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가을의 Surprise

2011.08.16 16:2908.16


  소녀는 침대 속에서 눈을 떴다. 아직은 일어나기에 이른 시간이지만 오늘따라 소녀는 눈을 일찍 뜨게 되었다. 소녀는 자연스레 탁상시계 쪽을 바라보았다.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너무 일찍 눈을 떠버렸네.'

  소녀는 다시 누워 잠을 청할까 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도 정신이 맑았기에 그냥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그리고 다소 쌀쌀함을 느꼈는지 부르르 떨며 의자에 걸려 있는 가디건을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는 방문을 열어 거실로 이동하려고 하던 차였다.

덜컹.

  현관에서 무엇인지 모를 소리가 들렸다. 소녀도 그것을 감지했는지 거실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고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누구지?'

  의문을 품어보았지만 역시 열어보는 것 이외에 제일 좋은 답은 없었기에, 소녀는 과감히 문을 열어보기로 하였다. 지금은 야심한 시각. 그리고 현재 집에는 자신뿐. 만약 괴한이라면 소녀는 엄청난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보통의 선택지는 기척도 내지 않고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안전한 방법이지만 소녀는 그것과는 별개인양 별다른 감정도 없이 문을 열었다.

끼이익.

  문을 연 소녀는 얼굴만 내밀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음이 증명되자 문을 닫으려고 할 때였다.

털썩.

  묵직한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소녀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시선을 아래로 가져갔다. 그곳에는 물건이 아닌 '생물'로 추정되는 사람 한명이 쓰러져 있었다.

'어머나!'

  이런 이른 시각에 사람이 돌아다니는 것도 신기하지만 쓰러져 있었기 때문에, 소녀는 우선 이 소년(소년으로 추정)을 집으로 옮기기로 했다. 아무래도 소녀가 소년보다는 신장이 작았기 때문에 거의 소년은 질질 끌리는 형태로 옮기는 것이었지만, 소년은 그것도 모른 채 정신을 잃고 있었다.

'아우우!!! 진짜 무겁다....'

  소녀는 새벽부터 중노동을 해버렸다.




  소년은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묘한 이질감이 시야를 괴롭혔다. 평소 자신이 보던 그 천장이 아니었고, 주위를 쳐다보니 바닥부터 집 구조까지. 자신이 살고 있던 집이 아니었다.

“아....머리야. 여긴 도대체 어디야?”

  분명 자신의 실수로 대량의 알콜을 먹은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리고 노래방을 갔다가 또 치킨집까지...그 이후로는 사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집을 가겠다며 간 발걸음이었는데 말이다. 그러고 눈 을 뜬 게 이 보지도 못한 공간의 타인의 집.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빠져 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소년은 자신에게 덮어준 것으로 생각되는 이불을 소리가 나지 않게 걷은 뒤 빠르게 현관문 쪽으로 향하려고 할 때였다.

덥썩.
  소년은 자신의 뒷 옷깃을 잡는 느낌이 들었고 무의식적으로 압력을 행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보기에도 아담한 소녀가 있었다. 나이는 대략 16살에서 17살 사이정도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어깨에 닿을 듯 말듯 한 머리에 하얀 피부가 그녀를 한층 더 귀엽게 해주는 것 같았다.

“...........”

“...........”

  소년은 우선 이집의 주인이 여자라는 것에 한 번 당황했고, 자신이 도망치려고 할 때 딱 걸린 것에 두 번 당황했다. 그리고 세 번 당황해 하는 찰나, 목에서 또 한 번의 압력이 가해졌다.

“컥!”

  소녀가 팔에 힘을 주어 좀 더 소년의 목이 뒤로 젖혀지자 소년은 숨쉬기가 아주 곤란해진 상황이었다. 소년은 생각했다. 혹시 자신이 정신을 잃고...설마하니!? 그런 몹쓸 짓을 했는가에 대해서.

‘그럼 곤란한데!’

  소년은 탈출하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옷을 잡고 있는 소녀의 팔을 잡았다.

“!”

“아 우선 죄송합니다. 제가 음주가무를 심하게 해서...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상황이거든요.”

  소녀는 소년이 자신의 팔을 잡자 적잖게 당황한 기색이 만연했지만, 현재 소년도 술에 의한 필름 끊김 현상 때문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다른 의미로 패닉 상태였다.

“그, 그리고 이건 도망가려고 하는게 아니라..헙. 아니, 그냥 일어나서 어떻게 된 사정인지 알아보고자..하하하.”

“............”

  묵묵부답. 소녀는 이렇게 변명하는 소년에게 아무것도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소년도 그것이 더 의아한지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이 흐르는 가 싶더니 소녀는 소년의 팔을 떼어 놓으며 소녀의 방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곧장 뛰어갔다. 소년이 놀랄 틈을 주지 않게 쏜살 같이 달려온 그녀의 옆구리에는 작은 태블릿 PC로 추정되는 물건이 끼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의 전원을 켜서 ‘만졌다’.

“!”

[아, 죄송해요. 저도 경황이 없어서...]

  소녀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민망하면 나오는 버릇인 듯 했다.

[음..말은 할 수는 없지만, 요즘 잘 발달된 세상이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요!]

  초롱초롱 빛내며 계속에서 문자를 출력해내는 소녀는 그것에 자부심이 상당한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소녀가 쓰고 있는 태블릿 PC는 조금 남다른 성향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직아이템...당신...마법사?”

[음. 그것과도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우선은 마력운용이 가능하니까요!]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문자를 출력했다. 보통 일반인의 태블릿 PC라면 펜으로 글을 쓰거나 해서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 밖에 못하겠지만 지금 이 소녀의 경우에는 그것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움직이며 문자를 영상 출력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법사라는 개념은 아직 이 사회에서 아주 많은 숫자가 아니었기에 소년도 이런 상황은 처음 겪어 보는 것이었다.

“비슷하다...라니? 그건 또 무슨 의미입니까?”

[엄밀히 말하면 ‘종류’가 다르니까요. 운용방식이나 출력 방식. 그리고 계산법도 다르고...]

  소년은 곰곰이 생각하다 무언가 알아챈 듯 자신의 손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마녀!”

[네!]

  소녀는 금방 알아채준 것에 기쁜지 폴짝 뛰며 크게 동의했다. 아무래도 마법사라는 존재보다 더욱 극소수이고 밖으로 전혀 드러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희귀하며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소년도 교과서로만 들어본 그 이름을 ‘현재’보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신기했다. 우선 마녀라고 칭한다면 할머니라거나 아니면 나이가 많거나 하는 이미지가 통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녀로 하여금 마녀의 이미지가 확실히 현실과는 많이 동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역시 교과서는...이랄까. 실례 되는 거지만...말을 못하는 상황입니까? 아니면..”

[아.]

  소녀는 그 질문이 올지 알았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자신의 말을 출력해 나갔다.

[어릴 적 기억에는 했었던 기억이 나는데..지금은 하지 못해요. 아마도 후천적인 가능성이 있는 것 같지만 원인을 알 수 없어서 이런 상태죠. 하지만 편한 아이템들이나 도구가 많이 나와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아요.]

  싱긋-웃으며 편안한 미소를 지어주는 소녀는 정말로 그 생활에 만족해 보이는 눈치였다. 소년도 그것을 눈치 챘는지 더 이상은 묻지 않았다.

꼬르륵.
  침묵이 이루어지려고 할 때, 타이밍 좋게 소년의 뱃속에서 민망한 소리가 들렸다.

“하하하...”

[풉!]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풍부한 표정에서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는 배를 잡고 웃으며 문자를 그려냈다.

[아..... 괜찮으시다면 식사나 함께 하실래요? 마침 점심을 하던 도중이었거든요. 불만 끄면 되니까요.]

  소년은 그러고 보니 주방 쪽에서 맛있는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을 눈치챘다. 소년은 곰곰이 생각해보자 집에 가면 어차피 아무 것도 없거니와 자신이 해먹어야 하는 불편함을 감소해야하기 때문에 차라리 신세진 거 조금 더 져도 괜찮다고 판단이 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소녀와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네에. 그럼 여기 상 좀 펴주시겠어요? 저는 식탁에서 먹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아하. 네. 그러죠.”

  소년과 소녀는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맛있는 점심을 먹으며(실제로 소녀는 요리를 정말 잘했다.) 소년은 소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의 이름은 마나라는 것. 그리고 소년의 예상치 대로 17살이라는 점. 그리고 소소한 마녀의 이야기 등 소년의 호기심을 충분히 충족해주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아주 많았다. 소년은 오래간만에 순수하게 웃고 즐겼다.
  이런 소년의 마음과도 같이 소녀도 소년만큼 즐거웠다. 우선 마녀라고 밝히면 사람들은 피하는 습성이 강했기 때문에(이전부터 마법사와 마녀의 평가는 상대적으로 다르다.) 그녀는 실제로 고립되어 있는 일이 흔했다. 거기다가 자주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에 평소에도 같이 대화를 해줄 사람도 없거니와 불편한 점이 있는 다소 부족한 마녀였기에 더더욱 고독한 시간이 많았었다. 그러나 이 소년은 달랐다. 서슴치 않게 자기소개를 하고(이름은 범율이라고 했다.), 동갑이라고 하니 웃으며 편히 말하자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마녀임에도 불구하고 편견어린 시선이 아닌 정말 순수한 호기심과 친절함으로 자신을 대해주었다. 마치 ‘친구’처럼. 그 점이 기뻤다.

  둘은 실과 바늘처럼 매끄럽게 대화가 진행되었다. 마나는 상당한 마력 운용실력을 가졌는지, 말하는 타이밍과 동시에 바로바로 문자가 그려져 출력되었고, 범율은 또 한 번 그것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는 한, 저 태블릿 PC의 경우 운용법에 의해서 기능을 쓸 수 있어지는 가짓수가 천차만별이었다.

“마나.”

[응?]

  범율은 씨익 웃으며 현관문 앞에서 고개만 젖혀 마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나 또 얻어먹으러 와도 될까?”

[아!]

  마나는 생각하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은 놀란 표정으로 범율을 바라보고는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환영할게!]

  소년은 만족한 대답을 들었는지 고개를 돌리며 현관문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고.





  그 뒤로 범율은 매일 아침 시간에 현관문 옆에서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마나가 늘 아침이 되어 갈 때 쯤 강아지 마냥 타이밍에 맞춰 서 있는 것이다. 마나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항상 그 시간에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문을 열었다. 그럼 항상 범율이 처음 만났던 그 자리에서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마나는 그럴 것임을 알고 있기에 손을 닦고 문을 열었다.

“여어.”

  아래를 쳐다보니, 늘 치아를 들어내며 활짝 웃음을 띤 얼굴로 자신을 맞이해 주는 범율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마나도 그 미소에 답하는 활짝 웃으며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였다.

[들어와.]

“땡큐.”

  범율은 바지를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평소대로 마나의 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둘은 눈치 채지 못한 것이 있었다. 또 하나의 시선이 자신들을 보고 있음을.



  오늘의 식단은 한식이었다. 속을 든든히 해주는 된장찌개와 범율과 마나 두 명 다 좋아하는 계란말이. 그리고 몇 가지 소소한 반찬들. 범율은 이 식단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집=기숙사이기 때문에 늘 식당밥만 먹는 그로써는 이런 가정용 식단이 엄청난 식욕을 돋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 때문인지 범율은 처음 만났을 때 보다 훨씬 얼굴색이 좋아보였다.

“언제나 입이 마르도록 설명하는 거지만...정말 요리 잘한다. 널 데려갈 놈은 분명 행복한 놈일거야. 그건 장담해줄게.”

  범율은 배를 만지며 만족하는 표정으로 마나에게 말했다. 마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 아냐! 기본적인 거 밖에 못하는 건데 뭘...]

  마나는 진심으로 부끄러운 듯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이리저리로 분산 시켰다. 범율은 마나가 자기를 칭찬하면 늘 저렇게 귀여운 얼굴이 되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기에 일부러 더 추켜세운 것도 있었다. 범율은 가끔씩 저렇게 부끄러운 얼굴을 한 마나의 모습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조금 더 많이 아니, 계속해서 새로운 얼굴이나 귀여운 얼굴이나 다른 사람이 모르는 얼굴 등등 모두 자신에게 보여주길 원했다. 왜 그런지는 범율 자신도 의문이 들었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도 잠시. 범율은 어제 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기로 했다.

“그럼, 어디...보자. 그러니까 너를 가르쳐준 스승님이 그 교과서에서도 대표적인 마녀로 나오는 헬리아나라는 거지?”

[응! 전형적인 마녀를 대표하시는 분이 되셨지. 다만 외모나 그런 것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아서.. 교과서에 있는 모습은 전혀 다른 얼굴이지만.]

“헬리아나의 직속 제자라...”

  헬리아나. 정(正)마녀로써 아주 대표적인 사람으로, 성격은 화끈하며 일반인에게도 좋은 평판의 마녀로 통했다. 그녀를 통해 조금이나마 부정적인 이미지를 긍정적인 이미지로 바뀌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준 것도 헬리아나 덕택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문하생이라는 문장을 가지고 있으면 어느 정도 사람들의 매서운 눈초리가 수그러들었다. 그녀는 마녀계의 새로운 개척자와도 같은 셈이었다.

“그런거라면, 나는 엄청난 녀석과 대화하고 있는 셈인데?”

[아, 아냐!! 아직 스승님의 반도 못 따라가는걸....]

  마나는 손을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아직은 견습생의 딱지도 제대로 떼어내지 못했고, 마력 컨트롤이나 운용능력 등등 많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특히 마나의 문제점은 마력은 방대하지만 그 양을 조절 못하는 것이 아주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스승은 그것으로 골머리를 앓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 였던 것이다.

[그래서...난 예외적으로 보조아이템을 쓸 수밖에 없었어. 보통 ‘마녀’라면 쓰지 않을....이것을 말야.]

  그녀는 태블릿 PC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범율이 많이 보던 것이었다.

“지..팡이?”

  마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응. 맞아. 그 말대로 지팡이야. 마법사들이 사용한다는...아 물론, 이건 ‘마녀’에게 적합하게 만들어진 지팡이지만...주문을 구사할 때 컨트롤용으로 같이 쓰고 있어. 그래서 많이 교정이 되었지만...이래가지고는 마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억지로 웃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울 것 같았지만 정신적으로 강한 것을 알기에 범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하는 대로 지켜볼 뿐. 마나는 다시 본연의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다시 지팡이를 태블릿PC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할 때 였다.

[하지만 난 잘 헤쳐나갈 자신이 있으니까 기가 죽을...]

펑!!!!!

  현관 방향에서 엄청난 파괴음이 들렸다. 마나와 범율은 크 큰소리에 움찔하며 자연스레 뒷걸음을 친채 숨죽이고 있었다.

[뭐, 뭐지!?]

“쉿!”

  범율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아차 싶었는지 얼른 손을 떼었다. 그리고 마나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범율아!]

  범율은 고개를 저으며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마나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범율이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이상 의사소통이 힘들기 때문에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휘유~어린 것들이 벌써부터 살림차렸냐? 분위기 좋은데~? 응?”

  자욱한 연기 속에서 두 개의 검은 인영이 나타나는 가 싶더니 후드를 걸친 두 사내가 나타났다. 얼굴은 다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웃고’ 있었다.

“아아, 정말 귀찮게 말이야. 이렇게 방방곡곡 찾아다니면 없어지고 찾아다니면 없어지고...이 오빠가 얼마나 짜증났는지 알아? 응~? 우리 꼬마 아가씨~?”

  두 남자 중 키가 더 작은 남자가 비아냥거리며 한걸음씩 다가오고 있었다. 범율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음이 실감났다. 본능이지만 이 남자는 위험했다.

‘어서 피할 곳을 찾아야 되겠는데...!’

  범율의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있었다. 그리고 마나 또한 못지않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빨리 들킬 줄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잘 피해왔고 또 이번에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간과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그녀가 터를 옮겨 다니는 ‘주기.’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짧고 달콤한 인연을 조금 더 즐기기 위해서. 이 외로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채우기 위해.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잊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마나는 그것을 ‘지금’ 기억해 낸 것이다.

‘아...! 아...!.....아...’

  자신의 나태함이 부른 위험이었다. 스승님께서도 그렇게 당부하던 일이었다. 자신의 실수였고, 간과함이었다. 그녀는 범율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 의심 없이 받아주고 웃어준 사람. 최초의 ‘친구.’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일 같아 가슴이 찢어졌다.

‘이를 어쩌지...지팡이가 있지만.. 공격 주문은 내 특기 분야가 아니라서...’

  그녀는 컨트롤로 인한 상당한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에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자칫 잘못 사용하여 범율까지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 누가 당신의 꼬마야? 웃기고 있네. 다짜고짜 집문 부수는 게 당신들 예의인가?”

  마나가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남자와 범율은 대치상태로 팽팽한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먼저 도발을 건 것은 범율이었다. 범율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입술을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입안이 텁텁했다.

“오호, 이 쥐똥만한 녀석이 감히 내가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어? 오호, 심장이 여러개 달린 특수한 인간인가보구나? 응? 이 새끼야??!”

  키가 작은 로브의 남자는 무엇인가 주문을 읊으려 하자, 키가 큰 로브의 남자에 의해서 제지 되었다.

“큰 소란은 만들지 말자고. 어차피 저 계집이 들고 있는 ‘그것’만 회수하면 되.”

  키가 작은 남자는 쳇을 연발하며 다시 범율과 시선을 마주했다.

“건방진 꼬맹이. 너한테는 볼일이 없으니까 다치기 전에 썩 꺼져. 쥐뿔도 없이 나대면 하나하나 없어지는 수가 있다니까? 내가 못할 놈으로 보이나봐~? 응~?”

꿀꺽.
  이 살기는 진심이었다. 범율도 그것을 알기에 다리가 후들후들 빠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뒤에는 자기보다 연약할 마나가 있었다. 비록 마녀일지라도 자신은 남자고, 지켜줘야할 의무가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범율은 최악의 경우의 케이스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판단되니 오히려 조금은 기분이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재킷 안의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이거면 시간을 벌 수 있겠지.’

  범율은 재빠르게 주머니 안의 ‘물건’을 그 남자들에게 던졌다.

“이거나 먹으라고!!!!!”

펑!

“이게 뭐야!! 에퉤퉤, 젠장 이 연기는 또 뭐..3#$^”

‘이때다!!!’

  범율은 마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또 품안에서 종이를 꺼내는 듯하더니 곧장 찢어버렸다.

[범..!]

“잘 있으라고!!”

  찢어진 종이는 가루가 되더니 두 사람의 머리 위에 가라앉았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없어져 버렸다.

“이, 투퉤, 건방진 새끼가...!!!!!!”

  범율과 대치하던 입이 거친 남자가 이제야 걷어낸 듯 다시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지만 이미 둘은 탈출한 뒤였다.

“이...X발 새끼가!!!!!!!!”

“진정해라. 이미 붙여뒀으니까.”

  덩치 큰 조용한 남자는 흥분하는 남자를 잡으며 진정시켰다. 하지만 쉽게 진정되지 않는 듯, 그의 손을 쳐내며 거칠게 발을 굴렸다.

“좌표부터 건네..이 건방진 쥐새끼가...둘다 갈가리 찢어버릴테니까.”

  덩치 큰 남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주문을 외웠다. 빛이 두 사람을 감싸더니 이내 그 두 사람도 순식간에 집에서 사라졌다.






“후아....후...여기정도면 따라오진 않겠지.”

  범율은 한숨을 푹 쉬며 긴장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평소에는 이런 것들을 왜 구비하고 다녀야 하는지 의문을 품었지만 오늘만큼은 정말 들고 다니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사람은 미리미리 준비해야 할 필요성이 다시 한 번 각인되는 시점이었다. 그리고 묘하게 자신의 가슴 근처가 따뜻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상했다. 요즘은 날씨가 서늘한 편인데 따뜻이라니....범율은 자신의 아래를 쳐다보자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자신이 마나를 부둥켜 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으,앗! 미안....”

  범율은 귀가 빨개지며 말을 더듬었다. 마나는 그런 범율을 보면서 자신도 푸웃하고 웃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금방 얼굴이 어두워졌다.

[미안...나 때문에..]

“응? 무슨 소리야. 너 때문이라니. 굳이 말하자면 저쪽이 100% 잘못인거지 네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범율은 정색하며 마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네가 저녀석들한테 시비를 걸었어? 아니지? 안그럼 피해라도 줬어? 아니지? 그리고 난 이걸 피해 입은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럼 된 거 아니야?”

[그래도....]

“신경 쓰지마. 이젠 어떻게 도망 가냐가 문제인 거니까....”

“참, 잘 알고 있어서 오히려 고마운데?”

“이 목소리는...!”

  앞을 쳐다보자 그곳에는 있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분명 저 둘을 따돌리기 위해 랜덤 이동 스크롤을 사용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잡힌단 말인가!

“오호, 꼬맹이.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 아주 좋아. 내가 말했지? 나대지 말라고. 넌 살 뻔한 기회를 버렸어 쥐새끼. 그냥 그 꼬마 아가씨랑 같이 죽어.”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마법 언어를 구사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야구공만한 불씨가 여러 개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 불덩이들은 곧장 범율과 마나에게 뻗어 나갔다.
“파이어 볼!”

퍼벙펑!!

  범율과 마나는 불의 방향을 감지하고 뒤로 달렸다.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그 불덩이가 떨어졌고 그 주변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두 사람은 메마른 침을 삼켰다. 이 고비를 어떻게 넘길 것인가. 범율은 속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젠장. 어떻게 해야...!’

  그때였다. 마나는 결심을 한 듯 범율의 옷깃을 꼬옥 잡았다. 그 느낌을 받은 범율은 마나를 쳐다 보았다.

[괜찮아. 이제부터는 내가 해볼게.]

“마나.”

  싱긋. 마나는 별다른 말없이 웃으며 범율을 밀어냈다. 그리고 범율은 그 행동을 저지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진지한 눈초리에 순간 멈칫하였다.

[견습이긴 하지만. 나도 마녀니까. 그리고 나도 너만큼 너를 지키고 싶어.]

  마나는 태블릿PC에서 그녀의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한층 진지한 얼굴을 보이며 로브의 남자들과 대치했다.

“오호. 꼬마 아가씨. 우리랑 한판 해보려고? 잘 될까~저번처럼 폭주라도 하면 곤란한데 말이지...”

  큭큭 웃으며 조소를 날리는 키가 작은 로브의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뾰족한 얼음들이 하나 둘씩 생겨났다.

“이번에도 그럼 잘 피해보라고. 아이스 에로우!!”

‘크윽!’

  마나는 급하게 방어막을 전개했다. 그 충격파가 어마어마했지만 그래도 스승님과 연습했던 충격파는 더욱 뼈가 시렸었다. 이정도면 괜찮았다. 그리고 그녀도 곧이어 공격마법을 시도했다.

‘나의 기는 언제나 한줄기 빛이 될 지어다. 라이트 건(Right Gun)!’

  남자의 주변에서 하얀색 빛줄기가 비처럼 떨어졌다. 그도 조금 당황했는지 급하게 가드 주문을 외쳤다.

“뭐, 뭐야! 실드!”

콰콰쾅!

  엄청난 굉음이 일어났다. 얇은 빗줄기 같은 크기였지만 파괴력은 상당한 주문으로 기본적인 마녀들의 공격주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라이트 건(Right Gun)! 라이트 건.(Right Gun)’

  마나는 쉴 틈도 없이 공격 주문을 외웠다. 보통은 동태를 살펴야 하지만 그녀는 아직 전투에는 미숙한 견습마녀였기 때문에 경험이 부족했다.

‘하아...하아...이정도면 될까?’

  어느새 연기가 자욱하게 퍼져 공격한 대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마나는 두리번 거리며 남자를 찾기 시작했다.

“후. 순진한 꼬마 아가씨인줄 알았더니, 마녀는 마녀로구만?”

  마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이 공격했던 그 로브의 남자가 서있었다. 남자는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그녀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퍽!

“커헉!”

  엄청난 고통이 온 몸 전체에 퍼졌다. 명치를 제대로 맞았는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떨어져 나갔다. 남자는 마나의 괴로운 표정을 보면서 더욱 신나는지 가까이 걸어가 그녀의 머리에 발을 올려 지그시, 천천히 압력을 가하며 짓밟았다.

“으..으..”

“벙어리 주제에 그래도 고통스러울 땐 목소리가 나오나 보구만? 아이고 신기해라 응?”

  마나는 눈물을 흘렸다. 분했다. 자신의 나약함에 자신의 부족함에.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달라니까?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을까~ 응? 응? 응!?”

빠악.

“커윽!”

“하하하하! 아 역시 표정은 이래야 제 맛이지. 드디어 내가 만족할만한 얼굴을 해주네? 큭큭, 그나저나 네 낭군님은 어딜 가셨길래 안보이나~! 아! 혹시 도망갔나? 푸하하하!!! 그럼 그렇지 겁쟁이 주제에 뭘 기사처럼 나서겠다고.”

[아니거든요!]

“하아?”

  마나는 눈을 빛내며 남자를 향해 쏘아보았다.

[당신같이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당신보다는 훠~~월씬 좋은 사람이거든요!]

“하. 아가씨. 지금 아가씨가 어떤 상황인지 알고나 있어?”

  마나는 굳은 결심을 한 듯 침을 삼켰다. 그리고 제일 위험한 주문이지만 최선의 방법은 이것 하나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마나야.’

[네].

‘이 <주문>은 솔직히 마력이 탱크통 같은 너한테만 어찌보면 적합한 주문이야. 하지만 그만큼 위험 부담이 커. 알겠지?’

[네.]

  스승님은 싱긋 웃으며 자신에게 이야기했다.

‘정말로 네가 결심이 섰을 때. 그리고 위험했을 때. 최악의 상황일 때만 쓰도록. 그렇지 않으면 몸 다 상한다. 알겠나 나의 소중한 제자씨?’

  마나는 활짝 웃으며 ‘네.’라고 대답했었다. 그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원천의 근원 나의 적성의 문자 <빙(氷)>. 나의 부름에 답하여 나의 몸에 응하라!’

  마나의 몸에서 빛이 일었다. 그러는가 싶더니 그녀의 체온은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발로 얼굴을 짓누르고 있었던 남자도 그것을 느꼈는지 재빨리 발을 떼었다. 그리고 그는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낮아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뭐, 뭐야!”

“....마녀의 마법이다. 젠장. 걸렸군.”

  큰 덩치의 남자는 실수를 했다는 듯 나무를 치며 마나를 쳐다보았다.

“저 여자는 영창을 못하는 대신에 ‘그’ 지팡이로 주문을 컨트롤 한다. 이런 대규모의 주문을 펼 칠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말이지.”

“뭐라고 하는 거야! 이 새파란 계집의 실력이 나보다 훨씬 위라는 거냐!!!?”

“실력보다는 기본 그릇이 다르다는 것이겠지. 이건 보통 마녀도 신중히 택하는 문자 주문이다. 자신의 속성을 잘 알고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끌어올리는 까다로운 주문이야. 이걸 한 번에 성공시키는 자체도 보기 힘든 케이스이거늘...렉스. 우린 판단을 잘못했다.”

  덩치 큰 남자는 작은 남자, 렉스를 향해서 말하고 있는 동시에 그의 다리는 이미 얼어가고 있었다. 렉스도 그것을 느꼈는지 자신도 움직이려 하였다. 하지만.

“뭐, 뭐야 어느새!?”

  자신의 발도 얼어 떨어지지가 않는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의 발을 녹이려고 화염 마법을 썼지만 얼어가는 속도가 더욱 빨라서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거기다 더욱 설상가상인 것은.....내리고 있었다. 가을의 날씨에서는 볼 수도 없는 하얀 솜사탕. ‘눈’이었다.

“참으로 놀랍군...주변의 날씨까지....도망만 다녀서 별 볼일 없는 제자인줄 알았지만...대착각을 했군..”

“젠장! 이런 젠장!!!!!!!!!!”

  어렴풋이 둘의 모습이 얼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주문이 성공한 것이었다. 정말 참으로 다행이었다. 혹시나 실패했으면 2가지 다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성공하였다. 마나는 안심했다. 그리고 매우 졸렸다. 마력을 많이 쓴 탓인지 몸도 무겁고 까딱하기 힘들었다. 그냥 이대로 자면 아주 편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범율이는......잘 도망갔겠지?...다행이야.. 휘말리지 않아서..’

  몸도 무겁고 졸렸지만 그가 무사히 도망쳤다는 것에 그녀는 마음이 놓였다. 이제는 그냥 푹 쉬는 것만이 마나의 일 같았다. 그렇게 잠이 들려고 할 때였다.

‘마나야!!!!!!! 이 망할 제자 녀석!!!’

‘어이! 마나!!!!!!!!!! 정신..’

  지금 제일보고 싶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자신의 착각일까. 마나는 미소 지으며 서서히 의식을 잃어 갔다.








  눈을 떴다. 눈을 떠보니 온통 세상이 하얗게 칠해진 것처럼 하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나는 분명 지금은 10월이고, 10월에는 분명 이런 풍경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것은 빨라도 11월 중순경에나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녀는 눈을 다시 부비며 쳐다보아도 믿을 수가 없었다. 눈이 소복소복 쌓여있는 것이었다.

“어? 일어났어?”

  익숙한 중저음 톤의 목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이것은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 중 한사람의 목소리였다.

‘범율이!?’

  마나는 고개를 돌리려 하였지만 그의 손에 제지되어 그대로 앞만 보게 되었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니 자기가 범율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형태로 되어 있었다. 매우 부끄럽지만 기분은 좋은 상황이었다.

“너. 죽을뻔 했어. 그것도 저체온증으로. 알고 있어?”

  범율은 태블릿PC를 건네며 진지한 목소리로 마나가 의식을 잃은 이후를 설명했다. 저체온증으로 죽을 뻔 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두명의 괴한은 그대로 동사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스, 스승님이!?]

“그래. 같이 왔어.”

  마나는 놀란 표정으로 범율의 얼굴을 쳐다보려 하였지만 범율은 또 거기서 제재를 가하며 말을 이었다.

“상당히 놀랐겠지? 그렇게 생각해. 나도 처음엔 몰랐다가 나중에는 무-지하게 놀랐거든. 헬리아나의 직속제자라니...하하 뭐 이런 인연도 있나 생각했어. 우연의 퍼즐조각을 맞추는 것도 아닌 마냥...본론적으로 얘기하면 난 널 어렸을 때 봤고 너도 날 어렸을 때 봤어. 다만 너는 기억을 못하고 있었지만.”

‘날 봤었다고?!’

  충격적인 이야기에 마나는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자신을 알고 있었다니...! 마나는 곰곰이 범율의 얼굴을 생각해도 어릴 적에 만나본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언제 만났단 말인가?

“뭐....기억 못하겠지. 나도 처음에 널 몰라봤는데 너라고 날 기억하겠냐? 한 번 밖에 못 본 사인데. 여튼 그래서 그 당시 난 헬리아나님을 많이 뵈었기 때문에 네 이야기도 많이 듣기도 했고 또 재미있기도 했어. 그리고 헬리아나님을 나도 많이 좋아했어. 정말 자상하게 잘 대해 주셨거든. 그러면서 나에게 특혜를 하나 주셨지.”



‘율아. 내가 아주 특별한 걸 하나 주도록 하지. 아주 특별 한거야. 보통 남들한테는 주지도 않아.’

‘우와! 뭔데요?’

  헬리아나는 자상하게 웃으며 범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특별 주문진.’

‘특별 주문진이요?’

‘그래. 너만이 <나>를 딱 한 번 부를 수 있는 특별한 주문진이야.’

  범율은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헬리아나를 바라보았고 헬리아나는 웃으면서 머릿속에 주문진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특별히 너에게만. 딱 1회권을 부여해줄게. 정말 위급한 상황이면 머릿속에서 저절로 이 주문진이 떠오를거야. 요긴하게 써?’

‘우와! 정말이요? 신기하다!!!’



  범율은 다시 생각하며 특혜의 영광을 받은 것을 감사히 여겼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로 둘 다 죽었을지도 몰랐었다. 그 생각을 하니 등 뒤가 더욱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짧은 회상을 할 동안 마나는 궁금했는지 태블릿PC로 문자를 띄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 특혜라는 게...]

“그래. 딱 한 번 너의 스승님을 부를 수 있는 주문진이었어. 지금은 생각하려고 해도 떠오르진 않지만.”

[아......]

  마나는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자신도 스승님을 보지 못한 것이 거의 2년 가까이 되었기 때문이다. 늘 긍정적이고 파워풀이며 자신에게 한 없이 다정했던, 마치 어머니 같은 스승님.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안기고 싶었고 해줄 얘기도 잔뜩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없던 것이다.

[내가.. 들은게 착각이 아니었구나.]

“그런 셈이지.”

[그래.........]

  범율은 그런 마나가 안타까워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할 때였다. 그의 손을 제지하며 가는 눈을 뜬 마나가 쏜살 같이 문자를 전송했다.

[뭐야! 그럼 넌 중간부터라도 날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 근데 왜 안 알려 준거야!!]

  마나는 아주 거친 문자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 하듯 최대한 격렬한 폰트로 이미지화 했다. 범율은 당황해하며 마나를 진정시켰다.

“워, 워. 그게 말이지. 말하려고 할때마다... 타이밍이 왠지 맞지 않아서. 거기다가 난 너도 어느정도 눈치는 챌 줄 알았거든...같이 찍은 사진도 있고 말야. 자 여기보라고. 난 많이 안변했어!”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나온 것은 손바닥만한 작은 사진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안에는 헬리아나와 마나, 그리고 범율과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아는 할아버지인 ‘딘’이 있었다.

[이 사진은......]

“단체로 한 컷 찍었던 사진이야. 너무 어릴 때라서 그런가.. 나도 사진을 보고 나서 알았어.”

[그렇다면 넌 딘 할아버지의....]

  범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현했다.

“맞아. 난 딘 할아범의 제자야. 그리고 ‘외손자’이기도 하고.”

  마나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범율을 가리켰다.

[그럼 넌.....]

“그래. 난 너처럼 아직 견습이라기보다는 이젠 어엿한 공방인이 될 지팡이 장인이야. 물론 아직 제대로 갖추려면 멀었지만.”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띤 채 부끄러운 듯이 코를 긁는 범율은 보며 마나도 얼핏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자신의 지팡이 제작을 위해 한 번씩 늘 들렸던 딘 공방은 언제나 신기한 것뿐이라 갈 때마다 즐겁게 탐험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늘 소년 한 명이 있었던 기분이 들었다. 당시에는 공방구경에 늘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럼 그 소년이....]

“음. 니가 기억하던 꼬맹이는 나 였을거야. 공방에 꼬맹이는 나밖에 없었거든.”

  범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손에는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무식한 크기의 라디오 겸용 카세트 플레이어가 쥐어져 있었다. 마나는 그것을 보았는지 궁금하다는 얼굴로 범율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범율은 그 시선이 느껴졌는지 헛기침을 하며 카세트에 이어폰을 꽂아 왼쪽 귀에 꽂아 주었다.

[이건?]

“너의 완벽한 스승님께서 일어나면 같이 들으래. 아마 자기가 많이 그리워서 분명 금단현상이라는 상황이 닥쳤을 거라고 하면서.”

[아....]

“훗. 부정은 못하네?”

  마나는 볼을 부풀리며 부정을 할 수 없음에 약이 올랐다.

“뭐 재쳐 두고. 들어나 볼까.”

  범율은 카세트의 재생버튼을 눌렀다.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잠시. 어디서 많이 듣던 음성이 들려왔다.

[어이어이. 이거 잘 들릴까나 몰라~잘 들려?]

‘!!!!!!’

  아주 그리운 음성이었다. 마나가 그리고 그리던. 바로 헬리아나의 음성. 그녀는 볼륨을 올리며 귀를 집중했다.

[아마 네 제자라는 살짝 부족해보이는 녀석이 이걸 듣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마나야?]

  마나는 마치 헬리아나가 바로 옆에 있는 듯 열렬히 끄덕이며 경청했다.

[본의 아니게..너를 홀로 놔두는 상황이 되었지만...긴말은 하지 않을게. 언제나 떨어져 있지만 난. 널 언제나 생각하고,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어. 그건 정말이야. 넌 내게 ‘특별’한 제자니까.]

지직.

[그리고 이번에는 정말 위험할 뻔 했더구나. 장하다. 완벽하게 성공한 문자 주문이었어. 조금의 무리는 있었지만. 그래도 훌륭해.]

  마나의 눈가에 이슬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아니 자신의 스승님이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했을지 다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스승님...’

[재수 좋게 공방집 손자놈이 같이 있었을 줄이야. 좀 놀라기는 했어. 그 ‘서비스’를 잊지 않고 쓰다니. 처음엔 많이 놀랐지. 상황도 긴급한 것 같았고. 크크큭. 그녀석 표정이 너무 절박했었거든...아마 너는 못봤겠지만.]

  마나는 의외의 폭탄발언에 자연스레 범율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범율은 고개를 반대로 돌린 채, 마나와 마주보고 있지 않았다.

[아마 그녀석 무지하게 부끄러워하고 있을 걸? 그 성격에 뻔해, 뻔해. 푸하하하!!!! 흠흠, 어쨌든 그녀석 옆에 있으면 많이 고맙다고 해줘라. 네 마법에 조금 휘말려서 팔이 동상 상태에서 나를 불러줬었으니까. 이 스승님. 제자님의 실력(?)에 깜짝 놀랐다고? 호호호홋! 역시 네가 날 조금 닮았(?)다니까.]

  범율의 귀가 빨개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목격한 마나도 같이 얼굴이 붉혀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연스레 그의 얼굴로 시선이 가던 것이 고개를 돌려 중앙으로 향하게 되었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느낌이 든 것이다.

[흠. 너무 잡담을 떨었네. 하여튼..난 이렇게 잘 살고 생존하고 있으니까 제자야. 너도 잘 지내길 바란다. 그 시기는 다들 힘드니까....이렇게 힘내라고 ‘특별히’ 내가 전하는 메시지니까.]

‘스승님...’

[잘해봐.]

  뚝. 필름이 다 감긴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짧은 고요한 침묵이 두 사람에게 찾아왔다. 범율은 이  때가 좋은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놀랍게도 한방에 자신의 마음을 알아챈 헬리아나가 고마울 뿐이었다. 그는 바짝 붙어있는 마나의 왼쪽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

  마나는 범율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라면서도 뿌리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 더욱 놀라웠다. 남자에 면역이 떨어지는 편이라 이런 행동은 늘 뿌리치지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의식적으로 잡힌 손을 빼내려고 하였지만 그 때마다 범율이 놓아주지 않고 더욱 꼬옥 잡았다. 마나는 그의 행동에 어찌할 바를 몰랐었다.

“흠.흠.”

  귀에서 양볼까지 붉어진 범율은 헛기침을 하였다. 지금부터가 어찌보면 본방이었다.

“계속 생각했었던....결론인데.”

  그는 결심을 한 듯, 눈에서 결의를 볼 수 있었다.

“우선 거두절미하고 말할게.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

[뭐, 뭐!]

  그녀는 황당 행동에 황당 고백까지 연타석을 얻어맞자 감정이 흘러 넘쳐 태블릿PC로 자연스레 전송되고 있었다.

“그냥 계속 계속 보면 지겨운 것도 아니고. 오히려 두근두근 해지는 것 같고. 거기다 편안하고. 취미도 비슷비슷한 것 같고....그래서 결론은 내가 너한테 ‘이성으로써의 감정’을 느낀다고 결론을 봤어. 아, 우선 대답은 바로 바라지는 않아. 그냥...지금 해야할 것 같아서 한 것 뿐..부담은 갖지 말아줘.”

  범율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땀이 베어 있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지만, 마주 잡고 있는 마나는 금방 눈치채고 있었다. 그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상당히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특성상 계속 세밀하게 조정해야 하잖아. 지팡이.”

“...........”

  왠지 더욱 쑥쓰러운지 고개를 돌리며 또다시 헛기침을 하였다.

“무상 AS. 무상 교체. 평생 관리 시스템. 내가 정식 라이센스를 취득하면 해줄 수 있는 혜택들이야. 나는 만들고 고쳐서 기분이 좋고 너는 보다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어서 좋고. 우리 잘 맞는 궁합이 아닐까 하는데...”

‘윽! 무드가 없는 이야기인가!!!’

  범율은 얼굴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너무 무식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이 되기 시작하더니 이내 조금은 후회하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1절만 할걸 그랬나!!!’

툭.
  그때였다. 범율의 오른쪽 어깨에서 조금 무게가 실린 따뜻함이 전해져 왔다. 마나의 머리였다. 범율은 다시 한 번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긍정의 대답으로 받아도 되는 걸까.

[고마워.]

  패닉상태의 범율은 보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표현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마주잡은 그 손을 꼬옥 잡았다. 조금 축축한 느낌이 들었지만 따뜻했다.

“호, 혹시나 물어보는 건데...이거, 긍정적인 반응으로 받아들여도 되는...거지? 응?”

  싱긋. 마나는 얼굴을 붉히며 웃었다. 그리고 그에 응답해주듯, 때아닌 가을에 보송보송한 눈 방울이 한올한올 계속하여 두사람 주위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해 10월의 가을은 추웠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게 채워지는 두 사람이었다.









=========================================


원고지 150매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잡혀서...
우선, 단편작입니다. 혹평 각오하고 올려봅니다..^^
나경
댓글 0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추천 수
공지 2024년 독자우수단편 심사위원 공고 mirror 2024.02.26 1
공지 단편 ★(필독) 독자단편우수작 심사방식 변경 공지★5 mirror 2015.12.18 1
공지 독자 우수 단편 선정 규정 (3기 심사단 선정)4 mirror 2009.07.01 3
417 단편 안심 위기백 2011.07.14 0
416 단편 [Machine] K.kun 2011.07.23 0
415 단편 노래하는 빵1 irlei 2011.07.18 0
414 단편 11시 이정도 2011.07.23 0
413 단편 [재업로드] 월세가 저렴한 방 헤르만 2011.07.27 0
412 단편 ATM 언어유희 2011.07.28 0
411 단편 무소식이 희소식 고요 2011.07.28 0
410 단편 드라마 각색 어린 왕자1 마뱀 2011.07.30 0
409 단편 요즘 따라 그녀가 마뱀 2011.07.30 0
408 단편 밤하늘에서 정말로 별을 보게 된다면 김진영 2011.07.29 0
407 단편 소울의 대부 천공의도너츠 2011.08.02 0
단편 가을의 Surprise 나경 2011.08.16 0
405 단편 복수 : 한양 성 살인방화사건의 전말과 현재 마뱀 2011.08.09 0
404 단편 우리들의 슬픈 오마주 김진영 2011.08.19 0
403 단편 세인트 프롤레타리아 천공의도너츠 2011.08.21 0
402 단편 돌산 2011.08.25 0
401 단편 최후의 무기(The Last Weapon) DOSKHARAAS 2011.08.25 0
400 단편 감옥과 동정에서의 탈출 Leia-Heron 2011.08.23 0
399 단편 [Agitpunkt] K.kun 2011.08.27 0
398 단편 모래 늪 조미선 2011.08.29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