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단편 일탈

2011.03.15 19:4803.15

프롤로그

헤셰드 왕국의 젊은 왕인 나이젤 3세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총애하는, 아니 총애하다 못해 한 가족으로 만들고 싶은 총리대신 가이사 벨이 어젯밤에 도성 밖으로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그렇게도 결혼하기 싫었나.’
나이젤 3세는 고개를 흔들면서 침상 위에 누웠다. 일단 추적 명령을 내려놓긴 했지만 총리대신이 맘만 먹으면 감쪽같이 행적을 감출 수 있다는 걸 알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총리대신이 남기고 간 짧은 편지에는 국왕 폐하에 대한 사과의 말과 함께 공주님이 다른 좋은 혼처를 구하기를 바란다는 완곡한 거절의 말이 실려 있었다.  
‘아무튼 어찌 될지 지켜봐야겠군.’
국왕은 미소를 지으며 점점 흐릿해져가는 눈을 감았다.


제 1장


가이사 벨의 일대기
: 사립 휴스타인 유치원~대학원 졸업

가이사 벨은 명백한 축복받은 천재였다. 조금 전의 경력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축복받은 환경에서 자랐는지 알 수 있다. 휴스타인 백작가의 교육방법은 그 이름만으로도 엄청난 신뢰도와 가치를 불러일으켰다. 백작가의 교육시설에서 학업을 마친 모든 학생들은 왕궁에서 박사로 대접받았다. 가이사는 그 중에서도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총리대신이 된 것이다.
빼어난 경력을 뒤로 한 채 가이사는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금화를 내밀었다.
“방 하나 주시오.”
“알겠습니다.”
여관 주인이 굽신거리며 방을 위로 안내했다. 가이사는 들고 왔던 짐 가방 두 개를 방 안에 내려놓았다.
“편히 쉬십시오.”
여관 주인이 내려가자 가이사는 방 안에 홀로 남아 종이와 펜을 꺼내들어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따라서 라파트 하나의 가치는 순수한 오브 하나와 맞먹으며, 큐브 넷과 맞먹는다. 우리는 여기에서 라파트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한 문단을 마친 가이사가 매우 몰입한 상태에서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언제나 라파트 연구자였으며 그 자신도 라파트였다. 라파트란 보통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말을 하는 옛 나라의 생존자들이었다. 그 나라가 어떻게 멸망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때때로 그 혈통의 잔해가 발견되곤 했다.
라파트를 확인하는 방법은 어떤 특정한 단어들을 발음하려고 하면 혀가 굳어버리는 증상이었다. 그 단어들은 공통되는 것들이었는데 <아빠> <우리> <나> 등으로 70-80여 가지 되었다. 결국 발음되지 않는 단어들을 되짚어 본 결과 밝혀진 사실은 놀라운 것이었는데, 옛 나라가 멸망한 이유는 아버지와 딸의 근친상간으로 핏줄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딸이 기억 속에서 그 간의 단어들을 묶어놓았다. 결과적으로 라파트는 사람들과 말할 때면 언제나 안전한 말을 골라서 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  *  *

가이사 벨은 남성치고는 상당히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옷차림새도 귀족다워 시선을 끌었다. 품위 있는 악당 같은 모습을 한 그는 식당에서 두 번째 포도주를 시키면서 싱긋 웃었다.
‘여기도 정말 괜찮단 말이야.’
가이사가 이 식당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바삐 여관으로 향하던 중 황제가 보낸 무사들이 여관 안으로 들이닥치는 것을 보고 엉겁결에 들어간 곳이 바로 이 식당이었다. 이왕 들어온 김에 제대로 맛을 보자는 생각에 가이사는 아예 여관에서의 일을 잊어버렸다. 가이사는 본인이 스스로 원하면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있었고 이를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이라 자부하고 있었다.
굴 요리를 모두 마치고 나서 천천히 여관으로 돌아갔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여관 주인을 뒤로 하고 난장판이 된 자신의 방에서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 다시 짐을 쌌다.  


제 2장


“근데, 몇 살이에요?”
여자 아이가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가이사는 손가락으로 둘을 두 번 표시했다. 22. 아이는 자신이 16이라고 말했다. 연분홍 빛 머리카락에 빨간 리본을 맨 귀여운 아이의 이름은 프란시스로 유학 차 루벤으로 가는 배에 오른 상태였다.
“전공은 뭘로 정했니?”
“지휘요.”
아이는 꿈꾸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휘자가 될 거예요.”
홍희(紅姬), 핏빛 맹수들의 주인이 가이사에게 가만히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  사색진청(死色眞靑) 중 청회절색(靑灰絶色)인 가이사는 홍희의 꿈에 미소로 회답했다. 반드시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희망을 담아.

*  *  *

오래 전 세계는 대지진과 홍수를 겪고서 이를 다룰 수 있는 자들을 찾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홍희와 사색진청이다. 홍희는 신령 홍견(紅犬)으로 대지진을 다룰 수 있게 되었고 사색진청은 신령 우사(雨巳)로 홍수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사색진청이란 죽음의 색, 청색이란 뜻으로 처음에는 오직 당주 자신만을 지칭하게 되었으나 차차 그 범위를 넓혀 이제는 그 일가(一家) 전부를 지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이 귀한 집안이라 수가 전부 5밖에 되지 않았다.

사색진청 윈텔 벨 우사(雨巳)
청회절색 가이사 벨 무귀(霧龜)
군청신색 헤름 벨 운해(雲蟹)
담청미색 노아 벨 설교(雪鮫)
은청묘색 시온 벨 빙리(氷鯉)

이것이 현재 사색진청, 아니 그들이 자신들을 이르듯 비색진청(翡色眞靑)의 명부이다.


제 3장


“당주님.”
잠든 사람을 깨우듯 가이사가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일렀다. 동방에서 수입한 비단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던 윈텔이 움찔 몸을 일깨웠다.
“가이사?”
재차 상대를 확인한 윈텔이 손을 앞으로 뻗어왔다. 그리고 가이사의 손을 한번 꼭 붙잡은 다음 다시 놓아주었다. 이것으로 윈텔은 상대의 파악을 마쳤다. 사색진청의 당주 윈텔 벨은 눈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총리 일은 어쩌고 이리로 왔느냐?”
“도망쳤습니다.”
“도망쳤다고?”
윈텔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섞였다. 그러나 잠시 뒤에 다시 흥미로움이 앞의 놀라움을 뒤덮었다.
“틀림없이 혼담이 들어온 모양이군.”
가이사는 보지 않고도 자신에 대해 훤히 꿰뚫고 있는 당주이자 자신의 형에 대해 당혹감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의 감정마저 당주에게 노출되어 있을 것을 생각하니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건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일단 쉬어라.”  
윈텔은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이사는 고개를 숙이고 침묵으로 수긍했다.
syl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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