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이것 참, 정신적으로 편한 일은 아니군요."
"당연하지. 안 그랬으면 자네가 이 일을 맡을 수 있었겠나?"
직장선배인 아저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렇게 보수 좋은 일에 별다른 페널티가 없다는 건 있기 어렵다. 정신적으로 쉽게 지쳐버리니 오래 붙어 있는 사람도 별로 없고,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보니 새로 정규직 근무자를 찾을 때까지 나 같은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하게 되는 거겠지. 내가 일하는 곳은 아르바이트생도 오래 붙어 있지 못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나 역시 다음 학기에 사용할 연금술 재료비만 충분히 지급되었더라도 여기에서 일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다.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노예시장이 바로 이 도시에서 열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검투사나 그들과 싸우기 위한 전쟁포로나 맹수들이 갇혀 있을 콜로세움의 지하는, 지금 대륙 각지에서 잡혀오거나 팔려온 노예들로 가득 차있다. 주중에는 검투 대회가 열리지 않아 콜로세움이 비어 있기 때문에, 예산이 부족한 시의회는 수, 목요일 이틀 동안 콜로세움을 노예상들에게 개방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지금도 길거리는 잡혀 들어가고 팔려나가는 노예들로 시끌시끌했다.
내가 맡은 일은 옆의 이 아저씨와 함께 출입구를 지키는 것이었다. 출입구래 봐야 주요통로가 아니라 쪽문이라 드나드는 사람도 별로 없다. 느긋하게 벽에 기대 멍하니 서서 시간을 보냈다. 교대까지는 1시간은 족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왜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이냐고? 여기에 서 있어 보면 알 거다. 사람들은 보통은 정문으로 드나들지만, 자신이 노예를 구입했다는 걸 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조용히 다니기 위해 이 문을 통하는 일도 꽤 자주 있다. 사람들이 나갈 때마다 재갈을 물고 손발이 묶인 채, 채찍 자국이 선명한 몸을 거적때기로 감싼 노예들도 함께 나간다. 특히 비공개적으로 노예를 구입하는 경우에는 농장이나 배에서 부려 먹으려 사는 일이 거의 없다. 남에게 말하기 민망한 용도로 노예를 사용하기 위해 이 문을 통해 드나드는 것인데, 그러다 보니 미색이 출중한 여자 노예들이 지나가는 일이 많다. 반항하다 뺨을 맞아 쓰려져 끌려가는 여자들을 보면 화가 울컥 치밀어 오르고, 안쪽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명, 고함, 한탄은 마음을 괴롭게 했다.
오래 버티려면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게 아저씨의 의견이자 조언이었고, 나는 거기에 따라 정신줄을 놓고 앞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대화도 교대 직후가 아니면 하지 않았다. 일이 끝난 뒤 술자리에서도 일과 관련된 화제는 꺼내지 않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멍하니 서서 교대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다리를 툭툭 건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재차 다리를 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누군가가 위장이라도 하듯이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어설픈 위장에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나를 올려보는 그 사람의 심각한 표정에 웃음을 참았다. 열일곱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애였다.
"무슨 일이야?"
내가 묻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라고 손짓을 했다.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아저씨, 저 좀 도와주세요."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불쑥 솟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이 오빠가 뭘 도와줄까, 꼬맹아? 참고로 미리 얘기하지만, 이 안에 들여보내 달라는 소리를 한다면 곧바로 목덜미를 잡고 너희 부모님께 끌고 가줄 테다. 여긴 놀이터가 아니라고."
진지한 그녀의 표정도 약간 일그러졌다. 뭐야,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고운 법이라고. 앞날이 창창한 20대 청년에게 아저씨라니.
대화가 중단되었고, 우리는 상대방을 노려보며 대치했다. 그러던 중에 그녀의 목에 채워진 물건이 보였다. 그녀는 폭이 넓은 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멋을 내기 위해 거는 장식용이 아니라, 개나 고양이에게 매달아 놓는 것 같은 목걸이였다. 잠겨 있는 자물쇠와 새겨진 복잡한 문양은 목걸이가 노예의 표식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뭐야, 도망친 거야?"
내 말에 그녀가 움찔하며 주위를 살폈다.
"그, 그래요. 대답이나 해줘요. 저를 도와주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도망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른 척해줄 테니 어서 가라. 혹시 도망치는 걸 도와달라는 부탁이라면 거절해주겠어. 마음으로는 돕고 싶지만 그럴 형편이 안 되거든. 여기에서 잘리면 앞이 막막해진단 말이야. 아직 밤이니까 가까운 신전에라도 가서 숨어. 그리고 해가 뜨기 전에 빠져나와서 도시 남서쪽으로 가. 거기 성벽에 개구멍이 하나 있거든."
그녀도 마주 고개를 저어주었다.
"안돼요. 혼자서는 못 가요."
"그럼 탈출은 어떻게 했어? 어리광 피우지 말고 가라. 어서. 여기 오래 있으면 이 오빠도 못 본 채 해주기 어려워."
"그게 아녜요. 안에 엄마가 잡혀 있단 말예요."
"나 참, 골치 아프게 하네. 이봐, 우리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안에서 나왔다면 알고 있겠지? 지키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며, 그들이 얼마나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는지 말이야. 내가 보기엔 네가 도망쳐 나온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아마 안에서는 벌써 너 찾으려고 난리를 치고 있을 거다. 네 엄마를 고문할지도 몰라. 정 혼자 못하겠으면 차라리 돌아가."
"그래요,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경비를 서고 있는지 알고 있어요. 그러니 도와달라는 거예요. 혼자서는 못하겠지만,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엄마를 구해낼 수 있단 말예요. 아저씨이, 제바알."
그녀는 고집스레 버티고 앉아서 떼를 쓰며 귀찮게 굴었다. 아무리 가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같이 경비를 서고 있는 아저씨가 말뚝잠에서 문득 깨어나거나 누군가가 지나갈 때면 수풀 너머에 숨었다가, 사람들이 사라지면 다시 나타나 징징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왜! 설령 구출할 가능성이 있더라도 여전히 위험한 건 변하지 않아. 내가 아무런 이득도 없이 왜 널 도와줘야 되냐고!"
짜증 섞인 말투로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저씨, 동정이죠?"
"뭐, 뭐? 웃기지 마. 날 뭐로 보는 거야?"
"동정이요."
"아니라니까?"
당황한 기색을 읽었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동정일 수밖에 없지. 곤란한 처지에 빠진 묘령의 여인이 간절히 도와달라고 하는데 저렇게 차갑게 무시하는 사람이 인기가 있으려고."
"묘령은 무슨. 꼬맹이가."
"이번에 저를 도와주시면 제가 아저씨 동정 딱지를 떼 드릴게요."
어이가 없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을 흘렸다.
"놀고 있네. 그런 말은 어디서 주워들었냐? 애초에 꼬맹이한테 그런 생각이 들기나 하겠냐?"
"흥, 그래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살피더니, 여전히 졸고 있는 아저씨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일어섰다. 위장한답시고 뒤집어쓰고 있던 나뭇잎을 털어낸 그녀는 다른 노예들처럼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이리저리 찢어져 맨살이 드러났다. 그녀는 찢어진 부분을 잡아당겨 조금 더 찢더니, 씩 웃어 보였다.
"거기 반응은 말이랑 따로 노는데요?"
"망할……."

일은 새벽 네 시, 내가 다른 사람과 교대하고 30분 정도가 지난 뒤에 시작되었다. 그녀가 탈출하는 데 사용했던 땅굴은 내가 서 있던 자리 근처에 있었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나와 교대한 사람이 졸고 있을 때를 노려서 잠입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거 원래 뚫려 있던 거냐?"
수풀 속에 숨어서 그녀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수풀이 크지 않다 보니 숨기 위해서는 서로 밀착해야 했다. 떨어져서 말하려 해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뇨, 제가 파낸 거예요. 땅 파는 건 자신 있거든요. 그나저나 딱딱한 것 좀 치우세요. 그런 건 탈출에 성공한 뒤에나 해요."
"나도 지금 그럴 생각 없다고……."
그나저나 놀랐다. 가느다란 팔로 어떻게 저렇게 커다란 구멍을 뚫을 수 있었을까 싶었다. 덩치 큰 사람은 안 되겠지만, 나 정도 체격의 사람이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을 아무 도구도 없이 어떻게 팔 수 있었을까? 그녀가 요령이 있다며 얼버무렸기에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자, 이제 나가요."
그녀는 낮은 포복으로 기어 앞으로 나아갔다. 나도 그녀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갔다.
굴을 지나가는 일은 손쉬웠다. 좁고 답답했지만 그렇게 길지도 않았기에 금세 지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여자애의 어머니를 구출하기 위한 여정은 길고 험난할 것이다. 안에는 수많은 경비병과 노예상이 눈을 부릅뜨고……있지 않네?
"거봐요. 저 사람들 죄다 한눈팔고 있다고요. 제가 괜히 자신 있다고 한 게 아녜요."
우리가 굴을 통과해 나온 곳은 쓰레기더미가 쌓인 방이었다. 아침에 청소부가 내가기 전까지는 온갖 쓰레기가 넘치기 때문에, 땅굴을 파고 그걸 가리기에 좋은 곳이었다.
"반항이 심하지 않으면 묶어놓지도 않아요. 귀찮아서 문도 잠그지 않는다니까요? 덕분에 제가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요."
그녀는 비위가 상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람들이 잘 접근하지 않는 쓰레기장에서도 거친 숨소리와 신음, 왁자지껄하게 떠들면서 음탕한 농담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노예의 정조 따위 상관하는 사람은 없어요. 게다가 임신도 안 되니, 거리낌 없이 그런 짓을 하는 거죠. 저도 당할 뻔했어요."
노예상이고 경비병이고 가릴 것 없이, 저마다 마음에 드는 노예를 하나씩 붙잡아 성욕을 풀고 있다는 얘기였다. 어차피 노예의 수는 많고, 탈출하려 해도 입구의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노예들의 감시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임신하지 않는다는 말은 밤새도록 능욕당하다 보니 스트레스 때문에 배란이 안 된다는 의미일까.
"그런데 이런 상황이면 굳이 내가 도와줄 필요가 없잖아? 감시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잖아."
"따라와 보시면 알아요."
그녀는 뒤꿈치를 들고 주위를 살피며 걸어갔다. 나도 그녀를 흉내 내며 쓰레기장에서 나갔다. 복도를 따라가다가 모퉁이에 이르렀다. 시끌시끌한 게 모퉁이를 돌면 바로 사람들과 만나게 될 것 같았다. 저 너머에서 이런 짓 저런 짓을 하고 있다는 얘기일까.
"엄마는 저 방에 있어요. 여기선 보이지 않지만, 저쪽에서는 정면으로 보이는 방이죠. 아저씨는 저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주세요."
"뭐야, 내가 모습을 드러내면 위험해지잖아. 게다가 들키지 않아야 하는 것 아냐?"
"탈출시키는 것만 들키지 않으면 돼요. 고용주가 좋은 일 해준다면서 안에 들어가 보라고 했다고 둘러대세요. 어차피 지금쯤이면 다들 술에 절어 있을 거예요. 그리고 둘러대면서 접근해서, 실수인 척하고 등불을 엎어버려요. 어두운 틈에 제가 엄마를 구해낼게요."
"어두우면 너도 보이지 않잖아."
그녀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밤눈이 밝거든요. 자, 어서요."
나는 그녀에게 등을 떠밀려, 모퉁이 너머에 있는 사람들 앞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여, 여어, 수고 많으십니다."
"엥, 뭐야?"
혀가 꼬부라져 불명확한 발음으로, 배가 산만큼 튀어나온 남자가 물어왔다. 체형을 보니 노예상인 것 같았다. 그는 벌거벗은 노예를 껴안은 채, 리큐어를 병째로 들이키고 있었다.
"그게, 저희 고용주께서 고생했다며 이쪽으로 가보라고 소개를……."
"아아, 그렇구먼. 보아하니 동정 같은데, 어서 오라고."
근육질의 경비병이 허리를 놀리면서, 킥킥거리며 말했다. 제길,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딜 봐서 내가 동정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헤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갔다. 광원은 탁자 위에 놓인 등불 하나뿐이었다. 나는 적당한 거리에서
"어이쿠, 발이……."
라는 말을 내뱉으며 넘어지는 연기를 했다. 내가 생각해도 괜한 말을 했다 싶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곧바로 불이 꺼졌기에, 사람들은 갑작스레 닥친 어둠 속에서 혼란스러워하기 바빴다.
"이봐, 무슨 일이야!"
"불 켜!"
다만,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를 보고 동정이 어쩌고 하던 경비원은 여전히 허리를 놀리느라 바쁜지 그의 말은 들리지 않았고, 뚱뚱한 노예상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조용해졌다. 취해 잠든 걸까. 허둥지둥하는 기척이 느껴지긴 했지만, 제정신이 아닌 그들이 불을 켜고 탈주극을 알아차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돌아봤지만, 뭐가 보일 리가 없었다. 그 사람이 내 손을 잡고 이끄는 것을 보아, 나와 함께 들어왔던 여자애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내 손을 잡아당길 일은 없을 테니까.
불이 꺼진 것은 넓은 콜로세움의 지하에서 일부분에 불과했다. 복도를 따라서 조금 가자 불이 밝혀진 곳이 나왔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것은 역시 그녀였고, 그녀는 다른 손에 자신의 어머니로 보이는 꽤 미색이 출중한 여성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이제 탈출만 남았군요."
"그래, 아직 4시 30분 조금 지난 정도일 테니까, 바깥은 조용할 거야. 그런데 나간 뒤에는 어떻게 하려고?"
그녀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아저씨가 안내해야죠."
제길. 도시 바깥까지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건가.

짐작대로 바깥은 어둡고 조용했다.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의 눈을 피해 남서쪽 성벽에 도착한 우리는, 올해 초에 근처의 개구쟁이들이 파놓았지만, 아직도 메워지지 않은 개구멍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우리는 가까운 숲으로 들어가 숨었다.
"정말 고마워요, 아저씨."
"아저씨 소리 그만할 수 없냐. 오빠라고 하라니까."
"네네, 그러면 이제 도와준 대가를 치러야겠죠?"
나는 그녀의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지쳤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에, 그, 뭐냐, 여기서?"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딸을 덮치는 건 상대방이 허락한다고 해도 좀 꺼림칙한데.
"당연히 아니죠. 따라오세요."
우리는 가까운 바위 뒤로 이동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자, 우리 동정 아저씨? 하기 전에 부탁이 있는데요."
"뭐야, 또 뭘 해달라고?"
그녀가 열쇠를 내밀었다.
"별 거 아녜요. 그냥 이 목걸이 좀 풀어달라는 거죠. 이거 쇠로 만들어진데다 무거워서 흔들리면 아프다고요."
"그거 그냥 네가 못 푸는 거냐?"
"아쉽게도 안돼요. 마법이 걸려 있거든요. 열쇠를 자물쇠에 끼우는 거야 할 수 있는데, 돌릴 수가 없어요. 사람만 돌릴 수 있게 되어 있어서요."
"사람만 돌릴 수 있다니? 너 사람이잖아."
"그런 게 있어요. 어서요."
나는 열쇠를 받아들고 목걸이를 붙잡았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라 자물쇠를 풀 수 없다는 걸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니, 좀 우울한 기분이 드는걸.
하지만 우울감은 이내 사라져버렸다. 자물쇠를 돌리자마자 그녀에게서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눈이 아플 정도의 빛 때문에 손으로 눈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빛은 곧 사라졌지만, 시력이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겨우 눈을 뜬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것은 이름 모를 코볼트 뿐이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덕분에 마법에서 풀려날 수 있었어요."
"에, 잠깐, 뭐? 설마, 설마 네가……."
"그래요. 마법 때문에 겉모습이 바뀌어 있었던 거예요."
"에엑?"
그래서 스스로는 자물쇠를 풀 수 없다는 거였나! 혼란스러운 와중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아니, 그러면 그……. 그건 어떻게 되는 거야?"
코볼트가 킥킥거렸다.
"이런 몸이라도 괜찮으면 해 드릴 수 있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고생을, 아니, 생각보다 탈출시키기는 쉬웠지만, 어쨌든 잠도 못 자고 가슴 조이는 불안감에 떨면서 겨우 탈출시켜줬더니,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다는 얘긴가!
"아, 방법이 없는 건 아녜요."
"그게 무슨 소리야? 코볼트랑 하고 싶은 마음 따윈 없어!"
"저희 엄마는 아직 목걸이를 풀지 않았다고요."
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 그녀의 어머니는 아직 인간의 모습이다. 그것도 꽤 괜찮은 모습의……. 하지만 이내 거부감이 밀려들었다. 딸이 보는 앞에서, 또는 딸의 근처에서 어머니를 범한다는 것 역시 꺼림칙했다. 그녀 자신이 허락한 것도 아니잖은가? 게다가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다고 해도 속은 코볼트라는 점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걸 알면서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 경비병들과 노예상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경비병들이라면 몰라도 노예상들은 알고 있지 않겠는가. 자신들이 직접 취급하는 상품인데.
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집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에서는 코볼트를 변신시킨 노예들을 사가는 사람들이 과연 자신이 사간 노예가 코볼트라는 걸 알 것인지, 몰랐다면 목걸이를 푸는 순간에 무슨 황당한 기분을 느낄지에 대한 궁금증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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