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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질식

2011.10.04 21:3110.04

제목 : 질식


내 친구는 그림자뿐이다. 내 친구에 대한 얘기는 더하지 않겠다. 나는 황토색 토사물을 입에서 쏟고 있고, 뱉어지지 않는 가시를 입에 물고 있다. 토사물과 가시가 언젠가는 사라지길 기대한다.

험준한 산중에 나는 갇혔다. 이곳이 산, 험준한 산중턱의 어떤 한 지점일 것이란 막연한 추측 외에 뭐라고 더 설명할 수 없다. 모호한 그 위치 안에서 내가 자리하고 있는 곳은 동굴처럼 생긴 공간이긴 한데, 이곳이 동굴이라고 확실히 말하기도 내키지 않는다. 그래도 마땅히 칭할 명칭이 없음으로 그저 여길 동굴이라 하겠다. 이 동굴의 벽과 바닥은 아무 기별이 느껴지지 않는다. 만약에 내가 이곳의 벽이나 바닥에 사정없이 머리를 부딪친다 해도 감촉마저 느끼지 못한다. 이곳의 넓이는 대충 25m반경이고 천정은 그 높이를 측정할 수 없이 높다. 좌우 2m, 상하 2.6m가량 입구에서는 빛줄기가 들어오긴 한다. 때문에 암흑천지는 아니다. 동굴의 색상은 모든 면이 짙은 보랏빛이다. 여긴 먼지 하나 없다. 아무것도 없다. 이곳에서 나는 온 몸을 발가벗고 있지만 춥지 않다, 또한 덥지도 않다. 배가 고프지도 갈증이 나지도 않는다. 그저 여긴 내가 꼼짝달싹 못하고 육체를 놓고 있어야만할 공간인 것이다.

방금 전 눈을 반쯤 감고 누워 있었을 때 어미들소보다 큰 초록색도마뱀이 나를 밟고 지나갔다. 도마뱀의 발이 내 목을 짓눌렀을 때 그대로 눈을 꽉 감은 채 내 숨통이 끊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무심한 도마뱀은 한 줄기 미세한 바람처럼 그저 스쳐 날아갔을 뿐이다. 죽음을 위한 불씨를 지피려 사력을 다 해보지만 항상 실패한다. 그 다양한 색깔의 불씨들은 언제나 제대로 된 연기도 내지 못하고 꺼져버리고 만다. 다시 말해, 무슨 수를 써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나를 해칠 수 없다. 꺼칠꺼칠한 시멘트벽에 바짝 이마를 긁어 피를 튀길 수 있다면 무척이나 좋겠다는, 꿈을 가져보기도 한다.

동굴 밖은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다. 그 앞에 발가벗은 채 쪼그려 앉아 있어도 춥지가 않다. 얼핏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가면 될 것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아무리 가도 제자리다. 아무리 가도.
기도하듯 두 손바닥을 겹쳐, 두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중얼거린다.
‘내가 얼어 죽게 해다오. 칼날처럼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내 혈관을 타고 들어와 온몸을 얼어붙게 만들어, 나를, 이 저주받은 나를! 산산조각 나게 해다오.‘
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죽어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죽어서 나와 내가 아는 사람들이 살던 세상을 벗어난, 누구도 모를 깊은 저주의 공간에 떨어뜨려져 있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이곳이 지옥일 수도.

가끔 모든 이의 환영을 본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이의 환영이 긴 머리카락과 맥없이 뜬 눈동자 사이 협소한 공간에 끼어 나를 흔든다. 나는 그것을 바라 볼 수 없어 바로 눈을 감아버린다. 처음에는 흐르던 눈물도 이제는 찾을 수 없다.


내가 이곳에 떨어뜨려지기 전 소년과 여자를 만났다. 소년은 눈처럼 하얀 얼굴에 말끔한 회색빛정장차림이었다. 그리고 오른쪽 다리를 약간 절고 있었다.
“애야, 너 어디서 왔니? 몇 살이니?“
아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너 이 동네 사는 애는 아닌 거 같구나.“
얼핏 차가운 인상의 인형과도 같은 이질적인 외모를 가진 아이는 그곳에 사는 산골마을 소년은 아닌 듯 보였다.
“애야, 왜 말이 없니?“
소년은 내 시선을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늘한 표정과 눈빛으로 나를 찌르듯 바라봤을 뿐 결코 대답은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시선에 그처럼 난처한 심정이 들긴 처음이었다. 오히려 결국, 내가 그 아이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기분 나빴다면 용서해라. 애야.“
소년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사과 아닌 사과의 말을 건넸을 때 어느새 한 여자가 다가와 있었다.
“소이! 여기 있었구나.“
아이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하얀 얼굴에 짙은 눈동자를 가진 미인의 형상이었다.

“내가 이 아이의 엄마예요. 이 아이 이름은 소이죠. 성은 없어요. 아빠도 없어요.“
“부군께서 돌아가셨나 보군요.“
“원래부터 이 아이의 아빠는 없었어요.“
“그건 무슨 말씀인지.......“
“그냥 말하고 싶지 않네요.“
“죄송합니다.“

비슷한 장소였지만, 우연히 그녀와 아이를 다시 마주치게 됐다.

“당신이 저 아이의 아빠가 돼주세요. 아니 아빠가 돼야합니다.“
“이것 참, 당황스럽군요. 뭐라고 해야 할지.........“
예상치 못한 그녀의 급작스런 부탁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가 너무나 간절하게 다시 부탁해왔다.
“제발,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울먹임을 참을 수 없는지 콱 막힌 그녀의 음성이 아주 낮게 깔렸다.

그녀와 아이를 다시 마주치게 됐다. 어디를 가도, 어디에 있어도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는 그저 다른 볼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며, 급히 자리를 피했다. 딱히 그런 마음을 가질 일은 아닌데, 내 자신이 아주 치사하고 졸렬한 인간으로 느껴졌다. 입에 재를 물듯 떨떠름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또 그녀와 아이를 만났다.
이번에도 애 아빠가 되어달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난처한 심정에 시선을 딱히 한 곳에 붙들어 놓기가 힘들었다. 아마도 그녀는 심한 곤경에 처한 것 같다는 안타까운 마음만 일어날 뿐이었다.  
나는 한참 떨어지지 않던 입을 무겁게 열었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저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빠가 되는 건.......  그것 말고 혹시나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와 드리지요.“
넋두리하듯 그녀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소이의 아빠는 짐승이었어요. 변태성욕자였죠. 8년 전에 저는 그 남자와 결혼했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학적인 성적학대를 받았어요. 돈이 많은 집안사람이었는데....... 한 1년 좀 넘게는 정말 끔찍이도 시달렸죠. 소이를 낳고부터는 그런 일은 아주 드물었는데, 그건 그 남자가 밖에서 돌았던 이유였죠. 이 여자 저 여자들과 별의별 이상한 짓거리들을 열심히 하고 다녔던 거예요. 저한테는 차라리 그게 나았어요.“
여자가 잠시 말을 멈췄다. 휑한 두 눈에서 이슬이 맺혀 이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휴지 몇 장을 빼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담배를 하나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동안 울기만 하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짐승이, 짐승이 넉 달 전부터 우리 소이에게 몹쓸 짓을 하기 시작했어요.“
나는 그 말에 입에 물었던 담배를 빼고는 진한 한숨과 함께 눈동자를 꺾었다.

“소이는 말을 잃어갔어요. 결국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벙어리가 됐죠. 더구나 한 쪽 다리가 불편하게 됐는데, 그 놈에게 그 짓을 당해서 무릎에 이상이 생겨 그런 거예요.“
그녀의 흐느낌은 더 짙어져가고 나는 찹찹한 마음을 다스릴 길이 없어 눈을 한참 꽉 감았다 떴다.
고개 돌려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저어기 널찍이 떨어진 곳, 작은 감나무 밑에 서서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아이의 주변에 알록달록하게 채색된 넓은 감나무이파리들이 한 장, 한 장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쓸쓸한 이파리 한 장이 아이의 어깨에 붙었을 그 순간, 나는 울컥해 오는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다.
너무 울어서 온몸의 신경이 쓰라려 오는 듯 잔뜩 몸을 떨던 그녀가 다시 힘겹게 말을 이었다.
“열흘 전, 난 그 놈을 죽였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서서히 들어올렸다.
“그 놈의 심장을 칼로 찌르고 소이와 함께 떠나온 거죠.“

“소이가 말을 잃기 전 자주 하던 말이 있었어요. 눈의 여신, 눈의 여신을 보고 싶다고. 만나고 싶다고. 그런 게 있을 리 없지만 우리 불쌍한 소이를 위해 이제부터라도 찾아다녀야만 했어요. 그래야, 그래야만 했어요. 열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무작정 떠돌아다니던 중에 저 산을 손으로 가리키며 ‘눈의 여신‘이란 말을 계속 반복하더라고요.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애가....... 그렇게.“

구깃구깃한 기억 속을 헤쳐보자면, 한적한 숲속의 어떤 오두막에서 그녀와 나는 한 몸이 됐다.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마치 생전에서부터 익숙해진 사람들처럼 서로를 받아들였다.
나는 어쩌면 그때 질식해 죽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녀와 나 소이는 눈의 여신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다. 산을 들어서는 입구에서 우리는 잠시 멈췄다. 하- 산을 향해 나는 아주 짙은 탄식을 쏟아냈다. 커다랗게 높은 가을 산에는 눈도 쌓이지 않았을 뿐더러 여신도 있을 리 만무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녀와 아이를 위해서 꼭 눈의 여신을 만나러 가야만했다. 오로지 눈의 여신을 만나겠다는 꿈에 가득 차있는 소이의 얼굴을 보며 나는 반드시 눈의 여신을 찾아내고 말겠다는 최면을 스스로에게 걸어 넣고 있었다.

산속에 진입해 얼마간 걷다가 다리를 저는 소이를 그대로 볼 수가 없었다.
“소이야, 아저씨한테, 아니 아빠한테 업혀.“
그때 소이는 나를 따르지 않았다. 내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업히라고 해도 결코 말을 듣지 않았다. 아마도 남자어른을 향한 본능적인 반감 탓이었을 터이다. 아직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나를 소이가 앞서 걸을 때 등 뒤에서 소이의 엄마, 연수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불쌍한 아이를......‘
다리를 저는 소이를 보며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깊은 한숨을 삼켰는지 모른다. 묵묵히 셋이서 말없이 계속 깊은 산중으로 들어설수록 -------------안개가 짙어져갔다. 우리는 안개에 가려져 사라지고 있었다.

산속의 정경은 좋았다. 가을향이 세상 그 어디보다 짙었다. 나는 자꾸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면 신선한 자연의 향을 최대한 가득 내 안에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떨어진 갈색가을낙엽처럼 색이 물든 연수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 머리카락이 내 가슴까지 포근히 어루만져왔다. 나는 그저 이 둘을 끝까지 지켜줘야겠다는 마음만 그리고 둘을 보며 울적해지는 마음만 가득해졌다.

그녀가 병든 몸이란 것을 알았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병, 폐암이란 것을.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운 여파라고 그녀는 말했다. 발길을 멈추지 못하는 그녀를 내 어깨에 기대게 해 부둥켜 잡았다. 그녀의 힘겨운 숨소리에 슬픔이 들끓어 오열하는 내 속을 숨기며 걸었다.

눈발이 자꾸 거세져왔다. 우리의 발자국이 찍히는 것을 시기하듯 자꾸자꾸 그것을 지워갔다. 소이에게 내가 입었던 외투를 씌워 내 등에 업혀 잠재우고, 그녀를 어깨에 기대게 하고 멈출 수 없는 발걸음을 힘겹게, 또 힘겹게 옮겼다. 자꾸 눈물이 났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여력이 없었다. 그녀와 소이를 이끌어야하기 때문에 미세한 힘이라도 낭비해서는 안됐다.
내게 기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인 듯, 바람소리인 듯 나직한 소리였다.
“울지 마세요.“


바람소리가 매섭게 귀를 파고들었다. 그때 내 귀에는 그 바람소리가 ‘너희는 다 눈 속에서 육신이 산산이 갈라져 죽게 될 거다.’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눈보라 속에서 무릎 꿇은 채로, 하얀 눈 위에 누워있는 그녀를 껴안고 있던 내 육체마저 단단히 굳어가고 있을 때, 내 옷자락 안에 있던 소이가 꼼지락 꼼지락 빠져나왔다.  
셋이서 그 자리에서 함께 얼어 죽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다. 죽어서 영원히 같이 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과연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저 바로지금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 나 혼자라도 없어지고 싶었을 뿐, 고통에서 도망치는.......

“눈의 여신을 찾는 걸 포기하지 마세요. 눈의 여신은 꼭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어요. 우리 소이를 위해. 소이를 포기하지 마세요.“
나는 그녀의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을 못하고 신음에 가까운 괴성으로 대신했다.
“이 히이이 흐흐으으흐흐 흐으 흠 흐흐흐...“
내 눈물은 흐르자마자 얼어 굳어버렸다.
그때 소이가 말하는 것을 처음 들을 수 있었다.
“엄마, 엄마.“
처음 봤을 때 내 육신을 꿰뚫을 듯했던 그 눈빛을 가진 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정말 애처로운 소년의 목소리였다.
소이는 누워있는 엄마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너무 추워 오돌 오돌 떠는 소이의 가련한 모습에 나는 슬픔이라기보다는 가슴이 깨져 내리는 충격을 받았다.
소이의 머리를 지그시 쓰다듬으며 그녀가 힘겨운 목소리를 냈다.
“소이야. 소이야.......“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연수는 눈을 감지 못한 채 숨을 멈췄다. 그 커다란 두 눈동자가 매서운 찬바람에 얼어붙어 그대로 굳고 말았다. 나는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 굳이 그녀의 눈을 감기지 않았다. 얼음으로 굳은 그녀를 부둥켜안고 입을 한껏 벌린 채 나는 계속 소리를 냈다.
“하아, 아흐흐으으, 기이히히힉 이 이 히 히 잎 에에.......“
인간 세상에 통용되는 언어마저 무의미하게 느껴져서인지 내 입에서는 그런 괴이한 소리만 맥없이 삐져나오고 있었다.
한 가지 크게 후회한 것. 비록 함께 한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내 진심인,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 표현이라도 했어야지 옳지 않았는가. 그런 말이라도 해서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었어야 했다는 자책이었다.
소이의 엄마를 마치 내가 죽인 것 같은 죄책감에 소이를 쳐다보지 못했다.
아련하게 시간이 흘렀다.
‘나를 죽여 다오. 소이야, 내 목을 졸라, 내 숨통을 끊어 줘. 제발 소이야. 소이야........’
모든 이성이 마비된 상태의 나는, 소이의 그 작은 손으로 내 목을 졸라 달라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소이와 함께 그녀의 몸에 기대어 꼼짝달싹도 하지 않은 지 얼마나 됐을까. 육체뿐 아니라  모든 감정마저 얼어붙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화산처럼 분출되던 때 소이가 내게 하는 말이 들려왔다.
“아빠.“
나는 정말 소이의 아빠가 된 것이다. 소이와 그녀를 함께 부둥켜안고 오열했다. 그때, 세찬 눈보라는 우리를 향해 싸늘한 조소를 하듯 그 뜨거운 눈물마저도 곧장 차갑게 식혀버렸다.
“가자, 소이야.“


소이를 잃고, 그녀를 잃고 비참한 상태에 갇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측정할 수 없다. 언제나 똑같은 환경인 이곳에서는 그것을 계산하기란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다만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몇 백 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섞인 추측을 가끔 했을 뿐이었다.



*

그래도 토사물과 가시는 입안에서 사라졌지만,

눈을 감고 고개를 숙여 두 손바닥을 모아 얼굴에 붙여 봤다. 손바닥 안에는 내 숨결이 느껴졌다. 속삭이듯 신음소리를 내봤다.
‘아흐, 으흐 흐으흐, 흐 으으, 이, 희미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 손의 손가락을 구부려 이마를 천천히 훑어 내렸다. 엄지손가락과 새끼손가락을 뺀 나머지 손가락으로 감긴 눈 위를 지그시 눌러 움직였다. 그러면 감은 눈 속에는 동굴 안과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그것이 내게는 하나의 기쁨으로 찾아와, 그 상태로 오래도록 바닥에서 뒹굴기를 즐겼다. 그 속에는 여러 가지 그림이 그려진다. 까만 밤하늘 같기도 하고 우주의 무한공간과 같기도 한 그곳에는 여러 가지 현란한 색의 파장이 넘쳐흐르기도 한다. 무엇이든지 해서 공허와 외로움을 달래야 했던 나는 그 우습지도 않은 짓거리를 자주 즐겼다. 눈 뜨고 바라보는 세상이 너무너무 견딜 수 없었기에.

나는 의지라는 것을 찾아갔다. 최소한 내가 이곳에서 영원히 그대로 똑같은 상태, 똑같은 고통을 지닌 모양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는 불씨를 지피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카락이 자라지도 수염이 나지도, 늙지도, 혀를 깨물고 죽어지지도 않는, 몸이 병들지도 않는 나를 버릴 수 있다는 희망이 싹텄다.
의지를 잃지 않기 위해 아무렇게나 몸을 흔들흔들 거리며 아무 짓이나, 어떤 몸부림이나, 다 동원해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야 안심이 됐다. 그렇게 혼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봤다.
생각지 못했던, 헤비메탈을 불러봤다. 아이언 메이든을 비롯해서, 내가 아는 모든 헤비메탈을 닥치는 대로 마구 불렀다. 가사를 몰라도 마구, 마구 소리 질렀다. 기타도 입으로 연주했다, 드럼도 연주했다, 베이스도 둥둥거렸다.
재미있었다.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기뻤다. 고무됐다. 우와! 이러다 나는 곧 죽을 수 있겠구나!
계속해서 많은 시간을 헤비메탈로 폭발했다. 그럼으로 인해 헤비메탈은 나의 본질임을 알게 되었다. 희한하게도 아무리 불러도 지치지 않았고 오히려 더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역시 헤비메탈로 열정을 풀다가 바닥에 털썩 누었을 때였다.
‘씨발.‘
동굴 안에 갇혀 지내며 잃었던 욕설을 아득한 시간이 지나서야 되찾았다.
침을 꿀꺽 삼키고서 다시 속삭였다.
‘그녀와 내 아들 소이를 나는 사랑했어. 그래, 이 씨발, 씹쌔끼들아.‘
나를 이곳에 떨어뜨린, 어떤 보이지 않는 막연한 대상이 있을 것이라며, 멋대로 그를 지정하고서는, 그를 향해 독이 섞인 말을 뱉었다.
‘개새끼.‘
내 입에서 그렇게 쇳소리가 울려 퍼질 때 눈시울이 시려졌다. 막혔던 눈물마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잃었던 것들을 하나하나 자꾸자꾸 찾아 갈 때마다 내 눈가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스스로를 위안하고 희망의 불씨를 지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자괴감이 새롭게 나를 괴롭혀 올 무렵이었다. 감정의 기복이 폭풍 쳐 옴을 감당할 수 없어 바닥에 얼굴오른쪽 면을 바짝 붙이고 온몸을 쭉 뻗고 엎드려 누워있었다. 두 팔은 양 옆으로 쭉 뻗은 채였고, 한참동안 그 자세로 있으니 입안에 침이 잔득 고이기 시작했다. 고인 침을 입 밖으로 흘려보내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한참 침을 흘려보내며 눈꺼풀을 깜빡거릴 때였다. 내 입안에서 까칠까칠한 느낌이 나더니 뭔가가 쏟아져 나왔다. 개미였다. 입안에서 하얀 개미들이 자꾸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순식간에 내 몸은 개미집이 되어 하얀 개미들이 화르르 분출되고 있었다.
‘흐 하하악, 퉤. 튀. 취.‘
참담한 기분에 진저리를 냈다. 입안에 가시를 물고 황토색 토사물을 쏟아내던 그것과는 또 다른 더러운 기분이었다.
‘투에, 테. 수웨........’
개미를 뱉어 낼 때, 본능적으로 지극히 조심했다. 이빨이나 입천장 등에 으깨지지 않도록 입 밖으로 불어내듯 했다. 개미와 침을 삼키지 않기 위해 입을 계속 벌리고 있어야만했다. 진정으로 나는 그것들을 삼키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개미들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끝없이 화르르- 쏟아져 나왔다.
얼굴을 계속 바닥에 대고 엎드려 입을 벌린 채 개미가 사라지길 바라며, 기어가는 개미들을 바라봤다. 질서정연하게 진군하는 하얀 개미들이 보였다. 개미들이 가고 있다................... 무작정 개미떼를 따라 나섰다. 개미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개미들을 따라 기다보니 나는 동굴을 벗어날 수 있었다! 벌려진 입으로 조심스레 나는 작은 환호성을 질렀다.
‘하아, 하아.......‘
혹시나, 아주 혹시나 개미들이 사라질까봐 나는 입을 다물 수도 없었고 바닥에서 일어설 수도 없었다. 개미들이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오는 처음 그때 바로 그 모양을 최대한 유지해야 한다는 마음이 아주 강하게 나를 자극했다.
손바닥과 무릎을 붙이고 엎드려 얼굴을 바닥에 바짝 가까이 하고 엉금엉금 하얀 개미떼를 계속 따라갔다. 개미들치고는 빠른 걸음이었지만, 따라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서 나는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됐다.
한참 개미떼를 따라 가며 생각했다. 이대로 의지를 살리면 뭐든지 가능할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를, 소이를, 내 부모를, 모든 이를 다시 찾을 수도 있으리란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나였지만, 이제 그렇게 개미의 행렬을 뒤따르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험한 바닥을 엉금엉금 기는 것도 내겐 축복이었다.

무조건 하얀 개미들의 뒤를 따라 가는데 신경 쓰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주변 세상을 볼 수 있을 여유도 생겼다. 그때 내가 처음 본 것은 나처럼 동굴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다. 나는 몹시 놀랐다. 깊은 산중의 맑은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의 개수만큼이나 그들이 보였다.

꽤나 길고 긴 시간이 지나 태양을 봤고 달을 봤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봤고 날아다니는 나비들을 봤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곳에서 봤던 자연 그대로의 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제 내게 낙원이 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계속해서 입을 벌린 채, 개미들을 쏟아내며 엉금엉금 기어가는 내 옆에 커다란 초록색도마뱀이 다가왔다. 도마뱀은 혀를 날름거리며 나와 같은 자세로 한동안 나를 동행해주었다. 신기한 듯 나를 바라보는 도마뱀의 눈에 시선을 맞추고 입을 그대로 벌린 채 한줌의 미소를 보냈다. 잃었던 미소를 찾은 때였다.

계속해서 동굴 안에서 불렀던 헤비메탈의 기세로, 악착 같이 개미들의 뒤를 따랐다.

춥고 배고프다는 감정을 찾게 됐을 때, 개미떼와 나는 깊은 숲속에 진입해 있었다. 까만 밤하늘에 무수한 별들과 휘영청한 달이 떠있었다. 바닥에는 소복소복 눈이 쌓여있었고 불어오는 바람은 살을 엘 듯이 차가웠다. 잔뜩 벌리고 있던 입안이 얼어붙어 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는 점점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바닥에서 일어서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어났다.

추위에 몸서리치며, 인내가 한계에 달했을 무렵 우리 앞에 강물이 펼쳐졌다. 강물의 건너편은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했다.
개미의 행렬 맨 뒤에 했던 내가 강기슭까지 도달했을 때, 앞섰던 개미들은 검은 강물에 투신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내 입안에서는 더 이상 개미가 나오지 않았다. 휘청휘청 어렵게 몸을 일으킨 나는 벌려진 입을 닫기 위해 한 손바닥으로는 턱을 바치고 또 한 손바닥은 머리위에 대고 위아래로 힘을 꾹 줘야했다.
달빛이 선명히 비치는 차가운 강물 속으로 하얀 개미들이 신속히 사라져갔다. 사라져가는 개미들을 멍하니 보며 서 있던 내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개미들아, 하얀 친구들아.‘
어디서인가 아이언 메이든의 고전, Hallowed Be Thy Name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저 강 건너에서인가. 아마도 내가 그 곡을 너무 많이 불렀었고, 떠올렸던 여파인 것 같다. 혹시나 환청은 아닌가?
사형집행을 바로 앞둔 사형수의 심정을 담은, 진행될수록 점점 죽음의 향취가 격동치는 곡. 천천히 둥당당당디디딧디디- 두근두근 곡은 흐르고, Running low- 예-
어두운 시간이 흘렀다. 죽기위해 몸부림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진정으로 죽기위해 이곳까지 온 것인 지도 모른다는 고민을 했다. 개미들과 운명을 같이 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밀려왔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란 기대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녀와 소이다. 휘이이이이잉- 그 기대를 확신으로 바꿔주듯 등 뒤에서 눈보라가 몰아쳐 나를 떠밀었다. 강물은 얼어붙고,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세찬 눈보라가 어두운 숲과 강을 순식간에 덮어버리고 있었다. 격정으로 치달은 -Hallowed Be Thy Name이 내 육신을 바짝 곤두서게 했다. 잔뜩 찌푸린 내 미간에 깊은 상처가 나 피가 튀기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달렸다. 강물 위를 세차게 달렸다. 강물에 얼어붙은 얼음이 깨져 날카로운 흉기가 되어 내 발과 발목을 찢어 피를 뿌리게 했다. 하늘에서는 얼음가루와 눈가루가 퍼부어 내 벌거벗은 육체를 날카롭게 파고들어 강렬한 상처를 냈다. 하지만 나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헤비메탈로 강철같이 무장하고, 개미들을 따라나서던 그 동안의 시절, 그것을 꿰뚫을 힘을 나도 모르게 키워왔던 것이다.
그녀와 소이와 함께 걸었던 눈보라 속에서도 지르지 못한 고함을 질렀다.
‘으으 아아아!‘
하늘을 찢어발길 듯이 폭발하는 그 소리에 놀랐는지 강물을 가로질러 달리던 나를 가로막는 물체들이 그 위력을 더해갔다. 발밑에서 깨지는 얼음의 날은 더 날카로워지고 하늘에서 퍼붓는 얼음가루와 눈가루들은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굵어졌다. 그것을 깨며, / 헤치며 / 계속 달렸다. 내 온몸이 찢겨지며 처절히 달리는 사이, 손잡고 걷는 그녀와 소이의 뒷모습이 아련하게 보였다. 그들을 향해 한 쪽 팔을 쭉 뻗으며 계속 달려갔다. 차가운 겨울의 야수들이 자꾸 내 앞길을 가로막아 피를 튀겼지만 나는 그들을 짓밟으며 달렸다.
‘연수!‘
  
하늘이 꿈틀꿈틀 들썩거렸다. 터질 듯한 굉음과 함께 울긋불긋해진 하늘에서 섬광이 번쩍 번쩍였다. 사방은 환희 밝아졌고 쿵쾅거리는 굉음은 간헐적으로 계속 이어졌다. 천지가 난리가 난 것이다.
거센 눈발과 얼음가루들이 내 앞길을 막지 못하자, 하늘에서는 지원군이 내려오듯 하얀 얼음뭉치들이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고드름덩어리처럼 보였다. 크기는 1.5 - 2m가량이었으며 끝은 뾰족했다. 떨어져 내리는 그 힘과 가속은 막강했다. 무차별하게 앞을 꿰뚫어 달리던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고드름덩어리가 내 몸을 덮쳐 찌르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쓰러져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조건 달리는 것만으로 그것을 꿰뚫을 수 없다고 느낀 나는 두 팔을 치켜들었다. 나를 노리는 거대한 고드름덩어리들을 때때로 주먹과 팔로 막아내며 계속 멈추지 않고 달렸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 비록 눈, 얼음가루와 거대한 고드름은 내 앞을 가로막는 막강한 장애물이었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그 광경은 눈이 부실정도로 장관이었다. 그것을 온몸으로 격파하는 쾌감은 그동안 고통으로 잔뜩 짓뭉개졌던 세월을 일순간에 무너뜨려주는 것이었다. 그 겨울의 야수들의 휘황찬란한 몸부림을 깨뜨리며 달리는 내 모습은 불붙은 폭주기관차 같았으리라. 개앳쌔액끼들-- 하, 하!
내가 강을 반쯤 점령했을 때, 내 앞으로 수십 미터 지점에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얼음덩어리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얼음은 좌우의 끝이 보이지 않았고 높이는 수십 미터에 달했다. 두께는 아득한 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듯 두꺼워보였다. 얼음 덩어리가 강에 떨어져 박히는 순간 그 여파로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다.
‘-쾅!’
거대한 파열음이 났고 차가운 강물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 물줄기는 마치 거꾸로 오르는 거대한 폭포와도 같았다. 강의 중간에 똑바로 박혀 성벽을 친 얼음덩어리의 위력에 나는 균형을 잃어 몸이 옆으로 쏠렸다. 기울어진 채, 쓰러질 듯 말 듯 휘청휘청하던 몸을 바로세우며,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입술을 꽉 깨물고 아주 짧은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마자, 바로 앞에 서 있는 얼음성벽이 보였다. ‘넘어갈 수도 없다. 벗어날 길은 이미 없다. 무조건 정면충돌이다. 그들이 바로 저 앞으로 갔다.‘
이 따위 것! 그대로 불같은 가속을 유지한 채 충돌했다.
‘-쾅!‘
나는 얼음성벽을 뚫지 못했다. 커다란 충격과 함께 몸은 공중에 떠서, 팽그르르 한참을 돌아 떨어뜨려졌다. 얼음으로 들쭉날쭉한 바닥에 등을 긁히며 수십 미터를 미끄러져, 강위에 두텁게 쌓인 눈밭에 쓰러졌다. 고통스러웠다.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잠시 후 감긴 왼쪽 눈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충돌로 찢겨진 이마에서 짙은 피가 흘러 눈을 적셨다.
‘하아.‘
그대로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강하게 부닥친 오른쪽 팔이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고, 이마 왼쪽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짙은 피가 유난히 느껴졌다. 내 온몸에는 핏줄기가 얼어붙어 크고 작은 길을 그리고 있었다. 온몸이 욱신거려왔다. 갑자기 구역질이 일어 속이 뒤집어 지는 느낌이 일었다. 입을 벌려 헛구역질을 했다. 먹지를 못했으니 토사물은 쏟아지지 않고 대신 입안이 찢겨 상처가 난 탓에 침에서 피 맛이 났다.
‘퉤.’ ‘퉤.‘
누워서 하늘을 봤을 때, 눈가루와 얼음가루, 어뢰 같은 고드름덩어리는 내리지 않고 멈춰 있었다. 그러나 힘겹게 고개를 들어 봤을 때, 얼음성벽은 그 자리 그대로 견고하게 서 있었다. 눈가루, 얼음가루, 고드름은 물리쳤지만 얼음성벽은 뚫지 못했다.
‘다 놓쳤어.‘
소이와 연수를 만나기 직전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그들을 놓쳤다는 커다란 아쉬움에 탄식했다.
무작정 누워있었다. 차가운 겨울 강물위에 누워 공허하게만 느껴지는 하늘을 바라봤다. 상실감이 나를 옥죄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그 사람을 위해서.
몸과 마음이 너무나 욱신욱신 아려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오는 것 같았다. 다시 몸과 마음을 다지려 해도 그렇게 되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얼음성벽과 충돌한 그 충격이 너무나 컸던 탓이다.  
죽는 건가-------
갑자기 서러운 기분에 감정이 울컥해졌다. 나는 통곡을 했다. 그래야 가슴 속의 쓰라린 응어리를 풀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쓰러져 얼굴을 박고 엉엉 울고야 말았다.
‘흐, 흐흑....... 아아, 아아하하아.‘
목이 콱콱 막힐 정도로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울기라도 해야 의식을 잃지 않고 나를 지탱해 낼 수 있으리란 본능이었다.
‘아, 아아. 아아, 아하.‘
울면서 바닥을 기었다. 개미처럼 바닥을 기었다. 몸서리치며 악착같이 기면서 주변을 돌았다. 내 폐부 속 깊숙이 박혀있는 의지라는 불꽃을 꺼뜨리지 않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그 불꽃의 축은 내 삶을 지켜 유지시키는 것이었는데, 그 불씨가 점점 작아져 갔다. 쓰러져 기면서 간신히 숨이나 쉬는 것이 결국 내 한계인가, 하는 절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죽어도 상관없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불꽃을 꺼뜨리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완전히 짓누르지 못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게 옳은가 저게 옳은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다 그대로 팔과 다리를 쭉 뻗고 누워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현기증이 일어 눈이 자꾸 감겨왔다.
‘미안, 미안하다. 모두에게 미안, 난 이제 눈을 감고 싶........’
나는 확실히 죽음을 바랐던 것 같다. 단 한 번의 장벽에 쓰러져 모든 것을 포기 하고 있었다. 폭주기관차처럼 달리다 순식간에 기세가 꺾여 제동이 걸리고 말았다. 쓰러진 몸을 일으키고 다시 시작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온몸이 찢겨, 저절로 핑 도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육체적 고통과 그동안 쌓였던 비참한 기억들, 얼음성벽에 대한 공포, 차가운 겨울야수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순식간에 나를 지배했다. 그저 아주 작은 안락함이라도 찾아 도피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불빛이 꺼져버린 개똥벌레처럼 육신이 오그라들고 있었다.

-------------------100만 년 동안 잠든 후 깨어나고 싶어 하는가.

하늘에서 송이송이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하늘하늘 눈송이들이 살가운 바람을 타고 내려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는, 내 육체를 덮어가고 있었다. 눈송이 하나가 눈동자를 파고들었을 때, 나는 두 눈을 감았다.
-눈감았을 때 어두운 세상이 어느덧 색을 바꿔 온통 하얀 눈 천지가 됐다. 나는 그곳을 다시 개미처럼 기고 있었다. 한참 헤매고 있을 때 하얀 망토를 입은, 그 망토에 달린 모자를 쓴, 온몸이 눈처럼 하얀 여덟 명이 나를 난폭하게 일으켜 세웠다. 포승줄로 내 두 손과 몸을 묶고 그들은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그들은 아무런 말이 없었으며 표정 또한 없는 듯했다. 그들은 매우 화가 난 듯 보였다. 그렇지만 의외로 나를 무지막지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행렬 맨 뒤에 서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을 보며 한걸음, 한걸음 걸었다. 한참 동안 걷다가 그들이 멈춰서 나도 그 자리에 멈춰 서게 됐다. 그제야 숙였던 고개를 들어 봤다. 나는 기겁했다. 내 눈앞에는 내가 갇혀 고통을 받았던 동굴의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동굴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그 안에 갇혀있는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었다. 그중에는 가끔 빈 굴이 보이기도 했다. 나는 다시 그곳에 감금되리란 직감을 받아 하얀 망토를 쓴 자들을 강하게 밀쳐 달아나려했다. 그러나 나를 묶은 포승줄을 꽉 움켜쥔 그들의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동굴로 떠밀지 않고 내 몸을 묶은 포승줄을 순순히 풀어주었다. 도망치다가 뒷걸음치며 보았다. 망토에 달린 모자를 벗은 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개미였다. 하얀 개미기도 하였지만, 그 여덟 명은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Rocker들인 코지 파웰, 스티브 클락, 본 스코트, 클리프 버튼, 랜디 로즈, 존 보넴, 필 리뇻, 다임백 대럴이 틀림없었다. 너무나 확연한 모습으로 그들이 다가와 있었다.
계속해서 미친 듯이 달려 다시 온천지가 하얀 눈의 세상을 만났을 때 다시금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성벽이 되어 내 앞을 가로 막았다. 나는, 성벽을 무너뜨렸다! 내 육체로 성벽을 꿰뚫었다.

성벽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눈을 떴다. 의식을 차리고 보니, 내 몸은 눈발에 소복이 묻혀 가고 있었다. 얼굴에 쌓인 눈뭉치를 손으로 훑으며 천천히 일어섰다. 저 멀리에 아련히 서 있는 얼음성벽을 바라봤다. 꿰뚫을 수 있으리란 완전한 확신을 심기위해 몇 번의 짙은 호흡이 필요했다. 길은 한가지다. 분명히 저 얼음덩어리를 깨트리면 길이 열리리란 확신이 생기자, 나는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두 눈과 육체에서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하늘에서 나를 찌르던 눈가루와 얼음가루, 고드름덩어리를 멈추게 한 것이 1차 목적달성이었다. 그런 장애물이 없는 상황에서 돌파는 한결 쉬운 것을 생각지 못하고 자포자기했던 나를 잠시 책망했다. 눈감은 세상에서 이미 성벽을 무너뜨린 나였다. 반드시 꿰뚫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더해졌다.

두텁고 차가운 얼음성벽을 향해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다섯 번째 걸음을 떼다가 달리기 직전,


/----콰직. 찌지지지지지이이익....... 쿠우우우웅----/

쩍- 하니 하얀 얼음성벽이 서서히 갈라졌다. 애초에 내가 충돌했던 지점을 중심으로 해서 약속이라도 된 것처럼 성벽은 양 갈래로 갈라져 무너졌다. 그 사이로 넓은 길이 났다. 쓰러져 눈발에 묻혀 생이 마감되던 찰라, 얼음성벽이 금이 가 천천히 붕괴되던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달리지 않고 유유히 걸어서 내 앞에 난 길을 통과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 잠시간의 여유를 느껴보고 싶었다. 마음 놓고 긴장도 풀어 봤다. 너털웃음이 났다.
‘하하.‘
저 건너편에서 따스한 봄바람이 부는 듯 훈훈한 기운이 밀려오고 있었다. 강물에 난 길을 다 통과하고 강기슭에 도착해서, 밀려오는 현기증에 털썩 무릎을 꿇고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모든 긴장이 풀린 탓이었다. 죽는다는 불안감 따위는 이제 없었다.
보았다. 빽빽한 초록색개나리나무군락 속으로 엉금엉금 숨어들어가던 강아지,
궁둥이 토실한 하얀 강아지,
강아지는 곧 꼬리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기 직전 하늘에서는 뜨거운 빗물이 내려오고 있었다. 비를 맞은 채 잠들어갔다. 너무나 따스한 비, 얼어붙은 가슴을 적셔주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 기대처럼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을 확인하고 잠들어갔다.


*

그날 밤은 내게 긴 영적인 여행의 시작이었다. 공연장에서 사고가 났다. 헤비메탈 밴드 ‘J.o.S‘의 리드보컬인 나는 조명세트가 안전하게 설치되어있는지 모른 채 무대에 올라갔다. 나는 떨어지는 장비를 피하려고 했지만, 그럴 틈도 없이 그것은 내 머리 뒷부분을 가격했다. 동시에 나는 앞으로 쓰러졌고 얼굴은 장비에 의해 바닥에 짓눌려졌다. 나는 의식을 잃었고 곧장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500kg이 넘는 장비가 내 몸을 덮쳤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옳았다. 생사의 고비를 넘겨 19일 만에 의식을 차리게 된 것은, 강물을 막은 얼음성벽을 무너뜨리고 이어서 하얀 강아지의 꼬리가 사라지고 나서였다.
기적의 생환이었다. 담당의사 정상철의 최선을 다한 노고도 컸다. 락매니아인 정상철이 한창 회복해가는 내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잭 다니엘을 좋아하는데, 혹시 화랑 씨도 잭 다니엘을 좋아한다면, 나중에 이 앞에 새로 생긴 Rock Bar에 가서 같이 마셔봅시다. 썬더버드, 랜디 로즈의 기타를 들으면서 말이지요.“
“아, 예. 저는 락바는 신촌에만 다녔었는데 제가 입원하고 나서 여기 새로 생겼나보군요. 가보고 싶습니다. 잭 다니엘. 한때 물처럼 마셔댔던, 가장 선호하던 위스키 중 하나였는데 다시 마실 수 있겠지요? 하하하. 그리고 물론 랜디 로즈 뿐만 아니라, 코지 파웰, 스티브 클락, 본 스코트, 클리프 버튼, 존 보넴, 필 리뇻, 다임백 대럴의 음악도 함께 들어봐야겠지요.“
“우리, 아이언 메이든도 들어봅시다. Hallowed Be Thy Name, 제일 좋아하는 곡이거든요. 화랑 씨도 물론 아이언 메이든과 그 곡을 굉장히 좋아하는 걸로 저는 알고 있는데.......”


의식을 찾은 후 다섯 달 만에 나는, 내 아내와 여섯 살 배기 딸과 함께 외출했다. 쇼핑을 하고 외식을 하고 아주 오랜만에 가족들과 밝은 시간을 보냈다. 잃었던 모든 소중한 기억을 되찾았고, 소중한 사람들도 함께 되찾았다.
문득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아내에게 말했다.
“연수,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내 아내, 연수의 뱃속에 자라고 있는 아기의 이름은 ‘소이’라고 짓기로 했다.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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