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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흰 뼈와 베어링

2023.07.12 23:5907.12

딱 십 년 전을 후회해. 돌아갈 수 있다면 그건 끔찍한 생각이었다고 말해 줄 거야. 2029720. 레인노프사가 휴머노이드를 개발하면 어떨까? 하고 네가 내게 물어 본 날이지. 아직 생생히 기억해. 우리는 초여름 날, 불임클리닉 아래 막 오픈한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었어. 카페엔 우리 말곤 아무도 없었지. 침묵이 카페를 메우자 너는 슬로우 조? 하고 물었고 나는 슬로우 조오오! 하고 두 팔을 허우적댔어. 한바탕 깔깔 웃었지. 그러고는 난 물기가 흘러내리는 컵을 뺨에 대곤 좋은 생각인걸, 이라고 말했어. 그걸 후회해.

너는 소설가 나부랭이가 아니라 레인노프의 AI 선임 연구자 겸 선임 매캐닉이니까, 내가 좋은 생각인 거 같아.” 라고 한 말을 마치 출발선의 요이 땅 신호처럼 받아들였어. 넌 삼 개월 안에 인간의 발달과정에 맞는 학습을 할 수 있는 AI를 만들어 냈지.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밑도 끝도 없이 지어내는 괴물 상자가 아니라 인간의 의식을 가장 정교하게 따라한 소프트웨어였어. 실수하고, 까먹고, 상처받는 그런 소프트웨어. 너는 그걸 흉터 난 소프트웨어라고 불렀어. 게다가 충동에 굴복하거나 분노하거나 심지어는 욕설하는 것까지 가능하게 되었어. 평범한 초등학교 삼학년 남자아이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런 흉터는 진짜를 아주 교묘하게 흉내낸 것이잖아?

그러니까 나는 범죄자가 아니야.

 

2029년에 한 유명 리서치 센터에서 나온 보고서의 한 문장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순수 한국인의 탄생은 10년 내에 중단될 것이다. 대체 그런 휘발유 같은 단어를 무슨 생각으로 넣었을까? 아직까지 한민족 사상에 경도된 연구자의 백일몽이 남긴 흔적일까? 그러나 작열하는 듯한 흰빛을 발하는 순수라는 단어에 사람들은 불같이 분노했다. 이번에도 애를 낳지 않는 이기적인 여자들에게 화살이 돌아갔는데, 여자들은 콧방귀를 뀌면서 아이를 더 낳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들은, 그리고 일부 여자들은 핏줄을 잇는 것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아이들을 원했다. 사랑을 주기 위해서. 그래. 뭐 그것도 있겠지만, 대개는 사랑보다는, 자신이 늙고 병들었을 때 은혜라는 기억을 껴안고 자신을 수발들어 줄 자식들을 원했다. 튼튼한 팔다리를 한 아들과 땡깡을 들어주고 멸치 반찬을 해다 줄 엄마 같은 딸을.

그러나 세상의 자원은 점차로 고갈되어 가는 중이었다. 이미 투발루 섬은 허리께까지 잠겨서 거기 사는 사람들은 인도적 지원을 받아 근처의 다른 섬이나 육지로 대피한 지 오래였다. 바다 역시 미세 플라스틱으로 가득하여 WHO가 물고기 취식을 지양하라는 이야기도 냈다. 사람들은 (특히 투발루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소비하고 부수고 파괴하고 먹을 수밖에 없으니깐.

그러나 로봇은 어떤가? 만일 로봇이 전기로 가동되고 그 전기가 친환경적으로 만들어졌다는 확신 혹은 기만이 있다면 좀 더 오랫동안 이 지구라는 곳에 드러눕고 살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인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 가능성을 가장 명백히 보여준 것이 바로 레미-1였다.

레미-1은 순수한 한국인이 순수한 한국 기술과 순수한 한국 반도체를 가지고 만든 휴머노이드다. (나나가 레미-1의 정신과 육체를 만드는 데 총지휘자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가 미국 스탠포드 AI 대학원과 칼텍 로봇공학 대학원 출신의 박사라는 사실만은 어딘지 쏙 들어간 채였다.) 그 설명란에 순수가 덕지덕지 붙은 이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첨단 기계공학과 AI 기술이 결혼 발표를 했다는 소식과도 같았다. 일부 각료는 그 기적과도 같은 중매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레미-1를 입양하여 30세가 될 때까지 의식 및 육체 업그레이드를 완료하는 부부에게는 두둑한 지원금이 나오는 정책이 입안되었다. 게다가 그것은 레미-1에게도 기쁜 소식이었는데, 한국인 둘이 레미-1을 서른이 될 때까지 키우면 그는 더 이상 로봇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인간 입양 단체가 그러는데 어이가 없대.”

나나는 방어적으로 아들을 끌어안았다. 동글이 안경을 쓰고 오른손에 알림장을 든, 오현동 역시 레미였다.

10년 전 아내는 임신이 되지 않아 속상해하고 있었고, 마침 베타서비스를 성공시키자마자 레미를 입양했다. 우리는 그를 현동이라고 이름 붙였다.

어린 현동은 울지 않았다. 왜냐하면 레미는 0세부터 3세까지는 울지 않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등에 설치된 디스플레이에 아이와의 유대관계를 위해 피부로 접촉해 주세요라는 홀로그램이 뜰 때마다 현동은 부드럽게 진동했다. 그리고 그 미션을 일정 퍼센트 이상 실패하게 되면 아이의 AI는 또 흉 지게된다. 그러니까 나중에 부모의 방임으로 인한 심리 상담을 받는 로봇들이 출현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나나가 그런 리얼리티를 왜 집어넣었을까 궁금해했다. 어디 잡지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http 주소를 처음 만든 사람들은 http 뒤에 작대기를 두 번이나 그었던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작대기엔 아무 의미가 없었는데, 전 세계 사람들이 그 두 작대기를 치느라 낭비했던 시간과 그걸 출력하기 위해 들어갔던 잉크 등이 아깝다고 말이다. 그래서 그때 난 현동의 등을 도닥도닥 두드리는 나나에게 왜 그런 기능을 넣었는지 물었다.

"이건 레미들을 위한 게 아냐.”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나는 현동을 다시 업었다. 현동의 등 뒤에서 나오는 붉은색 디스플레이는 잘 하고 계십니다라는 글씨로 빛나며 내 뺨을 붉게 물들였다.

 

현동의 열 번째 생일에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나나는 알았을까?

일단 가서 내일 시험이나 공부해. 빨리

현동이 마룻바닥을 두두두 뛰어가자 부주의하게 쥔 알림장 사이에서 손으로 찢어낸 가정통신문이 슬쩍 나와서 떨어졌다. 알림장 가운데에는 틈이 벌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엔 닌텐도가 허술하게 숨겨져 있었다. 나나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난 나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로 오늘 아침에 현동 때문에 학부모 총회가 열렸다. 어떻게 휴머노이드와 사람 아이를 함께 시험 볼 수 있게 하냐, 공정하지 않다. 지금이라도 학교를 그만두게 해야 한다. 학부모들의 가열찬 항의에 맞서 나나는 현동이 얼마나 공 차기 좋아하며, 죽어라 복습은 안 하고, 전날에서야 수행평가의 존재를 알려 오는 한심한 애인지 파워포인트까지 마련해 설명했다. , 현동이 얼마나 흠 있는 인간에 가까운지설명해야 했다. 고 삼 어머니들 같은 초 삼 어머니들은 의심쩍은 눈초리로 해산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나의 주장에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나나는 자신의 흉 진 소프트웨어이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현동에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전체를 18개국 언어로 다운로드 받지는 않을 것이다. 뭐 서예 학원에 등록시킬 수는 있겠지만.

그리고 현동은 그 자신도 모르는 크나큰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현동은 전 세계에서 가장 나이 든 레미로서 레미에 관련된 기준의 선례를 모조리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전체 매스컴의 관심이, 아니 세계 전체 매스컴의 관심이 현동의 삼학년 중간고사 결과에 쏠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현동의 문 너머에서는 닌텐도 음량 출력을 급하게 줄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나는 벌떡 일어났다.

오현동, 너 진짜 말 안 들을래? 엄마가 공부 하랬잖아!”

현동은 슬그머니 방문을 연 후 머리를 반쯤 열린 문에다가 쿵쿵 소리가 나도록 찧으며 항의했다. 뒷짐으로 닌텐도를 쥔 채였다.

하나도 안 들어오는데. , 그냥 머리에 위키 다운받아 줘요.”

! 엄마가 오늘 아침에 뭐 했는지 모르지!”

나나는 고혈압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나가 쉴 새 없이 쏘아대지 않으면, 이런 갈등 상황에서 잠시 동안이라도 침묵이 있으면 방어적으로 변했다. 나는 나나가 쓰러질 것을 대비하고 나나의 등 뒤에 서서 윽박질렀다.

쓰읍, 엄마 말 들어!”

하아, 아저씨는 또 뭔데 참견이야.”

너 오늘 학교에서 쫓겨날 뻔했어. 알아? 너 휴머노이드라고, 같이 시험 못 보겠다고 너 친구 엄마들이 항의하더라.”

여보!”

넌 엄마가 그거 막아 준 건데, 그것도 모르고 숨어서 닌텐도나 하고.”

현동은 과장되게 한숨을 푹 쉬었는데 나는 그 한숨이 나나에게 너무나 잘 먹히는 협박이라는 것을 눈으로도 알 수 있었다.

아니, 생각을 못 하나. 그럼 내가 바보 같은 게 좋은 거잖아요. 하아그럼 공부 안 하는 게 맞잖아. 하아, 하나도 모르면서

너는 엄마가 중간고사 35점 맞아 오는 로봇 만들려고 미국 박사 두 개 딴 줄 아니?”

나나는 휘청거리면서도 내 입을 막으려고 뒤에서 달려들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가벼웠다. 현동은 울분에 차서 소리쳤다.

멍청해서 한심하죠? 아들 취소하고 싶죠? 빨리 죽여요 그럼. 간단하잖아. 어차피 파워 끄면 되잖아!”

. 문이 닫혔다. 나는 경악한 나나의 눈을 보며 애써 흔들리지 않은 척했다.

입이 참 잘 뚫려 있군.”

나나는 울고 싶다는 표정으로 자기 방으로 가 문을 닫았다. 나도 문 하나쯤 닫아야 속이 편할 성 싶었는데 거실에는 닫을 만한 문이 없었다.

 

오현동의 투정과 허튼소리를 견디지 못했던 어느 날이었다. 현동은 날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도 모자라 나나가 외출했을 땐 내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고, 나와 시선을 맞추는 것조차 귀찮아했다. 무시의 범위가 지독하게 넓어진지 오래였다. 만약 그걸 평범하다고 부를 수 있다면 그날도 평범한 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날에 평범한 엄마 아빠는 배게에 입을 파묻고 소리나 지르겠지만 내 방식은 오현동의 어떤 특성 때문에 그것보다는 좀 더 극적이었다.

알루미늄 방망이로 현동을 때렸을 때 피는 나지 않았다. 그러나 발목이 부서져서 베어링이 노출된 그것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동의 홍채는 이 지구상의 누구와도 다르겠지만, 그 안광만큼은 현동 고유의 눈빛인지, 아니면 레미 모델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눈빛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미간을 찌푸렸지만 답이 나올 턱이 없었다. 비슷한 문제를 고민하던 지난 십 년간 습관처럼 찌푸려 온 나머지 이미 미간엔 금이 죽죽 갈 대로 간 채였다.

현동은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없는 것처럼 집안의 구석에 몸을 구겨 넣고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나의 다음 움직임을 살폈다. 그리고 서투르게 핸드폰을 숨겨 뒷짐 진 후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나는 고개를 숙여 119를 부르는 현동을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출동 안 한다에 500만 원 건다.”

"아빠가 저를... 때려요. 새꿈마을 5단지 402호로 오세요."

"어떻게그렇게 인간인 척을 잘 해?”

나나가 들어오자 현동은 부서진 다리를 질질 끌며 나나의 뒤편에 숨었다. 나나는 눈물 범벅이 되어서 핸드폰을 들고는 사지를 떨었다. 아까 딩동 하고 핸드폰 녹화가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갈다.

"가정폭력.”

재물손괴.”

나는 부드럽게 나나를 정정해 주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사정없이 뻗친 나나의 머릿결을 정리해주고 싶었으나 그녀는 뒷걸음질 치다 주저앉았다.

나는 이 난장판을 설명하려고 하는 대신 귀청에 꽂히는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붉은빛이 나를 따스한 혀처럼 쓰다듬고 지나갔다. 문득 현동의 등에서 빛나던 붉은 LED 라이트가 떠올랐다. , 나나의 말마따나 그 기능은 레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몇 세기 안에 레미가 새로운 지배종이 될 건데, 인간이 거기에 거부감을 품으면 안 되니까. 인류의 왕좌를 얌전히 넘겨주어야 하니까. 강제로 유대감을 만들어 주는 장치니까. 나는 그것을 깨닫고 나나에게 물었다.

"...순수한 한국인이 아니라 순수한 인간을 사라지게 하려고 하던 거였네."

나나는 허리를 짚고 벌떡 일어나 허공에 대고 외쳤다.

"순수한 한국인 씨가 살아 있다면 내가 사과할게. 김 순수한 한국인 씨!"

"이런 상황에서 농담은."

문 두들기는 소리가 나자 알루미늄 배트를 쥔 손에 힘을 풀었다 깽그랑 깡그랑 하는 소리가 바깥 요원들이 문을 부수는 소리를 덮었다.

“500만 원 아깝군."

 

내가 간과한 것은 법률이 아니라 언론의 성질이었다. 파리 떼라고 하면 진부한 표현이겠지만, 나나의 칼텍과 스탠포드 학위와 수많은 레미들의 어머니라는 타이틀은 그들을 매혹했다.

나나도, 형사도, 내 변호사도 왜냐고 물어봤다. 그냥,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초등학생의 오만을 견디다 못해 어느 날 짜증이 임계점을 넘어섰던 거다. 현동의 방이 두 개나 있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현동의 방과 조립용 방. 나는 방이 하나도 없는데하여간 부수고 싶어서 부쉈다고 솔직히 말했는데도 변호사는 자신의 노트에 아이 돌봄 스트레스-우울증이라고 휘갈겨 적었다. 난 그 부분을 지워 달라고 부탁했다.

내 변호사는 법정에서 매끄럽게 진술했다. 나는 나와 나나의 공동 소유물인 레미-1 현동에게 질렸고 화가 났으므로 그를 부쉈다. 피해를 입은 나나의 몫은 도의적으로 물어줄 것이나 그 외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사실 현동의 의식은 다른 곳으로 당장이라도 이식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은 그의 의식을 흉 지게 하는 것외에는 아무런 타격이 없다. 게다가, 나나가 주장한 흉터 난 소프트웨어이론에 따르면 트라우마는 레미의 인간다움을 더욱 끌어올리는 촉매가 수 있기 때문에 이 사건은 현동이 30세가 되었을 때 더 인간 사회에 편입하게 쉽게 만들어 줄 것이다.

법정에서 이를 듣는 나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 논리야말로 내 최고의 작품이자, 나나의 철학이자, 나나를 가장 아프게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현동은 다른 사람들과 트라우마의 조각을 꼭 맞추어 보면서 인간과 가까운 척하며 그 트라우마에 공명하는 친구 혹은 연인을 만들 수 있겠지. 인간은 곧 투쟁 후 남은 상흔과 그 위에 얹힌 딱지가 아니던가?

그러나 검사 측은 생각이 달랐다. 휴머노이드가 30살이 되어야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한 논리를 들고나와 현동이 사람 어린이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트라우마는 업그레이드로 기능하지 않았기에 현동에게 고통스러운 상처를 남겼으니 원인 제공자인 나에게 민형사적 대처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강아지마저 더 이상 재물이 아닐진대 어떻게 휴머노이드가 재물이 될 수 있냐고 신랄하게 비판하는 검사측 소장은 다시 입법부의 태만을 질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미 AI 관련한 서류더미에 쌓여 있는 입법부는 이를 고깝게 볼 것이다.

나는 재미있는 토론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침을 꿀꺽 삼켰다. 법정 안, 나무 울타리에 기댄 몸이 살짝 움직일 때마다 두 손목에 매달린 수갑이 짤깍였다. 이 새로운 액세서리에 붙여 볼 수 있는 별명으로는 끔찍한 오해, 공권력 체험 기념품, 곧 느낄 자유를 더욱 짜릿하게 만들어 주는 양념 등이 있으리라.

나는 형사상 무혐의, 민사상 손해배상금 지불이라는 결과를 받고 자유의 몸의 되었고, 그와 동시에 수많은 법학자들과 기술철학자들이 대난투를 벌이는 계기를 만들었다. 꽤나 만족스러운 결말이었다. 그러나 나나는 집을 비운 채 한 달간 오지 않았고, 나는 이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며 거실을 비워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내 주소를 남기기는 했지만 연락이 올 거란 희망을 갖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나는 오학년 수준 정도로 커 버린아니, 몸의 이곳저곳을 비례에 맞게 좀 더 큰 부품으로 교체한- 현동을 어중간하게 업고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란 나머지 탈고하다가 한 문장을 통째로 지워 버렸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나는 의자를 돌려 나나를 마주 보았다. 나나의 볼이 퀭했다. 현동을 내려놓자마자 현동은 발에 힘이 풀려 절뚝였다.

절뚝이네?”

현동? 당연하지.”

왜 여기 왔어요. 우리 집에 가요.”

현동은 졸음이 가득해 보이는 눈을 비볐다.

작별 인사하라고 데려왔어. 이제 엄마랑만 살거야, 아빠랑은 안 살아.”

장애를 그렇게 훌륭하게 묘사하다니, 역시 칼텍.”

사실 현동은 발목이 파손된 그날 바로 1km 완주를, 아니 42.195km 마라톤 완주를 할 수도, 심지어는 날아다닐 수도 있었다. 정확한 부품만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나는 현동이 절뚝거리게 하도록 했다. ‘자연스럽게절뚝거리는 로보틱스 기술은 매끄럽고 부드러운 움직임보다 훨씬 더 많은 변수와 알고리즘이 필요했을 테다. 레미를 키우는 건 세금이 엄청난 규모로 들어가는 정교한 인형놀이에 불과하다.

"얼마나 많은 의인화를 해야 망상에서 깨어날 거야?”

현동은 내 가슴으로 낳은 아들이야. 법이 어쩌든 나는 그렇게 느껴.”

"인간을 입양했다면 나도 그렇게 느낄 거야. 근데 말이지. 한 몽상가가 너무나 강력해서 전 세계를 자기 꿈에 빠트리고, 실제를 자기 꿈으로 대체할 계획을 갖고 있다면 뭐, 그 사람은 새 인류의 엄마가 아니라 인류를 절멸시킬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아니겠어? 제발 가서 다른 거 연구해. 달 위에서 걸어 다니는 파워슈트를 만들고, 적당히 노인 말상대나 해 주는 AI를 만들란 말이야.”

공간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자 나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슬로우 조오오오?”

난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슬로우 조는 언제부턴가 우리 사이에 있었던 암호이자 농담거리다. 어느 레딧 글에서 본 이야기다. 조는 미군의 폭발물 처리 로봇이었는데 그만 폭발 현장에 휘말려 버렸다. 그걸 본 한 미군은 자신의 몸을 날려 슬로우 조를 구하려다가 저지당했다. 그 미군은 "슬로우 조, 안돼, 죽으면 안 돼, 절대!”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우리는 애초에 로봇이 무엇을 위해 설계되었는지 깜박한, 로봇에 애착을 형성해 버린 그 사병을 애달파하면서도 우스꽝스러워했다.

그러니까 나나는, 어쩐지 옛 추억에 갑자기 빠지기라도 했는지, 휘적거리며, 슬로우 조를 부르는 사병 목소리를 흉내 냈다. 나도 휘적거리며, 그런 나나를 흉내 냈다.

현도오오옹.”

그러자 뺨이 날아왔다.

너는 사람을 광인으로 분류하는 그 습관을 좀 버려야겠다.”

뺨을 후려갈긴 그 자세 그대로 나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우는 것일까? 화난 것일까? 난 현동의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쿵쿵 박동하는 뺨을 움켜쥐었다. 나나의 손은 단단하고 거칠었고, 그 타격은 매운 정도가 아니라 철판을 가져다 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찔했다. 그보다 더 아찔했던 건 내가 나나의, 창조하는 손으로 공격당한 몇 안 되는 사람일 거라는 사실이었고, 또 내가 새로운 인류의 성경에 악마로 새겨질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은 약간 흥분되기까지 했다. 난 고개를 기울여서 입안의 피를 한 쪽으로 고이게 하며 말했다.

"인간은 물건을 가없게 여기는 마음 때문에 멸망할 거야. 길에 널린 잡동사니에서 얼굴을 보는 습성 때문에. 사방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거두어들이지 못해서.”

나나는 내 귓가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이를 갈았다.

"네가 임신만 시켜 줬어도, 이렇게까진 안 했어... , 왜 웃어!”

몇 년 전부터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예기치 못한 타이밍에 자꾸만 웃음이 났다. 그 손끝에서 막대한 가능성이 꽃피는데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조소가 아니라 경의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그러나 이번 웃음은 조금 달랐다. 이것은 깨달음에서 나는 웃음이었다. 나나는 우리의 배반자이자 새로운 지배종으로 향하는 다리였다. 그런 나나가, 방금 그 다리의 지반에 균열을 가할 유일한 방법을 내게 전해준 셈이었다.

미안, 요새 웃음이 많아진 것 같아.”

나는 의자를 돌렸다. 오현동의 눈을 정확히 마주 보며 나는 말했다.

오현동, 너는 인간 아이의 대체물이야. 그게 네 목적이란다. 방금 네 엄마가 인정했다. 하하, 하하하. 즐겁다."

그때였다. 내 팔 한 쪽이 깨끗하게 파여서 사라졌다. 한국 최고의 외과의사가 봤다 하더라도 혀를 내두를 것 같은 정교한 절삭 경로는 내 오른팔 안쪽 흰 뼈를 아름다워 보일 만큼 도드라지게 했다. 그러나 그 흰색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곧 솟구치는 핏물에 잠식되었다. 나는 상처를 움켜쥐려다가 잘려나간 면적이 너무 넓다는 것을 보고 그만두었다. 대신 어떤 힘이 나를 반절 내었는지, 곧 안락과 평안으로 인도해 줄지 알고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동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마 눈이 아니라 입에서부터였나 보다. 현동은 기절한 것인지 눈이 뒤집혀 있었고, 그 뒤편에서 나나가 현동으로 나를 조준하고 있었다. 가까운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너무 떨려서 비껴간 것이 명백했다. 나는 핏구덩이 안에서 퍽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망상은 그만뒀네?”

그리고 나는 어떤 장면을 봤다. 어쩌면 고통 때문에 뇌가 마지막 남은 도파민을 끌어다 보여 준 환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수천의 어린 레미들이 잠든 나나를 둘러싼 채로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그들은 나나의 숨 쉬는 템포에 맞추어 갈비뼈를 오르락 내gm락하며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레미의 동심원 바깥에는 또 다른 세대의 청소년 레미들과, 그 바깥에는 또 다른 세대의 어른 레미들이 두텁게 그들을 포위한 채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내게는 보였다. 수억 개에 가까운 개체들의 겉을 둘러싼, 부품과 살갗 한 층 아래에 도사리는 내장이. 그 수많은 몸 안에서 뛰는 심장 중 인간의 심장은 오직 중심에 있던 나나의 것 하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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