면서 어린 시절 외운 이 전승을 출간했다. 그러니까 국내판은 독일어 번역인데, 번역이 다소 딱딱하고 조심스러운 데다 특히 앞부분에 관념적인 서술이 많아서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은 각오해야 한다.

3백쪽이 조금 넘는 책 안에 창조신화, 인간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자비로운 신과, 대홍수,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땅을 찾아간 이들의 이야기, 수많은 사제와 신전이 창궐한 시기, 망각의 시기, 신들을 버리고 무서운 독재자를 세운 뒤의 암흑기, 그리고 그 지배에 대항하여 싸워 이긴 이들의 이야기가 모두 담겨 있고 이 많은 이야기에 철학적인 사색까지 함께 담겨 있으니만큼 쉽고 편하게 읽힌다면 더 이상한 일이리라. 그러나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과 들어볼 가치가 있는 이야기라면 모두 그렇듯, 끝까지 읽은 독자라면 그 인내심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우리의 신이 되리라"고 외치며 신을 모두 버리고 대신 신인을 자칭하는 독재자 밑에 엎드린 75민족이 산악민족(쿠르드의 뿌리로 여겨지는)과 벌이는 전쟁과 그 결말에는 장엄한 비극의 무게마저 담겨 있으니.



   목차

   1부   내 자신의 거울이 되어라
   결과들의 사슬|내 자신의 거울이 되거라|모든 속박에 대한 부담 없이|박명의 왕국들|보이지 않는 자들|물질적인 것의 한계|힘의 신비|미완성인 자들|암샤스판드 - 편재하는 자비|운명의 물|뮈모 괼뤼 - 지상의 고난의 호수|찬가|불결한 정령 디브|술의 정령들 뉘칸|인간의 자아

   2부   만물을 정화하는 물
   최종적인 것|계단들의 혼란|환영들|질서|메산나파다|물의 광란|사절 퀴르드탐|만물을 정화하는 물|달의 반사광|새로운 삶|주어진 것의 왕국|인간의 두 형상|지식의 힘|전지한 자들|탐무즈

   3부   신성을 얻은 인간과 민족의 탄생
   왕의 사자들|신성에 대하여|바람의 형상들과 삶의 비밀들|생각의 힘|인간 탐무즈 신성을 얻다|어떤 상하고도 닮지 않은 상|생각의 다양성|인간 민족|타라라타|정화하는 불|북들의 언어, 전쟁|조약 때문에|번개를 던지는 자|점쟁이|무인지대

   4부   우리가 우리의 신이 되리라
   폭풍의 법칙|태초의 우주를 향한 회귀|수나 예일라 티부코|전투의 노래, 생각의 힘이 내뱉은 말|침묵하고 무서운 자|법의 지배|불화, 폄훼, 시기|첫째이자 최고의 법|전쟁의 신 즈소르고르흐|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모든 한도의 동등함|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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