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타워 - 사회과학적 상상력 또는 생활의 발견


명훈  (녹음기에 가까이 대고) 자, 그럼 이제 타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어떻게들 읽으셨나요?

SeeReal  우리가 인터뷰 당하는 거군요. 제목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어쩜 그렇게 제목이 단순해요?

자하  원래는 가제였죠? 타워. 처음에 가제라고 붙어서 나왔는데.

명훈  첨에 왜 가제라고 나왔을까. 그 시점에는 확정이었어요.

SeeReal  아니, 타워로 검색하면 일단 도쿄 타워, 다크 타워… 다른 타워들이 먼저 나와요.

명훈  근데 오멜라스 편집자들이 제 입장을 생각해서 해준 건데, 이거는 나중에 길게 쭉 글을 쓴다고 생각했을 때 첫 책으로 들어간다고 생각을 하고 넣으면 약간 투박하고 단순한 이름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 그런 거였어요. 저는 옴니버스니까 단편 하나하나의 제목에 대해서는 좀 신경을 썼는데, 전체 책 제목은 그렇게 크게 집착하는 제목은 없었거든요.

진아  후보로 나왔던 다른 제목들도 있어요?

명훈  뭐 이것저것 있는데 그냥 … 그냥… 묻어두려고요. 거절당했어요. 상처받았어.

자하  그런 걸 가르쳐줘야죠.

명훈  상처 안 받았어요. (말 바꾸기)

자하  저는 아까 얘기했듯이 술술 읽었고… 3편은 감동적이었어요.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 이번에 처음 읽고서 느낀 건, 완전 이제까지 쓰신 단편들의 총집합 같다는 느낌.

명훈  급하면, 하던 게 나와서……

모두 폭소했다.

자하  나는 데뷔작이니까 막 쏟아 부으셨구나 이렇게 해석을 했는데-! 급해서!

명훈  저는 급하면 전쟁 이야기가 나와요. 어쩔 수 없어요.

자하  본질을 알 수 있군요.

SeeReal  만만한 게 그건가요?

명훈  전쟁을 공부를 제일 많이 했으니까. 관심도 관심이고, 공부를 이만큼 했으니까 아무래도 그냥 말을 해도 …

자하  하긴 전 급하면 신화가 나와요.

진아  난 급하면 베드씬이 나오던데. (농담입니다!!!)

명훈  그래도 하던 거 그대로 낸 건 아닐 거고요, 동원박사 세 사람도 초록연필이랑 이야기가 연결은 되는데, 그 다음 버전이니까.

이제까지 명훈님이 쓴 잡담, 이전에 했던 인터뷰, 인터뷰어로서 참가했던 인터뷰, 합평회 모든 곳에 타워의 씨앗이 숨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며, 부록 부분에선 퀴즈도 준비하고 있다.



진아  첫 장편이 나와서 책을 손에 쥐어본 소감 한마디? 사인하느라 팔은 아프셨겠지만.

명훈  사실 저는 홀가분하단 느낌인데, 시험 한 과목 끝났을 때 그 홀가분함인데, 한 과목이 더 남았어요. 그래서 아직 덜 홀가분한 것도 있긴 해요. (지금이) 저는 되게 위험하다고 느끼는 순간인 게, 거품 또는 바람이 들 수 있는 시점이거든요. 웅진에서 신경을 꽤 써주기로 해버려서, 홍보 활동을 하러 가면 나한테 바람을 넣어야 되는데, 인터뷰 같은 걸 하면 바람을 넣고 작가가 아닌 내가 되어서 뭘 해야 되는데, 장편 하나를 써야 돼요, 지금 당장.

그런데 이게 스위치 바꾸는 데 시간이 꽤 걸리기도 하고, 그게 나한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점이 딱 되서, 저는 이게 굉장히 큰 감흥이 와야 된다고 생각을 하지만 차단하느라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어요.

보시면 알겠지만, 초판 발행 날짜가 생일이라고 찍혀 있는데 안 좋겠어요? (웃음) 또 사인하러 가면 책이 막 쌓아놨잖아요. 그래서 되게 좋을 수밖에 없는 것들이 가득한데도 그럴 때는 아닌 것 같고.

근데 제 생각인데, 전 계속 이 상태였으면 좋겠어요. 조심하는 상태? 왜냐하면 저는 계속 써야 되니까. 옛날에는, [누군가를 만났어] 냈을 때에는 첫 책을 내면 아, 이제 끝이야! 이제 다 됐어! 그러잖아요. 근데 그게 뭐가 끝이에요, 끝이 시작이지. 지금도 그래요, 그니까. 이제 시작인데 뭐. 가야 할 길이 멀고. 근데 또 자칫하면 그 생각을 놓칠 수 있는 때예요.

자하  타워만 쓰는 데에는 얼마나 걸렸어요?

명훈  한… 두 달 반?

SeeReal  초고가 아니죠? 초고를 쓴 기간이 아니라 총 생산 기간이…

명훈  총 생산 기간은 좀 더 길어요. 쓰고 나서 후반 작업을 한 한 달 정도 한 것 같은데.

이번에는 오멜라스에서 이야기가 먼저 와서 처음에 구상단계에서부터 같이 했어요. 단편집을 하자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뒤에 시놉시스를 보냈죠. 이런 식으로 갈 거다. 근데 물론 그때 쓰는 시놉시스는 전혀 그대로 안 갈 거거든요? 저쪽에서도 물론 알고. 하지만 시점이 중요한 때가 있잖아요. 완성이 중요한 때가 있고. 시작할 때, 완성된 시놉시스가 나올 때까지 안 보여주겠어요 라고 하면은 작업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그 시점에는 그냥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이미지?(지만 보냈다)

저는 제가 생각하기엔 베타 버전을 내놓는 스타일인데요. 완성본을 내놓는 게 지금까지의 작가들이 생각하는 주류라고 할 수 있죠. 완성될 때까지 계속 고치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오타가 안 나올 때까지 하려는 사람도 많잖아요. 고치고 퇴고하고 해서 그때가 되어야 내놓을 수 있고, 뒤에는 안 고친다, 절대. 일단 공개됐으니까 그 다음엔 고칠 수 없다 그러는데. 제 경우에는 베타 버전을 내놔요. 뭐랄까 지금 작업 환경이 제 쪽에 유리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 스타일일 때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이 같이 달려들 수 있는. 이번 타워 같은 것도 사실 제가 혼자 구상했다기보다는, 처음에 아이디어는 제가 냈지만 그걸 보고 편집자들이 굉장히 좋아했어요. 영감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어서 편집자들이 하다가 ‘우리 책’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딱 그 느낌이었어요, 우리 책이라는 느낌이어서 어느 정도 지분이 있었어요. 창작은 원래 작가가 책임이기도 한데, 이런 느낌도 있었어요. 이 작업이 저는 되게 좋았어요.


“털면 먼지 나는 사람”은 어디에서부터 왔는가

자하  타워는 에피소드 여섯 개로 끝인가요?

SeeReal  테마 자체가 열려 있어서, 중요한 건 작가 본인이 계속 쓰고 싶은지의 문제인 것 같아요.

명훈  그럼요. 그래서 처음에 구상했을 때에도, 이거는 한 30년 써먹을 수 있는 주제겠구나 하는 생각이 딱 들어서. 시작을 해야 되겠는데.

SeeReal  그래서 (스포일러) 안 시키신 거예요?

일동 폭소.
무엇을 안 시킨 건지는 책을 끝까지 읽으면 나온다. (시치미)


명훈  근데 뭐, 언젠가 쓰겠죠, 언젠가. 지금 당장 그거 쓸 생각은 없고. 계속 써먹는 주제 중의 하나가 될 것 같아요.
좋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안에 들어가는 소재라는 게 그냥 사람 사는 데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 넣을 수 있으니까.

자하  작년부터라고 해야 하나, 작년부터 있었던 굵직굵직한 일들에 명훈님이 자유게시판이라든가 여러 군데에서 썼던 말들이 녹아 있는 게 저는 굉장히 좋았거든요.

SeeReal  글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느낌은 들었어요.

명훈  분리해야 좋은 건데 (웃음)

자하  이번 거는 굉장히 밀착형인 것 같아요.

명훈  {자연예찬}은 구상단계에서부터 제일 쓰고 싶었던 글이고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이 들어가 있고. {자연예찬} 마지막에 나오는 이야기를 거울 게시판에 썼었거든요. 누구 책임도 아니면 내 책임이라는 이야기. 그래서 거기 나오는 표현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책임이 있는 사람”이란 건데……

자하  그게 되게 전략적인 카피더라고요.

명훈  그걸 카피로 썼더라고요.

자하  근데 왜냐하면 그걸 확대하면 “모두가 읽어야 할 책”이란 소리니까. 누구에게나 책임이 있잖아요.

진아  물론 그게 카피 문구처럼 이용되길 바라고 쓰신 문구는 아니었겠지만.

명훈  그니까 그게 제일 처음에는 자유게시판에 들어가 있던 이야기니까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책임이 있는 사람에 내가 들어가고 있다, 한해 한해 갈수록. 옛날에는 그냥 기성세대 잘못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이젠 그게 안 되잖아요. 한발 한발 들어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한 이야기였어요. 나는 나중에 기성세대, 뭐 오십대 육십대, 경찰청장 나이가 됐을 때 ‘실수다’ 이런 이야기는 안 하겠다.

진아  저는 명훈님 인물이 ‘털면 먼지 나는’ 사람들인 게 좋아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너무 선량하고 착해서 착한 짓을 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 없을 때 슬쩍 빨간 불이어도 횡단보도를 건너고 그러는 게 사람인데, 그런 게 좋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글로 표현하는 게.

명훈  마로하 시리즈에서 분량으로 해서 1권은 완결된 데를 1권으로 해서 마무리를 지었고, 2권은 가다가 말았는데, 1권의 주제는 예언자예요. 두 예언자. 다른 우주에 있는 두 명의 예언자 얘긴데 1권 끝에 죽어요. 죽여요. 나중에 살… 려나? 아무튼. (웃음) 2권을 시작했는데 2권의 주제가 뭐냐, “예언자 없이” 예요. 예언자 없이 어쩔 거냐. 그거의 연장인 것 같아요. {매뉴얼}은 마로하 시리즈 이야기가 약간 나오는데 거기도 그거거든요. 예언자가 없는 상태에서 어떤 식으로 예언을 받을 거냐 하는 식으로 봤던 거고. [타워]에서 했던 이야기는 예언자는 어차피 없다, 그럼 이 사람들 가지고 어쩔 거냐, 지금, 그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근데 계속 그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군대 갔다가 느낀 건데, 군대 가기 전엔 굉장히 날카롭고 확고해서 난 군대 갔다 오면 학자가 될 거야! 생각했었는데, 군대 가서 일을 하면서, 먼지가 묻는 걸 경험하면서, 아, 이게 먼지가 묻는 게 리얼리티구나 하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근데 뭐 그건 군대도 그렇고, 딴 회사에 있어도 그렇지만, 제도적으로 실무자가 먼지를 묻히게 만드는 제도에서 사니까 그런 흔적인 것 같아요. 이십대 후반을 지나오면서 묻은 흔적? 또는 먼지. 삼십대가 되고, 그럼 기성세대가 되고, 내 책임이 되고, 그러면 나는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질 거냐?


타워와 공간의 미학, 우리나라 문학의 제약

SeeReal  타워에 대한 평이나 그런 게 골방으로 들어갔던 문학을 다시 광장으로 불러왔다는 그런 뭐랄까 굉장히 시사적이고 수사적인 평이 있는데, 물론 그걸 지시하는 그대로 그런 걸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꼈거든요.

자하  그런 면에서 명훈님 작품이 장르적이기도 하다고 느꼈어요. 저는 순문학에서 죽을 듯이 고민‘만’ 하는 게 답답하거든요. 그런데 타워에서는 행동하는 사람들이 나오니까.

SeeReal  그렇기도 하고, 순문학에서는 시장을 시장이라고 하고 대통령을 대통령이라고 말해야 하는 제약이 있어요. 그 제약을 제하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폭이 넓어지니까 그거를 마음껏 활용하고 이용하고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

명훈  공간을 쓰는 것 자체가 문단 쪽보다는 장르 쪽이 훨씬 기술도 발달되어 있고, 그쪽을 써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고, 소설에 중요한 요소로 들여와야 된다고 다들 인식하고 있고, 그런 면도 있고요. 다들 뭐 처음 쓰는 사람도 쓰라고 하면 세계관부터 쓰기 시작하잖아요.

SeeReal  근데 그런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미개척지였잖아요. 뭐랄까 정치풍자 장르소설이라는 …

명훈  그렇군요. 정치풍자라기보다는, 모르겠어요, 사회에 대한 이야기랄까.

자하  근데 또 보통 정치풍자 하는 분들은 글이 재미없거든요. 이야기가 없어요, 껍질만 있어요.

명훈  알라딘에 실은 인터뷰에 썼는데, 그냥 500층, 600층 이렇게 백 단위로 딱 떨어지면 풍자하긴 더 좋은데, 그럼 대안을 못 만든다는 거죠. 비웃기는 더 좋아요, 백 단위로 떨어지는 상징적인 숫자면. 근데 그 안에 사람을 살게 만들어야 되니까, 나는. 그래야…… 비판하고 나서 어쩔 건데? 하는 문제가 나오니까. 그래서 그걸 쓴 것 같고.

그러니까 상상력… 문제의 그 ‘톡톡 튀는 상상력’ 문젠데, 그게 저는 다른 식으로 서술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는 게, 상상력이 결국 크게 만드는 문제가 아니라 채우는 문제라고 생각을 해요. 그걸 잘 채우는 사람이 상상력을 제대로 발휘한 거지, 크게 만드는 게 끝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대통령의 놀라운 상상력은 정말 톡톡 튀고 기발한데, 채우기가 없잖아요, 채우기가.

상상하게 되는 공간을 만들고 채우는 문제인데, 채우는 거는 여러 가지가 있겠죠? 순문학 하시는 분들은 취재를 하라고 하고, 실제로 취재를 하는데, 우리는 취재를 안 하잖아요. 근데 제 경우에는, 학교에서는 ‘사회과학적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영역이 있어요. 그걸 하고 있는 거죠. 어느 정도의 이론과 시각과 실제로 가서 본 거를 가지고 하는 , 지식과 리서치에 해당하는 가서 본 걸 연결했을 때 좀 다른 식으로 보이는, 그런 식의 상상력.
채우는 걸 공학적으로 채우면 하드 SF가 될 거고. 근데 저는 그걸 공학적으로 채울 필요성을 전혀 못 느꼈고, 사람 사는 방식으로 채우려고 했던 것 같아요.

자하  권력장 같은 방식으로요? (웃음)

명훈  그건 정말 제가 십여 년 잡고 있는 주제 중에 하나예요. 권력장, 미세권력, 이런 거.
옛날에는 왜 중력도 A와 B 사이의 거리의 함수로 이야기했잖아요. 근데 물리학에서 이제 그렇게 이야기 안 하거든요?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는 (걸로 표현하죠). 근데 권력도 옛날에는 A라는 사람이 B 라는 사람에게 자기 이야기를 강요하는 힘, 뭐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요새는 그것도 바뀌었어요. 사회과학에서도. 거기선(옛 정의에선) A가 권력의 소스를 갖고 있어야 되는 거잖아요. 거기도 권력장이라는 용어가 있어요. 제가 쓰는 거랑은 좀 다른 식이지만. 뭐라고 해야 될까? 단적인 예가, 큰 건물 같은 데 지나갈 때 수위에게 지적을 안 받을 수 있는, 제지를 안 받을 수 있는 식의 그런? 그러니까 더 오묘한 문제라는 거죠, 권력장이라는 게. 권력이 내가 갖고 있는 소스로 발현되는 게 아니라, 뭔가 사회 자체에 있는? 근데 우리가 느끼기가 딱 그거잖아요. 내가 저 꼴보기 싫은 사장 말을 듣는 게 저 사람이 나하고 싸워서 이길 수 있어서가 아니잖아요. 뭔가 딴 것 때문이잖아요.

SeeReal  저는 배명훈 작가의 글을 봤을 때 그런 사회과학적 상상력이라든지 일종의 학문의 최전선에서 발견되는, 또는 본인이 발견한, 응용한 것들을 쓰는 방식이 굉장히 세련되다고 느끼는 게, 순문학 작가들의 글을 보면, 대중 과학서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요. 모모라는 과학자가 말하길, 인간의 의지는 뭐가 아니래, 이러면서. 게임 NPC처럼 나와서. 그 사람들에게 과학이란 그런 인용하는 거지 흡수될 수 있는 게 아닐 수 있잖아요. 근데 그 부분에선 뭐, 배명훈 작가가 어디 빚지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그거를 원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굉장히 능숙한 면모를 보여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명훈  그게 학교에서 대학원 다닐 때, 논문 쓰다가 안 풀리면 소설로 쓰거든요 (웃음) 그러면 되게 자연스러워지는데. 사실 논문도 진짜로 그런 게 아니라 비슷한 근거들을 막 갖다 붙여 놓고 거의 이런 거예요! 라고 말하는 건데, 거기에서 약간 좀 더 소설적으로 틀면 되게 그럴듯해 보이는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까 공간 이야기할 때, 전 대학원 다닐 때 우리 과 어떤 교수님이 제목은 한국 국제 정치 사상 이렇게 붙여놓고 한국 소설 읽힌 적이 있었거든요. 거기서 여러 가지를 읽었는데, 제일 재미있던 건 손창섭 소설을 읽었는데. 단편집을 보면 육이오 전 이야기는 한두 개밖에 없고, 직후 이야기인데, 그때 한국 사람들 공간 개념이 딱 나와요. 집 안이에요, 그냥. 방 안에만 누워서. 밖에 나가는 장면도 나오는데 밖에 나가면 무법천지고 피난민촌 같은 데 보면 사람들이 화장실 없으니까 그냥 배설을 아무데나 해버리니까 지식인인 이 화자가 나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공간이 딱 집 안이 됐는데.

그 단편집에 보면 제가 제일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게 {층계의 위치}란 단편이거든요. 이 사람이 맨날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옆집을 봤는데 옆집에 계단 위치가 밖으로 보이다가 갑자기 안 보이고 그 위로 보이는 계단이 있는 거예요. 저건 도대체 뭐지? 하고 궁금해하다가 결국 그 집으로 침투해서 그 계단까지 올라가봤다가 쫓겨나는 내용인데. 전 그게 좋았던 게, 그 앞의 소설은 공간이 딱 요기까지인데, 세계가 자기 집으로 한정된 상태인데 고기가 딱 다른 공간을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저는 그 단편집 안에서 보통은 잉여인간을 대표작이라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그게 대표작 같았거든요.

그래서 그런 식의 사고가 장르문학 하는 사람들에겐 훨씬 유리하다고 해야 하나. 순문학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공간 자체가 좁아서 약간 답답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사실 똑같은 거라도 풀 수 있는 방법이, {층계의 위치} 같은 거에서는 다른 공간을 관심을 가지는 거에서 딱 깨고 나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순문학에선 못 나가는 것 같아요. 이광수 소설 보면, 여의도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고 만주도 가고 일본도 가요. 공간 개념이 우리보다 훨씬 넓은 상태… 공간 개념 자체가 우리보다 훨씬 넓은 세계였던 사람들인데 우리는 훨씬 좁죠. 그때 사람들 생각보다.

SeeReal  이건 약간 다른 얘길지 모르겠는데 제가 대안학교 교사를 할 때 우리 학교에서 초경량 비행기로 비행교육을 한 적이 있어요. 비행교육을 통해서 애들에게 3차원 공간개념과 자기가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르쳐주는 교육적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정말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 가지는 공간개념이 막혀 있는 게 있어요. 일본보다 더하잖아요.

진아  그게 왜 그러냐면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고, 위쪽은 북한이고, 요새는 관광도 조금씩 하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북한으로 건너갈 수가 없고. 그러니까 우리나라는 사실상 섬이고, 국경을 넘어서 어딘가 딴 데로 가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란 인식이 있어요. 막상 저도 배낭여행 한번 가보고야 느낀 거고. 비자 한 번 도장 찍으면 바로 넘어갈 수 있는데, 걸어가는데 너무 쉬우니까 기분이 이상한 거예요. 어떤 제약이 있는 것 같아요, 정말.

명훈  냉전 끝나면서 갇혀진 공간인데, 조선시대에는 훨씬 큰 공간이었는데, 냉전 들어가면서, 육이오 끝나면서 우리가 폐쇄적인 공간으로 들어가면서. 물론 일제시대 때는 훨씬 큰 공간이었고.

자하  일본의 세력이 미치는.

명훈  일본 공간이 우리 공간이니까. 그랬는데, 되게 작아져서. 일제시대 때 못 살던 독립투사들도 상해 가서 독립운동 하는 걸 되게 편하게 생각했거든요? 건너가서 하는 거. 가는 건 지금보다 힘들었겠지만 공간개념으로는 그냥 가면 되지 이랬는데, 지금은 여행 자유화되면서 좀 넓어졌을 텐데도 굉장히 좁아요. 이게 SF 쓰는 데에도 분명히 제약이 될 거고. 공간을 어느 정도 이상 상상을 못하니까. 그리고 순문학을 한다는 분들한테는 더 큰 제약인 것 같아요. 공간 자체가.

근데 그 공간을 크게 해주는 사람이 결국 누구냐는 거죠. 결국 작가가 해야 하는. 자동차가 해주나? (웃음) 왜냐하면 같은 비행기를 타도 미군 같은 경우도 외국에 나가는 건 해군이거든요. 베이스가 공군은 정해진 위치에 있으니까 공간이 거기까진데, 해군은 항공모함 타고 가니까 공간 자체가 훨씬 크다는 그런 식의. 그래서 저는 SF 자체가 제국주의적 장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다녀봤으니까 지구가 얼마나 큰지 알고, 우리는 모르잖아요. 서울이 좁아터진 줄만 알지.

자하  다녀봤으니까 프론티어라는 개념도 실체로 알고 있고.

SeeReal  서울에 살다가 지방으로 갔거든요, 제가. 그러니까 한반도 내에서도 정말 다르고, 지방에 갔더니 반경 5킬로미터 이내에 아무도 없을 때도 있어요. 그때 느끼는 공간에 대한 감각과 사람에 대한 감각이 너무 다른 거예요.

자하  스타트렉 영화 보는데 맨 끝에 “우주, 최후의 프론티어” 이러는 것도 감흥이 별로 없는 거죠, 나한테는.

명훈  그러니까 그게 우리한테는 안 먹힌다는 거죠. 왜냐하면 걔들은 맨날 우주왕복선 날아가는 거 어렸을 때부터 텔레비전으로도 보고 장난감도 구하기 쉽고 실제로 봤던 애들이니까 설명을 할 필요가 없는데, 우린 설명해야 돼요. 이게 왜 멋있는지를 설명을 해서 납득시킨 다음에 그걸 써야 되니까.

진아  장르가 굉장히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대안이 될 수 있음에도, 또 장르라는 게 벽이 되는 것 같아요. [타워]의 경우 전략적으로 SF나 장르라는 단어를 안 쓰고 배명훈만의 작품, 이런 식으로 가게 되는 것도. C.S. 루이스니 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사실은 판타지잖아요. 근데 그냥 ‘세계 문학’이라고 생각해서 읽는 거고, 일본 소설 우리나라에 추리, 호러, 스릴러 이런 계열 많이 들어오는데 판타지나 장르라고 안 하고 그냥 ‘일본 문학’이라고 생각해서 읽는데, 그 인식의 벽을 깬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반지의 제왕의 성공이 어떻게 보면 그 인식의 틀을 굳힌 면도 있어요.

SeeReal  장르문학의 원죄가 되어버렸어요. (웃음)

진아  어떻게 보면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가 이룬 것도 너무나도 많지만, 그래도 그것 때문에 장르문학 쓰는 사람들이 페널티를 받게 되는 면이 많은 것 같아요.

명훈  많죠. 근데 장단점이 있어요. 그거 묻는 사람도 있어요, 이쪽에서 시작해서 불리하지 않느냐, 이런 거. 불리한 점도 분명히 있죠. 박민규 씨처럼 쓰기 시작했으면 그냥 인정받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말이나. 근데 거긴 사람이 많고 여기는 블루 오션이잖아요. (웃음) 미래를 놓고 보면 이쪽이 더 좋죠. 지금이 문젠데, 뚫는 게 힘든데, 뚫기만 하면 먹을 수 있는데.

SeeReal  틀에 갇히는 것도 있지만 아직은 개척할 신대륙이라는 느낌이. 그걸 항상 염두에 두고 자기가 뭐하고 있는지 알아야 된다는 생각이 항상 들었어요. 장르 규칙을 쓰든, 그걸 깨든, 아니면 이름표를 새로 붙이든지 간에요.

명훈  어쨌든 권력장이 존재하죠. 장르마다 존재하는데, 그중 하나를 빈스토크에 넣었는데, 3차원의 형태로 넣었고, 그게 빈스토크를 채우는 것의 제일 첫 번째였어요. 엘리베이터가 복잡하다는 거랑 권력장이 이런 식으로 존재한다는 거.

근데 저는 (현실에서) 권력장이, 대통령 바뀌고 나서 권력장이 새로 재편되는 게 제 눈에는 보였어요. 그러니까 한 칸 한 칸에 해당하는 사람이 갖고 있는 권력들이 다른 방향으로 쫙 흘러가는 게 보이는…… 실제로 사실 사회 전반에서 일어났는데 못 본 사람도 있을 거고, 현장에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더 자세히 봤을 거고.

아무튼 제가, 자꾸 다른 이야기로 번져가면 제 이야기로 끌어오고 있어요.

인터뷰의 달인 배명훈 님을 찬양하라. (웃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숫자의 미학

진아가 예전에 갔던 아름다운 MT 이야기를 꺼냈다. 노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모두가 조금씩 일을 맡아서 해서, 이를테면 식사 준비를 시작하면 양파 썰고 야채 씻고 고기 굽고 상 펴고 수저 놓고 자리 치워두는 식으로 한 가지씩만 했더니 마법처럼 식사 준비가 순식간에 완료되더라고. 그럼에도 실제로 자신이 한 일은 아주 적은 일부분이었기에 참여한 사람 모두 “나는 한 일이 없는데” 라고 감탄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명훈  (녹음기 앞으로 다가가) 저는 세상을 바꾸게 되는 비결이 결국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자하  그게 많이 잘 나타난 것 같아요, 타워에서.

명훈  조그만 걸 하고 있는데다, 뭘 하고 있다고 다들 생각은 안 하는데, 그 숫자가 많은 거죠.

SeeReal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
아니 그런 사례가 많이 회자가 되잖아요. 집단 지성을 이용해서 노가다를 쉽게 처리하는 알고리즘에 대해서 많이 읽어봤는데,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 이렇게 되겠구나 예상은 했는데 그걸 막상 보니까 아!

명훈  그러니까 제가 SF 작가라고 불리든 말든 상관은 없는데, SF의 미학 중에 분명히 쓰고 있는 게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숫자의 미학이거든요. 그냥 열 개, 백 개 던져졌을 때 말고, 많다고 해서 열 개 백 개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한테 오억 개를, 그냥 숫자 오억 말고 이게 오억 개일 수 있는 이유를 보여주면 그것 자체가 미학인데, 그건 SF에서 많이 나오는 미학 같아요. 월-E에서 제일 처음에 쌓여 있는 쓰레기 탑과 같은 미학. 얘가 요만큼을 쌓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그게 높이가 빌딩 높이잖아요. 얘가 이걸 몇 번 했을까 라는 걸 생각하게 되죠.

진아  근데 저는 동시에 어떤 생각도 했냐면, 어떤 일은 사람들이 우우 몰려가서 감동적인 결과를 낼 수 있어요. 진짜 작은 노력으로, 십시일반으로. 근데 사실 이 세상에 있는 9999개의 억울한 일은 묻히는 거죠. 굳이 타클라마칸 예를 들자면, 실종된 1000명 가운데 999명은 그냥 죽었어요. 근데 그 한 사람에게는 어느 순간 사람들이 몰릴 때가 있죠. 다만 저는 그걸 무조건 맹신할 수도 없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몰리는 일도 있지만, 그냥 묻히는 일도 너무 많은 거죠.

자하  근데 이게 작가간의 차이가 아닐까? 글의 성격이 달라지는 이유가 보이는 것 같아. 사고의 차이가 보여. (웃음)

명훈  어떤 건가요? 구체적으로. 나 사회보고 있어. (웃음)

SeeReal  전 스토리의 차이라고 느꼈던 게,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죽음이 조명할 만한 가치가 있냐 하는 건 어떤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 스토리가 매력적이냐 아니냐에 사람들이 끌린다고 전 생각하거든요. 이 경우에도 사막 한가운데 실종된 사람, 그걸 우리는 독자로서 보고 있긴 하지만, 헤어진 옛날 애인, 어떤 공무원의 사소한 실수, 이런 것들이 모임으로써 그 사람을 살릴 만한 가치가 생기는 거잖아요. 그 스토리 구조 내에서. 근데 진아님이 쓰는 글 같은 경우 그 스토리를 획득하지 못해서 잊혀지고 죽어가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눈이 간다는.

진아  글쎄 제가 딱히 그런 글을 썼던 것 같진 않지만 (웃음)

SeeReal  근데 그건 정말 두 분의 차이인 것 같아요. 어디에다 초점을 맞출 것이냐.

명훈  근데 그냥 현상, 현실 문제로 가면 크라우드 소싱이라고 하는, 타클라마칸 배달사고에서 일어난 것 같은 일을 대량으로 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있어요. 보통은, 전의 상식은 그런 세밀한 작업에 많은 사람이 붙으면 할 수 있는 일의 케이스가 적다는 게 그전의 상식인데, 그냥 인터넷을 활용해서, 이건 좋은 컴퓨터를 활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네트워크를 활용한다는 뜻인데, 그렇게 하면 그거를 수만 개, 수백만 개까지 할 수 있다는 게 사례들이 나오고 있는데, 시간이 좀 더 가면 실제로 그런 걸 쓰게 될 것 같아요. 많은 사람 중의 한 명만 찾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규모 자체가 달라요. 예전에 생각하고는.

자하  어쩌면 이렇게 우연이 겹쳐서 하나의 점으로 시작하지만, 배명훈 님은 그게 시작일 수 있고 가능성일 수 있고 희망일 수 있다는 쪽인 것 같고, 진아님은 그렇게 되기 전에 스러져 간 수많은 뒷면들에 더 시선이 가는 것 같달까요.

명훈  그러니까 저는 타워의 구조가 어떻게 되냐면, 앞쪽 두 개가 비판에 해당하는, 이 타워라는 공간이 안 좋은 이유에 대한 건데, 그 타클라마칸 배달 사고에서는 안 좋은 건 맞는데 근데도 희망적인 걸 써야 되는 이유, 긍정적인 걸로 바꾸는 부분에 해당하니까 그런 것 같아요. 뒷부분은 그래서 약간 고민으로 가게 되는 거고.

자하  엎치락뒤치락하죠. 그러다 결말에서는 결국… (스포일러) 그런데 독자들도 거기 등장인물들처럼 생각했을 것 같아요. 솔직히 다 그럴 줄은 몰랐다 하고.

명훈  그니까 주제가 뭐냐고 누가 물은 적이 있어요. 연재 한 2주쯤 했을 때에. 근데 ‘뭐지?’ 막 그랬거든요, 그땐 다 쓴 상태가 아니었는데, 근데 지금은 알 것 같은 게, 일단 문제제기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에요. 답은 뭐냐 하면 생명이었고, 더 구체적으로 가면 생활이란 형태의 생명이었어요. 그니까 수평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에 해당하는 그 생활이란 형태의 생명. 그리고 종교에서 많이 빌려왔고, 힌트를 많이 받았고.

사실은 (타워가) 종교소설이라는 거 아세요? (웃음)

웃음과 함께 깨달음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아직 깨닫지 못한 분은 [타워]의 첫 에피소드 제목을 떠올리시라.

명훈  저도 쓰고 나서 알았는데, 전부 종교소설이에요.

SeeReal  그게 이면에 있는 강력한 끌어당기는 장치로 작용을 하는 것 같아요. 상징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효과가 되게 크니까. 처음에는 잭과 콩나무 상징인 줄 알았는데, 그게 동방박사라든지 그런 종류의 상징이고. 그것도, 본인이 의식했든지 안 했든지 반쯤 의식했던 건지 어쨌든 저는 상징을 쓰는 방식도 굉장히 능숙하다고 느꼈거든요, 배명훈 작가가. 사람들이 그런 상징에 굉장히 지배당하잖아요. 독자로서는 의식하지 않는 수준에서. 근데 그걸 눈에 띄게 쓰면 되게 촌스러워지는데 그 균형이 참 잘 잡혀 있단 생각이 들었어요.

명훈  모르고 써서 그런 거 아닐까.

자하  본인도 지배받고 있었다든가 (웃음)

명훈  정말 종교 이야기를 계속 썼는데, 그것도 화마다 다양하게. 근데 그걸 인식을 못 했어요. 광장의 아미타불을 제일 뒤에 썼는데 그거 쓸 때 알았어요. 종교가 다 들어가네, 이제 불교도 들어가네? 불교가 아니라 힌두교라고 해야 되나.

종교테마를 자연스럽게 내포하는 인도 영화에 대한 잡담이 이어졌다. {누군가를 만났어}가 인도 영화의 번역 제목이라는 걸 배명훈 님의 이전 인터뷰에서 알 수 있고, 배명훈 님이 밝힌 단편 설정 뒷이야기들을 보면 인도 영화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심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지만 자연스럽게(?) 인도 영화에 포함된 원초적 에너지에서 에로틱한 장면들로 화제가 바뀌었다.


진아  (한참 열변을 토하다가) 명훈님은 어떠세요?

명훈  저요?

진아  네, 명훈님 인터뷰잖아요.

명훈  (마이크 가까이 다가가) 전 순수해서, 어우, 너무 부끄러워요, 질문이.

진아  [누군가를 만났어] 보면 거기 단편들이 에로한 표현들이 들어간 거잖아요.

명훈  어려서 그랬어요, 그땐. (시치미)

SeeReal  스윙바이 말고 거기 뭐가 들어갔었죠?

자하  이웃집 신화랑, 임대전투기랑…

명훈  전 스윙바이가 제일 좋아요, 야한 시리즈 중엔. (웃음) 세 편 중에.

SeeReal  근데 야한 걸 써도 선정적이지 않다는 느낌은 있어요. 탈색된 에로에로라는 느낌은 있는데, 아니 탈색까진 아닌데 베이지나 미색 정도의 느낌? 남성 작가들이 쓰면 약간 형광 분홍 같은 느낌이 나잖아요. 형광 노랑이라든지. 근데 이쪽은, 굳이 말하자면 파스텔톤 에로를 구사하시는…

명훈  좋아. 그거, 어, 어디 적어놔야겠다, 어디. 파스텔톤 에로.

자하  그러고 보니 타워에는 그런 게 없잖아요. 다음 작품에선 혹시 기대해도 되나요? (웃음)

오해를 풀기 위해서 굳이 부언하자면, ‘에로한’ 작품은 배명훈 님의 작품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웃음) 다음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나온다.


장르 문학을 서술하라

SeeReal  이거는 또 별개의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이영도나 듀나가 최근에 '네이버 오늘의 문학'에 단편을 실었잖아요. 새삼 읽어봤는데, 보통 내부에서는 이영도, 듀나, 배명훈을 하나로 묶을 수 있지만 저의 입장에서는 다른 궤적이란 느낌이 들었어요. 장르 문제가 아니고, 작품의 연속성 문제에서. 그 사람들은 스타일이 완성되어 있고 거기서 계속 뽑아서 쓴다고 하면, 배명훈 같으면 새로운 곳을 개척하는 것 자체를 의미를 두고 있으니까. 아, 이 사람도 10년이 지나도 재기발랄할 수도 있겠구나, 뭐 그런, 원하든 원치 않든.

명훈  근데 나는 이번에 타워 내면서 마케팅 컨셉 웅진에서 막 이야기하는데 결국 ‘상상력’ 쪽으로 가는 것 같은데, 나는 그냥 무턱대고 재기발랄하고 톡톡 튄다고 하는 게 아니라 다시 평가해도 상상력이란 말이 나오면 그냥 받아들여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은 어떤 상상력이냐에 신경을 써달라고 하고 있는 거지, ‘읽어보지도 않고 톡톡 튀는 상상력’이 아니라 읽어보고 상상력이면… 그러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나는 재기발랄한 상상력이라는 표현에 얽힌 다른 많은 것들이 읽혀서 부담스럽달까. 정말 재기발랄하다고 표현을 하려면 재기발랄한 상상력이라는 표현을 안 써야 된다고 생각해서.

카피는 결국 낚시에서는 미끼 같은 것이고 사람을 낚아야 하는 것이라 오히려 진부하고 안전을 택하는 일이 많다는 것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명훈  그걸 그렇게 되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저는 서술이 어떻게 될 거냐 하는 관점에서, 다른 부수적인 효과로 그게 (카피가) 서술의 효과를 발휘하는데, 작가나 작가군을 서술하게 되는데, 점점 굳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 서술이 필요한 단계가 있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사람들도 있는데.

진아  그거는 카피가 아니라 비평이나 리뷰에서 해줘야 할 역할인데, 장르가……

명훈  비평이나 리뷰가 없으니까요.

자하  그 역할을 해주는 게 판매량도 있죠. 전에는 팩션이라고 하면 다 ‘제2의 장미의 이름’이라고 했는데 요새는 ‘제2의 다빈치 코드’라고 하는 것도 판매량 때문이고.

명훈  그게 마케팅 관점에서 보자면 원래 있던 시장에 끼어들어가는 방식인데, 그걸로 해서는 안 될 만큼 시장이 좁으면 새로 만들어야 되는 부분인데, 그러니까 새로운 서술을 통해 새로운 시장의 영역을 만들어야 되는 부분인데 말이에요. 이것도 결국은 카피 만드는 사람들도 빠져나가선 안 되는 책임이 있는 것 같아요. 장기적으로. 단기적으로는 뭐 어쩔 수 없지만. 시장을 만들어가는 게 마케팅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존립 근거’니까. 길게 봐서 적용되는 생각이지 뭐 짧게 보면 왜 그걸 하게 되는지를 모르는 건 아니죠.

길게 보는 거는, 저는 거울이 해야 될 것 같아요. 거울, 굉장히 길게 갈 거라고 생각을 하고, 안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나중에 됐을 때 그때 편해지려면 지금 해야 되는 것들은 있다고 생각이 되고, 그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SeeReal  재기발랄 이외에 서술할 수 있는 태그든지, 표제든지 그거를 개발할… 책임 이전에 필요성이 있는 것… 그런 게 한번 개발되면 아직 장르문학판에서는 비평이나 리뷰의 권위가 없는 마당이니까 사람들이 그걸 갖다 쓰게 돼 있다고 저는 보거든요.



거울의 가능성과 역할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위해 희생하는 단계를 넘어서 작가들의 피난처이자 커뮤니티이자 연결 통로로 발돋움한 거울. 다음 단계는 어떻게 가야 할까? 무엇을 잃지 말아야 어떻게 변하더라도 남을 수 있을까? 같은 것들.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기성문단과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었다.

명훈  전 그런 게 싫은 거예요. 누구나 먼지를 묻히고 살잖아요. 너무나 퍼져 있어서, 정말 심하게 그렇게 하는 사람한테도 뭐 어느 정도 그냥 무뎌지는 분위기인데, 어느 날 그 진짜 나쁜 놈이 버럭! 화를 내면서 “넌 도덕적으로 문제 있어.” 라고 그러면 정말 황당한 거죠. 근데 ‘그분’은 그러고 있으니까. 전 ‘그분’이 도덕 이야기하면 정말, 정말 웃어요. 정말 박장대소. 인터넷 보다가. 그 차이인 것 같아요, 난 그게 재밌고, 그게 되게 가슴 답답하다는 사람은 되게 답답하고. 저는 재밌어요.

타워 제일 끝에 저자의 말에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신 L씨의 건강을 기원한다”고 썼거든요? 모르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L씨가 누구냐고… (웃음)

배명훈 님이 “그분”이라고 지칭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거울 게시판을 자주 보신 분이라면 누군지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풍자적 영감을 불어넣으며, 독보적인 건축적 상상력을 보여주시는 L씨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걸 재미있게 생각하고 영감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배명훈 님이 내 입장에서는 신기하고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타워] 다음에는?

자하  다음 장편 이야기 좀 해주세요.

명훈  아직 덜 써서…

자하  주인공은 어떤 사람인가요?

명훈  주인공은 두 사람이에요. 한 사람은 은경이고요. 여기에 출연시키느라 [타워]에 안 내보냈어요.

타워는 674층이라는 초고층 빌딩의 독립 국가라는 설정부터 흥미를 유발할 수 있고 특징을 잡아내기 쉬운 반면, 준비 중인 다음 작품은 좀 더 복잡하고 규모가 크고 요약하기 힘든 면이 있다고 하셨다. 배명훈 님의 작품을 계속 봐온 사람이라면 한번쯤 본 소재들이 등장하지만, 이제까지의 궤적을 되짚어보건대 이전과 절대로 같을 리 없는 발전형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서는 이 정도만 살짝 공개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인공위성 궤도 위의 신을 추적하는 이야기, 배명훈의 간판배우 은경이 등장하는 야심작! COMING SOON!!!






진아  한마디 해주세요. 인터뷰를 마치며 독자 여러분에게 한 마디. 타워를 구입하시거나 구입하실 예정이신 분들에게 한 마디. 그리고 특별히 거울 독자 분들에게 한 마디.

명훈  글쎄요. (개미소리만 하게) 많이 팔아주세요…

발언 내용과 소리 강도에 대해 구박이 쏟아졌다.

명훈  아니 뭐 전 그렇게 상업적인 데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고요, 많이 팔아주셔야 돼요. (마이크 가까이) 그래야 상업적인 부분에 신경 안 쓸 수 있어요.

다시 한 번 깨달음을 얻다.

진지하고 심도 있고 생각해볼 만한 이야기가 많지만 대화 자체는 시종일관 부드럽고 유머러스하게 진행되었다. 자신이 있는 자리,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그 길을 곧게 가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인데, 그것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준비가 된 작가이기까지 한 배명훈 님과 함께한 시간은 즐거운 것 이상으로 보석 같은 시간이었다. 헤어질 때, 지면으로 옮기면서 편집할 때에는 너무 재미있어서 두께가 얇아지는 게 아쉬운 책을 읽는 기분이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독자, 그리고 작가 분들, 그 결과물인 이 인터뷰 기사가 조잡했더라도, 또는 여기에 실리지 못한 이야기들이 궁금해서 아쉽더라도, 실망하거나 노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이보다 훨씬 재밌는, 앞으로 계속 발전할, 언제나 글로 답하기 위해 나아가는 배명훈 님의 다음 작품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부록:: 빈스토크의 숨은 씨앗 찾기

 [타워]의 첫 번째 에피소드 {동원 박사 세 사람 - 개를 포함한 경우}는 “권력장”이란 소재 때문에 배명훈 님의 전작 {초록 연필} (황금가지에서 나온 [한국 환상문학 단편선]에 포함)이 바로 연상된다.

 그러나 {초록 연필} 말고도 이 에피소드에 아주 직접적인 영감을 준 씨앗이 배명훈 님이 직접 쓴 비소설 원고에 나타나 있다. 물론 거울에 발표한 글이다. 어느 글일까?

 인터뷰를 다 읽고 덧글로 정답을 찾아 링크해주세요. 가장 먼저 정답을 맞히는 분께 작은 상품을 드립니다.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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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 09.06.27 12:48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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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도 자하님처럼 "총집편"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ㅎㅎ "씨앗"이라니,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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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소설" 이라는 점이 어렵군요, 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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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9.06.27 21:08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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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9.06.29 12:41 댓글 수정 삭제
    역시 거울 인터뷰는 재미있어요. 하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씨리얼님이 깜짝 게스트로 참석해 주셔서 더 재미있었어요. (장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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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하 09.06.29 17:15 댓글 수정 삭제
    앞으로 장모님이란 말만 들으면 빵빵 터질 것 같아요 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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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모님 09.07.05 14:44 댓글 수정 삭제
    거울 인터뷰는 정말... 최고급이에요. 요새처럼 기자의 사회적 위상이 땅에 떨어진 때에는 더더욱 그러해요. 저도 정말 재밌었어요. 사실 뭐 인터뷰를 했다기보다는 수다를 열심히 떨었더니 자하님이 알아서 착착 정리해주시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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