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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스파라그모스

2023.08.12 20:4908.12

여명이 찾아왔다. 새들이 나지막히 지저귀었다. 하지만 그는 잠들지도, 그렇다고 살아있지도 않은 채 그 밤을 꼬박 지새웠다. 왕의 침실에 갔다가 허탕을 친 환관이 종종걸음쳐서 달려왔다. 환관은 왕좌 앞에서 고개를 조아렸다. 왕은 밝아오는 아침의 정경을 바라보다가, 무언가에 시선이 닿자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눈이 붉었다. 뺨과 입술도 붉었다. 반면 피부는 창백해져 있었다. 마치 지독한 열병이 그를 사로잡은 것 같았다.

그 무리는 떠났더냐? 왕이 물었다. 그게... 떠나지 않았습니다. 환관이 말했다. 잠잠해졌을 뿐이구나. 술에 취해 들쑤시던 그 자들은 이제 잠들었겠구나. 환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난 잠들 수 없다. 왕은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그 자가, 그 요사스러운 이방인이 내 심사를 어지럽힌다. 그 자가 살아서 저 미친 무리를 이끌고 질서를 유린하는 한 난 잠들 수 없다. 힘주어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피가 묻어나오는 것 같았다. 환관은 놀라서 퍼득 고개를 들어 왕의 안면을 살폈다. 왕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웅크린 몸은 털을 곤두세운 멧돼지처럼 위협적으로 부풀어 있었다. 왕은 주먹으로 받침대를 쳤고, 숨을 헐떡였다. 환관이 가까이 다가오려 하자 손으로 막았다. 결단을 내려야 해. 그 자가 사라지든, 내가 죽든... 그가 말했다.

환관은 근심스러운 눈으로 창가를 보았다. 검지 크기 만한 바위산이 치솟아 있었다. 흡사 암갈색 철옹성 같은 모습이었다. 바위산을 중심으로 그간의 피리, 북, 방울 소리, 요란한 음악과 웃음, 그리고 환각 상태에서 때때로 내지르는 괴이한 비명이 다시금 되살아나 지축을 흔드는 것 같았다.

그 무리가 찾아온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그것은 예정된 일이었다.

그 교주는 먼 땅에서 왔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그를 신으로 여기며 숭배했다. 그들은 마치 쥐 떼처럼 머무는 곳마다 세력을 불렸고 전염성이 강했다. 마치 적군이 성을 깨뜨리듯 도시를 하나둘씩 점령해갔다. 교주는 타국에서 술 빚는 법을 배워왔다고 했다. 그가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것은 술을 제조하는 방법 뿐이 아니었다. 그는 현란한 음악과 춤, 그리고 축제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행렬로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환각을 일으키는 약초를 나눔으로써 난잡한 의식 행위를 무분별한 살육으로 이끌었다. 반발하여 참여하지 않는 자는 도취한 광신자들의 손에 살해되었다. 그러자 도시는 그 무리에게 자발적으로 문을 열어주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휩쓸고 지나가면 노예들이 온순해졌다. 여인들이 성질을 부리거나 울음을 터뜨리는 일이 줄어들었다. 소식을 들은 펜테우스 왕은 경악했다.

"그 자들이 내 나라를 어지럽히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다."

왕이 단언했다. 그는 사원에 가서 기도를 올렸다. 왕은 선조를 떠올렸다. 선조들의 모습은 그의 눈 앞에 생생하게 살아났다. 칼을 들고 진군하는 무장한 후예들의 정연한 행렬이 뒤따랐다. 사원을 나오는데 한 노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백내장을 앓았는지 눈 안쪽이 허연 노인은 검은 옷으로 겨울 나무처럼 앙상한 몸을 휘감고 있었다. 무사들이 칼을 빼들었다. 왕이 제지했다. 노인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였다. 왕이 입을 채 열기도 전에 노인은 떨리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왕을 가리켰다.

"세멜레의 아들인 무서운 리베르 신께서 오신다. 백성들은 향을 사르고 신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대의 권위는 리베르 신의 무시무시한 권능 앞에서 짓밟힐 것이다. 그러니 저항하지 마라. 저항하면 무서운 벌이 뒤따를 것이다."

왕은 화를 가라앉히려고 미소를 지었다.

"노인장, 말 조심해. 그 혀를 잘라줄까?"

"나, 난, 거짓말 안 해요. 부, 불복한다면 찌, 찢겨 죽고 맙니다."

왕은 노발대발했다. 말을 더듬는 예언자는 가버렸다.

그날 밤 산야가 술렁였다. 곳곳에 횃불이 걸려 있었고, 깨끗한 옷을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모여서 향을 지피고 기도문을 읊으며 교주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왕은 가마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급작스러운 방문에 놀라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장작이 타는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왕이 코를 킁킁댔다. 무사가 재빨리 달려가서 향을 밟아 껐다. 숨죽인 비명 소리가 한차례 터져나왔다.

"너희들이 섬기는 그 자는 악질적인 사기꾼이다. 감히 신을 참칭하며 신처럼 대우 받기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군의 창칼에 죽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나, 얄팍한 수법으로 사람의 얼을 빼놓는 애송이를 숭배하는 건 굴욕이다. 너희는 진정으로 조상의 영광을 버리고 이국의 마술과 사교에 홀려 타락할 생각이냐?"

사람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집으로 향했다. 무사들이 그들을 감시했다. 왕은 수행원 두 명을 붙여 젊은이들을 미행하도록 했다. 그들이 차례차례 사라져서 공터가 텅 비었을 때쯤이었다. 불어온 바람에 세워둔 횃불이 일렁였다. 누군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무사들이 칼을 빼들고 소리가 난 쪽으로 걸어갔다. 늘어선 횃불이 이번에는 일제히 오른쪽으로 휙 기울었다. 경쾌한 발소리가 이어졌다. 그림자가 신속하게 움직였다. 무사들이 그 쪽으로 달려갔다. 발소리는 사원을 사이에 두고 뒤편에서 울리고 있었다. 키득대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잡아라, 빨리 안 잡고 뭐하는 거냐?" 왕이 말했다. 무사들이 서로 눈짓했다. 그들은 각기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웃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숨바꼭질을 하듯 짜릿한 즐거움에 휩싸여 내는 소리 같았는데, 그 주인은 그것을 숨길 의사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왕은 기다렸다. 무사들이 한 남자를 끌고 걸어왔다. 왕은 자신 앞에 내동댕이쳐진 남자를 내려다 보았다. 스물을 갓 넘긴 청년이었다. 청년은 계속해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떨림을 진정하기 어려워 보였다.

"너는 왜 웃고 있느냐?"

"너무 기뻐서 웃음을 참기가 어렵습니다."

"뭐가 기쁘다는 말이냐?"

"리베르 신께서 재림하실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그 점이 저를 기쁘게 합니다. 그 분은 반드시 오십니다. 오셔서, 저희를 환희와 황홀경으로 이끌고 진리를 보여주실 겁니다. 왕께서도 기뻐하소서."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양 팔을 한껏 하늘로 치켜올렸다. 왕은 그제서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청년의 머리에는 화환이 흘러내렸고 여자처럼 화장을 하고 있었다. 눈은 광인의 그것이었다.

"네가 제관이냐?"

왕이 혐오감을 가득 담아 물었다. 청년은 그렇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문초가 시작되었다. 수행원이 내용을 기록했다.

왕: 이름이 무엇이냐.

이단자: 리디아 출신의 아코이테스.

왕: 넌 어떤 연유로 그 자를 따르게 되었느냐?

이단자: 저는 고기잡이 배에 있었습니다. 출항하기 전, 한 동료가 술에 취해 비틀대는 청년을 데리고 배에 올라왔습니다. 저는 첫 눈에 그 분께서 신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동료들에게 그 분을 해치지 말아달라고 간곡하게 애원했지만 그들은 제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저주를 받아 바다에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왕: 그 청년이 바다로 밀었다는 말이냐?

이단자: (웃는다) 그들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왕: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이단자: 그 분은 아무런 무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들의 가슴 속에 광기의 불씨를 일깨웠을 뿐입니다. 저는 그 분이 명하는 대로 낙소스 섬에 가서 배를 정박했고, 그 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왕: 더 상세히 말하라. 그 자가 어떻게 선원들을 죽였다는 말이냐?

이단자: 궁금하십니까?

왕: (무사들에게 눈짓한다.) ...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다음 번에는 다리가 으스러질 줄 알아라. 다시 묻겠다. 그 자가 어떻게 선원들을 죽였느냐?

이단자: 곧 보게 되실 거고, 알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그 때가 되면 왕께서 목숨을 구하시기에 너무 늦었을 겁니다. 그 분을 거스르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왕: 네 신은 지금 어디 있느냐?

이단자: 도성 밖의 인근 숲에 계십니다. 하지만 그 분을 붙잡을 수 없을 겁니다. 그 분은 왕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왕: 그 자가?

이단자: 듣기로 두 분께서는 친척 관계시라더군요. 그러고 보니, 여신의 저주를 받아 사냥개들에게 찢겨 죽은 악타이온도 전하의 핏줄이었지요.

청년은 감옥에 던져졌다. 심한 고문을 받아서 양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고문자들이 그를 죽일 형기를 들고 감옥 문을 열었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왕은 병사들을 시켜 민가를 샅샅이 뒤지게 했다. 돌아온 병사는 허름한 차림을 한 늙은 노인의 등을 밀쳤다. 노인은 벗은 모자를 양 손으로 가지런히 모은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죄수가 두 발로 감옥에서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았다고, 그 때 감옥 문이 스스로의 의지인 양 저절로 열렸다고.

"네가 본 것을 다른 자들에게도 말했느냐?"

"아닙니다. 이 늙은이가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눈이 침침해서 잘못 본 것이겠거니 하고 남들한테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죄수가 터럭 한 올 다치지 않고 감옥에서 걸어 나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교주가 숭배자들과 함께 도시에 들어왔을 때 왕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왕은 뜬 눈으로 아침까지 버텼다. 날이 밝자 보고가 들어왔다. 사람들이 키타이론 산으로 몰려갔다고. 거리와 신전과 상점은 텅 비었다고. 하지만 도둑이나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고. 왕은 즉시 병사들을 산으로 보냈다. 그들은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왔다.

"아코이테스라는 자는 보이더냐? 그 교주는?"

고통을 삼키며 병사가 간신히 꺼낸 말에 의하면 그들이 산의 초입부에 들어섰을 때부터 북피리 소리와 사람들의 괴성이 들렸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짐승 가죽으로 몸을 가린 한 무리의 여자들이 고함을 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무서운 속도로 병사들에게 달려들어서 무기를 빼앗고 몽둥이로 난자했는데, 그 힘을 이길 수 없었다. 간신히 빠져나와서 몸을 숨기고 산의 정상에 접근했을 때 환한 표정을 한 제관이 담쟁이 덩굴로 만든 관을 누군가의 머리에 씌우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의 얼굴은 수풀과 나뭇가지에 가려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그 사람이 교주임을 확신했다. 그때 달려오는 여자들 때문에 그들은 급히 산에서 내려와야 했다.

"산에 간 사람들은, 저희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수였습니다."

왕은 병사들이 자리를 뜬 이후에도 꼼짝 없이 앉아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그의 시선은 정면에 고정되어 있었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어느 곳을 보고 있지 않았다. 정신은 다른 곳을 헤매고 있었다. 거대하고 잔혹할 정도로 매혹적인 심상이 그를 뒤덮었다. 그는 공포와 전율에 떨었다. 설핏 잠이 들었을 때 그는 꿈을 꾸었다. 용의 이빨이 땅에서 자라났다. 그것은 무장한 병사가 되었다. 그들이 땅을 가득 메웠고, 세상은 그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왕은 높고 먼 곳에서 그들을 내려다 보았는데, 그는 그의 선조 자신이기도 했다. 병사들은 끝없이 진군했다. 칼과 창과 활촉이 번쩍였다. 왕은 견고한 시선으로 그들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그의 맨발에 휘감겨 오는 끈덕진 감촉을 느꼈다. 왕은 이상한 예감에 다리를 내려다 보았다. 그것은 녹색의 덩굴이었다. 식물은 본연의 의지를 가지고 그의 몸 위를 기어오르며 그를 휘감고 있었다. 떨구어 내려고 했지만 힘이 너무 강해서 이길 수 없었다. 왕은 고함을 질렀다. 병사들은 뒤돌아 보지 않았다. 우측에서 거대한 급류가 몰려와서 그들을 모두 쓸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두운 이파리가 왕의 벌린 입과 눈을 막았다. 왕은 잠에서 깼다. 아침이 밝았다. 환관이 왔고, 세상은 조용했다. 왕은 키타이론 산으로 갔다. 그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그것이 긴장과 공포에서인지, 매혹 때문인지 왕 자신도 잘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홀로 말을 타고 산 어귀에 도착했다. 말을 나무둥치에 묶어 두고 산을 올라갔다. 그때 한 사람이 그를 뒤에서 불렀다. 왕은 몸을 돌렸다. 피부가 희고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흘러내리고 보라색 옷을 입은 남자였다. 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자가 말했다. 축제에 참석하려 오셨냐고. 왕은 그렇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복식을 해야 합니다. 어제 병사들이 산에 들어와서 호된 곤욕을 치렀지요. 우리 사람들은, 신을 모시지 않는 자는 용납하지 않거든요. 남자는 호의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옷은 어디에 있습니까. 왕이 물었다. 남자는 어렵지 않다는 듯 옷과 화관을 꺼내서 건넸다. 왕이 옷을 입자 남자는 이제 얼굴에 화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왕은 짧게 깎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얼굴에는 분칠을 하고 입술은 붉고 길고 흰 옷을 입은 차림이 되었다. 남자가 말했다. 아주 잘 어울리시는군요. 이제 들어가도 좋습니다. 왕이 어렵사리 몸을 기울이며 경사를 올라갈 때 뒤에서 웃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왕은 그 소리를 잘못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애써 무시했다. 그는 계속해서 올라갔다. 숨이 찼다. 북을 두드리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지나갔다. 행렬의 중앙에는 피투성이가 된 염소가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염소에 달려들어서 이빨로 살점을 뜯어내 씹었다. 죽어가는 염소의 눈이 그를 슬프게 응시하다가, 빛이 사라지듯 꺼졌다.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입 주위는 털로 지저분했고 턱에 핏물이 흘러내렸다. 여자는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눈이 이글거렸다. 왕은 그 시선을 받아내려고 애쓰며 태연히 가던 길을 갔다. 수풀이 유난히 우거진 곳이 나왔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요란한 악기 소리와 괴성은 보다 위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왕은 몸을 낮추고 수풀과 나뭇가지를 헤치고 숨겨진 곳을 보았다. 그 곳에서 그는 화려한 행렬을 보았다. 사람들은 일렬로 늘어선 채 북을 치고 춤을 추며 걸어갔다. 피리 소리가 이어졌다. 곱사등이 노인이 지나갔다. 그는 술에 취해서 얼굴이 붉었고 풀린 눈으로 딸꾹질을 했다. 이윽고 이어진 광경에 왕은 눈을 의심했다. 이마가 납작하고 검은 반점이 찍힌 누런 가죽의 맹수 두 마리가 끄는 마차였다. 마차의 주인은 서 있었다. 솔방울을 단 지팡이, 작고 단단한 두 뿔을 감싼 담쟁이 덩굴관, 긴 머리카락, 보라색 제복.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가 손을 들어 화답했다. 소리는 거세졌다. 산천이 울릴 지경이었다. 왕의 머리가 울렸다. 가슴이 뛰었다. 이상한 긴장과 황홀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흥미진진한 경기를 관람하듯 그 장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공포와 전율이 흘러내리는 두 줄기 땀방울처럼 서로를 앞지를 듯 비등한 속도로 오르락내리락했다.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는 수풀과 나뭇가지를 손짓 하나로도 모두 없앤 다음 드러난 공터에서 그에게 거대한 사랑의 맹세를 바치고 싶었다. 함성과 괴성과 악기 소리는 그에게 있어 완벽하게 어우러진 하나의 화음과도 같았다. 그것은 이내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머릿속 공백에는 유혹과도 같은 장면이 그를 응시하고, 에워쌌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여자들이 장미꽃잎을 뿌렸다. 왕은 불확실하고 모호한 어떤 욕망을 느꼈다. 그 욕망은 그 안에서 점점 자라나서 확고한 모양을 갖추었다. 그는 목이 말랐다. 그는 눈 앞의 신을 삼키고 싶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왕은 그 광경에서 시선을 뗐고,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나무 둥치에 묶어둔 말을 찾으러 내려가야 했다. 여자들을 마주쳤다. 이번에는 나이 든 여자들이었다. 그의 어머니와 이모들이었다. 그들의 눈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빛으로 번득였고, 인간의 것이기보다는 죽어가는 짐승의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질렀다. 왕은 그들을 향해 양 팔을 벌려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마치 사냥개 떼가 사슴을 둘러싸고 갈기갈기 찢듯 그를 원형으로 에워쌌고, 그를 분해했다. 노파는 축제의 주관자에게 가서 노획물을 바쳤다.

"아버지시여, 이 갓 잡은 신선한 숫소를 바칩니다. 덫도 없이 오직 신께서 주신 힘으로 사냥했습니다. 모두 와서 즐깁시다." 

 

 

임윤재

임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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