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브라이드시클Bridesicle
(*브라이드bride는 신부, 시클-sicle은 꽁꽁 얼었다는 뜻으로 아이스캔디 상표 팝시클, 드림시클에서 나온 말. 얼음신부나 냉동신부는 너무 직접적이고, 상품화된 인간이란 뉘앙스를 살릴 수가 없어 브라이드시클이라는 말 그대로 두었습니다.)

윌 매킨토시Will McIntosh


『아시모프』 2009년 1월호

http://www.asimovs.com/_issue_1003/art/bridesicle.pdf

2010년 휴고상 단편부문 수상

2010년 네뷸러상 단편부문 최종후보


그녀는 조용히 울리는 그 말에 잠에서 깨어났다.

“안녕. 정신 좀 차려봐.”

그녀는 감은 눈꺼풀 너머 빛을 느꼈고, 눈이 쑤시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살짝 가리고 눈을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말할 수 있겠어?” 어떤 남자의 부드러운 목소리.

곧 그녀는 머릿속이 맑아졌고 궁금해졌다. 엄마는 어디 있지? 그녀가 머릿속 구석구석을 찾았지만 대답이 없었고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그녀가 엄마를 받아들인 한, 엄마를 쫓아낼 수 없었다. 엄마를 아파트에 들이는 일과 달리 한번 엄마가 머릿속에 들어오면 되돌릴 수 없었는데, 엄마가 돌아갈 몸이 없기 때문이었다.

대체 엄마는 어디 간 거지?

“아, 이미 깨어있다는 거 알아. 어서, 잠자는 숲 속의 공주님. 말 좀 해봐.” 마지막 말은 연인이 속삭이는 말이었기에, 미라는 잠에서 깨어 눈을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숨을 쉬려고 했지만, 숨을 쉴 수 없었다. 깜짝 놀라 눈을 떴다.

한 노인이 몸을 숙이고 미소 짓고 있었지만 미라의 눈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는데, 미라가 숨을 들이쉬려고 입을 벌리자 턱에서 바닷새 소리처럼 끽끽거리는 소리가 났고 공기를 들이마실 수 없었으며, 두 손으로 턱관절을 누르고 싶었지만 손도 올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굴 말고는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안녕. 잘 부탁해.” 노인은 미소를 거두면 미라가 부서질지도 모른다는 듯 온화하게 웃고 있었다. 미라가 다시 보니 남자는 그렇게 늙은 편이 아니었다. 아마도 60세. 이마 주름과 팔자 주름만이 깊게 보였는데 그 사람 얼굴이 거의 키스하는 것처럼 미라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문제라도 있나?” 그 사람이 손을 뻗어 미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공기 유입을 조절하려면 어금니로 눌러야 해. 안 배웠나?”

정말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약한 바람이 부드럽게 목을 지나 입과 코로 쉭 빠져나갔다. 바람이 콧구멍 속 작은 코털을 간질였다. 미라가 어금니를 앙다물자 약한 바람이 쉭쉭 소리로 바뀌었다. 날숨이 강해서 가슴이 푹 꺼질 정도였지만, 미라는 정말 그런지 알 수가 없었는데 머리를 들어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 미라는 말하다가 깜짝 놀라 악을 썼는데 목소리가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목소리는 낮고 거칠고 힘이 없어서, 늪에서 끌려나온 어떤 괴물의 목소리 같았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려. 내가 처음이야? 아무도 당신을 되살린 적 없었나봐? 예비교육도 없었고?” 미라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남자는 자신이 미라의 처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서 기쁜 듯했다. 미라는 아는 사람인지 궁금해 하며 그 남자를 살펴보았다. 남자는 미라가 관심을 쏟자 우쭐해하며 마치 미라가 남자를 반기기를 기대하는 듯했다. 매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코는 굵고 울퉁불퉁했으며 품위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콧구멍은 황소 콧구멍 같았다. 눈썹은 네안데르탈인 같았지만 입은 조그마했다. 미라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요? 왜 그래요?” 미라가 간신히 말했다. 미라는 주위를 둘러보려 용을 썼다.

“괜찮아. 긴장 풀어. 얼굴만 기능하고 있어서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미라가 겨우 말했다.

“교통사고를 당했군.” 남자가 근심스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남자는 손바닥에 나오는 정보를 찾아보고 있었다. “상당히 크게 다쳤고. 대동맥 파열에. 오른다리가 없어졌네.”

오른다리를 잃었다고? 오른다리? 미라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와 굉장히 높은 금색 천장밖에 볼 수 없었다. “여기는 병원인가요?” 미라가 물었다.

“아니, 아니야. 데이팅 센터야.”

“네?” 미라는 처음으로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의 낮고, 열렬하고, 은밀한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눈치 챘다. 가까운 곳에서 이런 대화가 들렸다.

“……무채색이죠. 누가 보라색을 골라요?”

“……지난번에 데이글로우즈 콘서트에 갔을 때는 열일곱 살이었는데…….”

“다른 사람이 설명해줘야 하는데.” 그 남자가 어깨 너머로 뒤돌아봤다. “보통 예비교육이 있거든.” 남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남자가 다시 얼굴을 미라에게 돌리고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끼리 알아서 해야겠구먼.” 남자가 두 손을 움켜잡고 미라에게 몸을 숙였다. “사실은, 그러니까, 당신은 사고로 죽어서…….”

미라는 다음 몇 마디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마치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죽었으면서도 당신은 죽었다고 누군가가 전해주는 말을 듣다니 터무니없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사실처럼 들렸다. 미라는 죽어가는 순간을 기억할 수 없었지만, 과거와 현재를 확연히 구분하는 어떤 경계를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미라는 이미 죽은 자신의 몸에서 도망쳐 벗어나고 싶었다. 미라의 치아는 시체의 치아였다.

“……가입한 보험에서 급속 냉동 보존술을 보장하고 있었지만, 완전 부활에는, 특히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경우에는, 비용이 엄청나게 들지. 그래서 데이팅 서비스로 —”

“제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 미라가 말을 잘랐다.

남자가 다시 손바닥을 찾아봤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편승인을 데리고 있었군. 어머니.” 남자는 주위를 다시 흘끗 둘러보더니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 듯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편승인. 얼마나 적절한 용어인지. “어머니는 사라졌나요?” 미라는 “어머니는 돌아가셨나요?” 하고 묻고 싶었지만 죽음은 모호한 개념이었다.

“응. 편승인을 유지하려면 뇌 활동이 일관되게 있어야 하니까. 한번 죽으면 편승인도 사라지지.”

전화번호를 외우려고 애쓸 때와 같지. 미라가 생각했다. 의식적으로 붙들고 있어야 하고 놓치면 되돌릴 수 없다. 미라는 크게 안도했다. 눈을 뜬 순간부터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계속 기다렸다. 이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라 알게 되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에 마음을 놓은 자신에 죄책감을 느꼈지만 누가 미라를 탓하겠는가? 분명 미라의 어머니를 알았던 사람이라면 미라를 탓하지 않을 것이다. 분명 린이라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저는 자매가 있어요. 린이라고 하죠.” 미라는 아주 뻣뻣한 턱을 움직이며 말했다.

“응, 쌍둥이군. 이건 좀 흥미롭네.” 남자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싱긋 웃었다.

“린은 살아있나요?”

“아니.” 남자는 미라가 어리석다는 말투였다. “당신은 80년 넘게 죽어 있었어,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 남자는 그 모든 일들이 사소하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현재에 집중하자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느냐면, 우린 서로를 알게 되는 거야. 데이트를 하는 거지. 우리가 서로 잘 맞으면…….”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슬쩍 웃었다. “내가 당신을 되살리는 비용을 내줘서 같이 살 수 있는 거고.”

데이트라.

“그럼. 내 이름은 레드라고 하고, 당신 이름은 정보를 보니까 미라네. 만나서 반가워, 미라.”

“반가워요.” 미라가 웅얼거렸다. 레드는 미라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했다. 미라는 기억하려고 애썼지만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사고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떠오르는 기억들은 말다툼들이었다. 어머니와 했던 말다툼들. 쇼핑몰에서 했던 말다툼. 엄마는 미라가 좋아하는 것을 모두 싫어해서, 미라에게 할머니들이나 감직한 옷가게로 가 칙칙한 싸구려 실내복을 사게 하려고 했다. 엄마는 미라의 몸을 통제할 수 없었지만(엄마는 어쨌든 그저 편승인에 불과했다), 통제하는 방법은 굉장히 많았다.

“자. 미라.” 레드는 손뼉을 쳤다. “헛소리만 하고 있을까, 아니면 좀 친해져볼까?”

레드는 쌍둥이 자매를 언급할 때와 마찬가지로 눈썹을 한 번 더 추켜세웠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미라가 말했다.

“으으음. 예를 들어서, 질문 하나 할게.” 레드가 몸을 가까이 숙여 미라의 귀에 숨을 헐떡거렸다. “내가 당신을 되살려주면, 어떤 일들을 해줄래?”

미라는 이 남자의 이름이 레드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고, 누군가를 정말 되살리러 왔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잘 모르겠어요. 그건 굉장히 은밀한 질문이네요. 먼저 서로를 좀 알아 가면 어때요?” 미라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몇 분만이라도 지금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조용한 시간이.

레드는 눈썹을 과장되게 찌푸렸다. “이봐. 귀엽게 좀 굴어 보라고.”

레드에게 미라가 동성연애자라고 밝혀야 할까? 절대 아니다. 레드가 관심을 잃을 테고, 어쩌면 그 사실을 시설 운영자에게 알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설 운영자는 왜 미라가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아마 미라가 받지 않은 예비교육과 관련 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데이트 상대가 되지 못하는 위험, 플러그를 뽑혀 땅에 묻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까?

그게 가장 끔찍한 일일까?

이러한 생각이 들자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이 깨어나려 했다. 아니 그것은 완전히 잊은 기억에 가까웠다. 미라는 모든 것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으니까. 다시 그 기억을 떠올리려 생각하자, 기억이 없는데도 아직 그 고통을 다시 느낄 만큼 엄청나게 괴로웠다는 기억만 떠올랐다. 미라는 그 기억에 다다랐지만, 그 기억은 뭔가를 기억해내려 할 때마다 맞닥뜨리는 끈적끈적하고 두꺼운 뭔가에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다. 살아있었을 때는 정말 쉽게 그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원래 이런 식으로 기억하고 있는 걸까?

“저는 그저 —” 미라는 “그럴 기분이 아니에요”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대단히 뻔한 데다가 굉장히 절제된 표현이었다. 미라는 죽었다. 얼굴 밖에 움직일 수 없었고, 그래서 밧줄에서 풀려 둥둥 떠다니며 떠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손과 발이 나를 땅에 붙들어 줬구나. 미라는 처음 깨달았다. “저는 그저 이런 일에 엄청 서툴러요.”

“그러면.” 레드가 손을 허벅지에 올리며 일어서려는 자세를 취했다. “이건 꽤 돈이 들고, 일분마다 요금이 올라가. 그러니 이제 작별 인사를 할 테니까, 당신은 다시 죽으러 가라고.”

다시 죽는다고? “잠깐만요!” 미라가 말했다. 되살렸다가 다시 죽게 할 수 있다고? 미라는 자기 몸이 아마 몇 년 동안, 어쩌면 영원히 어딘가에 보존되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 생각을 하자 겁이 났다. 레드가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알았어요. 저는…….” 미라는 뭐라도 생각해내려 했지만, 머릿속에 너무 많은 일들이, 알고 싶은 생각들이 줄줄이 떠올라서 미라에게 몸을 숙이고 있는 변태에 관한 일은 하나도 생각할 수 없었다.

영원히 “부활”하는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연락할 수 있는 친척이 살아있거나, 지난 80년 동안 이자가 누적된 예금 계좌가 있을까? 죽었을 때 저금해둔 게 있던가? 집이 한 채 있었다. 미라는 그 사실을 기억해냈다. 린이 그 집을 상속받았을 것이다.

“좋아, 그렇게 말을 안 할 거면, 이쯤에서 헤어져야겠구먼.” 레드가 투덜댔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올 거라고 기대하지는 말라고. 당신 부상은 회복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드는데, 여기는 다른 여자들이 몇 만 명이나 있으니까. 게다가 이 시설이 문을 열기 전에 60년이나 냉동되어 있던 여자들은,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서 남자들이 안 좋아한다고.”

“제발요.” 미라가 말했다.

레드가 머리 위쪽에 있는 뭔가에 손을 뻗자, 깜깜해졌다.


미라는 꿈속에서 숲 속에 난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 길은 위로 경사가 져있었고 점점 가팔라지다가 높은 계단으로 이어졌다. 계단은 얇은 합판으로 만든 탑 안으로 들어가서 위로, 위로 나선을 그리며 계속됐다. 어두워서 미라는 거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달리고 있으려니 기분이 좋았다. 계단이 얼마나 가파른지는 이미 훨씬 전부터 신경 쓰이지 않았다. 미라는 더 높이 올라갔고 되돌아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이렇게나 멀리 왔으니 꼭대기까지 올라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꼭대기에 도착하자 창밖으로 넓은 강과 그 주변으로 멋지게 펼쳐진 대학교 교정이 보였다. 미라가 좀 더 잘 보려고 창가로 서두르자 탑이 미라의 무게 이동에 따라 기울더니 앞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탑은 점점 속도를 높여서 건물로 돌진했다. 이거야. 내가 죽는 순간이야. 속이 뒤집히는 기분을 느끼며 미라가 생각했다.

미라는 땅에 부딪히기 전에 가슴이 철렁해 깨어났다.

어떤 노인이 — 70대로 보이는 노인이 — 눈을 가늘게 뜨고 미라를 보고 있었다. “내 타입은 아니구먼.” 노인이 투덜거리며 미라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안녕하세요.”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목을 가다듬었다. “전 이런 데 처음 와 봐요.” 그 남자는 뚱뚱했고 40대로 보였다.

“오늘 며칠이에요?” 미라가 정신이 혼미한 채로 물었다.

“2342년 1월 3일이에요.” 그 남자가 대답했다. 거의 30년이 지났다. 남자가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여기 있으려니 제가 아동성추행범 같은 사람이 된 느낌이라 기분이 나빠요.” 남자가 눈을 찌푸렸다. “그래도 사람들이 서랍장에서 진정한 사랑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요. 제 사촌 안셀도 부활 센터에서 둘째 아내 플로렌을 만났죠. 멋진 여자예요.”

남자는 어설프게 활짝 웃어보였다. “어쨌든 저는 라이컨이라고 해요.”

“저는 미라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당신 미소는 좀 떨려 보이는데 매력 있네요. 당신은 정직해보여요. 부활하는 데 저를 이용하고 나서 이혼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 건 조심해야 하죠.” 라이컨은 비스듬히 앉아 있었는데 아마 날씬하게 보이려고 그런 것 같았다.

“그게 걱정스럽다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미라가 말했다.

라이컨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브라이드시클 소개소에서 여자를 만나는 게 한심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 손을 잡고 파티에 가는 게 아니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혼자 참석하거나 웃음소리가 경박하고 유머 감각이 형편없는 데다가 나보다 10살은 많고 매력도 없는 여자랑 가거나 하는 게 더 한심하죠. 아름답고 젊은 제 아내가 부활한 사람 아니냐고 사람들이 수군대는 게 나아요. 그래도 그 사람들은 저를 부러워할 테고 사람들이 아내를 살펴보는 동안 저는 아내 손을 잡고 자부심을 느낄 거예요.”

라이컨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할머니께서는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한대요. 죄송해요.”

라이컨도 편승인을 데리고 있구나. 적어도 한 명은. 겉으로는 알기 힘들었다. 편승인을 데리고 있으면 두 사람과 동시에 대화를 하는 데 능숙해진다.

“아뇨, 전 좋아요.” 미라가 말했다. 생각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 생겼으니까. 미라는 살아있을 때 자유 시간이 있던 적이 거의 없었지만 생각할 시간은 언제나 있었다. 미라는 일하러 갈 때, 기다리며 줄서있을 때처럼 사이사이에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갑자기 그런 시간이 굉장히 소중하게 느껴졌다.

라이컨이 손바닥을 닦았다. “첫 데이트는 그다지 좋지 않았어요.”

“잘하고 계세요.” 미라는 억지 미소라는 것을 알면서도 최대한 멋지게 미소를 지었다. 미라는 여기서 나가야만 했고, 되살아나려면 이런 남자들 중 하나를 설득해야만 했다. 이런 남자들 중 하나? 이곳이 문을 연 50년 동안 미라를 되살린 사람은 겨우 세 명이었고, 변태였던 첫 남자가 믿을 만하다면 미라가 여기 오래 있을수록 미라는 가치가 떨어질 터였다.

미라는 자신이 있는 곳을 보고 싶었다. 내가 관에 들어있을까? 침대에 누워있을까? 목이 움직일 수 있으면 싶었다. “여기는 어떻게 생겼어요? 우리가 방에 있나요?” 미라가 물었다.

“보고 싶으세요? 여기요.” 라이컨이 미라 얼굴에서 30센티미터 정도 되는 곳에 자기 손바닥을 들었다. 손바닥에 달려 문자와 그림을 삼차원으로 보여주던 스크린이 거울로 변했다.

미라는 흠칫 놀랐다. 미라의 죽은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피부가 회색빛이었고, 입술이 푸른빛에 가까웠다. 얼굴이 축 늘어져서 평온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약간 미친 사람, 정신이 지체된 사람처럼 보였다. 은색 철망이 반짝이며 목 아래를 가리고 있었다.

라이컨은 거울 각도를 조절해 방안을 둘러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곳은 넓고 개방된 공간으로 거대한 호텔의 아트리움처럼 보였다. 아트리움 가운데에는 승강기가 내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름답게 만들어진 다리들을 서둘러 건넜고 공중에 매달린 커다랗고 투명한 관 속으로 맑고 푸른 물이 구불구불 흐르고 있어서 냇물이 떠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가까운 곳에서 한 남자가 열린 서랍 옆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다소 수줍게 모은 채 입을 움직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라이컨이 거울을 치웠다. 라이컨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미라가 물었다.

라이컨이 입을 열었다가 마음을 바꿔 고개를 저었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제발 말해주세요.”

오랜 침묵이 흘렀다. 미라는 라이컨이 마음속으로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라이컨이 대답했다. “그냥 문득 의식하게 됐어요. 내가 죽은 사람이랑 말하고 있구나 하고. 제가 당신 손을 잡을 수 있다면 그 손가락은 차갑고 딱딱하겠죠.”

미라는 눈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부끄러웠다. 자신이 깃든 죽은 몸이 부끄러웠다.

“죽는다는 건 어때요?” 라이컨이 마치 은밀한 질문을 던지는 듯 속삭였다.

미라는 대답하기 싫었지만 다시 죽음으로 돌아가기도 싫었다. “힘들어요. 아무 것도 통제할 수가 없어서 힘들어요. 깨어날 시간도 이야기할 사람도 못 정해요. 그리고 솔직히 겁나고요. 이 데이트가 끝나면 전 다시 죽어요. 생각도 없고 꿈도 없고 공허만 있죠. 그래서 무서워요. 데이트가 끝나기 전 몇 분이 두려워요.”

라이컨이 질문한 것을 후회하는 듯 보여서 미라는 주제를 바꿔 라이컨의 편승인에 대해 물었다. 라이컨은 두 명을 데리고 있었다. 아버지와 할머니.

“이해할 수 없군요. 사람을 되살리는 법을 알았는데 왜 아직도 편승인이 있죠?” 미라가 물었다. 미라가 살던 시대에도 의학이 발달해서 언젠가 죽음을 극복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고, 보존술이 흔할 정도였지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었다.

“육체는 손상되니까요. 아흔 아홉 살 된 노파를 되살려도 그 사람은 계속 죽어갈 뿐이에요.” 라이컨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저기, 당신 이야기를 해봐요. 당신도 편승인을 데리고 있었네요?”

미라가 라이컨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해주자 라이컨이 애도를 표했고 미라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척 했다. 미라는 자기가 어머니를 떠맡는 데 동의한 이유를 착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 이유는 순수하게 이기적 목적 때문이었다. 미라는 자기가 거절한다면 죄책감 속에서 살아가야 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미라의 어머니가 한 일은 감정을 이용한 협박이었지만 완벽하게 성공했다.

하지만 난 죽고 있잖니. 미라, 난 무섭다. 제발. 80년이라는 세월과 죽음을 뛰어넘어서도 여전히 어머니의 목소리가, 늘 억울해 하는 그 말투가 귓가에 울렸다.

미라가 어머니를 생각하자 지독한 어둠이 몰려왔다. 미라는 죄책감이 들었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한단 말인가? 어머니가 친절을 베푼 일이라고는 자기를 낳아준 일밖에 없는데 무엇을 빚졌단 말인가? 그래도 머릿속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가? “멋진 남자” 대신 여자를 사랑했다고 어머니가 거의 말을 걸지 않았어도? 소울메이트가 고통스럽게 죽었는데 위로한답시고 하는 말이 “다음에는 남자를 만나야 할 거야.”였어도? 꼭 자넷의 죽음으로 자기 반대를 정당화하는 듯한 말투였다.

“제가 정말로 여기서 누군가를 만나서 그 사람을 되살려 주고 결혼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들이 제 아내치고는 너무 예쁘다고 눈치 채고 브라이드시클 소개소에서 아내를 만났을 거라고 생각할까요?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마련해둬야 할 거예요. 지어낸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게요.” 라이컨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브라이드시클요?”

라이컨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그렇게 불러요.”

그렇다면 누군가가 되살려준다고 해도 미라는 따돌림 받을 것이다. 사람들은 미라에게 상관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거의 화음을 이루며 미라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난 너희에게 상관하고 싶지 않아. 너와 네 여자 친구에게는.

“유감이지만 갈 시간이군요. 다른 여자들과도 이야기 나눠야 하거든요. 그래도 나중에 또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 라이컨이 말했다.

미라는 다시 죽고 싶지 않았고 그 구렁텅이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미라에게는 생각할 문제, 기억해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기꺼이 그럴게요.” 미라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을, 이 남자에게 자신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 만약 미라가 그런다면 이 남자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남자가 미라를 끄려고 손을 뻗었을 때 미라는 남은 몇 초를 이용해 자신이 당한 사고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 기억은 살갗 밑에 박힌 가시 같았다.


라이컨이 돌아왔다. 라이컨은 미라에게 일주일이 지났다고 말했다. 미라는 잠이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일주일이나 30년이나 똑같이 느껴졌다.

“다른 여자 열한 명이랑 이야기 나눠봤는데 전부 당신 절반만큼도 재미없었어요. 특히 최근에 죽은 여자들은요. 현대 여성들은 얄팍하고, 공통점을 찾으려는 생각도 없어요. 저는 힘겨운 관계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전 아내가 원하는 것에 마음을 쓰고 싶거든요. 제가 ‘아냐, 자기, 당신 보고 싶은 영화 보자’ 이렇게 말하면 아내가 ‘아냐, 괜찮아, 당신이 얼마나 다른 영화를 보고 싶은지 알아’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가끔은 아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가끔은 제가 보고 싶은 영화를 보는 거죠.”

“무슨 말인지 잘 알아요.” 미라는 자기 말투가 친밀하게 들리길 바랐다. 시체가 낼 수 있는 목소리치고는 가장 친밀하게.

“그래서 제가 여기 바닥 층에 와서 죽은 지 100년, 125년이 된 여자들을 만나는 거예요. 여자들이 더 순진했던 시대 사람을 만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 사람은 아마 더 고마워할 거고요. 안내원은 살아있는 여자 대신 브라이드시클을 고르는 일이 아량을 베푸는 거래요. 목숨을 빼앗긴 사람에게 목숨을 되돌려 주는 거라고요. 그렇다고 제 자신을 속이지는 않아요. 고결함에서 우러나온 행동은 아니죠. 그렇지만 제가 누군가를 위해 좋은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참 좋고, 바닥에 있는 여자들이 꼭대기에 있는 여자들보다 더 절실할 거예요. 당신들은 오래 기다렸잖아요.”

미라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그래도 실감할 수는 없었다. 겨우, 어디보자, 죽은 지 한 시간 정도? 죽은 순간을 기억해낼 수 없었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려웠다. 미라는 돌이켜보려고 애썼다. 교통사고가 도시에서 있어났던가 아니면 고속도로에서 일어났던가? 자기가 잘못했던가? 떠오르는 생각이라고는 사고가 있기 몇 주 전에 있었던 일들, 어머니가 미라를 미치게 만들었던 일들뿐이었다.

미라는 어머니를 받아들인 후로 다시는 사랑을 나눌 수 없었다. 어머니가 보고 있는데 어떻게 누군가와 사랑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상대가 남자라 해도 불가능했다. 물론 어떤 경우라도 남자는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참 거북해요.” 라이컨이 말을 이어갔다. “누군가에게 관심이 없다고 친절하게 말하는 방법이 전혀 없거든요. 전 여자에게 퇴짜 놓는 편이 아니에요. 그 반대에 훨씬 가깝죠. 당신이 그 서랍에 누워있지만 않았어도 제게 눈길을 주지 않았을 거예요.”

미라는 라이컨이 은근히 속을 떠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 말이 틀렸으며 자신이 라이컨에게 관심을 보일 것이라 말해주길 바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려운 일이었다. 미라는 감정을 꾸미는 성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치를 부리며 성격대로 행동할 때가 아니었다.

“당연히 눈길을 보냈을 거예요. 당신은 멋지고 잘생긴 남자인걸요.”

라이컨이 활짝 웃었다. 대체 왜 우리는 아무리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어도 감언이설을 믿는 것일까? 미라는 궁금해졌다.

“어떤 사람들을 만나면 왠지 가슴속에서 뭔가가 불타오르고 숨이 가빠지고 그러잖아요? 다른 사람은 그렇지 않은데요. 이유는 모르지만 누군가를 처음 만난 몇 초 안에…….” 라이컨이 손가락을 튕겼다. “확실히 알게 되죠.” 라이컨은 잠시 미라의 시선을 받다가(라이컨에게는 분명 어색한 상황이었다) 얼굴을 붉히며 자기 무릎으로 눈을 돌렸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미라가 말했다. 미라는 짐짓 따뜻하게 웃어 보이려 했다.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주변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삶과 부활을 통해 평생 함께 할 것을…….

“지금 들리는 말은 뭔가요? 결혼식이 있어요?” 미라가 물었다.

라이컨이 어깨 너머로 흘낏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는 늘 있는 일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를 되살리는 일이 좀 위험하니까요.”

“물론 그렇겠죠.” 미라가 말했다. 미라는 여기 수십 년이나 있었지만 이곳에 관한 아무 것도 몰랐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라이컨이 말했다. 여섯 번째 아니면 일곱 번째 데이트였다. 미라는 다행스럽게도 점점 라이컨이 좋아졌는데 미라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라이컨의 늘큰한 턱살과 거기 살짝 튀어나온 턱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변변치 못해도 라이컨이 미라의 삶 전부였다.

“뭔가요?” 미라가 물었다.

라이컨이 눈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함께 있으면서 즐거운 여자는 당신이 처음이에요. 당신한테 솔직히 말해야겠지만 그러면 당신을 잃을까 걱정이 되네요.”

미라는 자신이 라이컨과 이야기하는 대신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끔찍한 말이 무엇일지 상상하기 힘들었다. “무슨 말이든지 그런 일은 없을 거라 장담해요. 절 믿으세요.”

라이컨이 손으로 눈을 가렸다. 라이컨의 가슴이 왈칵 요동쳤다. 미라는 부드럽게 쉬쉬 소리를 내며 달랬다. 미라의 어머니는 한 번도, 자넷이 죽었을 때도 이렇게 달래주지 않았다.

“괜찮아요. 무슨 문제든지 괜찮을 거예요.” 미라가 속삭였다.

마침내 미라를 바라본 라이컨은 눈이 새빨갰다. “저는 미라 당신이 정말 좋아요. 아마 사랑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전 부자가 아니에요. 전 지금 당신을 되살릴 돈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재산을 모두 팔아도 안 돼요.”

미라는 희망이 산산이 부서지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그 희망에 매달리고 있었는지 실감했다. “저기, 별로 당신 잘못은 아니에요.” 미라는 명랑한 말투를 내려 애썼지만 속에서는 캄캄한 절망이 차올랐다.

라이컨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라이컨이 누군가를 되살릴 형편도 안 되면서 왜 여기 와서 아내를 찾는 척하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분명 여기 있는 여자들은 모두 라이컨에게 친절했을 것이고 라이컨이 자신을 선택해 기나긴 잠에서 해방해 줄 것이라는 희망으로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매달렸을 것이다. 여기가 아니라면 라이컨 같은 남자가 그러한 관심을 받을 수 있겠는가?

“용서해 주실 건가요? 당신 보러 계속 와도 괜찮아요?” 라이컨이 꾸지람 받는 불도그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당연하죠. 당신이 오지 않으면 엄청 보고 싶을 거예요.” 정확히 말하자면 라이컨이 미라를 찾아오지 않으면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수많은 브라이드시클이 상자에 누워 어깨를 맞대고 있는 이 끝없는 무덤 속에서 미라를 찾아오거나 우연히 발견하거나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라이컨은 주제를 바꿔 자기가 수집한 고전 게임 코드 이야기를 시작했고 미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중간 중간 “그래요” 소리를 내며 혼자 생각에 잠겼다.

깨닫고 보니 미라는 자넷보다 엄마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있었다. 아마도 자넷이 세상을 떠난 일은 이미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엄마의 죽음은 가슴이 전혀 아프지 않기는 해도 아직 생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넷이 죽은 후 미라는 계속해서 더는 새로운 생각이 나지 않을 때까지 자넷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야 마침내 자넷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미라는 정말 놀라운 생각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거기에 생각이 미치지 않은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자넷도 미라와 마찬가지로 캐피털 라이프키사(社)에서 일했었다. 자넷의 복리 후생 제도도 미라와 마찬가지로 보존술을 보장했다.

“라이컨, 부탁 하나 들어주실 수 있어요?” 부탁을 꺼내려니 시간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그럼요. 말해 봐요.”

“죽은 제 친구 한 명을 검색해 주실래요?”

“이름이 뭔가요?”

“자넷 지어크예요. 2224년생이고요.”

라이컨이 확인하는 동안 미라는 생각보다 불안하지 않았는데 아마 심장이 뛰지 않고 손바닥에 땀이 나지 않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감정은 놀라울 만큼 마음이 아닌 몸에 매어있었다.

라이언이 확인했다. “찾았어요. 여기 있군요.”

“자넷이 여기 있다고요? 바로 이곳이요?”

“네.” 라이컨이 손바닥을 코 가까이에 들어 정보 표시를 보더니 거대한 아트리움 건너 그들이 있는 곳보다 아래쪽을 가리켰다. “저쪽이에요. 당신이 왜 놀랐는지 모르겠군요. 만약 그 친구가 보존되었다면 여기 있을 거예요. 보존 계약을 어기면 중죄니까요.”

미라는 고개를 들어 라이컨이 가리키는 방향을 볼 수 있었으면 싶었다. 미라는 지난 몇 년 동안 자넷이 정말 세상을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겨우 받아들였다. “친구를 깨워서 제 말을 전해주실 수 있나요? 부탁이에요.”

라이컨은 잠시 말이 없었다.

“부탁해요. 무척 소중한 일이에요.” 미라가 말했다.

“그래요. 알겠어요. 그러죠. 잠시만요.” 라이컨이 잠시 혼란스러운 듯 엉거주춤 서 있다가 자리를 떴다.

라이컨은 잠시 후 돌아왔다. “친구한테 뭐라고 전해줄까요?”

미라는 사랑한다고 전해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좋은 생각은 아닌 듯했다. “그냥 제가 여기 있다고 전해주세요. 정말 고마워요.”

어쩌면 다른 사람이거나 미라의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미라는 저 멀리 놀라서 꺄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고 확신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자넷일 것이다.

곧 미라의 시야에 미소 띤 라이컨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 친구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흥분하던데요. 정신이 나갈 만큼 흥분했어요. 상자에서 뛰쳐나와 절 껴안는 줄 알았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미라는 목소리를 진정하려 애썼다. 자넷이 여기 있어. 갑자기 모든 것이 변했다. 미라는 살아갈 이유가 생겼다. 거기 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전해 달랬어요.”

미라는 흐느꼈다. 라이컨이 정말로 자넷과 이야기했다. 이 얼마나 이상하고 멋지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인가.

“또 당신이 사고로 많이 고통 받지 않았길 바란대요.”

“사고가 아니었어요.” 미라가 말했다.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생각을 먼저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 나와서, 누군가 미라의 죽은 입을 조종해 말을 만들어 목구멍을 지나는 공기에 실어 보내는 듯한 묘한 경험이었다.

길고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무슨 뜻이에요?” 라이컨이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미라는 이제 기억이 떠올랐다. 죽음의 순간이 아니라 죽음을 계획하고 죽음을 의도한 순간이. 미라는 가장 좋은 황갈색 정장을 걸쳤다. 어머니가 무슨 일이냐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머니는 저녁 먹으러 팬 피에트로 식당에 갈 뿐인데 미라가 왜 그리 호들갑을 떠는지 알고 싶어 했다. 어머니는 미라가 생각한 만큼 아름답지도 않으니 거만하게 굴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다. 미라는 어머니 말을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그때만큼은 어머니 말에 신경 쓰지 않았다.

“사고가 아니었다고요.” 미라가 되뇌었다. “당신이 솔직하게 말해줬으니 저도 솔직해지고 싶어요.” 사실 미라는 라이컨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기 싫었지만 저도 모르게 말을 해버렸고 그 말을 다시 주워 담을 방도가 없었다.

“어. 음, 고마워요.” 라이컨이 곰곰이 생각하며 한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었다. 미라는 자신의 말을 라이컨이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눴어도 라이컨이 똑똑한지 아닌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있잖아요, 당신을 되살리는 방법을 찾아내면, 우리 회사 정기 야유회에 같이 가요. 작년에는 테이블에 같이 앉은 사람들한테 제가 경품 추첨에 당첨될 거라고 장담했는데 정말 당첨됐어요!”

라이컨이 회사 야유회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 미라는 둘 다 죽었는데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 자넷을 생각했다.

곧이어 라이컨이 작별 인사를 했다. 라이컨은 화요일에 미라를 보러오겠다고 말하고서는 미라를 죽였다.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맨 남자가 미라 주위를 맴돌고 있었는데 정장은 소매가 없었고 넥타이는 둥글게 생겼으며 피부는 밝은 오렌지색이었다.

“지금 몇 년인지 좀 알려주세요.” 미라가 물었다.

“2477년입니다.” 남자는 불친절하지는 않았다.

미라는 지난 번 라이컨이 왔을 때 날짜를 기억해낼 수 없었다. 2400년대라고? 지난번에는 이천삼백 몇 년이지 않았나? 100년이 흘렀다. 라이컨은 결국 다시 오지 않았다. 라이컨은 떠났다. 죽었든지 친척에게 편승하고 있든지 할 것이다.

오렌지색 남자는 이름이 니어스였다. 미라는 왜 니어스가 오렌지색인지 물으면 결례이겠다 싶어서 그 대신 직업을 물었다. 니어스는 변호사였다. 미라는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살아있을 때와 세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피부가 오렌지색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변호사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제 조부 라이컨이 인사를 전해달라고 하시는군요.” 니어스가 말했다.

미라는 활짝 웃었다. 뻣뻣한 입술로 활짝 웃기는 힘들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결국 라이컨은 다시 돌아왔구나. “좀 늦었지만 괜찮다고 전해주세요.”

“할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이야기해봐야 한다고 고집하셨어요.”

니어스가 라이컨에 관한 이야기를 친절하게 들려주었다. 라이컨은 식이요법 모임에서 한 여자를 만났고, 아내가 된 그 여자는 라이컨이 미라를 만나는 일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이 부부는 20년 후에 이혼했다. 라이컨은 예순 여섯 살에 심장 마비로 숨졌다가 부활한 후에 아흔 살에 아들에게 편승하게 되었다. 그 아들은 몇 년 전 라이컨과 함께 니어스에게 편승했다.

“라이컨이 잘 지냈다니 기뻐요. 전 라이컨이 굉장히 좋았거든요.” 니어스가 이야기를 마치자 미라가 말했다.

“할아버지께서도 당신을 좋아하셨어요.” 니어스가 다리를 꼬고 목을 가다듬었다. “뭐 하나 물어볼게요, 미라. 살아있을 때 아이가 생기길 원했나요?” 니어스는 말투가 면접 감독관처럼 바뀌었다.

미라는 이 질문에 허를 찔렸다. 라이컨이 미라를 찾아가야 한다고 고집했다는 말을 듣고 미라는 이게 사교적 방문이라고 생각했었다.

“네, 그랬어요. 아이를 바랐죠. 일이란 게 계획대로만 되지는 않지만요.” 미라는 지척에서 상자에 잠든 자넷을 마음에 그렸다. 니어스의 질문에 희망의 불꽃이 일었다. “그럼 이게 데이트인가요?” 미라가 물었다.

“아뇨.” 니어스가 어떤 편승인의 말에 대답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우리는 여자아이를 낳고 길러줄 사람을 찾고 있어요. 저기, 제 아내가 불치병인 디에츠 증후군으로 죽어가고 있어서 제게 편승했어요. 우리 부부는 아이를 원하죠. 아이를 낳고 길러줄 대리모와 유모가 필요해요.”

“그렇군요.” 미라의 머리가 핑핑 돌았다. 그 부부의 아이를 키울 기회를 반긴다고 즉답해야 할까, 즉답하면 미라가 이 문제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듯 보일까? 미라는 진지한 그 상황을 잘 이해한다는 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기로 했다.

“우리는 물론 법률적 이유로 결혼하겠지만 그 관계는 완전히 플라토닉할 거예요.”

“네, 그렇겠죠.”

니어스는 갑자기 짜증나는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죄송하지만, 미라, 아내가 당신은 안 된대요. 할아버지는 엄청 화나셨고요.” 니어스가 일어나 미라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우리는 사오십 명쯤 면담해봤는데 딱 맞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니어스가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잠깐, 안 돼요!” 미라가 말했다.

니어스가 멈췄다.

미라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미라가 어떻게 했기에 니어스의 아내가 갑자기 미라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일까? 틀림없이 그 사람은 집에 어떤 여자를 들여 아이를 키우게 한다는 그 생각이 끔찍이 두려웠을 것이다. 남편을 유혹할지도 모르니까. 미라가 니어스 아내의 두려움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면…….

“전 동성연애자예요.” 미라가 말했다.

니어스는 엄청 놀란 듯했다. 입으로 연애편지를 전하고 나서도 분명 라이컨은 자넷이 누구였는지 깨닫지 못했었다. 친구 사이에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니어스는 아무 말이 없었고 미라는 니어스의 머릿속에서 격렬한 회의가 열렸다는 것을 알았다. 미라는 자신이 상황을 제대로 읽었기를 기도했다.

“그럼, 당신은 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거군요?” 니어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질문은 기이했다. 니어스는 평범한 남자가 아니라 오렌지색 남자였고 특별히 매력이 있지도 않았다.

“네. 저는 자넷라는 여자 친구를 사랑해요. 라이컨도 자넷을 본 적 있어요.”

다시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당신 교통사고가 사고가 아니라는 일은요?”

미라는 그 일을 잊어버렸었다. 자신과 어머니의 목숨을 끊은 일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잊어버렸을까? 어쩌면 굉장히 오래 전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라가 죽기 전에 일어난 일은 모두 굉장히 오래된 일 같았다. 마치 전생처럼.

“오래 전 일이에요. 하지만 맞아요, 사실이에요.” 미라가 중얼거렸다.

“어머니의 목숨을 앗은 건가요?”

“아뇨,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미라는 어머니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단지 어머니에게서 해방되고 싶었을 뿐이다. “전 어머니한테서 달아났어요. 어머니라고 해서 그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이 불가능할 리가 없다는 뜻은 아니에요.”

니어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상상하기 어렵군요. 편승은 우리에게 굉장히 강렬한 경험이었어요. 우나와 저는 우리가 이렇게 가깝게 되리라고 꿈도 못 꿨고, 아버지, 조부님, 증조모님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해요.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어요.”

“얼마나 멋질지 알겠어요. 결혼과 비슷하지만 더 좋을 거 같아요. 관계를 확대해주니까요. 좋은 관계는 더욱 가깝고 깊어지고, 나쁜 관계는 참을 수 없게 되죠.” 미라가 말했다.

니어스의 눈이 촉촉해졌다. “할아버지께서 당신은 믿어도 된대요.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니어스는 잠시 생각에 잠겨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그러다 니어스가 손을 흔들자 문자가 여러 줄 공중에 나타났다. “아이에게 매를 대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니어스가 첫 줄을 읽었다.

“당연히 아니죠.” 미라는 그 대답에 자신의 존재가 달려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라의 심장이 마구 뛰어서 가슴속에 퍼덕이는 날개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루치아가 작고 보드라운 머리를 미라의 쿵쾅대는 심장에 누른 채 잠들어 있었다. 둘은 승강기를 타고 올라갔다. 드넓은 아트리움이 아래쪽에 펼쳐지자 땅 위에 있는 사람들이 점처럼 보였다.

미라는 달려가고 싶었지만 발걸음을 고르게 유지하며 투명한 신발로 대리석 바닥을 밟았다.

미라는 자넷이 눈을 떴을 때 울음을 터뜨리며 손가락으로 자넷의 창백한 귓등을 어루만졌고 파란 입술을 가볍게 스쳤다.

자넷이 흐느꼈다. 자넷에게 지금은 라이컨이 말을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살아났구나.” 자넷이 끔찍하게 들리는 죽은 목소리로 꺽꺽거렸다. 자넷은 아기를 알아채고 미소 지었다. “참 다행이다.” 아무 것도, 목숨마저도 바라지 않는 것이 참 자넷다웠다. 자넷이 온전히 되살아나서 미라가 누운 상자에 찾아왔더라면 미라의 뻣뻣한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여기서 꺼내줘”라는 말이었을 것이다.

몇 층 아래에서 결혼 서약이 들려왔다. 신랑의 목소리는 크고 확실했고 신부의 목소리는 생기 없고 쉬어있었다.

“널 되살릴 형편은 안 되지만 널 받아들일 돈은 모았어. 그래도 괜찮아? 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 나와 함께 해줄래?” 미라가 말했다.

죽었을 때는 울 수 없었지만 자넷은 눈물 없이 울었다. “응. 괜찮은 것보다 천 배는 좋은 걸.” 자넷이 대답했다.

미라가 미소 지으며 끄덕였다. “일을 처리하려면 며칠 걸릴 거야.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올게. 네가 죽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미라는 자넷의 차가운 뺨을 쓰다듬었다.

“약속해?”

“약속해.”

미라가 손을 뻗자 자넷이 죽었다.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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