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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엽편]피리 명인

2011.10.09 17:1010.09

  옛적에 피리의 명인이 있었습니다. 그의 피리 소리는 신묘하여 흐느끼는 듯 했고, 기뻐 외치는 듯 했고, 길고 소슬한 바람소리 같기도 했고, 흐르는 물 소리 같기도 했습니다. 그가 피리를 불면 숲의 새들도 지저귀는 것을 멈추었고, 소리높혀 다투던 이들도 숨을 죽이고 들었습니다. 그의 피리 소리를 한번이라도 들어본 사람들은 입시울에 침이 마르도록 그의 솜씨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라도 피리라고 하면 그의 이름을 말했고, 그의 이름을 들으면 피리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명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알고 익히 쓰이는 곡조들과 어울리는 음률들을 알았을 뿐이지 자신이 부는 소리에 응답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가 무슨 뜻을 품고 피리를 부는 것인지 알아차리고 함께 웃는 이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면 명인은 말하지 않고 다만 웃으며 쓸쓸히 피리를 거두어 자리를 떴습니다. 모두의 귀에 그가 부는 소리가 울려퍼진다고 해도, 명인은 아무도 자신의 소리를 들어주지 않는 것처럼 외로웠습니다.

  관직 높은 벼슬아치의 술자리에 초청되어갔던 명인은 잔치가 파하고 홀로 길고 긴 달 아래의 담벼락을 따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명인은 동냥을 구하는 늙은 소경과 마주쳤습니다. 명인은 말없이 소경의 손에 술잔치의 흥을 돋구어준 사례로 받은 금편을 던져 준 뒤, 그가 돌아서기 전에 피리를 빼들어 거침없이 한 곡조를 불어냈습니다. 그 가락은 달빛과 같고 음률은 외줄기 바람에 놀라 우는 부엉이 같았습니다. 소경은 가만히 그 소리를 듣더니 웃으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소리를 잘 알지 못해서 선생님의 피리가 좋은지 나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허나 저기 저 바람이 머물다 가는 벼랑에 사는 신령이 피리에 능하다고 하니, 그리로 가서 평을 들어 보시면 어떠실런지요?"

  그래서 명인은 늦은 밤에 허위 허위 산줄기를 타고 바람이 머무는 벼랑으로 갔습니다. 달은 기울고 밤만이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구비구비 서린 소나무 아래 앉은 명인은 숨을 고르고 피리를 내어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는 그의 심정을 곡조로 불었습니다. 구름 한점 없는 밤에 저무는 달은 빛을 던지고, 바람은 숨결을 따라 들어섰다가 피리를 통해 빠져나왔습니다. 곡이 끝나고 명인이 피리에서 입을 땠을 때, 아무도 그의 소리에 답해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피리를 불기 시작할 때 처럼, 바람만 소슬히 깊은 아래서 불어 올라올 뿐이었습니다. 메아리쳐 돌아오는 피리 소리를 듣는 것은 그 자신뿐이고 아무도 그 소리를 듣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제서야 명인은, 누군가 피리 소리를 들어주고 그 속의 뜻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저 피리를 부는 것, 그가 피리를 불고 있다는 것, 오로지 그 것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로, 명인은 다른 사람들을 청하여 피리를 불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느 사람은 이제 그의 솜씨가 녹슬었다고도 했고 또 어느 사람은 그가 자기 솜씨를 닦는데 너무 집착한 나머지 더이상 자기 솜씨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없게 된 거라고도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홀로 피리를 불 때면, 그 소리는 바람이 영그는 소리 같기도 하고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달이 저무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밤이 여무는 소리 같았습니다. 아무도 명인이 피리를 불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밤은 조금 더 길고, 그 밤의 잠은 조금 더 깊었을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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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필을 결심하고 이 글을 쓴 뒤,
글을 쓰지 않겠다는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 깨닫고
글을 쓰지 않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댓글 2
  • No Profile
    123123 11.10.09 21:19 댓글 수정 삭제
    고맙습니다
  • No Profile
    Melissa 11.10.28 11:22 댓글 수정 삭제
    그 밤은 조금 더 길고, 그 밤의 잠은 조금 더 깊었을 뿐이라..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오래 읽고 싶은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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